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루브르 박물관 나폴레옹 정원 야경. (장러/에포크타임스)
17세기 파리에 관한 이 원고를 쓰고 있을 때, 파리 테러 사건(역주: 2015년 11월 13일 발생)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이 전대미문의 학살을 전쟁이라 부른다. 사실 이것은 문명과 야만 사이의 전쟁도, 종교와 종교 사이의 전쟁도 아니다. 그 근원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이 냉혈한 행동은 인류의 사랑을 자극했다. 에펠탑의 불이 꺼지는 동시에, 세계 각지의 랜드마크 건축물들은 프랑스의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적·청·백 삼색기 빛을 밝혔다. 뉴욕 거리의 한 카드에는 “뉴욕은 파리를 사랑한다”라고 적혔고, 리버풀은 파리를 위해 밤을 지새웠으며, 타이베이 101 빌딩도 구름 안개 속에서 적·청·백 삼색 등을 밝히고 파리를 위해 기도했다.
파리의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함께 일어서는 순간이다. 어둠을 향한 우리의 선전포고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위대한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억해 보자. 17세기에 태양왕이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도시를 한 치 한 치 일구어냈는지, 어떻게 유럽을 진보하고 개명된 기원으로 인도했는지 함께 추억해 보자. 그가 어떻게 파리의 어두운 거리 위에 가로등을 세우고, 신들의 조각상을 세웠으며, 웅장한 다리와 건축물, 광장을 건설하여 황량한 대지 위에 세인에게 영원한 기념물을 남겼는지 말이다.
파리: 이상적인 도시

《호위대의 수호를 받으며 퐁 뇌프에서 파리로 향하는 태양왕》, 판화, 1690년 이전. (공유 영역)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프랑스에는 루이 14세가 남긴 흔적이 가득하다. 그가 영토를 확장하며 개척한 자연 방벽인 피레네산맥, 알프스산맥, 라인강은 지중해와 함께 유럽의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이 왕국을 수호해 왔다.
태양왕이 남긴 흔적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문화와 언어에서 생활에 이르기까지, 태양왕은 현대 프랑스와 인류 문명을 위해 유구한 흔적을 남겼다. 그는 문화 유럽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생활의 초기 형태를 묘사했다. 패션, 스프링 마차, 흰 빵에서 간행물에 이르기까지, 루이 14세 시대가 남긴 발자취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1세기에 살며 포스트모던 디지털 기술의 표상을 꿰뚫어 보더라도, 예술이나 생활 면에서 우리는 태양왕 유산의 상속자다.

루브르 박물관 나폴레옹 정원 조각: 말 탄 루이 14세. (장러/에포크타임스)
파리라는 도시는 태양왕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루이 14세는 파리를 새로운 로마로 건설하기를 꿈꿨다. 서구 문명의 탄생지 중 하나이자 첫 번째 세계급 대도시, 문화 및 예술의 세계적 중심지, 영원한 도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 말이다. 17세기, 태양왕이 파리를 개조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바로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 도시였다.
인간이 대지 위에 시적으로 거주하다

《시간의 서》 삽화 속의 파리 성. (공유 영역)
사람들이 한 도시에 이토록 매료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늘날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며, 많은 이들에게 ‘파리’라는 프랑스어 음절은 매혹적인 자력을 뿜어낸다.
300년 전, 파리는 여전히 중세 도시였다. 거리는 좁고 굽어 있었으며, 낮은 집들이 제멋대로 밀집해 공기가 통하지 않았고, 길모퉁이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위생 설비와 신선한 물이 부족해 사람들은 센강 변에서 빨래하고 목욕했으며, 강물은 오염되어 냄새가 났다. 밤이면 칠흑같이 어두워 위험과 범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늪지 위에 베르사유 궁전을 짓겠다고 고집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친정 초기 베르사유 궁전의 첫 축제에서 찬란한 전설과 불꽃을 쏘아 올려 천공과 나뭇가지들을 밝히기에 매진했던 것처럼, 이제 텁수룩한 갈색 긴 머리를 한 사자 같은 젊은 루이는 놀라운 의지력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파리의 옛 성벽을 허물고 좁고 굽은 거리를 넓히며, 길바닥에 정돈된 벽돌을 깔라고 명령했다. 한 치 한 치 넓은 도로가 닦였고 대도로 양옆에는 나무를 심었다. 당시 전 유럽의 도시들 중 파리처럼 넓고 평탄한 대도로를 갖춘 곳은 없었으며, 로마의 거리조차 파리가 닦은 길만큼 평탄하지 못했다. 파리를 인간이 거주하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곳곳에 다리와 넓은 광장이 세워졌다.

생제르맹앙레 왕궁(Saint-Germain-en-Laye) 옥상. 이 성은 루이 14세 시대에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기기 전 프랑스 왕실의 주요 거처였다. (장러/에포크타임스)
1661년경, 파리에서 스프링과 유리가 달린 마차가 발명되었고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수시로 놀라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는 말등에서 내려와, 안락하고 모던한 마차로 갈아탔다. 스프링 없는 마차가 내내 덜컹거리며 장거리 여행객에게 주었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떠올려 본다면, 인류의 육상 교통에 있어 스프링 마차는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1667년, 파리의 어두운 거리에 첫 번째 기름 등불이 켜졌다. 이어 도시 전체에 5천 개의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파리는 밤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밤이 된 후에도 가로등을 따라 걸으며 낮의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밤이면 노래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석기 시대 숲속에서 타오르던 모닥불 더미처럼, 파리의 가로등은 어둠을 몰아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파리의 조명 설비를 모방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어둠을 몰아낸 후, 국왕은 소란스럽고 불안했던 도시에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기마 경찰과 경비대를 배치해 순찰하게 했으며 거리를 청소할 사람들을 보냈다. 그런 다음, 마치 왕관에 보석을 박듯 파리 거리 곳곳에 인류 예술의 보물인 신들의 조각상을 세웠다.
가로수 길을 질주하는 마차, 과학 아카데미의 장엄한 돔, 센강 좌안에 일렬로 늘어선 문화 건축물들, 강물 위로 비치는 등불의 잔영. 대지 위에 인류가 거주하기 적합한 성이 우뚝 섰다.
17세기의 새로운 생활
거주 배경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삶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신사와 숙녀들은 높이 솟은 왕립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가로수 길과 광장을 산책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우아하고 여유로워졌으며, 사교 생활 또한 친절하고 문화적인 교양을 갖추게 되었다. 신료들이 루이 14세의 궁정 예법에 감화되어 더 이상 오만하고 무례하지 않게 된 것처럼, 본래 호전적이고 거칠었던 백성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화학 변화가 조용히 일어났다. 그들은 화초가 무성한 광장과 정원을 산책하고, 길모퉁이에 우뚝 선 조각상을 지나며, 밤에도 어둠에 집어삼켜질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마치 환골탈태한 듯 파리 사람들은 예의와 절도를 아는 문명인이 되었다.
가로수 길에는 유행하는 마차가 달리고, 마차 안에는 패셔너블한 남녀가 앉아 있었다. 파리는 문명의 숨결을 들이마시는 동시에, 인류의 삶을 현대화로 이끄는 발명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냈다.
1710년, 파리의 상인 장 마리우스(Jean Marius)가 접고 펼 수 있는 우산을 발명했다. 이후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보행을 막지 못했고 일상의 활동도 방해할 수 없었다. 즉, 인간 생활의 공간이 확장된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과 붉은색 우산을 들고 긴 치마나 예복을 입은 채 빗속의 파리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문명의 커다란 새 풍경이라 할 만했다.
사실 이 위대한 세기에 인류의 의식주와 행동 전반에 걸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루이 14세 시대의 회화 속 귀족들의 차림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태양왕의 궁정에서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패션’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긴 곱슬머리, 넓고 긴 소매, 화려하고 넓은 장식 띠, 무릎까지 내려오는 완벽한 재단의 옷자락, 옷감의 화려한 색채와 질감, 여기에 귀족들의 우아한 자세와 타이츠 속의 건장한 두 다리가 어우러져 루이 14세 궁정만의 독특한 미감을 형성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이 패션 뒤에 모방하기 힘든 기질이 숨어 있음을 느낀다. 예술적 취향이 담긴 이 의복들은 사람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탈바꿈시킨 듯했다. 태양왕의 궁정 전체에는 이러한 고귀한 기질이 넘쳐흘렀으며, 우리에게 문화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국왕의 주도 아래 상류 사회에서는 거친 흑빵 대신 정제된 흰 빵이 자리 잡았다. 국왕이 직접 제작 표준을 정한 마르세유 비누는 오늘날까지 ‘고법(古法)’으로 제조되는 고급 향료 비누로 전해 내려온다. 또한 로마식의 초호화 가발의 유행은 신사와 숙녀의 외모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탄생시켰다. 한 풍속 판화에는 거울을 들고 앉아 미소 짓는 소년 뒤에 헤어디자이너가 서서 그의 길고 곱슬거리는 흰 가발을 손질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미감을 숭상하던 그 시대에는 오늘날과 유사한 ‘헤어 스타일 시즌’이라는 유행 현상이 나타났다.
상상해 보자. 이 수려한 소년이 향기 나는 가발을 쓰고 마차에 올라 넓은 가로수 길을 천천히 지나간다. 유리창 너머로 양옆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나무들이 보인다. 곧 마차가 루브르 궁전을 지난다. 이때 무용 아카데미, 회화 조각 아카데미,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이미 재설계되어 거듭난 이 오래된 건축물로 옮겨왔으며, 수많은 재기 넘치는 예술가와 음악가들이 태양왕의 초대로 궁전 1층에 입주해 있었다. 만약 이 소년이 문예적 성향을 가졌다면, 어느 가을날 기름 등불이 켜진 루브르를 지나며 그의 마음속에는 옅은 우울함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황혼 무렵, 그의 마차는 센강 변에 도착하고 멀지 않은 곳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머금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소년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강변의 마부 무리에게 끌린다. 그들은 짧은 머리를 드러내고 허리에 거친 천을 둘렀으며, 기름진 넓은 소매를 걷어붙여 갈색 팔을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짐을 내릴 때 턱과 목에 힘이 꽉 들어간다. 팔에 주름이 가득한 백발의 한 마부가 몸을 굽혀, 하얀 땀을 흘리는 말의 몸을 솔질하며 말에게 나직이 무언가 중얼거린다. 다리가 굵은 밤색 말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콧김을 몰아쉬더니, 입을 벌려 커다란 말 이빨을 드러내며 돌 구유의 물을 들이켠다.
센강 위로 밤바람이 불어오고 소년은 다시 마차에 올라 가로수 길을 지난다. 길 위로 나무 그림자가 황금빛 광륜들을 스쳐 지나간다. 우측으로 거대한 조각상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것은 준마의 등 위에서 칼을 휘두르는 태양왕의 모습이다.
사회생활의 혁명
“리슐리외의 말년부터 루이 14세 서거 후의 한 시기 동안, 우리의 정체(政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술, 정신, 습속 면에서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볼테르 《루이 14세 시대》) 지식 면에서도 유럽에는 똑같이 한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17세기의 유럽은 아직 주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고독(蠱毒)을 행한다는 유언비어가 심지어 국왕의 조정에까지 침투했다. 1672년, 루이 14세는 법원이 요술에 대한 고발을 수리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점차 이성이 미신의 짙은 안개를 깨뜨렸다. 파리가 문명 도시가 됨에 따라 중세 마녀의 그림자와 종교적 ‘성물’에 대한 백성들의 황당하고 가소로운 광기는 점차 시간 속으로 씻겨 내려갔다.

루이 14세가 설립한 파리 앵발리드. 나폴레옹 1세 황제의 유해(골회)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장러/에포크타임스)
1663년, 루이 14세는 결투를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세기 유럽부터 이어져 온 이 악습은 수많은 젊은 남성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 조치 이후 유럽의 결투는 대폭 감소했다. 비록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결투가 진정으로 쇠퇴했지만, 유럽인들이 야만과 작별하고 이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이것이 하나의 전환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도시에는 병원이 세워졌다. 루이 14세는 의료를 매우 중시하여 의료진을 세심히 양성했으며, 탁월한 외과 치료와 수술이 필요할 때 유럽인들은 멀리 파리까지 찾아와 치료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또한 파리에 외관이 매우 웅장한 ‘앵발리드(보훈 병원)’를 건립하여, 오랜 전쟁으로 늙고 병든 4천여 명의 병사를 수용했다. 또한 왕립 도서관의 장서는 3만 권 증가하여 훗날 지식 발전의 좋은 토대를 닦았다. 이와 동시에 파리는 유럽의 도서 출판 중심지가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파리는 문명 도시의 기초 인프라를 완비했다. 영광스러운 새로운 로마 성이 나타난 것이다.
파리는 스스로를 단장하여 세계를 놀라게 할 무대가 되었다. 이 무대 위에는 라이프니츠, 볼테르, 몰리에르, 쿠프랭, 그리고 훗날 인류 역사의 궤도를 바꾼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등장했다. 마차가 흐르는 대도로, 예술의 보물로 가득 찬 루브르 박물관, 서쪽 교외의 베르사유 궁전, 궁 안의 아폴로 살롱에 있는 범접할 수 없는 태양왕은 모두 파리를 당시 전 유럽이 선망하는 수도로 만들었다. 마치 자석처럼 파리는 수많은 엘리트를 끌어들여 당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이 유럽의 수도에서 바로크 음악이 극장에 울려 퍼졌고, 몰리에르의 희극은 연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귀부인들의 고아한 거실에서 문아(文雅)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과학자들이 모인 살롱에서는 괴짜 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나 지구가 과연 “오렌지처럼 생겼는지 혹은 수박처럼 생겼는지”를 두고 격렬하게 토론했다. 낭만적인 문화적 공기와 자유로운 사상이 감도는 이 도시에서, 출신이 제각각인 학자와 작가들은 계몽주의의 초기 단계를 열었다.
17세기의 파리에는 또 다른 사명이 있었다. 세계의 창(窓)이 되기 위해 파리는 스스로를 단장하며, 머나먼 세계의 반대편에서 올 존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1/24/n4580291.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