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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화하 역사 진면모: ‘가천하(家天下)’의 시작 (4)─하조(夏朝)

(기원전 2033년 –1562년)

심연(心緣)

【정견망】

오제(五帝) 시기 천하의 공주(共主)였던 황제(黃帝), 제곡(帝嚳), 전욱(顓頊), 요(堯)와 순(舜)은 모두 어진 덕망 덕분에 각 부족의 존경과 추대를 받았다. 오제가 천하를 다스린 것 역시 덕(德)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였다. 후계자를 선발함에 있어 오제는 기본적으로 “현능한 이에게 전한다”는 원칙을 따랐고, 대중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자식이라 하더라도 이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반드시 제위를 물려준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와 제곡처럼 부자간에 전승된 사례도 있었다.

순제(舜帝)가 세상을 떠난 후, 하족(夏族)의 수령인 우(禹)가 치수(治水)에 공을 세우고 성품이 어질고 겸손해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우가 죽은 후 제위가 다른 현인에게 전해졌음에도 결국 그의 아들 계(啓)가 천자의 자리를 계승하면서, 중국 역사상 왕위(王位)가 “부자간에 전해지는” 선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말하는 “가천하(家天下, 천하를 한 집안의 소유로 만듦)”의 시작이다.

이후의 역대 왕조들은 기본적으로 이 계승 법칙을 이어갔다. 계가 즉위한 후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왕조인 하조(夏朝)를 건립했다. 하조의 건립은 중국의 원시적이고 느슨한 부족 사회가 기본적으로 끝났음을 상징하며, 그 탄생은 중화 문명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다만 사마천(司馬遷) 때부터 사학자들은 대부분 하나라의 시작을 하우(夏禹) 때부터 계산했다. 우로부터 이계(履癸, 걸)에 이르기까지 총 14대 17명의 왕이 있었으며 전후로 400여 년이 흘렀다.

또한 중국의 별칭인 “화하(華夏)”는 하족 및 하왕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화하”라는 단어는 《상서(尙書)·무성(武盛)》편에 처음 등장한다. “화(華)”는 예악(禮樂)의 성함을 뜻하고, “하(夏)”는 국가가 큼을 뜻한다. 황하 유역은 화하 문화의 요람이며, 상당히 긴 역사 기간 동안 고대 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옛사람들은 중국을 “화하”라 불렀으며, 그 안에는 찬란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고대 문헌에서 “하(夏)”는 세 가지 주요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화하족 사람을 뜻한다. 동한(東漢) 허신(許慎)의 《설문해자》에서는 “하(夏)는 중국 사람이다”라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흔히 “제하(諸夏)”나 “제화(諸華)”(“화”와 “하” 두 글자는 의미가 서로 통함)로 화하족 사람들을 지칭했다.

둘째는 화하족의 문화다. 서한의 양웅(揚雄)은 저서 《방언(方言)》에서 “하(夏)는 큰 것이다. 관(關) 서쪽 진(秦)과 진(晉) 사이에서 만물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하(夏)라고 한다”라고 지적했다. 진과 진 사이는 하(夏) 왕족의 발원지이므로 “(대)우가 서강(西羌)에서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셋째는 상고 삼대(三代)의 으뜸인 하 및 그 전신인 대우(大禹)가 봉해졌던 하국(夏國)을 지칭한다. 세 가지 의미 중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며 앞의 두 의미가 파생된 기초라 할 수 있다. 하나라의 건설 성과 덕분에 최종적으로 하족(즉 화하족)의 중심 지위가 확립되었고, 하나라의 근거지는 바로 “이(伊), 낙(洛) 사이”인 지금의 예서(豫西) 지역이다.

이후 천하를 장악하려는 어떤 정치 세력도 이 핵심 지역을 차지해야만 진정으로 천하를 통제하는 실제 지위를 갖게 되었으며, 상(商)과 주(周) 두 왕조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계 왕조의 통치자들 역시 예외 없이 자신들이 하 문화의 계승자이며 대우가 획정한 “구주(九州)”의 주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므로 《시경(詩經)·소아(小雅)》에는 “풍수(豊水)는 동으로 흐르고, 우(禹)의 업적을 잇도다”라는 시구가 있다.

[역주: 풍수는 위수의 지류 중 하나로 문왕이 도읍을 정한 풍경(豊京)이 이 강 서쪽 기슭에 있었다.]

창건자 우(禹)의 사적

대우는 하조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우의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그의 아버지는 곤(鯀)이고, 곤의 아버지는 전욱제(顓頊帝)이며,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 창의의 아버지는 황제(黃帝)다. 즉 우는 황제의 현손이자 전욱제의 손자다. 우의 증조부 창의와 아버지 곤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천자의 대신으로 일했다.

요제(堯帝)가 재위할 때 홍수가 하늘을 뒤덮어 사람들이 매우 근심했다. 요가 홍수를 다스릴 사람을 찾자 사람들이 곤을 추천했다. 그러나 9년이 지나도록 홍수는 여전히 범람했고 곤의 치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순(舜)이 제위를 계승한 후, 곤의 아들 우를 등용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우의 용모에 관해 《상서위(尙書緯)》에서는 “우는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모습이었다. 키가 9척이며 호랑이 같은 코에 하마 같은 눈, 겹치아를 가졌고 귓구멍이 세 개였다”라고 전한다. 《사기·하본기(夏本紀)》에서는 우의 위인이 총명하고 기지 넘치며 고난을 잘 견뎠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도덕을 준수하고 인애(仁愛)하여 친근했으며 언행에 믿음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장중하며 엄숙하여 백관(百官)의 모범이라 불릴 만했다.

우는 순제의 명을 받은 후 익(益), 후직(后稷)과 함께 구주(九州)의 땅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구주”란 무엇인가? 옛날에 주(州)와 주(洲)는 같은 글자로 지금의 섬(島)이라는 뜻이었다. 주(州)와 도(島) 두 글자는 고대에 음이 같았다.

《설문해자》 설명에 따르면 “주(州)는 물 가운데 살 수 있는 곳이다. 옛날 요(堯)가 홍수를 만났을 때 백성들이 물속의 높은 땅에 살았으므로 구주라고 한다”라고 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우공(禹貢)》의 기록에 따르면 “구주”는 기주(冀州, 지금의 산서·하북·요남 일대), 청주(靑州, 지금의 산동 동부), 연주(兗州, 지금의 산동 서부), 서주(徐州, 지금의 산동 남부·강소·안휘 북부), 양주(揚州, 지금의 강소·안휘 남부·절강·강서 북부), 예주(豫州, 지금의 하남), 옹주(雍州, 지금의 섬서·감숙), 형주(荊州, 지금의 호남·호북), 양주(梁州, 지금의 사천)를 뜻한다. 나중에 주례(周禮)의 구주는 양, 형, 예, 청, 연, 옹, 유(幽), 기, 병주(並州)를 가리켰다. 현재 “구주”는 중국을 통칭하는 고칭(古稱) 중 하나로 쓰인다.

《설문》의 해석에 근거하면 당시 홍수 피해가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대략 호수 근처나 물 위에서 생활했던 셈이다.

다시 우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먼저 각지의 산천 지형과 땅의 모습을 조사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고생을 마다치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나무 말뚝을 세워 표식으로 삼아 산천의 형세를 측정했다. 항상 왼손에는 준(准)과 승(繩)을 들고 오른손에는 규(規)와 거(矩)를 들었으며, 몸에는 사시(四時)를 측정하고 방향을 정하는 의기를 지니고 다녔다. 이어 그는 점차 구주의 땅을 개간하고 아홉 개의 하천 물길을 트며 아홉 개의 큰 호수를 정비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의식주를 절약하고 누추한 곳에 살며 모든 재산을 하천 정비에 쏟아부었다. 치수 13년 동안 세 번이나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조사와 치수를 병행하며 익(益)에게 시켜 백성들에게 벼 종자를 나누어주어 낮고 습한 땅에 심게 했다. 또한 후직(后稷)에게 시켜 식량이 부족한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 식량이 부족할 때는 여유가 있는 지역에서 부족한 지역으로 식량을 조절하여 각 제후국이 모두 먹을 수 있게 했다.

우가 다스린 구주는 북으로 제도(帝都)인 기주(冀州)에서 시작하여 형수, 장수, 황하, 회수 등을 다스렸고, 남으로는 형주에 이르러 장강, 한수 등을 다스렸으며, 서로는 삼위산 지역(지금의 감숙성 돈황현 동쪽)에 이르러 흑수, 위수 등을 다스렸고, 동으로는 양주에 이르러 송강, 전당강, 포양강 등을 다스렸다. 우는 주로 물길을 트는 소도(疏導) 방식을 사용하여 아홉 개의 큰 강을 소통시켰고 일부 지역에는 제방을 쌓았다. 강물이 소통되자 사람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며 비옥한 땅에 각종 작물을 심었고, 진심으로 감복하여 천자에게 지역 특산물을 진상했다. 또한 우는 아홉 산맥의 길을 뚫었으며, 치수 과정에서 남방 구리(九黎) 삼묘(三苗)의 침입을 평정했다. 이때부터 구리와 삼묘가 북쪽을 침범하지 않아 장강 중류 지역이 안정되었다.

우의 13년 노력 끝에 모든 산천과 하천이 정비되었으며, 구주가 통일되어 사해 안의 땅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부족의 수령들도 경성으로 와서 회맹하고 조회할 수 있게 되었다. 우는 화하 경내 구주에 제후들을 봉하고 땅과 성씨를 하사하며 “공경히 덕행을 제일로 삼고 천자인 나의 조치를 어기지 말라”고 일렀다.

우는 또한 공부(貢賦, 조세와 부역) 제도를 제정했다. 천자의 국도 밖 500리 지역을 전복(甸服)이라 정하여 천자를 위해 농사를 짓고 곡물세를 내게 했다. 왕성 100리 이내는 볏가리째 내고, 200리까지는 이삭을, 300리까지는 알곡을, 400리까지는 거친 쌀을, 500리까지는 정미를 내도록 했다. 전복 밖 500리는 후복(侯服)이라 하여 천자를 위해 정찰하고 왕명을 받드는 지역으로 삼았다.

전복과 가까운 100리는 경대부의 채읍, 그 밖 200리는 작은 봉국, 다시 그 밖 300리는 제후의 봉지로 정했다. 후복 밖 500리는 수복(綏服)이라 하여 천자의 안무를 받고 교화를 펴는 지역으로 삼았다. 후복과 가까운 300리는 상황에 따라 예악과 법도를 시행하고, 그 밖 200리는 무위를 떨쳐 천자를 보위하게 했다. 수복 밖 500리는 요복(要服)이라 하여 천자의 구속을 받고 따르는 지역으로 삼았다. 수복과 가까운 300리는 교화를 지키며 화평하게 지내고, 그 밖 200리는 왕법을 지키게 했다. 요복 밖 500리는 황복(荒服)이라 하여 천자를 위해 먼 변방을 지키는 지역으로 삼았다. 요복과 가까운 300리는 황량하고 낙후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로웠고, 그 밖 200리는 구속 없이 마음대로 거주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동쪽은 바다, 서쪽은 사막, 남북에 이르기까지 천자의 위엄과 교화가 사방 먼 변방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에 순제는 우의 치수 공로를 표창하며 물빛을 상징하는 검은색 규옥(圭玉)을 하사하고 천하에 치수의 성공을 선포했다. 천하는 이때부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우는 홍수를 다스리고 구려와 삼묘를 정복한 공적이 매우 컸기에 “대우(大禹)”라는 존칭을 얻게 되었다.

순제가 세상을 떠난 후 대우가 선양을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즉위한 후 먼저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 우현)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 안읍(安邑, 지금의 산서 안읍)이나 평양(平陽)에 도읍했다. 우제(禹帝)는 천자가 된 후 고요(皋陶)를 후계자로 천거했으나 고요는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그 후 우는 천하를 익(益)에게 전했다. 3년상을 마친 후 익은 제위를 우의 아들 계(啓)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기산(箕山) 남쪽으로 은거했다. 이때부터 왕위 계승 법칙이 현자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 형제간에 전하는 세습 제도로 바뀌었으며, 옛사람들이 말하는 “가천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계(夏啓)의 사적

우의 아들 계 또한 매우 현덕(顯德)하여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중국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왕조인 하조를 세웠다. 하조의 최고 통치자는 “왕(王)” 또는 “후(后)”라 불렸다. 계는 즉위한 후 대우의 사업을 계승하고 덕화(德化)로 천하를 다스렸다.

계가 제위에 오른 후 균대(鈞台)에서 각지 수령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유호씨(有扈氏)가 굴복하지 않고 연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하자 계는 정벌을 결정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계는 《감서(甘誓)》라는 서사(誓辭)를 짓고 육군 장령들을 모아 훈계했다. 계가 말했다.

“육군 장령들이여, 너희에게 맹세하노니 유호씨는 인, 의, 예, 지, 신 오상(五常)의 규범을 멸시하고 천, 지, 인의 정도를 배반했으므로 하늘이 그의 명을 끊으려 하신다. 이제 나는 공경히 하늘의 벌을 집행하려 한다. 전차 왼쪽의 사수가 왼쪽에서 적으로 쏘지 않거나, 오른쪽 검수가 오른쪽에서 적을 베지 않는 것은 명령 불복종이다. 말을 모는 자가 수레와 말을 정렬하지 못하는 것도 불복종이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조상 신령 앞에서 상을 내릴 것이나, 따르지 않는 자는 사직 신 앞에서 죽일 것이며 그 가족은 노비로 삼을 것이다.” 계의 지휘 아래 유호씨를 멸망시키자 비로소 천하가 모두 와서 알현했다.

계 이후 하조의 발전

계가 죽은 후 아들 태강(太康)이 즉위했다. 태강은 온종일 유람과 사냥만 즐기며 민생을 돌보지 않다가 제후 수령인 유궁씨(有窮氏) 후예(后羿)에게 쫓겨났다. 이로 인해 태강은 나라를 잃었고 인민과 권력은 후예의 손에 넘어갔다. 태강이 죽자 후예는 태강의 동생 중강(仲康)을 하왕으로 세웠으나 실권은 후예가 쥐고 있었다.

중강제 재위 시 천지 사시를 관장하는 대신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술에 빠져 사시와 날짜의 순서를 어지럽혔다. 중강이 죽은 후 아들 상(相)이 세워졌다. 후예 역시 사냥에 빠져 방탕하게 지내다 신하 한착(寒浞)에게 살해당했고, 한착은 다시 상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상이 죽임을 당할 때 왕후 민(緡)은 임신 중이었는데, 친정인 유잉(有仍, 지금의 산동 제령현)으로 도망쳐 아들 소강(少康)을 낳았다. 소강은 장성한 후 하나의 잔존 세력을 모아 한착을 멸하고 하 왕조를 광복했다. 역사는 이를 “소강중흥(少康中興)”이라 부른다. 소강의 아들 저(杼) 재위 시 한착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동이(東夷)를 정벌하여 하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후 5대(代) 6왕 시기에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하왕조의 통치는 동으로는 동해, 서로는 서하(西河), 북으로는 연산(燕山), 남으로는 강회(江淮)를 넘었다. 전해지는 문헌에 따르면 하나라의 통치 체계는 상당히 방대했으며 오제 시기의 체제를 계승하면서도 발전시켰다. 하왕 아래에는 정사를 관장하는 삼정(三正)이 있었고, 천자의 보좌관으로 의(疑), 승(丞), 보(輔), 필(弼)의 사린(四鄰)이 있었다. 국왕 곁에서 보좌하는 육사(六事, 6리·6경), 역법을 관장하는 희화(羲和, 태사라고도 함), 소송을 맡은 대리(大理), 음악을 맡은 고(瞽), 귀족 자제의 교육을 맡은 관사(官師)와 국로(國老), 사신을 맡은 유인(遒人), 공부를 징수하는 색부(嗇夫), 산택을 관리하는 우인(虞人), 축산을 관리하는 목정(牧正), 왕의 식사를 관리하는 포정(庖正), 수레를 관리하는 차정(車正), 궁문을 지키는 수문자, 왕실 가족 사무를 맡은 신(臣) 등이 있었다.

하왕조는 줄곧 우가 생전에 정한 구주의 획정 기준과 전, 후, 수, 요, 황의 오복(五服) 공부 제도를 유지했다. 이는 하왕조의 지방 관리가 부족 수령을 제후(백 또는 목이라 부름)로 삼아 다스렸음을 보여준다. 제후는 반드시 하왕(夏王)의 정령에 복종해야 했으며 조공, 조회, 부역, 정벌 수행의 의무를 졌다. 제후 아래에는 각 대가족의 족장인 대부가 있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하왕은 천하를 가졌고, 제후는 나라를 가졌으며, 대부는 가(家)를 가졌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라에는 이미 초기적인 “덕치관형(德治寬刑, 덕으로 다스리고 형벌을 너그럽게 함)” 사상이 있었다. 《좌전·문공 7년》에 인용된 《하서(夏書)》에 따르면 “경계하는 데는 아름다움(休 선정)으로써 하고, 바로잡는 데는 위엄(威)으로써 한다”라고 했다. 즉 국가 통치에서 문치와 형벌을 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정 운영에서 조짐이 보일 때 미리 방지하는 인식도 있었던 듯하다.

《좌전·성공 16년》에 인용된 《하서》에서는 “원망이 어찌 밝은 곳에만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을 도모하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법률 역시 하조의 건립과 함께 생겨났으니, 이른바 “하에 어지러운 정치가 있어 우형(禹刑)을 만들었다”(《좌전·소공 6년》)는 것이 그것이다. “우형”은 단지 형법뿐만 아니라 하왕조 법률의 총칭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는 당시 이미 우수한 청동을 제련할 수 있어 많은 청동 생산 도구와 생활 용기를 생산했으며 상품 교환도 발전했다. 하대(夏代) 유적에서 출토된 농업 도구에는 석렴(石鐮 돌낫), 돌칼 등 수확 도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농작물은 견무법(畎畝法)으로 심었는데, 두 이랑 사이에 고랑을 하나 두고 이랑 위에 작물을 심는 방식이다. 하나라의 농업 생산은 이미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수확량이 급격히 늘었으며, 술 마시는 풍습이 생긴 것이 이를 방증한다. 최초의 화폐도 하나라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지는데, 구슬과 옥을 상폐(上幣), 황금을 중폐(中幣), 칼 모양의 돈을 하폐(下幣)로 삼아 “삼품(三品)”이라 불렀다.

예술 면에서 하나라에는 악무(樂舞)에 관한 전설이 있다. 주로 계와 관련된 전설로, 《산해경·대황서경》의 신화에 따르면 계가 미녀 세 명을 천신에게 바치고 하늘에서 《구변(九辯)》과 《구가(九歌)》라는 두 악무 작품을 얻어 인간 세상에 가져왔으며, 다시 《구운(九韻)》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학 분야에서 하나라는 이미 상당히 진보한 음양합력과 간지 기일법을 가졌었다. 《하소정(夏小正)》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풍부한 물후(物候) 지식을 담은 저작이다. 총 463자로 구성되어 1년 12개월별로 물후, 기상, 천상 및 주요 정사를 기록했는데 주로 농경, 잠상, 말 기르기, 채집, 어로, 수렵 등 생산 활동에 관한 것이다. 당시에는 초기 지도도 등장했다. 하우의 치수 전설에서 보듯 당시 사람들은 이미 많은 산천을 인식하고 대지의 동서남북을 확정했으며, 수로를 파고 홍수를 나누며 제방을 쌓는 법을 배웠고 계산, 측정 및 간단한 지도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전설에 따르면 대우는 실천을 통해 구주에서 헌상한 구리 등 금속을 모아 아홉 개의 큰 솥(九鼎)을 주조했는데, 솥에는 각 주의 산천, 초목, 금수 등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길 안내를 위한 “지남도(指南圖)” 혹은 4000년 전의 원시 지도였을 것이라 말한다.

하조의 쇠락과 멸망

제15대 하왕 공갑(孔甲)에게 제위가 전해졌을 때 그의 음란함으로 인해 하후씨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쇠퇴했고 제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켜 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하늘에서 암수 두 마리의 신룡(神龍)이 내려왔는데 공갑이 이를 기를 줄 몰라 사육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 제요 도당씨가 이미 쇠퇴하여 그 후손 중에 유루(劉累)라는 자가 용 기르는 법을 배워 공갑을 섬겼다. 공갑은 그에게 어룡씨(御龍氏)라는 성을 내리고 시위씨 후손의 봉지를 받게 했다. 나중에 암룡이 죽자 유루는 몰래 고기 양념(육장)을 만들어 공갑에게 바쳤다. 공갑이 이를 맛있게 먹고 다시 유루에게 육장을 요구하자 두려움을 느낀 유루는 노현(魯縣)으로 도망쳤다.

공갑이 죽고 3대를 지나 하걸(夏桀)에 이르렀다. 걸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으로 덕을 닦지 않고 사치가 극에 달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경궁(傾宮)을 짓고 요대(瑤台)를 꾸미며 경실(瓊室)을 만들고 옥문(玉門)을 세웠다”라고 한다. 또한 각지에서 미녀를 구해 후궁에 가두고 밤낮으로 말희(妹喜) 및 궁녀들과 술을 마시며 즐겼다. 술 연못을 아주 크게 만들어 배를 띄울 정도였으며, 술에 취해 빠져 죽는 일이 빈번했으나 이런 황당한 일을 보며 말희는 즐거워했다.

백성의 삶은 매우 곤궁하여 매년 수확해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저축한 식량도 없었으며 천재지변이라도 나면 가족이 흩어졌다. 하(夏)의 신민들은 태양을 가리키며 하걸을 저주하기를 “이 해는 언제 없어질꼬, 내 차라리 너와 함께 망하리라”라고 했다. 즉 네가 언제 망할지 모르나 나는 기꺼이 너와 함께 죽겠다는 뜻이다.

걸은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하조의 대신 관룡봉(關龍逢)이 “황도(皇圖)”를 받들고 걸을 알현했다. “황도”는 제왕의 조상들이 세운 공적을 그린 그림으로 후대 제왕들이 보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관룡봉이 가져간 그림에는 대우의 치수 장면 등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걸이 선왕을 본받아 시조 대우처럼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나라를 오래 보존하기를 바랐다. 만약 지금처럼 사치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망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간언했다. 걸은 이 충언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룡봉을 살해했고, 앞으로 그와 같이 간언하는 자는 모두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어진 신하들은 사라지고 간언도 끊겼으며 걸은 더욱 교만해졌다.

걸은 또한 사방으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의 고혈을 짜냈고, 결국 백성의 반항과 제후들의 이반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왕조에는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하천의 물이 끊겼다. 하(夏) 말기에는 두 차례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제계(帝癸 걸임금) 15년 밤, 별이 비처럼 떨어졌고 지진이 나 이(伊), 낙(洛) 강물이 말랐다”, “제계 30년, 구산(瞿山)이 무너졌다”(모두 《죽서기년》 기록).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하 말기 지진을 두고 “옛날 이, 낙 강물이 마르니 하가 망했다!”(《국어·주어상》)라고 했다. 천재지변은 인간이 천리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자 응징이다. 하걸이 불의를 많이 행하자 하늘이 그를 멸한 것이다.

상탕(商湯)은 하걸이 하늘의 벌을 받고 대중에게 버림받은 것을 보고 “천명(天命)”을 기치로 내걸어 “하는 죄가 많아 하늘이 멸하라 명하셨다”며 하늘의 뜻을 집행하기 위해 분발해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명조(鳴條) 전투에서 상탕의 군대가 하걸의 군대를 이겼고, 걸은 도망치다 남소(南巢)에서 죽었으며 하나라는 멸망했다. 강대한 국가가 4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작은 제후국에 멸망한 사건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사색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은(殷)의 거울은 멀리 있지 않으니 바로 하후(夏后)의 시대에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그리하여 상탕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하나라를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탕은 하나의 후손들을 봉해주었고 주조에 이르러 그들을 기(杞) 땅에 봉했다.

하조 유적에 관한 고고학적 내용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조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역사적으로 하나라가 실존했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사기·하본기》의 하대 세계(世系)는 같은 책 《은본기》의 상대 세계만큼 명확하며, 상대 세계는 안양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복사(甲骨卜辭)를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는 《하본기》의 하대 세계를 믿을 만하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이 안양 은허, 정주 상성 등 상대 문화 유적을 깊이 인식하면서 하 문화 탐색이라는 연구 과제가 제기되었고, 고고학적 수단으로 하대 유적을 찾아 하 역사를 복원하고자 노력해왔다.

고대사 학자들은 문헌 자료에 근거해 하(夏) 사람들의 활동 지역으로 두 곳을 꼽는다. 하나는 하남 서부 숭산 근처의 등봉, 우현과 낙양 평원이며, 다른 하나는 산서 남부의 분수(汾水) 하류 지역이다. 전설 속 하나의 도읍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이 두 지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59년 “하허(夏墟)” 조사가 시작되면서 하 문화 탐색의 서막이 열렸다. 40여 년간 예서와 진남(晉南) 지역에서 일련의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어 탐색 범위가 점차 좁혀졌다. 현재 다수의 학자는 언사(偃師) 이리두 유적의 이름을 딴 “이리두 문화”(이리두 유형과 동하풍 유형 포함)와 예서 지역의 “용산 문화”를 하 문화 탐색의 주요 대상으로 보고 다양한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 다만 문자와 같은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어떤 유적이 확실한 하대 문화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서 지역의 용산 문화나 이리두 문화 모두 상당히 풍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禹) -> 계(啟) -> 태강(太康) -> 중강(仲康) -> 상(相) -> 소강(少康) -> 예(予) -> 괴(槐) -> 망(芒) -> 설(泄) -> 불강(不降) -> 경(扃) -> 근(廑) -> 공갑(孔甲) -> 고(皋) -> 발(發) -> 이계(履癸, 즉 걸왕)

참고 자료
1. 《사기》
2. 《하조개론(夏朝槪論)》, 중화만년망 발췌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