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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45): 우쭐거림도 집착

요연(了緣)

【정견망】

손오공이 칠선녀로부터 반도회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억울한 마음이 다시 일어났다.

뻔뻔하게도 큰소리로 “내가 바로 제천대성(齊天大聖)인데, 나 손어르신을 주빈으로 모시는 것이 어찌 안 된단 말이냐?”라고 외친다.

이 말투를 보라. 자신이 주빈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한데 왜 초대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도무지 이치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치라는 것이 자기 생각일 뿐, 남들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물며 칠선녀도 “이것은 지난 모임의 관례일 뿐, 이번 모임은 어찌 될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즉, 그를 초대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인데, 불확실한 일조차 참지 못하고 화를 억누르지 못했으니 이 원숭이가 얼마나 자기애가 심한지 알 수 있다.

조금의 경시도 용납하지 못하고, 우쭐거리면서도 맞장구쳐 주는 관객이 없자 무시당했다고 느껴 상처를 입은 것이다. 비록 좋지 않은 감정이 막연하게 일어났으나, 그로 인해 유발된 마성(魔性)은 무한히 확대되어 뒷감당도 생각지 않고 도둑질을 저질러 하늘을 찌를 듯한 큰 화(禍)를 불러왔다. 거짓말로 수습할 수 없음을 깨닫자, “네가 나를 업신여겨서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예 하늘에 반기를 들었다. 아직 자신도 확실하진 않지만 참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 나는 자기애가 심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남의 눈 속에, 남의 입속에, 남의 인지 속에 살려 하는가?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깊이 상처를 입어 마음이 한없이 나약해진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면서 무능하게 미친 듯이 화를 내니,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일이다. 당신의 가치가 오직 타인의 태도에서만 나타나는가? 남들이 당신의 무게를 달게 내버려두면서 자신은 오만하기 짝이 없고, 정작 거지처럼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지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를 왜 남이 평가하게 하는가? 타인의 척도는 오직 절실한 이익뿐이며, 당신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만 볼 뿐인데 거기에 무슨 공정함이 있겠는가. 이런 평판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데 그것이 당신의 생존 가치가 되고, 남의 시선으로 허영심을 채우며 남의 평가 속에서 성취감을 경험하려 하니 이것이 자애인가 자학인가? 공평과 공정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타인이 당신이 원하는 성취감을 줄 것이라 확신하는가. 사람 마음이 두려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하되 얻지 못하면 반드시 난이 일어난다. 밖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 가장 표면적인 물질적 요구이며, 물질에는 유통기한이 있어 영원할 수 없다. 하물며 물욕은 육신의 요구일 뿐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사랑도 돈으로 환산되고, 감정을 논하면 돈이 상하며, 돈을 논하는 것이 감정의 깊이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 십악독세(十惡毒世)가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한 글자, ‘돈’이다. 모든 것이 돈을 향하고, 재물을 탐해 목숨을 해치며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이 정상 상태가 되어 버렸다. 사람마다 위태로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물욕에 빠져 본진(本真)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아(真我)는 정신적인 측면의 선량함으로 나타나며, 이는 5천 년 문명을 지탱해 온 도덕이자 반신문화(半神文化) 속에서 하늘과 통하는 덕행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 일생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근본이다. 사람이 일단 도덕적 저지선을 저버리고 사상이 변이되며 사람 마음이 마변하면, 그럼 정신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성(神性)이 매몰되거나 말살되며 심지어 변이되어 마(魔)로 된다. 그러므로 도덕의 패괴(敗壞)는 스스로 성벽을 허무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화근은 사람의 자만심에서 시작된다. 천지신명을 경외하지 않고 과대망상하며 멋대로 행동하니, “무지한 자는 두려움이 없는 법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의 악과(惡果)이다.

신을 믿지 않으면 신(神)도 자연히 구할 방법이 없다. 천만년의 기다림이 애석하게도, 일대(一代)의 사설(邪說)인 무신론이 무량한 중생을 해쳤다. 그러나 정법(正法)은 바르지 않은 모든 요소를 바로잡는 것이니, 아직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면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위덕(威德)을 닦아낼 수 있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중생에 두고 자리를 비워 기다린다면 중생은 스스로 부름에 응해 올 것이다.

물론 신(神)의 사자로서 무사무아(無私無我)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주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 속에서 자아의 요구를 버리는 것이다. 육신의 요구와 영혼의 요구를 구별해야 한다. 육신은 밖으로 구하는 욕망이며 절실한 이익을 중심으로 하지만, 영혼은 안으로 구하며 치우친 것을 바로잡고 승화하는 것이다. 자사(自私)에서 기원한 자아(自我)를 내려놓아야만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생명의 경지를 높일 수 있으며, 승화되어 올라간 것이 바로 진아(真我)이다. 진아는 무사(無私)하며, 생각하는 바가 모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상 속의 정견(正見)에서 나오는데, 정견과 탐욕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쭐거리는 과대망상은 사오(邪悟)하여 법을 어지럽히는 자들의 공통된 병폐다.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하여 속여도 목적은 위사(爲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만은 수련인의 큰 금기인데 이를 깨뜨리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오직 자아가 팽창할 때 자신의 단점을 생각해서 스스로 찬물을 끼얹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면, 한 차례의 작은 마변(魔變)이 경지의 승화로 전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의 단점은 말하기 귀찮아하는 것인데, 내가 글을 좀 쓴다고 스스로 대단하다 여기며 조금 팽창할 때면 나는 진상 거점의 동수들을 생각한다. 비바람과 뙤약볕 속에서 날마다, 해마다 견지해 온 분들이다.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면서도 각양각색의 중생을 대하며 속인의 각기 다른 태도가 심령에 주는 자극을 체험한다.

물론 자극이라는 표현은 좀 과할 수도 있다. 마음이 평온한 수련인은 쉽게 자극받지 않으며, 오직 자기 연민이 심한 사람만이 자극을 받기 쉽다. 나는 자신을 연민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구하는 바가 없기에 천하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모르기를 바랄 정도다. 물론 이것은 고쳐야 할 병폐이며 선(善)이 부족한 것이다. 그저 말하기를 귀찮아하고 특히 반복되는 말을 싫어할 뿐이다. 진상 거점의 동수들, 그들 중 대다수인 노년 동수들이 매일 낯선 이들에게 반복적으로 삼퇴(三退)를 권하고 진상을 알리는 말을 하는 것을 생각한다. 수년간 눈비를 가리지 않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반복하는 것을 더욱 싫어하니, 만약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진상 거점은 바로 나의 단점이다.

물론 만약 다른 선택지가 없이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는 길뿐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여 세 치 혀를 단련하고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게 진상을 알렸을 것이다. 말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하기 싫은 것이 능력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법기(法器) 중에는 황금 같은 말재구(口才)가 있었지만 내가 방치해 먼지가 쌓였을 뿐이다. 이 때문에 수년 동안 자책했고 ‘정진’이라는 글자만 봐도 양심에 찔려 부끄러웠기에 나는 감히 팽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것과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훌륭히 해내기에 그들이 나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진상 거점의 동수들을 생각하면 내가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이 대수겠는가. 차 한 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바람도 비도 맞지 않는다. 좀 위험하다 해도 다른 공간에서 나타날 뿐이니 내가 쓸 수만 있다면 모든 번거로움을 평정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아는 밝음(明)을 귀하게 여기는데, 수련인은 더욱 자신을 명확히 보아야 한다. 작은 결점은 누구에게나 있고 원만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십전십미(十全十美)할 수 없으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더러 완벽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지나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마음(人心)이 팽창할 때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잘하고 있는 동수를 생각한다면,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도 가라앉을 것이다. 비학비수(比學比修)를 적절히 활용해야 수시로 부족함을 살피고 채울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사부님께서 법을 명확히 설해주셨기에 우리가 세세한 곳에서 자신을 수정할 수 있는 덕분이다. 법이 크니 실천 속에서 형식으로 흐르지 않고 마음을 쓴다면, 생활의 사소함 속에서도 이 마음을 수정하여 착실하게 승화해 올라갈 수 있다.

연공을 하는데 왜 공(功)이 자라지 않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

우리가 얼마나 행운인지 보라. 우주 대법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어떻게 닦아야 할지는 사부님께서 손을 잡고 가르쳐주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밥을 입가에 가져다주어도 먹을 줄 모르고, 심성을 닦지 않으며 형식에만 치중하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제고할 수 없다. 마음을 쓰고 싶다면 배운 것을 실제에 응용해야 한다. 마음에 늘 정법제자의 역할을 두고, 중생을 마음에 품은 채 자비 속에서 정념(正念)의 위력을 체험해야 한다. 정념정행(正念正行)하기만 하면 불법신통(佛法神通)은 그 안에 절로 있다. 정념정행하는 자체가 바로 불법신통을 인간 세상에 펼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원숭이는 바로 이 점에서 손해를 보았다. 고층차의 법을 몰랐기에 닦을 법이 없었고, 더욱이 심성을 제고해야 공이 자란다는 것을 몰랐다. 오직 강한 자가 존귀하다는 관념에 빠져 내 주먹이 세니 최고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고, 얻지 못하면 빼앗으려 했다. 요괴의 이념 속에서는 약육강식이야말로 생존의 도다. 그러나 요괴의 영역을 벗어나 천정(天庭)에서는 심성의 요구가 높아지자, 이 이념은 마성(魔性)이 되었다. 상선(上仙)의 몸으로 마성 이념을 가진 오공에 대해 말하자면, 마성의 대폭발은 필연이었다. 일찍이 드러내어 없애지 않는다면 어찌 취경(取經) 대업을 담당해 육체 범태(凡胎)인 당승을 끝까지 보호할 수 있겠는가.

당승은 육체범태인데 어떻게 원숭이의 사부가 될 수 있었을까? 그가 원숭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취경 팀의 궁극적인 사명은 경을 얻는 것이지만, 사도(師徒) 네 사람에게는 각자의 집착이 있었기에 요마귀괴를 만날 때마다 모순이 생겼고 각자 닦아버려야 할 마음이 드러났다. 마치 우리가 정체 협력 속에서 각자 자기 의견만 고집하여 법리상 이념을 통일하지 못하고 일을 함에 있어 정체를 형성하지 못하면 교란이 들어오고 마난(魔難)이 수시로 일어나는 것과 같다.

비록 수련인의 오성(悟性)에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동일한 법을 공부하고 있다. 법으로 가늠하기만 하면 모두 깨달음의 계기를 찾을 수 있으니, 모두 법을 위해 왔으므로 법에 부합하기만 하면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 개인의 법에 대한 깨달음이 달라 누가 누구보다 조금 더 낫다는 식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천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션윈 티켓 판매에서 제자들은 모두 전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일하는 방식과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는 티켓 판매 수로 말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정체 협력의 문제는 그래도 서유기를 보아야 한다. 사도 네 사람의 취경 과정은 수련인의 주원신과 부원신의 협력 문제를 형상화하여 연기해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현재 그 내함(內涵)을 많이 써낼 능력이 안 된다. 십여 년 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부원신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부원신에 관한 글을 한 편 썼는데 확신이 서지 않아 열려서 수련하는 한 동수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는 다 읽고 나서 부원신 문제는 너무 복잡하여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니 투고하지 말고 다른 동수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조언했다. 시기가 되지 않았기에 나도 즉시 글을 삭제했다.

부원신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으로 남겨진 문제인데, 바로 과거의 수련은 모두 부원신을 제도하고 주원신은 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 수련은 주원신을 제도한다. 구세력은 구우주의 이치를 붙잡고 분수를 모르는 부원신들을 강제로 끼워 넣어, 주객이 전도되게 함으로써 법을 얻은 주원신을 압제(壓制)하려 했다. 이는 수련을 빌미로 법을 훔치려는 것이며, 수련 중에 사오(邪悟)하는 경우 이런 상황이 있다. 정신병원의 환도 부체(附體) 외에 부원신이 너무 강한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본래 영성(靈性)이 높아 공능(功能)이 엄밀하게 닫히지 않았는데 입을 단속하지 못해 함부로 말하다가 정신병자로 불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정신병은 실질적인 병이 아니라 공허한 병(虛病)이며, 삼혼칠백(三魂七魄)에 문제가 생긴 것이자 또한 무신론의 악과(惡果)이다.

요컨대 이것들은 극소수의 상황이지 대다수는 아니다. 대법제자는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사부님과 법을 믿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모두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설령 유래가 바르지 않아 마계(魔界)에서 태어났더라도 오직 진수(眞修)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제도하실 수 있다. 이 육체 범태를 얻었다는 것은 바로 불성(佛性)과 마성이 공존한다는 뜻이지만, 다만 정(正) 부(負) 에너지 비율이 다를 뿐이며 대다수는 불성이 더 많다. 오직 정법(正法)을 수련해야만 점차 순도를 높여 본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사부님과 법을 믿을 때도 고순도로 믿어야 한다. 이는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많은 일들을 내가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많이 써내지 못하는 것이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다. 나중에 이 시리즈 글을 써서 서유기를 해석하며, 취경 팀의 구구 81난을 통해 주원신과 부원신의 협력, 즉 각자의 꿍꿍이가 있던 상태에서 일체동심(一體同心)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써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차피 나 또한 수련 중이며 끊임없이 제고하고 승화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분명히 쓸 날이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