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10: 인재가 구름처럼 모이고 후세에 전해지는 명작들이 쏟아져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는 여러 신하들과 힘을 합쳐 진시황이 이래 첫 번째 전성시대를 이루어냈으며, 문치(文治)·무공(武功)·과학기술(科技)·예술 방면에서 모두 전무후무한 고점에 도달하여 후세가 찬탄하기에 충분한 공적을 남겼다. 웅재대략의 한무제는 동시에 문학과 음률을 우아하게 즐긴 재자(才子) 제왕이었으니, 그는 유문(遺文)을 수집하고 한부(漢賦)를 일으켰으며 악부(樂府)를 확장해, 강대하고 번영한 서한 왕조에 문채(文彩)가 찬란한 예술적 풍모를 불어넣었다.
대부(大賦)의 유행
한 조(朝)의 천자에게는 그 조(朝)의 문화가 있는 법이다. 후인의 총결에 따르면 역대 중국 왕조는 모두 고유하고 독특한 문학 양식을 지녀 다른 왕조가 비견하기 어려웠기에 이를 “일대(一代)의 문학”이라 부른다.
가령 초나라에는 초사(楚辭)가 있고, 한에는 부(賦), 당은 시(詩), 송은 사(詞), 원은 곡(曲)이 있다. 즉 당시, 송사, 원곡처럼 한대(漢代)에는 ‘부(賦)’가 그 시대 최고의 문학 형식이었다. 한부(漢賦)는 한대의 가장 전형적인 문학 형식으로, 특히 한무제 시기에 가장 번영했다. 경제적 부유함, 물산의 풍요로움, 군사적 승리, 정치적 청명함, 사방에서 조공이 들어오는 흥성함은 대일통(大一統) 왕조의 방대한 기상을 빚어냈다. 이것이 문인들의 붓끝에서 구현되어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문채를 뽐내는 성세(盛世) 문학인 ‘한대부(漢大賦)’가 되었다.

사마상여의 대표작인 《상림부(上林賦)》는 천자의 유람과 사냥의 성황 그리고 궁실의 화려하고 웅장함을 극도로 과장하여 펼쳐 놓았다. 그림은 명대 구영의 《상림도(上林圖)》 국부이며 대만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공유 영역)
한대부는 산문의 장법과 격조를 갖추면서도 변문(駢文)의 리듬과 운율을 지닌 체제로, 문사(文辭)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고 대상을 대량으로 나열하는 데 주력한다. 주로 한대의 궁전, 도시, 황실 생활의 장엄함과 위엄을 묘사하고 글 끝에는 권계(規勸)와 풍간(諷諫)의 말을 덧붙인다. 『문심조룡』에서는 대부에 대해 “화려함을 펼치고 문채를 휘두르며, 사물을 체득해 뜻을 쓰는 것[鋪采摛文、體物寫志]”이라 정의했다.
물론 한무제 이전에도 부(賦)라는 문학이 존재하긴 했으나 초사의 영향을 받은 ‘소체부(騷體賦)’였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사회의 발전과 황제의 장려를 거쳐 도도하고 화려한 대부(大賦) 문학이 때맞춰 탄생한다.
한무제는 즉위 직후 부 작가 매승(枚乘)의 명성을 흠모하여 안차포륜(安車蒲輪)으로 초빙했으나, 매승은 노령으로 입경 도중 사망해 무제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매고(枚皋) 역시 작부(作賦 부를 창작)의 대가였고, 스스로 추천해 무제의 근신이 되었다. 매고는 재치가 빠르고 필력이 좋아 무제가 순행하거나 봉선을 할 때마다 즉석에서 조칙을 받아 글을 짓는 다작 작가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재를 모집한 결과 한무제(漢武帝)의 곁에는 문인과 아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동방삭(東方朔),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 등 많은 대신이 부(賦)를 지을 줄 알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한부(漢賦) 사대가(四大家) 중 으뜸인 사마상여였다. 한경제(漢景帝) 시기 사마상여는 양국(梁國)에서 객으로 있으며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다. 훗날 한무제가 이 글을 읽고 크게 감탄하며 “애석하게도 짐은 이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했다. 곁에 있던 구감(狗監 황제의 사냥개를 관리하는 직책)인 양득의(楊得意)가 작자가 자신의 동향 사람이라고 말하자, 한무제는 곧바로 그를 불러들였다.
사마상여는 한무제에게 《자허부(子虛賦)》에 기록된 것은 제후의 유람과 사냥에 불과하여 기이할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천자의 유람과 사냥을 묘사한 대부(大賦)를 한 편 더 바치겠다고 말하였다. 사마상여는 곧이어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인 《상림부(上林賦)》를 지어 천자의 유람과 사냥의 성황 그리고 궁실의 화려하고 웅장함을 극도로 과장하여 펼쳐 놓았다.
이 부(賦)는 대일통(大一統) 제국으로서 서한(西漢)의 비할 바 없는 형상을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은근한 풍간(諷諫)을 담고 있어, 한대(漢代) 대부의 기본적인 주제를 개척하였다. 한무제는 이를 읽고 크게 칭찬하며 그를 낭관(郎官)에 봉했다. 사마상여가 글을 쓰는 방식은 매고(枚皋)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그는 언제나 많은 시간을 들여 구상해야만 한 편의 대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고는 사마상여 앞에서 늘 자신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했다.
이들 문인들은 한무제의 곁에서 문학적 시종인 동시에 정무상의 강력한 조수이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주매신은 외지에서 태수(太守)를 지냈고 사마상여는 서남이(西南夷)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부 작가들이 문재(文才)로써 천자의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정계에도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문인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한대 문인들이 점점 더 많은 대부를 창작하도록 촉진하였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는 한무제 군신(君臣)의 부 창작 수량을 통계하였는데, 사마상여가 29편, 매고가 120편, 엄조가 35편, 사마천이 8편으로 모두 300여 편에 달한다. 이는 서한 초기에 비해 100여 편이나 많은 것으로, 그 수량의 방대함과 질적 수준의 높음은 사람을 경탄하게 한다.
악부시가(樂府詩歌)
한대에 성취가 가장 높았던 문학 장르에는 부 외에도 악부시(樂府詩)가 있다. 시가(詩歌)는 역사가 유구하며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옛날에는 경학과 문학이 기본적으로 일체였으니, 즉 문사철(文史哲)이 나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가 경전인 《시경(詩經)》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가집으로, 그 문학적 성취와 교화 작용은 매우 높다. 공자(孔子)도 “시(詩)에서 일으키고, 예(禮)에서 세우며, 악(樂)에서 이룬다”라고 말씀하셨다. 한무제는 유술(儒術)을 존숭하였기에 자연히 시가의 발전도 매우 중시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음악 기관인 악부(樂府)를 대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고대의 예술은 시(詩), 악(樂), 무(舞)가 나뉘지 않았으며, 시가는 모두 음악에 맞춰 노래하거나 무용을 곁들였다. 그림은 오대(五代) 완고의 《낭원녀선도권(閬苑女仙圖卷)》 국부이다. (공유 영역)
악부는 진조(秦朝)부터 이미 설립되어 음악을 관리하던 관서였는데,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채집, 창작, 연주를 일체화한 정식 전문 음악 기관이 되었다. 여기서 설명할 점은 고대 예술은 시, 악, 무가 나뉘지 않았다는 것인데, 시가는 모두 음악에 맞춰 노래하거나 무용을 곁들였으므로 당시의 시는 곧 노래였으며 이를 가시(歌詩)라고 불렀다. 서한의 시가는 악부 기관 내에서 번성하여 고전적인 한악부(漢樂府)가 되었다.
서한 초기의 시가 창작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주요하게는 한고조(漢高祖)가 창작한 《대풍가(大風歌)》와 당산부인(唐山夫人)이 창작한 대형 시가 《방중락(房中樂)》이 있었다. 《방중락》은 나중에 반주 음악이 더해지며 《안세락(安世樂)》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 후 악부 기관은 옛 음악을 답습할 뿐 신작이 없었다.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악부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우선 연주 곡목이 늘어났다. 한악부에는 3대 곡목이 있는데 하나는 《방중락》 17장이고, 나머지 두 부는 모두 한무제 시기에 창작되었다. 하나는 《교사가(郊祀歌)》 19장으로, 사마상여 등 문인들이 조칙을 받들어 시를 짓고 음악가 이연년(李延年)이 작곡하여 만든 황실 제사 악장이다. 다른 하나는 요가(鐃歌) 22곡으로 군중(軍中)의 음악이라 불린다.
악부 곡목을 풍성하게 하는 데 있어 이연년(李延年)의 공헌은 매우 컸다. 이연년은 대대로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부모와 형제가 모두 음악인이었으며, 본인 또한 음률에 밝고 가무에 능해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사서에 따르면 이연년이 창작한 음악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가령 그가 《가인곡(佳人曲)》을 지었을 때 한무제는 이를 듣고 세상에 어찌 이런 가인이 있겠느냐며 감탄하였다. 이에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이연년의 여동생을 한무제에게 추천하였고, 그녀는 가장 총애받는 이부인(李夫人)이 되었다.
이연년은 또 이로 인해 더욱 중용되었으며, 한무제가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예악을 일으키는 기회를 빌려 구곡(舊曲)을 새로운 변곡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가져온 음악을 28수의 고취신성(鼓吹新聲)으로 개편했다. 뛰어난 작곡 실력 덕분에 이연년은 협률도위(協律都尉 한무제 때 이연년을 위해 설치한 음악을 관장하는 무관직)에 봉해져 일세를 풍미했다.
또한 한무제는 악부를 위해 민가(民歌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채집하고 정리하는 제도를 제정하였는데, 이로써 궁정에 조(趙), 대(代), 진(秦), 초(楚) 등 지방의 가요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애제(漢哀帝) 시기에 이르러 각지에서 수집된 민가는 260편에 달했다. 민가 채집의 의의 또한 매우 중요한데, 공자가 《시경》을 편찬하고 주나라의 국풍(國風)을 정리한 이래 전국 시대와 진나라, 서한 초년까지 이 문화적 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한무제의 조치는 민가의 수집과 정리를 계승하고 회복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가들은 “슬픔과 즐거움에 감응하여 일에 따라 발생한 것(感於哀樂, 緣事而發)”으로 백성의 진심을 대표하며, 조정이 민간의 고통과 정무의 득실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부가 궁정 문학의 성취를 대표한다면, 한악부(漢樂府)는 상당 부분 민간 문학의 정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악부의 시가는 시경의 전통 정신을 계승하여 시가 사상의 또 다른 정점을 이루었다. 많은 문인이 악부의 편장을 빌려 시를 지었으며, 이는 후세 시가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무제의 찬란한 문채
문학을 장려한 것 외에도 한무제 본인 역시 문학에 열중하고 창작에 힘써 그 성취가 가히 독보적이었다. 사학자 반고(班固)는 한무제의 문채를 탁연(卓然), 환언(煥焉)이라는 단어로 형용하였다. 한무제는 일생 동안 많은 대업을 이루었고 상서로운 광경도 많이 마주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신들에게 시와 부를 짓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붓을 휘둘러 많은 시편을 남겼다.

한무제는 경국지색인 이부인을 위해 깊은 애도의 정을 담은 《이부인부(李夫人賦)》를 쓴 적이 있다. 그림은 《화리주췌수(畫麗珠萃秀)》 첩 중 이부인이며, 청대 혁달자(赫達資)가 그리고 양시정(梁詩正)이 제사를 썼다. (공유 영역)
예를 들어 원수(元狩) 원년(기원전 122년), 한무제는 사냥 중에 백기린(白麒麟)을 포획하자 《백린지가(白麟之歌)》를 지었다.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는 후토사(後土祠) 곁에서 보정(寶鼎)이 출토되자 한무제가 감흥을 느껴 《보정지가(寶鼎之歌)》를 지었으며, 같은 해 악와수(渥窪水)에서 신령한 말이 나타나자 《천마지가(天馬之歌)》를 창작하였다. 또한 하동(河東)을 순행하던 도중에는 《추풍사(秋風辭)》를 남겼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태산(泰山)에 제사를 지내고 호자(瓠子)라는 곳을 지날 때 황하의 제방이 터지려 하자, 그는 수행하던 장군 이하의 관원들에게 모두 응급 복구에 참여하여 땔나무를 짊어지고 제방을 보강할 것을 명령하였다. 홍수의 위험에 직면하여 한무제는 감회를 느껴 《호자지가(瓠子之歌)》를 지었다. 같은 해 감천궁(甘泉宮) 안에 아홉 줄기 잎이 이어진 지초(芝草)가 자라나자 또 《지방지가(芝房之歌)》를 썼다.
태초(太初) 4년(기원전 101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벌하고 한혈마(汗血馬)를 가져와 조정에 바치자, 한무제는 이 성대한 일을 기념해 《서극천마지가(西極天馬之歌)》를 지었다. 태시(太始) 3년(기원전 94년)에는 한무제가 동해(東海)를 순시하다가 붉은 기러기를 잡고 《주안지가(朱雁之歌)》를 지었다.
한무제의 시가는 초사(楚辭)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섬세하고 진실된 감정과 천하를 품은 일대(一代) 제왕의 기세가 공존하는데, 그중 《추풍사》와 《호자지가》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먼저 《추풍사》를 감상해보자.
가을바람 일고 흰 구름 날리니,
초목은 누렇게 지고 기러기 남으로 돌아가네.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로우니,
가인을 생각하며 잊지 못하네.
누선 띄워 분하를 건너며,
강 한가운데 가로질러 흰 물결 일으키네.
소와 북 울리며 뱃노래 시작되니,
즐거움이 극에 달해 슬픈 마음 많아지네.
젊은 날이 그 얼마인가, 늙어감을 어찌하리!
秋風起兮白雲飛,草木黃落兮雁南歸。
蘭有秀兮菊有芳,懷佳人兮不能忘。
泛樓船兮濟汾河,橫中流兮揚素波。
簫鼓鳴兮發棹歌,歡樂極兮哀情多。
少壯幾時兮奈老何!
“비추(悲秋 가을의 서글픔)”는 중국 시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이다. 한무제는 누선에서 군신들과 연회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흘러가는 세월을 느끼고 이 가을의 소회를 썼다. 앞의 세 구절은 가을 풍경을 묘사하여 문사가 아름답고, 네 번째 구절은 가인(佳人), 즉 어진 인재를 갈망하는 주제를 명시하였다. 뒤의 구절들은 시를 짓게 된 배경을 묘사하며, 태평성대의 가무 속에서 인생의 짧음과 다시 오지 않을 청춘에 대한 탄식을 담아 여운이 무궁하다.
《호자지가》는 한무제가 황하 제방이 터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지은 것으로, 창생을 구하려는 박애(博愛)의 흉금을 표현하였다. 제2절 일부를 감상해 보자.
강물은 도도히 흘러 물소리 격렬하구나.
북으로 건너려 하나 소용돌이쳐 흐름이 빠르니 어렵도다.
긴 대나무 끌어다 미옥을 가라앉히네.
하백(河公)은 허락했으나 땔나무가 이어지지 않는구나.
땔나무가 모자람은 위(衛)나라 사람의 죄로다.
다 타버려 쓸쓸하니 아아, 무엇으로 물을 막으리.
대나무 숲을 베어 돌 바구니를 박노라.
선방(宣防) 제방이 막히니 만복이 오리라.
河湯湯兮激潺湲。
北渡回兮迅流難。
搴長筊兮湛美玉。
河公許兮薪不屬。
薪不屬兮衛人罪。
燒蕭條兮噫乎何以禦水。
隤林竹兮揵石菑。
宣防塞兮萬福來
이 절은 제방의 터진 곳을 막는 긴박한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앞의 두 구절은 하천의 급류를 짚어 공사의 난도를 암시한다. 이어지는 치수 과정에서는 땔나무가 부족하자 즉시 대나무 숲을 베어 댐을 쌓는다. 치수에 성공한 후 한무제는 백성들에게 수재 방지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시 전체가 기개 있고 웅장하며 천하를 염려하는 제왕의 비민(悲憫)한 정서가 흐른다.
《한서·예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무제는 두 편의 부도 창작하였는데, 그중 한 편은 《이부인부》이며 다른 한 편은 이미 고증할 수 없다. 이부인은 바로 《가인곡》의 여주인공이나 일찍 병사하여 한무제에게 끝없는 슬픔을 남겼다. 어느 날 한무제가 이부인을 그리워하여 방사(方士)에게 그녀의 혼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한무제는 멀리서 바라볼 뿐 가까이 갈 수 없자 탄식하며 “그대인가, 아닌가? 서서 바라보건대 어찌 그리 뒤척이며 늦게 오는가!(是邪,非邪?立而望之,偏何姍姍其來遲!)”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문학 사상 최초의 도망부(悼亡賦 망자를 추도하는 부)를 썼으니, 위엄 있는 제왕이지만 깊고 무거운 정(情)의 일면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사(正史)의 비조
“서한 문장에는 두 사마(司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한무제 시대에 성이 사마씨인 두 명의 문호를 가리키는데, 하나는 사부(辭賦)로 저명한 사마상여이고, 다른 하나는 사학자이자 산문작가인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은 사학(史學) 가문 출신으로, 일생의 가장 큰 성취는 사학 거저(巨著)인 《사기(史記)》를 완성한 것이다. 《사기》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사학에서는 정사(正史)의 비조이고 문학에서는 산문의 고전이며 경학(經學)에서는 일가(一家)의 견해를 이룬 글이다. 고대 전적 중 그 어떤 저작도 《사기》와 같은 성취에 도달한 것이 거의 없기에, 이를 가리켜 하나의 ‘절창(絕唱)’이라 한다.

사마천은 사학 가문 출신으로, 일생의 가장 큰 성취는 사학 거저인 《사기》를 완성한 것이다. 그림은 사마천과 그의 《사기》이며, 명 만력 26년 북감(北監) 간본이다. (공유 영역/에포크타임스 합성)
그렇다면 이 거작은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한무제 시기의 사관(史官), 즉 태사공(太史公)이었다. 사마담은 박학다식하여 천문과 《주역》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儒), 도(道), 묵(墨), 법(法), 음양(陰陽) 등 제자백가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와 학문을 지니고 있었다. 한무제가 전국에서 전대(前代)의 일문(遺文)을 구할 때, 사마담은 천하의 고전과 고적을 널리 열람할 기회를 얻었다. 사관의 책임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기에 사마담에게는 “천도와 인사의 관계를 탐구하고(究天人之際),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通古今之變), 일가의 견해를 이루는(成一家之言)” 고금을 관통하는 통사(通史)를 완성하려는 지향이 있었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가학을 계승하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고, 동중서(董仲舒), 공안국(孔安國) 등 당대 명사들로부터 경학을 배웠다. 장성한 후에는 각지를 유람하며 옛 소문을 채집하여 풍부한 역사적 소재를 쌓았다.
사마천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간 문인으로, 위인이 총명하고 통달했으며 문장에 능해 훗날 조정에서 낭중(郎中)을 지냈다.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10년), 한무제가 봉선대전(封禪大典)을 준비할 때 사마담은 사정이 생겨 참여하지 못하자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기다 중병에 걸렸다. 마침 사마천이 파촉(巴蜀)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임종 전의 부친을 만났다. 사마담은 자신이 다 이루지 못한 과업을 사마천에게 부탁하며, 조상의 사업을 계승해 태사공의 직을 이어 저술을 완성하고 한대 이래 제왕장상(帝王將相)들의 휘황한 공적을 기록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3년 후,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을 맡게 되었다.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 역사서를 쓸 필요에 따라 사마천은 역법을 개정하고 연호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며 《태초력(太初曆)》 제정에 참여하였다. 《태초력》은 진·한 이래의 《전욱력(顓頊曆)》을 대체해 정월을 세수(歲首)로 삼고 농사 때에 유리한 24절기를 채택하였으니, 이는 중국 고대 역법의 중대한 진보였다. 세계적으로도 태초력은 앞선 수준이었으며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력보다 58년이나 빨랐다. 새로운 역법이 확정된 후 한무제는 성대한 전례를 열어 새 역법을 반포하고 그해를 태초 원년으로 정하였기에 새 역법의 이름도 《태초력》이 되었다. 그 후 사마천은 정식으로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천한(天漢) 3년(기원전 98년), 이릉(李陵)이 흉노 대군과 마주쳐 힘이 다해 투항했다. 나중에 그가 한을 배반해 흉노의 군사 훈련을 돕는다는 소문이 들리자 한무제는 그의 배은망덕함에 분노했고 조정 대신들도 이릉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여겼다. 사마천이 극력 그를 변호하다 군주를 기만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면하려면 거액의 돈을 내야 했지만 사마천은 돈이 없어서 치욕을 참고 궁형(宮刑)을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고, 거대한 정신적 압박 속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아 마침내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 《사기》를 완성했다.
《사기》는 황제(黃帝)부터 서한까지 약 3,000년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기전체(紀傳體) 역사 서술 방식을 처음으로 창시해 본기(本紀), 서(書), 표(表),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5대 체례를 확립하였다. 시공간을 아우르는 광범위함과 완비된 체제는 훗날 정사(正史)의 완벽한 모범이 되었으며, 이로써 24정사의 으뜸이 되었다. 또한 사마천의 역사 서술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춘추(春秋)》의 미언대의(微言大義) 정신을 계승하여 역사와 인생에 대한 자신의 사고를 그 안에 융합시켰으니, 즉 “천도와 인사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여, 일가의 견해를 이루겠다”는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한무제 시대의 문학 예술 중에서 한대 대부는 종횡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문채를 지녔고, 한악부는 천하의 민가를 포괄하였으며, 사전(史傳)은 웅대하고 호장한 비전을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어떤 문학 양식이든 모두 웅장하고 박대(博大)하다는 특징을 구현하고 있다.
흔히 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듯, 아마도 사상 전례 없이 번성한 시대였기에 비로소 지향이 원대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을 양육할 수 있었고, 이토록 기세가 웅장하고 문사가 수려한 예술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한무제는 자신의 재능으로 한대 문학을 제창하고 번영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문인들에게 자유롭게 창작할 광활한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3/n11451174.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