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화하 역사 진면모 (6): 천하 조종(朝宗) 서주(西周) 상(上)

(기원전 1066년 –770년)

심연(心緣)

【정견망】

은상(殷商)의 역사가 막 막을 내리고,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주(周) 역사의 서막이 올랐다. 막이 오르고 내리는 즈음에 우리는 다음을 주목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표면적인 형식은 다를지라도 역사는 어떤 면에서 놀랍도록 반복되고 있다. 가령 한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해 과거 하(夏)왕조와 상(商)왕조는 모두 우(禹)와 상탕(商湯)처럼 인덕(仁德)의 정치를 베푼 현능한 왕 대에 흥성했고, 걸(桀)과 주(紂)처럼 잔혹하고 포학한 왕 대에 망했다. 또한 인덕을 갖춘 군주들은 모두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두려워하며 하늘의 경고에 따라 끊임없이 천하에 덕을 닦았다. 반면 포악한 군주들은 상천이 반복해서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의 도를 거스르며 반역하다 결국 파멸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새로 시작된 이 역사는 어떠한가? 이후 중화라는 무대 위에서 상연된 한 편 한 편의 역사 대희(大戱 큰 연극)은 또 어떠한가? 어쩌면 답은 이 역사 대희의 서막과 종막 사이에 있을 것이며, 어쩌면 이 끊임없이 상연되는 큰 연극이 끝날 때라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새로운 역사 정극(正劇)을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주조(周朝 기원전 1066년-전 206년)는 은상이 멸망한 후 중국 역사상의 중요한 시기다. 주조는 전후 총 37대의 천자가 있었고 800여 년간 지속되다가 기원전 206년에 이르러서야 진(秦)나라에 멸망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왕조이며 중화 고전 문명의 전성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발생한 유가와 도가 사상은 후세 중국 역사를 관통하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770년을 경계로 후대 사가들은 도읍이 소재한 지리적 위치에 따라 그 이전의 주나라를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렀다. 서주 시기 주 왕조의 영토는 비교적 넓어 서기(西畿)와 동기(東畿)를 포함했다. 서기는 주의 최초 도읍인 풍(豊)과 호(鎬) 두 경(京 지금의 섬서성 경내)을 중심으로 했고, 동기는 후에 세운 도읍인 낙읍(洛邑 지금의 낙양)을 중심으로 했다. 기원전 770년 주유왕(周幽王)이 죽고 평왕(平王)이 낙읍으로 천도하면서 서부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주 왕조는 이때부터 기본적으로 쇠약한 상태에 처해 여러 나라의 압박을 받았다. 《좌전(左傳)》에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가니 진(晉)과 정(鄭)에 의지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서주의 역사에 대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하상(夏商)의 역사처럼 후세에 공주(共主)로 여겨진 한 국가의 역사일 뿐이며, 나머지 각 방면의 상황은 매우 막연하다. 서주 왕조에는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및 주공(周公) 등 오제(五帝)를 본받은 어진 왕과 신하들이 잇따라 나타나 아직 대도(大道)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동주 이후는 그렇지 않았다.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각 강대국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의 사실(史實)이 많으며, 이른바 천자의 나라는 대수롭지 않은 위치에 처한 듯하다. 또한 주 천자 중에 평범한 인물이 많았다. 동주 시기 천하의 형세는 끊임없는 변동 속에 있었고, 열국 간의 경쟁도 그리 격렬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격렬한 상태로 변했다. 이에 따라 후세 사가들은 다시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누었다. ‘춘추’는 공자(孔子)가 지은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했고, ‘전국’은 아마도 이 시기에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서한(西漢)의 유향(劉向)은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다.

춘추 시대에 각 제후국은 크기와 강약에 따라 1등국과 2, 3등국으로 나뉘었다. 각국의 실력이 한계가 있었기에 주의 예제(禮制)를 준수할 수 있었으므로 제후 간의 다툼은 패권을 다투는 데 그쳤다. 하지만 주 천자를 존숭한다는 전제하에 강대국 간의 전쟁도 비교적 적었다.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북방의 제후들이 더 이상 주 천자를 안중에 두지 않고 다투어 왕을 칭했다. 제후마다 모든 왕 위에 군림하여 황제를 칭하고 나아가 통일을 실현하려는 욕망을 가졌기에 당시 전쟁이 매우 빈번했다.

이 난세를 살았던 공자는 이때를 “천하에 도(道)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라고 여겼다.

그는 바람을 맞으며 길게 탄식했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와 하, 상, 서주의 현왕(賢王)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를 나는 만나지 못했으나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가 공정하여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해 사회를 다스리게 했으며, 사람마다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며 화목하게 지냈다. 재물을 사사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노동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음모와 도둑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도가 이미 몰락하여 천하는 통치자의 가문 차지가 되었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으며 사람들은 자기 친척과 자녀만을 돌보고 재물과 힘을 자기만을 위해 쓰며 각자 사욕을 채운다.”

과거 사람들이 존숭하던 ‘덕’이 현실적인 권력욕과 이익에 자리를 내어주었고, 사람은 도와 점점 멀어지니 인류의 도덕은 이때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대도와 멀어질 때 도덕이 너무 빨리 하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 신(神)들이 성자(聖者)의 형상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규범화했다. 춘추 전국 시대에 중국에는 유(儒), 도(道), 묵(墨), 법(法) 등 제자백가가 쟁명하는 국면이 나타났는데, 그중 노자(老子)의 진도(眞道)와 유가 사상이 후세 수천 년의 중국 역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주나라의 조상

주의 시조는 후직(後稷)이며 이름은 기(棄)다.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매우 신기한 전설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有邰)씨 부족의 딸인 강원(姜原)이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正妃)였다. 한번은 강원이 들판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 그것을 밟아보고 싶어 했다. 발자국을 밟자마자 몸에 진동이 느껴지며 임신한 것 같더니 열 달 뒤 아들을 낳았다. 강원은 이 아이가 불길하다고 여겨 좁은 골목길에 버렸으나 말이나 소가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모두 피해 가며 밟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숲속에 버리려 했으나 마침 숲에 사람이 많아 장소를 옮겼다.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었다. 강원은 아이가 신령스럽다고 여겨 다시 데려와 길러 어른으로 만들었다. 처음에 내다 버리려 했기에 이름을 기라고 지었다.

기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으며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놀 때 삼이나 콩 같은 농작물을 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가 심은 삼과 콩은 매우 무성하게 자랐다. 성인이 된 후 그는 밭을 갈고 곡식 심는 것을 좋아했으며 어떤 땅에 무엇을 심는 것이 적당한지 자세히 관찰했다. 농작물을 심기에 적당한 곳에서 심고 수확하니 백성들이 모두 와서 그에게 배웠다.

요(堯)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임명해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하니 백성들이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의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순(舜) 임금은 기를 태(邰) 땅에 봉하고 관직 이름을 따서 후직(后稷)이라 칭했으며, 희(姬)를 성씨로 내렸다. 후직의 흥기는 당요, 우순, 하, 상 시대에 걸쳐 있었으며 이 부족은 모두 매우 좋은 덕망을 갖추고 있었다. 후직이 죽은 후 아들 부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부줄 말년에 하후(夏后)씨의 정치가 쇠락하여 농사 관직을 폐지하고 더 이상 농사에 힘쓰지 않자 불축은 관직을 잃고 융적(戎狄) 지역으로 떠돌아다녔다. 불축이 죽은 후 아들 국(鞠)이 뒤를 이었고, 국이 죽은 후 아들 공류(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류는 비록 융적 지역에 살았으나 여전히 농업 생산에 종사하며 땅에 무엇을 심을지 사방으로 고찰하고 목재를 베어 사용에 공급했다. 이로써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여비가 있고 집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저축이 있게 되었다. 백성의 생활이 모두 그의 덕행 덕분에 좋아졌다. 많은 이들이 그를 고맙게 여겨 귀부해 왔으며 시인들은 노래를 지어 그의 공덕을 찬양했다. 주나라 사업의 흥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공류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이어 빈(豳) 땅에 국도를 세웠다.

경절이 세상을 떠난 후 7대를 거쳐 고공단보(古公亶父)에 이르러 뒤를 이었다. 고공단보는 후직과 공류의 대업을 다시 닦고 덕을 쌓으며 인의를 널리 베푸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다. 융적의 훈육(薰育)족이 침범해 재물을 빼앗으려 하자 고공단보는 자발적으로 재물을 주었다. 나중에 그들이 다시 침범해 토지와 인구를 빼앗으려 하자 백성들이 분노해 맞서 싸우려 했다.

고공은 “백성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그가 모두를 위해 이익을 도모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 융적이 침범해오는 목적은 나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백성이 나를 따르든 그들을 따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백성이 나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게 하여 남의 부자 형제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가솔과 무리를 이끌고 빈 땅을 떠나 기산(岐山) 기슭으로 가서 거주했다. 빈읍의 사람들이 온 성의 노약자를 부축하고 아이를 이끌며 모두 고공을 따라 기산 아래로 왔다. 이웃 나라들도 고공이 이토록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많이들 귀순해 왔다. 이에 고공은 융적의 풍습을 폐지하고 성곽을 쌓으며 집을 짓고 백성들을 읍락으로 나누어 정착하게 했다. 또 각종 관직을 세워 여러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백성들은 노래를 지어 그의 공덕을 찬양했다.

고공의 장남은 태백(太伯)이고 차남은 우중(虞仲)이다. 그의 비(妃) 태강(太康)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을 낳았고 계력은 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 역시 태강처럼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는데 성현(聖賢)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 고공은 “우리 가문이 어느 대에 흥성할 것인데 아마 창의 몸에서 응험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장남 태백과 차남 우중은 부친이 계력에게 뒤를 잇게 하여 창에게 전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함께 남방의 형(荊)과 만(蠻) 땅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현지 풍습에 따라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왕위를 계력에게 양보했다.

고공이 세상을 떠난 후 계력이 뒤를 이으니 이가 공계(公季)다. 공계는 고공의 덕정(德政)을 계속 실행하며 인의를 베푸는 데 힘쓰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순했다.

주조의 창건자 – 문왕과 무왕

문왕 서백의 덕행과 공적

공계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희창(姬昌)이 뒤를 이었다. 희창은 상 왕조 주(紂)왕에 의해 서백후(西伯侯)로 봉해졌기에 서백이라 불렸으니 이분이 곧 주 문왕이다. 그는 구후(九侯), 악후(鄂侯)와 함께 상 왕조의 삼공(三公)에 올랐으나 상 왕조로부터 중시되지는 않았다. 서백은 후직과 공류의 유업을 계승하고 고공과 공류의 법도를 본받아 한결같이 인의를 베풀고 노인을 공경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현사(賢士)를 예우했다. 때로는 정오가 되어도 밥 먹을 겨를 없이 현사들을 접대하니 많은 선비가 그에게 귀부했다. 고죽국(孤竹國)의 명사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서백이 노인을 극진히 공경한다는 말을 듣고 서백에게 귀순했다.

상조 대신 숭후호(崇侯虎)가 주왕에게 “서백이 선행과 미덕을 쌓아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순하니 이는 대왕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참소했다. 이에 주왕은 서백을 유리(羑裏)에 감금했다. 서백에게 귀부했던 현사들이 그를 걱정해 미녀와 준마, 그리고 여러 진귀한 보물들을 구해서 주왕에게 바쳤다. 주왕은 보물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서백을 사면해주고 활과 화살, 도끼를 하사하며 인근 제후들을 정벌할 권한을 주었다. 서백은 귀국한 후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헌납하며 주왕에게 포락(炮烙)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폐지해달라고 요청했고 주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여상(呂尙), 즉 강태공(姜太公)의 보좌 아래 서백은 겉으로는 유흥에 빠져 상나라 주왕에게 순종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더욱 선을 쌓고 덕을 닦으며 백성들을 화목하게 하고 생산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제후가 귀부해왔고 제후들은 분쟁이 생기면 그에게 와서 재결을 청했다.

당시 서백의 덕행을 설명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우(虞)나라 사람과 예(芮)나라 사람 사이에 밭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생겨 결판이 나지 않자 함께 주나라를 찾아왔다. 주나라 국경에 들어서자 밭 가는 사람들이 모두 밭 경계를 서로 양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겸양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나라와 예나라의 분쟁 당사자들은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우리가 다투는 것은 바로 주나라 사람들이 수치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서백을 만나서 무엇 하겠는가, 스스로 치욕을 사는 꼴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각자 돌아가 밭을 양보하고 떠났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서백이야말로 천명을 받은 왕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서백을 왕으로 존숭했다.

서백은 왕이라 칭한 후 은상의 율법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역법을 제정했다. 그는 고공을 태왕(太王)으로, 공계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는데 이는 제왕의 서광이 태왕 때부터 흥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서백은 또한 순종하지 않는 제후와 상나라의 맹방들을 정벌했다. 그는 견융(犬戎), 밀수(密須), 기(耆)나라를 차례로 정벌했다. 은조(殷朝)의 조이(祖伊)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주왕에게 보고했으나 주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천명을 받은 자가 아니냐? 그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후 서백은 숭후호 등을 정벌하고 풍읍(豊邑)을 도읍으로 건설했다. 천도한 이듬해 서백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태자 발(發)이 뒤를 이으니 이가 무왕이다.

서백은 재위에 약 50년 동안 있었다. 그가 유리에 감금되었을 때 《역(易)》의 8괘를 늘려 64괘로 연역했다고 전해진다. 서백이 세상을 떠난 후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무왕의 덕행과 공적

무왕은 즉위한 후 부친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계승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상을 스승으로 삼고 동생인 주공 단(旦), 소공(召公)을 조수로 삼아 내정을 정돈하고 병력을 확충하며 동맹자들과 연락했다. 또한 도읍을 풍수(灃水) 동쪽의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경내)으로 확장하고 상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적극적으로 했다.

* 천명에 순응해 주왕을 토벌

무왕 즉위 9년, 주왕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했다. 무왕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강 한복판에서 백어(白魚) 한 마리가 무왕의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왕은 몸을 굽혀 그것을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을 건넌 후에는 하늘에서 불덩이 하나가 내려와 무왕이 머무는 집 위에 떨어져 쉼 없이 돌더니 결국 붉은 까마귀가 되어 소리를 냈다. 당시 800여 명의 제후들이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맹진(盟津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이라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제후들이 “지금 주왕을 토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니 아직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2년 후 무왕은 주왕이 더욱 어리석고 포학해졌으며 충언하는 비간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태사 자(疵)와 소사 강(強)은 화를 피하기 위해 악기를 안고 주나라로 도망쳐왔다. 이에 무왕은 모든 제후에게 선포했다. “은왕의 죄악이 깊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전차 300대, 용사 3,000명, 갑주를 입은 병사 4만 5,0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주왕을 정벌했다.

무왕 11년 12월 무오일, 군대가 모두 맹진을 건너 상나라를 토벌하려는 각국 제후들과 맹약을 맺고 군대를 검열했다. 맹진은 상조의 수도와 매우 가까웠는데 여기서 군사를 훈련하고 검열한 것은 상나라에 대한 탐색이자 시위였다. 무왕은 〈태서(太誓)〉를 지어 전체 관병에게 선포했다. “지금 은왕 주는 여자의 말만 들어 스스로 하늘과 끊어지고 천, 지, 인의 정도를 파괴하며 친족 형제들을 멀리했다. 또한 조상이 전해준 음악을 버리고 음탕한 소리를 지어 정아(正雅)한 음악을 어지럽히며 여자의 환심을 사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 희발(姬發)은 공경히 하늘의 벌을 집행하려 한다.”

이듬해 2월 갑자일 새벽, 무왕은 일찍 상나라 교외인 목야(牧野)에 도착해 서시(誓師 출정의식)를 거행했다. 무왕은 왼손에 황금 도끼를 들고 오른손에는 목우 꼬리로 장식한 흰 깃발을 들어 지휘했다. 이때의 맹세문이 바로 《상서(尙書)〉 중의 〈목서(牧誓)〉다.

전문은 두 단락으로 나뉜다.

첫 번째 단락은 주왕이 여자(달기)의 말만 듣고 조상과 천지 신명께 제사 지내지 않으며 자기 형제도 임용하지 않고 오히려 사방에서 도망쳐온 죄인들을 중용해 백성들을 포학하게 다룸으로써 하늘의 노여움과 원성을 사 결국 은나라의 멸망을 자초했음을 통렬히 꾸짖는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자신이 하늘의 벌을 몸소 행함을 밝히고 작전 규율을 선포하며 병사들이 용맹하게 적을 섬멸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이다.

서시가 끝나자 무왕은 먼저 온 각 제후 군대와 합류했다. 총 전차 4,000대가 목야에서 진을 쳤다. 주왕은 무왕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역시 70만 병사를 내어 무왕에게 대항했다. 무왕은 사상보(師尙父 강태공)에게 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도전하게 한 후 친히 전차 350대, 보병 2만 6,250명, 용사 3,000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주왕의 군대로 돌진했다. 주왕의 군대는 인원수는 많았으나 아무도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주왕의 포학함을 증오하여 마음속으로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무왕이 공격해오자 많은 주왕의 병사들이 병기를 거꾸로 들고 주왕의 군대를 공격하며 무왕의 길잡이가 되었다. 주왕은 대패했다.

* 무왕이 주왕을 멸하고 상천에 알리다

주왕은 전쟁에서 지자 성안으로 돌아가 녹대(鹿台)에 올라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제후들은 무왕을 따라 상나라 도읍인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로 들어갔다. 상나라 도읍의 백성들은 모두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왕은 군신들에게 명하여 상나라 백성에게 선포하게 했다. “하늘이 너희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감사해하자 무왕도 그들에게 답례의 예의를 표했다. 무왕은 성안으로 들어가 주왕이 분신한 곳을 찾았다. 무왕은 친히 황금 도끼로 주왕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흰 깃발에 매달았다.

다음 날 무왕은 도로를 청소하고 토지 신에게 제사 지낼 사단(社壇)과 주왕의 궁실을 수리하라고 명했다. 무왕은 사단에서 주왕을 멸한 과정을 하늘에 고했다. 군신들이 모두 뒤를 따랐다. 제사 전에 대신 모숙정(毛叔鄭)이 명월의 밤에 떠놓은 이슬물을 받쳐 들고, 위강숙(衛康叔) 봉(封)이 자리를 깔았으며, 소공 석(奭)이 오색 비단을 올리고, 사상보가 제사에 쓸 가축을 끌어왔다.

이일(伊佚)이 축문을 읽으며 기도했다. “은의 마지막 자손 계주(季紂)가 선왕의 밝은 덕을 완전히 망치고 귀신을 업신여기며 제사를 지내지 않고 상읍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그의 죄악이 명백하여 천황상제(天皇上帝)께서 아시게 되었습니다.”

무왕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대어 닿게 하며 말했다. “상천의 명을 받아 은조(殷朝)의 정권을 혁파하고 상천의 성명하신 지명을 받드나이다.” 무왕은 다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댄 후 물러났다. 이로써 주조(周朝)가 정식으로 확립되었다.

상조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무왕은 원래 상왕이 직접 통제하던 영토를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원래 은의 도읍 조가 이북 지역(현 하남성 탕음현 일대)은 빈(豳)이라 하여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부(祿父)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혹은 곽숙이 빈에 거주했다고도 함). 조가 동쪽 지역(현 하남성 정주시 일대)은 위(衛)라 하여 자신의 동생 관숙(管叔) 선(鮮)에게 맡겼고, 조가 서쪽 지역(현 하남성 상채현 일대)은 자신의 동생 채숙(蔡叔) 도(度)에게 맡겼다. 무왕은 또 상보를 영구(營丘)에 봉하고 국호를 제(齊)라 했다. 동생 주공 단은 곡부(曲阜)에 봉하고 국호를 노(魯)라 했다.

무왕은 또 고대의 성왕(聖王)을 기리며 신농씨의 후대를 초(焦)에, 황제의 후대를 축(祝)에, 요 임금의 후대를 기(薊)에, 순 임금의 후대를 진(陳)에, 대우(大禹)의 후대를 기(杞)에 표창하여 봉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 초기에 총 71개의 제후국을 분봉했는데 그중 형제의 나라가 15개, 동성(同姓)의 나라가 40개였다. 나라를 세우고 봉한 목적은 각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주 왕실의 울타리로 삼기 위함이었다. 제후들은 다시 자신의 봉지 안에서 경대부(卿大夫)를 분봉하고 경대부는 다시 자신의 봉지 안에서 사(士)를 분봉하여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국가를 다스렸다.

무왕은 주왕에게 갇혀 있던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고 가두었던 백성들도 석방했다. 또한 녹대 창고의 재물을 나누어주고 거교 창고의 식량을 풀어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을 구제하라고 명했다. 대대로 전해진 보물인 구정(九鼎)과 은조(殷朝)의 보옥(寶玉)들을 전시하게 했으며, 비간의 묘에 흙을 돋워 봉분을 쌓게 했다. 제사를 주관하는 축관에게 명하여 군중에서 전사한 장졸들의 넋을 기리게 했다. 그 후에야 무왕은 군대를 철수하여 귀국했다. 가는 길에 무왕은 각 제후국을 순시하고 제후들을 분봉하며 종묘의 제기를 하사했다.

* 무왕이 천하에 덕을 닦다

무왕은 주의 도읍 호경으로 돌아왔으나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주공 단이 무왕의 거처로 와서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무왕이 말했다. “상천이 은나라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미 60년이 되었다. 교외에는 괴수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해충이 들판에 가득하다. 상천이 은나라를 보살피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오늘날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상천이 세운 은나라는 일찍이 이름난 선비 360명을 임용했는데, 비록 정적이 현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멸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기에 은나라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상천이 주나라에 내리신 국운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무왕은 또 말했다. “나는 주나라의 국운이 변치 않도록 확보할 것이며 천제의 거처와 가깝게 할 것이다. 모든 악인을 찾아내어 은왕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벌할 것이다. 나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우리나라의 안정을 확보할 것이며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공덕이 사방에서 빛나게 할 것이다. 남쪽으로 삼도(三塗)를 바라보고 북쪽으로 악북(嶽北)을 바라보며 황하를 관찰하고 낙수와 이수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이 천제의 거처와 멀지 않아 도읍을 세우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나중에 무왕은 낙읍(洛邑)에서 측량을 진행하여 이곳에 주나라 도읍을 건설할 준비를 했다. 무왕은 또한 전국에 휴식을 명하며 말을 화산(華山) 남쪽에 놓아 기르고 소를 도림(桃林) 구역에 놓아 기르게 했다. 군대에게는 무기를 내려놓고 정돈한 뒤 해산하게 하여 천하에 더 이상 병사를 쓰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얼마 후 무왕이 병이 들었다. 주공은 재계하고 목욕한 뒤 상천에 기도하여 무왕의 재앙을 없애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달라고 빌며 자신의 몸으로 무왕을 대신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무왕의 병이 차츰 나았다. 무왕 시기 주나라는 매우 흥성하는 기운이 있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태자 송(誦)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가 성왕이다.

주공의 섭정

주공은 성이 희(姬)이고 이름은 단(旦)이며 숙단(叔旦)이라고도 불린다. 서백후 희창의 넷째 아들이자 주 무왕의 동복동생이다. 무왕이 죽은 후 성왕이 어렸기에 그가 7년 동안 섭정했다. 섭정 기간에 그는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 관숙, 채숙과 무경의 반란을 평정했다. 나아가 제후들을 분봉하고 동쪽 도읍을 건설했으며 예악(禮樂)을 제정했다. 성왕이 자란 후 그는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주공의 덕행

주공 희단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성실하며 두터웠다. 또한 다재다능하고 총명하여 문왕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희창이 살아 있을 때 희단은 그의 형 희발(姬發 무왕)과 함께 늘 곁에서 정무 처리를 도왔다.

주 무왕이 즉위한 후 희단은 무왕의 조수가 되었다. 이때 희단의 지위는 노신 강태공과 맞먹었으며 무왕 곁에서 가장 유능한 대신으로서 함께 상나라 멸망 계획을 세우고 부친 희창이 다 이루지 못한 대업을 완수했다.

2년 후 희단과 무왕은 각국 제후들과 연합하여 맹진에서 맹약을 맺고 군대를 검열했다. 맹진 회맹 이듬해 무왕은 희단 등의 보좌를 받아 군대를 이끌고 맹진을 건넜으며 목야에서 대중을 모아 서시를 거행했다. 그 맹세문이 바로 《상서》 중의 〈목서〉다. 〈목서〉는 희단이 지은 것이다.

상조가 멸망하고 주조(周朝)가 세워졌다. 상을 멸한 후 남은 은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무왕은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강상은 이들을 모두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주 무왕은 동의하지 않고 다시 대신 소공을 불러 상의했다. 소공은 “죄가 있는 자는 죽이고 죄 없는 자는 남겨두소서”라고 했다. 무왕은 죄가 있는 자라도 경중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죽이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무왕은 다시 희단(姬旦 주공)을 불렀다. 희단의 의견은 은나라 사람들을 원래 살던 곳에 안주하게 하고 원래의 땅을 경작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은나라 사람 중 영향력이 있고 인덕이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자고 했다. 항복한 자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현지에 안착시키며 분화시키는 희단의 정책에 무왕은 깊이 찬성하며 이를 채택했다. 이는 은나라 사람들의 옹호를 얻어냈다.

상을 멸한 후 호경(鎬京)에 돌아온 무왕은 희단과 함께 동방을 통제하기 위해 낙수와 이수 사이의 평원 지대에 신도(新都 새 도읍)를 건설하는 일을 논의했다. 밤낮으로 노심초사한 탓에 무왕은 중병에 걸렸다. 희단은 몹시 초조해하며 선조인 태왕, 계왕, 문왕에게 경건하게 기도했다. 그는 “당신들의 원손(元孫)이 위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하늘에 바칠 아이 하나가 필요하다면 저를 대신 데려가십시오. 저는 인덕이 있고 다재다능합니다. 당신들의 원손은 나만큼 다재다능하지 못해 귀신을 모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왕의 병은 그제야 차츰 나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왕은 결국 병사했다.

무왕은 임종 전에 왕위를 덕과 재능이 있는 희단(姬旦)에게 물려주려 했으며 이 일은 점을 칠 필요도 없이 면전에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희단은 눈물을 그치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공의 공적

무왕이 죽은 후 희단은 무왕의 아들 송을 세워 즉위하게 하니 이가 성왕이다. 성왕은 당시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다. 국가가 갓 세워진 상황에서 재능과 위망을 겸비하고 제때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 복잡한 국면에 대처해야 했으므로 그 책임은 희단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는 당연히 섭정직을 맡았다. 그러나 동방에서 무경 녹보를 감시하도록 봉해졌던 관숙과 채숙은 희단의 섭정에 매우 불만을 품고 질투심이 크게 일어났다.

형제 순서로 따지면 관숙이 셋째이고 희단이 넷째이므로 관숙이 형이고 희단이 동생이다. 왕위를 잇든 섭정을 하든 관숙이 희단보다 우선권이 있었다. 그래서 관숙은 복종하지 않았다. 채숙은 비록 다섯째였지만 관숙을 지지했다. 이에 그들은 희단이 “유자(孺子, 성왕)에게 불리한 일을 하려 하며 성왕을 해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지 3년째 되는 해, 관숙과 채숙은 빈에 봉해졌던 옛 상나라의 영주 무경 녹보를 부추겨 함께 희단에게 반대하며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이에 호응한 것이 동방의 서(徐), 엄(奄), 회이(淮夷) 등 원래 은상과 관계가 좋았던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방국(方國)들이었다. 갓 건국한 주나라로서는 이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었다. 만약 반란을 잠재우지 못하면 주나라 선조들이 수십 년간 경영하여 세운 공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판이었다. 당시 주 왕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 주공의 동정(東征)

희단은 위기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강태공과 소공을 설득하여 내부 단결을 꾀했다. 그는 “내가 곤란한 형세를 피하지 않고 정무를 주관하는 이유는 천하가 주나라를 배반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태왕, 계왕, 문왕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세 왕께서 천하를 위해 노심초사하신 지 오래되어 이제야 성취를 보았습니다. 무왕께서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고 성왕은 이토록 어리니 나는 주 왕조를 완성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얻은 후 주공은 이듬해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 관숙, 채숙, 무경의 반란을 토벌했다. 출정 전에 점을 친 후 주공은 신하들에게 선포했다. “우리 작은 주나라는 상천(上天)의 보살핌 덕분에 흥성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받은 것은 천명이다. 이번 출정을 위해 내가 다시 한번 점을 쳤는데 상천께서 우리를 도우려 하시니 이는 상천이 보여주시는 위엄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천의에 순종하여 주나라가 이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도록 도와야 한다!” 신하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을 하나로 뭉쳐 희단을 따라 동정(東征)에 나섰다. 희단의 말은 사관에 의해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상서》 중의 〈대고(大誥)〉다.

주공의 동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험난한 전쟁이었으며 무왕의 벌주(伐紂) 전쟁의 연장이었다. 이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경과 관숙은 살해되었고 채숙은 유배되었다. 채숙의 아들 호(胡)는 품성이 고상하고 어질어 그 아버지와는 크게 달랐다. 채숙이 죽은 후 주공은 그를 발탁해 노나라의 경사(卿士)로 삼았다. 호가 노나라를 잘 다스리자 희단은 다시 그를 신채(新蔡)에 봉했다. 관숙과 채숙의 반란을 평정한 후 주공은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 반란에 참여했던 50여 개의 작은 나라를 멸망시켰다. 주공 동정의 승리는 주나라의 통치 지역을 동부 해안 지대까지 확장시켰다.

* 주공이 제후들을 다시 분봉하다

정복한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는 전쟁 승리 후의 큰 문제였다. 무경과 엄국(奄國 무경을 지지한 동방의 제후국), 회이(淮夷)의 반란은 중요 지역에 더 이상 옛 씨족 수령을 둘 수 없으며 반드시 주 왕실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구성원에게 분봉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무왕의 분봉과는 이미 차이가 있었다.

주공은 동생 강숙(康叔)을 상나라 통치의 중심지에 봉하고 조가를 도읍으로 하여 위(衛)나라를 세우게 했으며 위후(衛侯)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게 은나라 민족 7족을 나누어주었는데 대부분 어떤 수공예 기술을 가진 씨족들이었다. 강숙 봉의 봉지는 면적이 넓을 뿐만 아니라 8사(師)의 병력을 두어 은나라 사람들의 재반란을 방지하게 했다. 강숙 봉이 통치를 강화할 수 있도록 주공은 차례로 〈강고(康誥)〉, 〈주고(酒誥)〉, 〈재재(梓材)〉 세 편의 문고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주공의 정복 지역에 대한 시정 강령이다. 세 편의 핵심은 ‘경천보민(敬天保民)’과 ‘명덕신벌(明德愼罰)’로, 은나라 사람들이 전란을 거친 후 안정되어 정상적인 농업 생산과 상업 활동에 종사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강숙 봉이 봉지로 부임할 때 주공은 특별히 당부했다.

“소인은 다스리기 어려우니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하며 안일함과 즐거움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은나라 사람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성의 원망은 큰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순종하지 않는 자를 순종하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를 노력하게 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너의 직무는 바로 주나라를 빛내고 은나라 사람들을 순종하는 백성으로 안정시키는 것이다.”

만약 은나라 사람들이 반항하면 단호하게 진압하라고 주공은 강숙 봉에게 일렀다. 그는 “만약 집권자가 죄인에게 징계를 가하지 않으면 신이 인간에게 준 법이 어지러워지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문왕 때 제정된 형벌에 따라 관대하게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형벌을 집행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사람에게 작은 죄가 있을 때 우연한 과실이 아니라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그 죄가 비록 작아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 큰 죄가 있을지라도 만약 일시적인 과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잘못을 고집하지 않고 끝까지 완고하지 않으며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숨김이 없다면 그 죄가 비록 커도 죽이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공은 또 자신의 장남 백금(伯禽)을 노(魯) 지역(현 산동성 곡부시)에 봉하여 노나라를 세웠다. 백금에게 은나라 민족 6족을 영민(領民)으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떤 전문 기술을 가진 수공업 씨족들이었다.

강태공은 원래 제후(齊侯)로 봉해져 도읍을 영구(현 산동성 임치 북쪽)에 두었는데, 이번에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봉지가 매우 넓어져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하(河)에 이르며 남으로는 목릉(穆陵 기산 산맥의 고개)에 이르고 북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제나라를 세웠다.

주공의 동성인 소공(召公)은 연(燕)에 봉해졌다. 소공의 장남은 반란 평정 후에야 봉지로 가서 계(薊 지금의 북경 일대)를 도읍으로 삼았다. 연나라는 주 왕조 동북방의 병풍이었다. 이 밖에 당숙(唐叔, 성왕의 동생)은 옛 하나라 소재지(현 산동성 태원시 남쪽)에 봉해져 진(晉)나라를 세웠다. 주왕의 형 미자(微子)는 주왕에게 반대했고 무경의 반란에도 반대했기에 역시 분봉을 받아 상구(현 하남성 상구시)에 송(宋)나라를 세웠다.

희단은 또한 크고 작은 동성국과 이성국을 분봉했다. 기록에 따르면 희단은 “71개 나라를 세웠는데 희씨 성이 독점한 것이 53명이었다”라고 한다. 희단은 주나라의 동성 형제와 공신, 귀족들을 전국 각지의 중요한 곳에 배치했으니 이로써 주 왕실은 안전한 울타리 속에 있게 되었다. 또한 각 제후국은 국내에서 토지의 일부를 대부에게 하사했는데 이를 채읍(采邑)이라 했다.

* 주공이 국가 체제를 확립

주공은 거대한 국가 기구도 설립했다. 중앙에는 태사(太師), 태보(太保)를 두어 주왕을 보좌해 천하를 통치하게 했다. 삼사대부(三事大夫)로는 상백(常伯), 상임(常任), 준인(准人)을 두어 각각 지방의 민사를 관리하고 정부 관리를 선발하며 사법 심판 등을 담당하게 했다. 육대(六大)로는 대사(大史), 대축(大祝), 대복(大卜), 대재(大宰), 대종(大宗), 태대(太大)를 두어 각각 행정 사무와 종교 제사 활동을 분담하게 했다. 또한 사도(司徒 농지 경작 관리), 사공(司空 관직 업무 관리), 사마(司馬 군사 군부 관리), 사구(司寇 사법 관리), 호신(虎臣 궁정 호위 관리), 선부(膳夫 출납 삼명三命 관리), 취마(趣馬 천자의 말 관리) 등을 두었다. 이들을 통칭해 ‘내복직관(內服職官)’이라 하며 모두 조정 사무를 전담했다.

이 밖에 제후국 사무를 처리하는 후(侯), 전(甸), 남(男) 등 많은 ‘외복직관(外服職官)’도 있었다. 제후국 안과 경, 대부의 채읍(採邑) 안에도 정치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동성 제후는 주 천자와 종속적인 정치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엄격한 종법(宗法) 관계도 유지했다. 종법 관계의 중심은 적장자의 상속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적장자의 상속권은 뚜렷한 정치적 성격을 띠었는데 재산을 상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도 상속할 수 있었다.

주나라는 동성불혼(同姓不婚) 제도를 시행했고 이성(異姓) 간의 결혼은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로써 주 천자와 이성 제후 사이에는 통혼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주 천자는 동성 제후를 숙백(叔伯)이라 부르고 이성 제후를 생구(甥舅)라 불렀다. 이를 통해 통치 기반을 확대했다. 분봉제와 종법 제도는 주공 이전에도 있었으나 주공이 집권하고 성왕을 보좌하는 동안 이 제도들은 더욱 완비되었다. 주공은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거대한 국가 기구와 군대를 바탕으로 은나라 사람을 상대하는 정책을 관철했다. 이 방식은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10년의 노력 끝에 성왕이 친정할 무렵에는 정령(政令)이 각 봉국의 관리들에게까지 하달될 수 있었다. 주나라의 통치는 마침내 공고해졌다.

* 주공이 신도(新都)를 건설하다

주나라의 도읍은 풍, 호(지금의 서안 부근)에 있어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주공은 동정(東征)에서 돌아온 후 중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동쪽 도읍인 낙읍(洛邑 지금의 낙양시 서쪽)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주공 섭정 5년, 정식으로 낙읍 건설에 착수했다. 그해 5월 희단은 낙읍으로 와서 신읍의 계획을 전반적으로 관찰하고 다시 점을 쳤다. 1년 남짓한 시간이 걸려 완공되었다. 내성은 사방 1,720장(丈)이고 외성은 사방 70리였다. 성안의 궁전은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신도는 신읍(新邑)이라 불렸고 낙읍이라고도 했다.

* 예악 제도 제정

낙읍을 건설할 때 희단은 일련의 예악 제도도 확립했다. 이른바 예(禮)란 등급과 명분을 나누는 전장 제도를 말한다. 예는 매우 복잡하여 귀족들의 의식주와 장례, 혼례 등 모든 행위 규칙을 거의 다 포함했다. 이를 요약하면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길례(吉禮)로 신명에게 제사 지낼 때 쓴다.

둘째는 흉례(凶禮)로 장례와 기근 등에 쓴다.

셋째는 빈례(賓禮)로 조빙(朝聘)과 접대에 쓴다.

넷째는 군례(軍禮)로 군사를 일으킬 때 쓴다.

다섯째는 가례(嘉禮)로 연회와 혼례, 성인식 등에 쓴다.

이른바 악(樂)이란 음악을 말한다. 이는 당시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며 어떤 등급이 어떤 경우에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가 매우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동도 낙읍이 완공되었을 때 주공의 예악도 완성되었다. 이때 성왕이 이미 자랐으므로 희단은 정권을 성왕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보좌하는 위치로 물러났다. 주 성왕이 낙읍으로 천도한 후 희단은 천하 제후들을 불러 모아 성대한 경축 행사를 열었다. 신도에서 정식으로 천하 제후들을 책봉하고 각종 전장 제도, 즉 이른바 ‘제례작악(制禮作樂)’을 선포했다.

* 주공이 성왕을 권계

주 성왕이 집권한 후 주공은 성왕이 젊어 안일함을 탐할까 걱정하여 〈무일(無逸)〉이라는 글을 지어 성왕을 권계했다. 근면하고 고생하는 것의 이로움을 알아야 하며 한결같이 향락만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상나라의 여러 현능한 왕들과 주 문왕을 본보기로 삼아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을 당부했다. 반대로 백성의 고통에 관심이 없고 사치와 향락에만 빠지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옛날 은왕 중종(中宗)은 재위 시에 일을 처리함에 엄숙하고 신중했으며 행동함에 앞뒤를 살피고 늘 자신을 반성하며 함부로 향락에 빠져 정사를 폐하는 일이 없었다. 조갑(祖甲)은 오랫동안 평민으로 지내 민간의 고통을 알았기에 즉위 후 백성을 아끼고 은혜를 베풀며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 후 즉위한 국왕들은 태어나서 향락만을 누릴 줄 알았으며 하루 종일 술과 여자에 빠져 농사의 고달픔을 모르고 소민(小民)의 노동을 중시하지 않았기에 국력이 점점 쇠퇴했다. 그는 성왕에게 문왕처럼 현사(賢士)를 예우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유능한 군주가 되라고 간곡히 가르쳤다.

주공은 주 왕조의 사업을 위해 온 마음과 힘을 다했다. 만년에 그는 자신의 봉지로 돌아갔다. 임종 전에 그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 땅에 묻어 성왕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게 하라”고 유언했다.

주공이 죽자 성왕은 가장 성대한 천자의 예절로 희단을 필원(畢原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그곳에는 문왕릉과 무왕릉이 있었다. 희단을 문왕, 무왕과 함께 장사지낸 것은 희단의 공로가 커서 문왕과 무왕의 못다 한 사업을 완수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성강(成康)의 성세(盛世)

성왕에 대한 주공의 가르침과 보좌는 효과가 있었다. 성왕은 집권 후 주공이 규정한 전장 제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중시했으며 중원과 해안 지역에서 무역 활동을 벌여 상업을 발달시켰다. 성왕이 37년간 집권하고 뒤를 이은 강왕(康王)이 26년간 집권하며 ‘성강의 치(成康之治)’라 불리는 번영의 장면이 나타났다.

성왕은 임종 때 태자 소(釗)가 국사를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소공, 필공(畢公)에게 제후들을 이끌고 태자의 등극을 보좌하라고 명했다. 성왕이 세상을 떠난 후 소공과 필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태자 소를 데리고 선왕의 종묘를 참배했다.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 왕업을 창건할 때의 어려움을 반복해서 태자에게 훈계하며 반드시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탐욕을 경계하며 국정에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고명(顧命)〉을 지어 대신들에게 태자 소를 보좌하고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태자 소가 마침내 등극하니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은 즉위하여 천하 제후들에게 통고하며 그들에게 문왕과 무왕의 업적을 선포하고 반복해서 설명하니 〈강소(康詔)〉를 지었다. 그리하여 성왕과 강왕 즈음에는 천하가 평안하여 모든 형벌이 한쪽으로 치워진 채 4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 강왕은 필공에게 명하여 책서(策書)를 짓게 하고 백성들을 마을별로 나누어 살게 했으며 주나라 도읍 교외의 경계를 정해 도읍의 방어벽으로 삼게 했다. 이를 위해 〈필명(畢命)〉을 지어 필공이 명을 받은 이 일을 기록했다.

이때 천하는 안정되고 정치는 맑았으며 백성은 평안히 살며 즐겁게 일했다. 수공업, 농업, 상업 등 각 방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서주는 이때 성세의 시기에 처해 있었으니 가히 서주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었다.

서주의 발전

* 일대웅주(一代雄主) 목왕(穆王)

강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뒤를 이었는데 소왕 재위 시에 왕도(王道)가 쇠락했다. 소왕은 남방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현지인들이 그를 증오하여 아교로 붙인 배를 내어주었고 결국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제후들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은 것은 이 일을 기휘(忌諱)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소왕의 아들 만(滿)을 세우니 이가 목왕이다. 목왕이 즉위했을 때 이미 50세였다. 국가 정치가 쇠미해지자 목왕은 문왕과 무왕의 덕정이 훼손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백경(伯冏)에게 명하여 태복(太僕)을 거듭 권계하고 국가의 정사를 잘 돌보게 하니 〈경명(冏命)〉을 지었다. 이로써 천하가 다시 안정될 수 있었다.

그 후 목왕은 서쪽으로 견융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이인(夷人)들을 섭수하며 변방 민족의 침범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를 펼쳐 약탈을 저지했다. 목왕은 또한 동평(東平) 서언왕(徐偃王)이 이끄는 서이(徐夷) 제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토벌했으며 도산(塗山)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았다.

주 왕조의 위망을 회복하기 위해 목왕은 태복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태어중복(太禦衆仆)의 우두머리로 삼아 왕조의 중추 관리를 강화했다. 그는 천하에 선정을 베풀었다. 제후 중에 화목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보후(甫侯 보나라 제후)가 목왕에게 보고했고 이에 형법을 제정하여 형벌을 가볍게 했다. 묵(墨), 의(劓), 빈(臏), 궁(宮), 대벽(大辟) 등 다섯 가지 형벌의 규정에 따라 판결했다. 만약 오형(五刑)이 적합하지 않으면 돈으로 죄를 사면하는 다섯 가지 징벌에 따라 판결했다. 만약 오형을 쓰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과실에 따라 판결했다. 오형의 조문 규정은 묵형류 1,000조, 의형류 1,000조, 빈형류 500조, 궁형류 300조, 대벽류 200조였다. 이 형법은 보후가 제안한 것이기에 〈보형(甫刑)〉이라 불렀다.

목왕은 재위 5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서주는 여전히 강력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서주에는 다시 이런 성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목왕의 아들 공왕(共王) 예후(繄扈)가 뒤를 이었다. 공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의왕(懿王) 간(囏)이 등극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