옥수(玉樹)
【정견망】
“늙을 때까지 살고 늙을 때까지 배운다(活到老,學到老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배운다는 의미)”라는 말은 구학(求學) 정신을 아주 잘 나타낸 듯하다. 그러나 역사상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더욱 극치까지 실천했는데, 늙어서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시험을 치렀다.
고대 중국에서 과거 제도의 위상은 매우 컸다. 그것은 조정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공식적인 통로이자 독서인이 학업 성과를 검증받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과거 시험은 난도가 매우 높아 많은 이들이 수십 년간 고생하며 글을 읽어도 급제가 쉽지 않았다. 과거는 응시생의 나이를 제한하지 않았기에 고사장에는 백발이 성성한 수험생이 자주 나타났으며 심지어 백 세 노인이 응시하러 오기도 했다.
청조 가경(嘉慶) 연간의 왕복경(王服經)은 산동 능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조상들이 부지런히 가업을 일군 덕에 가산이 점차 넉넉해지자 후대들이 독서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왕복경의 부친 왕륜(王倫)은 성품이 선량하고 정직하며 집안을 다스리는 도리가 있어 현지에서 꽤 명망 있는 독서인이었다. 한번은 그가 길에서 은자 한 꾸러미를 주웠는데, 그 자리를 지키며 주인를 간절히 기다리다 결국 은자를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왕복경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왕복경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 글을 읽을 때 자주 먹고 자는 것조차 잊었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수재(秀才)에 합격했다. 그러나 이후 59년 동안 그는 20여 차례나 향시에 응시했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했다. 그사이 그는 글을 가르쳐 집안을 건사하면서도 계속 글공부를 이어갔다.
[역주: 청조 과거는 현(縣)이나 부(府)에서 치른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을 말하며 이후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되고 최종적으로 경성에서 치르는 회시를 통과하면 공생(貢生), 최종관문인 전시에 합격해야만 진사(進士)가 되었다.]
가경 9년, 한때 의기풍발했던 왕복경은 이미 백발이 다 되었다. 80세 되던 해에 그는 다시 고사장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끈기 있는 정신은 산동 학정(學政)을 깊이 감동시켰다. 학정이 이 일을 가경 황제에게 상소하자 가경제는 듣고 크게 감동하여 왕복경에게 직접 거인(擧人) 신분을 하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해 기뻐하며 그의 과거 여정이 마침내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복경은 이 공명이 황제의 은사(恩賜)일 뿐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연히 경성으로 가서 회시(會試)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가경 13년, 먼 길을 달려 84세의 왕복경은 경성에 도착해 객잔에 머물며 매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시험을 준비했다. 고사장에 들어간 후 그는 전심전력으로 답안을 작성했다. 방이 붙는 날 그는 인파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다가 마침내 125등 자리에서 ‘왕복경’ 세 글자를 보았다. 그 순간 그는 격동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합격한 것이다!
이어 그는 전시(殿試)도 순조롭게 통과하여 삼갑(三甲) 238등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으로 진사가 되었다.
가경 황제는 왕복경을 매우 찬탄하며 특별히 어지(御旨)를 내려 그에게 한림원 검토(檢討) 직을 수여했다. 관례에 따르면 전시 일갑(一甲) 상위 세 명인 장원, 방안, 탐화만이 조고(朝考 관직 발령을 내기 전 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관직을 받았다. 원래 나이가 많은 진사는 보통 지방관으로 나갔고 젊고 재능 있는 이들만 한림원에 들어갔다. 왕복경처럼 삼갑 진사이자 고령임에도 직접 한림원에 들어간 것은 실로 황제의 특별한 은혜였다.
가경 14년, 가경제의 50세 생신을 맞아 성대한 만수 경축 행사가 열렸다. 왕복경은 정성껏 지은 축사를 올렸는데 문채가 눈부시고 의경이 심오하여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축원을 잘 표현했다. 가경제는 매우 기뻐하며 즉석에서 많은 보물을 하사했다.
가경 15년, 노환으로 눈이 침침해져 업무를 계속하기 어렵게 되자 왕복경은 글을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기를 청했다. 가경제는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84세에 진사에 합격한 이 노인은 겨우 2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냈다. 가경 21년, 왕복경은 능현에서 향년 92세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역사상 드문 사례가 아니다.
조상의 고향이 순덕(順德)인 황장(黃章)은 14세에 독서를 시작해 20세에 과거에 응시했다. 명조부터 청조까지 계속 시험을 쳐서 60세에 수재가 되었고 83세에 공생(貢生)이 되었다. 강희 연간에 99세의 황장은 광동(廣東) 향시에 응시하며 증손자에게 ‘백세관장(百歲觀場)’ 네 글자가 쓰인 등불을 들게 하고 고사장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놀라운 시선에 황장은 웃으며 말했다. “내 나이 올해 99세니 아직 과거에서 뜻을 이룰 때가 아니다. 102세에 다시 와서 시험을 치면 그때가 바로 내가 급제할 날이다!” 안타깝게도 그때 역시 낙방했다.
양광총독과 광동순무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크게 찬탄하며 특별히 접견했다.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황장의 식사량이 매우 많고 몸이 여전히 건강함을 발견했다. 접견 후 총독과 순무는 그에게 은자와 포목을 주어 격려했다. 훗날 그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표창하기 위해 건륭 연간의 지방지에서는 그의 사적을 《태산현지》, 《순덕현지》, 《광동통지》에 기록하고 《사고전서》에도 수록했다.
건륭 연간에 광동 조경(肇慶) 사람 사계조(謝啓祚)는 94세에 거인에 합격했다. 훗날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건륭 황제의 80세 생신 때 경축 행사에서 90세 이상의 한림원 노신(老臣)이 장수 촛불을 켜야 했는데, 한림원에 뜻밖에도 그렇게 고령인 사람이 없었다. 이에 조정은 파격적으로 94세의 사계조를 직접 한림원으로 발탁해 한림원 검토 직을 수여했다. 사계조는 결국 104세까지 살았다.
광서(光緖) 연간에는 고사장에 102세의 수험생인 막여원(莫如瑗)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노인은 학식이 비범하여 문장과 서예 모두 찬탄을 자아냈고 결국 거인(擧人)이 되었다. 광서 20년에 그는 다시 진사를 은사받았고 훗날 관직이 국자감 사업(司業)에 이르렀다.
도광(道光) 연간 광동 삼수(三水) 사람 육운종(陸雲從)은 102세에 향시에 응시해 거인을 제수받았다. 연회에서 시험관이 그에게 “세 차례 시험이 힘들었을 텐데 계속 버틸 수 있겠소?”라고 묻자 육운종은 아무 문제 없다고 대답했다. 과연 이듬해 그는 북상하여 경성에서 열린 회시에 응시했다. 그의 등장은 일시에 화제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이 백 세 수험생의 풍모를 보려 다투어 몰려왔다. 사람들은 이 노인이 귀도 먹지 않고 눈도 침침하지 않으며 걸음걸이가 씩씩하여 노태가 전혀 없음을 발견했다. 비록 103세의 육운종은 끝내 급제하지 못했으나 도광 황제는 그의 정신에 감복하여 특별히 국자감 사업 직을 수여했다.
“늙은 천리마는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에 있다”라고 하니 이 노령 수험생들의 의지는 참으로 경탄스럽다.
어떤 이는 그들이 공명에 집착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는 단지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평생의 정력을 성현(聖賢)의 글을 읽는 데 쏟았으며 백 번 읽어도 싫증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하늘과 통하고 백성과 연결된 박대정심(博大精深)한 유가 사상이 강력한 흡인력을 갖추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으로써 독서인의 사명을 실천한 것이다.
북송의 사상가이자 교육가 장재(張載)는 독서인의 이상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명을 세우며,
이전 성현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연다.
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往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
사람이 천지 사이에 있음은 본래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성현의 글 속에는 천의에 순응하는 도덕 준칙이 담겨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본성을 지키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며 번잡한 사회 속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게 한다. 옛 성현의 지혜를 계승하고 발양하여 중화문화의 횃불을 이어감으로써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여는 것이다. 이 네 구절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며 수많은 독서인의 좌우명이 되었고 역대 지식인들의 이상적 경지가 되었다.
독서는 단지 공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독서인은 나약한 책벌레도 아니며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하고 공허한 이론만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유자(儒者)의 책임이다. 자에게는 풍모와 기개가 있고 도통(道統)이 있으며 신념과 또 담당(擔當 사명)이 있다.
예로부터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은 모두 백성의 안락과 국가의 흥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한 무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백가를 몰아내고 유술만을 존중)’ 이래 유가 사상은 오랫동안 국가 다스림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사대부는 품덕을 중시하고 수양을 쌓으며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을 품었기에 나라를 다스림에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마치 범중엄(範仲淹)이 말한 바와 같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거워한다.”
공명(功名)은 겉모습일 뿐이며 거대한 사회적 가치와 숭고한 정신적 경지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중화문화의 광휘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근대 이래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재앙은 중화 전통문화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많은 전통 명절과 예속, 가치관이 훼손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인의도덕(仁義道德)의 문화적 뿌리를 잃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이미 중국인이 마땅히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으며 옛사람들의 그 두터운 문화적 자신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라가 망해도 산천은 남았으니 부흥을 위해서는 마땅히 뿌리를 찾아야 한다. 오직 중화 전통문화의 정신적 내함(內涵)을 다시 인식하고 회복해야만 중화민족은 진정으로 위풍을 되찾을 수 있으며 화하(華夏)의 자손들이 다시 광명한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