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그리 멀지 않은 숲에 둘러싸인 곳에, 중세의 장면으로 꾸며진 타원형 경기장이 있다. 백여 명의 귀족이 중세 기사로 분장하고, 금색 시구(詩句)가 새겨진 방패와 문장을 든 채 준마를 타고 당당하게 발을 맞추며 들어온다. 경기장 밖에서는 왕후와 귀부인들이 아치 아래에서 이 고풍스러운 공연을 관람하고 있으며, 모든 이의 시선은 화려한 루비색 연갑을 입고 높은 관을 쓴, 비할 바 없이 존귀한 국왕에게 쏠려 있다. 그해 루이 14세는 25세였으며, 친정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 거대한 기사 행렬 뒤에는 높다란 도금한 태양신(太陽神)의 마차가 따랐고, 금마차 뒤편으로는 인간과 기이한 짐승, 꽃과 나무, 과실로 구성된 방진이 이어졌다. 이 방진들은 각각 금·은·동·철의 네 시대, 운행하는 천체, 사계절 그리고 시간을 상징했다. 이 방대한 행렬이 베르사유 궁전 정원을 가로지를 때, 하나의 위대한 시대가 공식적으로 서막을 열었다.
밤의 막이 내리자 4천 개의 촛불이 켜져 정원의 꽃과 나무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숲의 신, 숲속의 요정, 혹은 목동이나 포도를 따는 사람으로 분장한 200명의 하인이 산림과 대지에서 온 진수성찬과 미주를 연회석에 올렸다. 피로연의 절정에서 반원형의 무대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때는 1664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확장 공사 완공을 축하하기 위한 이 축제는 6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이 이전에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환상적인 전설, 발레 희극, 음악, 기이한 짐승들, 그리고 밤하늘과 나무들을 태운 불꽃놀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충격 속에, 축제에 초대받은 600명의 프랑스 귀족과 신료들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공통된 예감이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왕조가 곧 펼쳐질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젊은 국왕은 무한한 자신감과 기백으로 그들에게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웅장한 문화의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지상의 베르사유 궁전
1682년, 태양왕은 아직 건설 중이던 베르사유 궁전으로 궁정을 옮겼다. 태양의 광채가 조각된 문을 밀고 들어가 수천 개의 조각상과 분수를 지나면, 토성, 수성, 금성의 이름을 딴 큰 홀들이 나타난다. 천청색 돔 천장 위에는 날개 달린 천사들이 도처에 날아다니고, 황금 투구를 쓴 어린 천사들이 칼을 끌고 다니며, 올림포스산의 신들도 하나둘 강림한다. 모든 것이 마치 환상인 듯, 누군가 저 먼 천체를 이 지상의 궁전에 옮겨 놓은 것만 같다.
정원의 남북 축을 가로질러 왕실의 대운하가 흐른다. 운하 끝의 거대한 수조에서는 아폴로가 태양 전차를 몰고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이것은 하루의 시작이며, 태양신이 장려한 말들을 몰고 천궁을 달려 대지에 빛을 비추는 모습이다.

베르사유 궁전 태양왕 기마상. (장러/에포크타임스)
마치 사람들에게 우리의 고향은 지상이 아니라 저 먼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심혈을 기울여 세운 이 베르사유 궁전은 아득히 먼 천체(天體)와 뭇 신들을 하나하나 인간 세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세인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태양왕의 의지에 따라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은 수많은 조각상과 천상과 인간계를 묘사한 유화들을 창조해냈다. 베르사유 궁전은 예술가들이 재능을 펼치는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풍성한 예술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정원에서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회랑의 기둥, 거울의 방 속 황금빛 유리와 하나로 어우러졌다.

프랑스 궁정 태피스트리, 1660년 22세의 루이 14세가 호위대를 거느리고 유람하며 사냥하는 모습. (Juliet Zhu/에포크타임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가진 군주로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입장권은 머리에 쓴 예모(禮帽)와 허리에 찬 한 자루의 칼뿐이었다. 이 불가사의한 정원을 거닐다 운이 좋으면, 화려한 커다란 원형 모자에 채색 깃털을 꽂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국왕을 만날 수도 있었으며, 그때 백성들은 그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었다. 사치스러운 베르사유 궁전이 왕실만의 것이 아니라 백성의 것이기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태양왕은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고 있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과거 이탈리아가 야만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가 유럽 전체가 모방하는 문화 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 전신 조각상 (장러/에포크타임스)
궁정에서 무용 교육
그리스 로마 시대의 남성들이 매일 경기장에 가서 힘을 겨루었듯, 루이 14세의 궁정에서는 매주 최소 한 번 이상의 가장무도회가 열렸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의 신체는 세심하게 지켜야 할 예술품과 같았으며, 신체의 균형, 회전, 손발이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모두 한 개인의 내면적 자질을 대변했다. 매일 아침 국왕은 승마 수업 후 무용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귀족들도 무용을 생활의 일부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무용은 지혜, 용기, 조화, 절제와 같은 고대 인류의 이상적인 특질을 체현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 곳곳에서 보이는 조각상들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 속 신(神)들을 이상적인 인격으로 삼아 스스로를 완벽하게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이 추었던 춤 역시 장중하고도 우아하며 신성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모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도회에서 근신들은 모든 춤에 숙련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아한 풍채뿐만 아니라 예민한 지혜가 필요했는데, 루이 14세 조정의 사교춤은 전문 무용 못지않은 고난도 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무도회에서 국왕과 전 궁정 왕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귀족들이 쌍쌍이 마주 보며 춤을 출 때면,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심판대와 같은 시선 아래 놓이게 되었다. 생시몽의 회고록에는 춤사위가 특히 서툴렀던 한 인물이 무도회에서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비웃으며 손뼉을 치고 소란을 피웠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한동안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단지 무릎을 굽혀 절하는 것, 단지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려 서 있는 것조차도 예법을 초월한 내실을 깊이 드러냈다. 루이 14세 궁정을 찾은 각국 사절들에게 프랑스 귀족과 신료들의 우아한 거동과 말투, 화려한 의복, 절을 하고 춤추듯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법은 그들을 내심 경악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루이 14세를 접견하는 판화 한 점을 보면, 프랑스 조정 전체가 보여주는 기품이 매우 우월하여 먼 곳에서 온 손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많은 유럽 군주들이 프랑스어를 귀족 학교의 교과 과정에 넣고 프랑스어를 궁정의 공식 언어로 삼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국왕이 발레를 민간에 개방하기 전까지 발레는 귀족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신체 언어였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근신들이 발레를 잘 추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1661년, 그는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발레의 단순한 걸음걸이를 점차 성숙하게 발전시켰으며, 이는 이후 300년 동안 인체미(人體美)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 무용의 정점으로서 독보적인 무용 체계가 되었다.
태양왕의 발레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흐는 뤼네부르크에서 학생 시절 프랑스에서 온 악단이 루이 14세 궁정 발레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자주 들으며 프랑스 음악가들의 기교를 익혔다. 그는 바이마르의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 음악가들의 악보를 필사했으며, 루이 14세 궁정에서 궁정 악장 륄리에게 배운 일부 독일 음악가들은 프랑스식 서곡을 독일 음악에 도입했다. 훗날 바흐, 헨델, 퍼셀(Purcell) 등이 창작한 곡들은 바로크 음악의 전성기를 열었다.
또한 륄리는 오페라에 합창과 발레를 가미하여 프랑스 오페라의 새로운 형식을 창시했다. 몰리에르의 희극은 발레 및 음악과 결합하여 당시 매우 유행하던 예술 형식을 형성했다. 음악, 연극, 무용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천재들은 예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탐구했다.
예술 문화적 혁신과 병행하여 태양왕을 중심으로 일련의 화학 작용이 일어났다. 권세를 믿고 자립하며 오만불손했던 신하들은 국왕의 위엄 아래 하나둘 순종하게 되었고, 국왕의 은총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700여 개의 방과 100헥타르의 정원으로 둘러싸인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며 국왕의 아침 기상을 알리는 첫 마디와 첫 시선을 맞이했다. 루이 14세는 문화, 예법 그리고 명예로 국토 내의 왕실 귀족들을 굴복시켰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프롱드의 난을 기억한다면, 루이 14세가 치밀하게 계획한 이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더욱 그 지혜와 필요성이 돋보인다.
“하느님께서 너를 국왕으로 만드셨다. 네게 선량한 의지만 있다면, 그분께서 네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이다.” 이것은 루이 14세가 후손에게 남긴 훈계였다. 의심할 바 없이, 하늘로부터 온 태양왕의 지혜는 미칠 수 있는 제왕이 드물었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제는 교묘한 문화적 메커니즘 위에 세워졌으며, 국가 전체의 고전주의적 분위기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몰리에르, 몰리에르
몰리에르가 창작한 《타르튀프》, 《상상병 환자》, 《서민 귀족》과 같은 풍자 희극이 없었다면 베르사유 궁전의 각종 축제는 견고한 핵심을 잃었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 솟아오른 반원형 극장 무대 위에서 인성의 기괴하고 다채로운 모습이 폭로되었고, 터져 나오는 웃음 속에서 정화되었다.
몰리에르는 젊은 시절 극단과 함께 사방을 유랑했으며 극단 부채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파리에서 그는 루이 14세의 깊은 감탄을 자아냈다. 1664년 창세기(創世紀)의 축제에서 그의 두 편의 희극 발레는 중책을 맡았다. 그가 주도한 극단은 국왕 극단이 되어 파리 왕립 극장에서 공연했다. 몰리에르의 날카로운 풍자극은 사람들의 가면을 찢어 발겼으며, 당시 종교인들의 허위와 젠체하는 상류 사회를 폭로했다. 몰리에르의 겉보기에 방탕하고 즉흥적인 연극 속에서 사람들의 허례허식이 스포트라이트 아래 놓였고, 그는 도덕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몰리에르를 비호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그의 보호자이자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몰리에르는 자주 병든 몸을 이끌고 공연했다. 폐결핵을 앓던 그는 《상상병 환자》의 주인공 역을 맡아 관객의 우레와 같은 웃음소리로 자신의 격렬한 기침 소리를 감추었다. 공연 도중 그는 갑작스러운 각혈과 함께 쓰러졌으나 끝까지 연기를 마쳤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실려 간 몰리에르는 불과 몇 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
베르사유 궁전의 금빛 찬란한 겉모습 아래에는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기를 요구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오직 그러했기에 베르사유 궁전의 명성이 오늘날까지 변색되지 않고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몰리에르의 극적인 인생에서 우리는 루이 14세 시대의 모든 생명을 관통하는 독특하고 찬란한 빛을 본다. 바로 이처럼 온 생명으로 노력하며 삶을 살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인물들이 이 위대한 시대를 써 내려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홀: 거울의 방. (장러/에포크타임스)
유럽 예술 공화국
예술의 수호신으로서 태양왕은 그리스 로마 및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을 대량으로 수집했다. 1683년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주한 이듬해, 아를에서 발견된 《아를의 비너스》 조각상이 루이 14세에게 헌상되었다. 동시에 태양왕은 루브르 궁전의 소장품을 대폭 확충하고 대중에게 개방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루이 14세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 과학 아카데미, 천문대를 창설했으며, 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최초의 회화 조각 아카데미(1663년)를 세웠고 루이 13세 때 창설된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이 아카데미들은 유럽과 상호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유럽의 예술과 사상을 주도했다. 신고전주의의 거장 다비드가 바로 회화 아카데미가 길러낸 인물이며,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이후 흡수한 인재들에는 시대 사상을 변화시킨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포함되어 인류 문명에 미친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
동시에 루이 14세는 유럽 전체에 손을 뻗어 풍성한 상금으로 각국의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 천문학자들을 장려하고 후원했다. 태양왕에게 예술에는 국경이 없었다. 그는 각 분야의 일류 인재들을 품어 안아 그들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파리에는 각국에서 온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 열기를 유럽 전체로 방사했다. 프랑스어를 숙련되게 다듬은 시인 부알로(Nicolas Boileau-Despréaux)와 고전주의 비극 작가 라신은 모두 루이 14세 궁정의 사관(史官)이었으며, 라신은 훗날 국왕의 비서가 되었다. ‘국왕 제1화가’ 르브룅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천장 벽화와 모든 실내 설계를 담당하여 화려한 루이 14세 양식을 정립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아폴로 분수는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튀비(Jean-Baptiste Tuby)가 창조한 것이며, 근대에 명성이 높아진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는 국왕의 아들을 위해 곡을 쓰고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 및 기타 연극의 음악을 작곡했다.
파리의 수많은 천재 중에는 철학자, 수학자, 외교관의 면모를 모두 갖춘 라이프니츠가 있었다. 그에게는 네덜란드와 독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대신 이집트를 공격하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라는 이례적인 외교 임무가 있었다. 독일 출신의 사절로서 라이프니츠는 루이 14세의 가장 충실한 숭배자는 아니었으나, 그는 일찍이 적절하게 말한 바 있다. “루이 14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홀 거울의 방. 많은 벽화가 태양왕의 주요 사건을 이야기한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가장 강력한 지점 중 네 곳을 동시에 공격하라고 명령하는 국왕”이다. (장러/에포크타임스)
이 26세의 박학다식한 천재는 태양왕의 수도로 와서 각 강대국이 암중으로 힘을 겨루는 외교가에서 활동했으며, 유럽 학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머지않아 우리는 곧 전개될 세계사란 큰 연극에서, 무한한 기발한 생각과 이상을 실천하는 용기를 지닌 이 철학자가 마치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생동감 넘치고 귀중한 필치를 남겼음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유럽 예술 문화의 영도자가 되었다. 루이 14세의 강력한 추진 아래 언어와 예술에서 정신 사상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유럽 예술 지식 공화국’이 조용히 형성되었다. 비록 국가 간에는 종교와 왕위 계승권을 두고 여전히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문화 예술과 과학 지식에 있어서는 태양왕의 열기 아래 유럽은 물과 우유가 섞이듯 조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시기에 인류의 이성은 이미 성숙에 도달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빈약해 보였던 사회 전체의 정신적 면모와 표상은 문화 프랑스의 잠재적인 영향 아래 조용히 탈바꿈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유럽은 인류 문명의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1/10/n4569792.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