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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화하 역사 진면모 (6): 천하 조종(朝宗) 서주(西周) 중(中)

(기원전 1066년 –770년)

심연(心緣)

【정견망】

성강(成康)의 성세(盛世)

성왕에 대한 주공의 가르침과 보좌는 효과가 있었다. 성왕은 집권 후 주공이 규정한 전장 제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중시했으며 중원과 해안 지역에서 무역 활동을 벌여 상업을 발달시켰다. 성왕이 37년간 집권하고 뒤를 이은 강왕(康王)이 26년간 집권하며 ‘성강의 치(成康之治)’라 불리는 번영의 장면이 나타났다.

성왕은 임종 때 태자 소(釗)가 국사를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소공, 필공(畢公)에게 제후들을 이끌고 태자의 등극을 보좌하라고 명했다. 성왕이 세상을 떠난 후 소공과 필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태자 소를 데리고 선왕의 종묘를 참배했다.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 왕업을 창건할 때의 어려움을 반복해서 태자에게 훈계하며 반드시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탐욕을 경계하며 국정에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이때 〈고명(顧命)〉을 지어 대신들에게 태자 소를 보좌하고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태자 소가 마침내 등극하니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은 즉위하여 천하 제후들에게 통고하며 그들에게 문왕과 무왕의 업적을 선포하고 반복해서 설명하니 〈강소(康詔)〉를 지었다. 그리하여 성왕과 강왕 즈음에는 천하가 평안하여 모든 형벌이 한쪽으로 치워진 채 4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 강왕은 필공에게 명하여 책서(策書)를 짓게 하고 백성들을 마을별로 나누어 살게 했으며 주나라 도읍 교외의 경계를 정해 도읍의 방어벽으로 삼게 했다. 이를 위해 〈필명(畢命)〉을 지어 필공이 명을 받은 이 일을 기록했다.

이때 천하는 안정되고 정치는 맑았으며 백성은 평안히 살며 즐겁게 일했다. 수공업, 농업, 상업 등 각 방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서주는 이때 성세의 시기에 처해 있었으니 가히 서주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었다.

서주의 발전

* 일대웅주(一代雄主) 목왕(穆王)

강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뒤를 이었는데 소왕 재위 시에 왕도(王道)가 쇠락했다. 소왕은 남방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현지인들이 그를 증오하여 아교로 붙인 배를 내어주었고 결국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제후들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은 것은 이 일을 기휘(忌諱)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소왕의 아들 만(滿)을 세우니 이가 목왕이다. 목왕이 즉위했을 때 이미 50세였다. 국가 정치가 쇠미해지자 목왕은 문왕과 무왕의 덕정이 훼손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백경(伯冏)에게 명하여 태복(太僕)을 거듭 권계하고 국가의 정사를 잘 돌보게 하니 〈경명(冏命)〉을 지었다. 이로써 천하가 다시 안정될 수 있었다.

그 후 목왕은 서쪽으로 견융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이인(夷人)들을 섭수하며 변방 민족의 침범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를 펼쳐 약탈을 저지했다. 목왕은 또한 동평(東平) 서언왕(徐偃王)이 이끄는 서이(徐夷) 제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토벌했으며 도산(塗山)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았다.

주 왕조의 위망을 회복하기 위해 목왕은 태복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태어중복(太禦衆仆)의 우두머리로 삼아 왕조의 중추 관리를 강화했다. 그는 천하에 선정을 베풀었다. 제후 중에 화목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보후(甫侯 보나라 제후)가 목왕에게 보고했고 이에 형법을 제정하여 형벌을 가볍게 했다. 묵(墨), 의(劓), 빈(臏), 궁(宮), 대벽(大辟) 등 다섯 가지 형벌의 규정에 따라 판결했다. 만약 오형(五刑)이 적합하지 않으면 돈으로 죄를 사면하는 다섯 가지 징벌에 따라 판결했다. 만약 오형을 쓰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과실에 따라 판결했다. 오형의 조문 규정은 묵형류 1,000조, 의형류 1,000조, 빈형류 500조, 궁형류 300조, 대벽류 200조였다. 이 형법은 보후가 제안한 것이기에 〈보형(甫刑)〉이라 불렀다.

목왕은 재위 5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서주는 여전히 강력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서주에는 다시 이런 성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목왕의 아들 공왕(共王) 예후(繄扈)가 뒤를 이었다. 공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의왕(懿王) 간(囏)이 등극했다.

서주의 쇠락

의왕 재위 시에 주 왕실은 차츰 쇠락했다. 의왕이 죽은 후 공왕의 동생 벽방(辟方)이 등극하니 이가 효왕(孝王)이다. 효왕이 서거하자 제후들이 다시 의왕의 태자 섭(燮)을 옹립하니 이가 이왕(夷王)이다. 이왕이 서거한 후 아들 여왕(厲王) 호(胡)가 뒤를 이었다.

여왕의 폭정이 나라를 해치다

여왕은 재물을 탐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영이공(榮夷公)을 가까이했다. 대부 예양부(芮良夫)가 여왕에게 간언했다. “왕실이 아마 쇠미해질 것 같습니다! 저 영공은 오로지 재물과 이익을 독점하기만 좋아할 뿐 큰 화가 닥칠 줄은 모릅니다. 재물과 이익은 온갖 사물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천지가 자연적으로 소유한 것인데, 그것을 독점하려 한다면 그 해로움이 큽니다. 천지간의 만물은 누구나 한 몫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독점하면 많은 사람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데 대난을 방비할 줄도 모릅니다. 영공이 재리로써 대왕을 유혹하니 대왕께서 어찌 오래가겠습니까?

사람들의 군주 된 자는 마땅히 각종 재물을 개발하여 위아래 군신과 백성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신, 사람, 만물이 모두 마땅히 얻어야 할 몫을 얻게 해야 하며,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매일 조심하고 경계하며 원망을 살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송시(頌詩)》에 ‘우리 조상 후직께서는 문덕(文德)이 있어 공이 높기가 천지와 견줄 만하네. 오곡을 심어 만민을 기르니 당신을 본받지 않는 이 없네’라고 했고,

〈대아(大雅)〉에는 ‘은택을 널리 베풀어 주(周)의 업을 열었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과 이익을 널리 베풀고 화난이 닥칠 것을 경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선왕들께서 지금까지 주나라의 사업을 세워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도리어 재물과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배우려 하시니 이 어찌 되겠습니까? 평민이 재리를 독점해도 도둑이라 불리는데 대왕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면 대왕께 귀복할 자가 적어질 것입니다. 영공이 중용된다면 주나라는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왕은 간언을 듣지 않고 여전히 영공을 경사로 임용하여 국사를 관장하게 했다.

* 하늘의 경고

여왕 21년부터 26년(기원전 858-853년)까지 서주의 서북 지역에 6년 연속 큰 가뭄이 들었다. 《시경》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넓고 넓은 하늘이여,
그 덕이 훌륭하지 못하구나.
굶주림의 재앙을 내려
사방의 나라를 베고 치는구나.”

“백성이 어질지 못하여 한편으로 서로 원망하네.”

오랜 시간 지속된 큰 가뭄에 여왕의 부패하고 잔폭함이 더해져 결국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

가뭄이 끝난 후 백성들은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인 여왕은 도리어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을 더욱 심하게 했다. 그는 재해 후에 더욱 ‘전리(專利 공유지에서 나오는 이익을 왕실이 독점하는 정책)’를 시행했다. 즉 원래 공유하던 산림과 하천을 자기 소유로 독점하고 백성들이 땔감을 구하거나 어로와 사냥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여왕의 행위는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수법이 주 왕실의 ‘왕인(王人)’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라 여겼다. 한편 몇 년간 가뭄의 고통을 겪은 후 어로와 사냥, 땔감의 원천까지 끊기자 백성들의 원망이 깊어지고 재력은 고갈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왕의 포학하고 도가 없으며 방종하고 교만한 행태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과실을 공개적으로 논란했다.

그러자 여왕은 사회 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여왕은 위(衛)나라에서 무당을 불러와 무술의 힘을 빌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정탐하게 했다.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게 하여 바로 죽였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호경 성안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후들도 더 이상 와서 조회하지 않았다. 여왕 34년, 여왕이 더욱 가혹해지자 나라 사람 중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도 눈짓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여왕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소공에게 말했다. “내가 사람들의 비난을 없앨 수 있었소. 그들이 모두 감히 말을 못 하는구려.”

소공은 여왕이 이토록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을 보고 간언했다.

“이것은 그저 그들의 말을 막아버린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물줄기를 막는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물이 많이 고였다가 한꺼번에 터지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백성이 말을 못 하게 하는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치수(治水)하는 사람은 물길을 터서 물이 잘 통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도 마땅히 그들을 풀어주어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백성이 입으로 말을 내뱉어야 정사의 어느 부분이 좋고 나쁜지를 거기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은 시행하고 나쁜 것은 방비하는 이 이치는 대지가 재물과 기용(器用), 의복과 양식을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마음속으로 잘 고려한 뒤에 실행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그러나 여왕은 권고를 전혀 듣지 않고 계속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천재(天災)와 인화(人禍)의 이중적인 고통 속에 여왕 37년(전 842년), 소영주 공백화(共伯和)의 지도 아래 대규모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일세의 폭군이었던 여왕은 국인(國人)들의 폭동에 겁을 집어먹고 체(彘)(현 산동성 곽현)로 도망쳤으며 이로써 그의 잔폭한 통치는 끝이 났다. 여왕은 타지에서 14년을 살다가 죽었다. 이번 폭동은 주 여왕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서주 왕조의 통치 기반을 뒤흔들어놓았다.

* 공화(共和)의 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여왕의 태자 정(靜)은 소공의 집에 숨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알고 소공의 집을 포위했다. 소공이 말했다. “일전에 내가 여러 번 대왕께 간언했으나 대왕께서 듣지 않으셔서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 만약 지금 태자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대왕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대왕을 원망한다고 생각하시지 않겠는가? 군주를 모시는 사람은 위험을 당해도 원망해서는 안 되며, 원망하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자를 모시는 일에 있어서랴?” 그리하여 자기 아들을 태자 대신 내주어 태자가 살해당하는 것을 면하게 했다.

이후 소공과 주공(周公)이 함께 조정을 다스렸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주소공화(周召共和)’라 한다. 공화 원년인 서기전 841년부터 중국 역사는 명확하고 연속적인 기년(紀年)을 갖게 되었다. 공화 14년(전 828), 여왕이 죽고 태자 정이 소공의 집에서 성인이 되자 소공과 주공 두 보좌 대신은 함께 그를 주왕으로 받들어 세우니 이가 선왕(宣王)이다.

* 선왕 중흥과 선왕의 죽음

선왕이 등극한 후 두 대신이 계속 보좌하며 정사를 닦고 문왕, 무왕, 성왕, 강왕의 유풍을 본받았다. 역사는 이를 ‘선왕 중흥’이라 부른다.

또한 황토 고원 위의 여러 적(翟) 부락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선왕은 태원(太原) 깊숙이 군대를 보내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39년(기원전 789), 선왕은 천무(千畝)에서 다시 한 차례 전쟁을 치렀는데 그 군대가 강융(姜戎)에게 대패하면서 서주 왕조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는 또한 서주가 강 너머 지역에 대해 점차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동요 한 구절을 편벽되게 믿은 탓에 선왕은 충직한 간언을 듣지 않고 무고한 상대부 두백(杜伯)을 살해했다. 두백은 죽을 때 “죽어서 만약 앎이 있다면 3년 안에 반드시 왕께서 알게 하리라”라고 말했다.

3년 후 선왕은 제후들을 교외에 모아 유람하며 사냥을 했다. 정오 무렵 선왕이 사냥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길 왼편에서 두백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는 백마를 타고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썼으며 붉은 활과 화살을 들고 선왕을 겨누어 쏘았는데 화살이 선왕의 심장을 정통으로 맞혔다. 선왕은 비명을 지르며 말 아래로 떨어져 등뼈가 부러져 죽었다.

부인을 총애해 서주를 망친 유왕(幽王)

* 하늘의 경고와 망국의 예언

주 선왕 말년(대략 기원전 803년), 서주에 다시 큰 가뭄이 발생했다. 이 가뭄은 지속 시간이 훨씬 길었다. 가뭄은 강과 연못을 완전히 말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숲과 풀과 나무도 모두 말라 죽게 했다. 농경지와 장원은 모두 황야로 변했다. 식량이 없었고 인축의 식수마저 곤란해졌다. 가뭄이 가져온 풍경은 서민들이 도망치고 읍락이 비어 있으며 마을이 쓸쓸하고 전원이 황폐해진 쇠락한 모습이었다.

계속되는 심각한 가뭄 앞에서 주 선왕은 선조들의 기양(祈禳)을 이었다. 《춘추번로(春秋繁露)·교사(郊祀)》에 기록되기를 “왕이 비가 오지 않으매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며 몸을 정돈하고 수행하여 이를 조금이라도 없애고자 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선왕에게는 상탕(商湯)의 덕행이 없었기에 그가 제사를 지내든 ‘몸을 정돈하고 수행’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가뭄은 유왕이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지속된 가뭄은 이미 서주를 위난의 지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선왕 46년(기원전 782), 선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궁생(宮湦)이 뒤를 이으니 곧 유왕이다. 유왕 2년, 서주 도읍과 인근 경수, 위수, 낙수 세 강의 지역에 모두 지진이 발생했다. 대신 백양보(伯陽甫)가 예언했다. “주나라가 곧 망하겠구나. 천지간의 음양의 기운은 질서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만약 질서가 어지러워진다면 그것 또한 누군가 어지럽힌 것이다. 양기가 아래에 가라앉아 나오지 못하고 음기가 그것을 억눌러 상승하지 못하게 하니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삼천(三川) 지역에 지진이 발생한 것은 양기가 원래의 위치를 떠나 음기 아래에 눌려 있기 때문이다. 양기가 위에 있지 못하고 음기 아래에 처하면 수원은 반드시 막히게 되고 수원이 막히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수토(水土)의 기운이 통해야 백성이 생산에 종사할 수 있다. 땅이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백성은 재용이 부족해질 것인데 만약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옛날 이수와 낙수가 마르니 하왕조가 망했고 황하가 고갈되니 상왕조가 망했다. 지금 주의 기수도 하, 상 두 왕조의 말년과 같으니 하천 근원의 물 흐름이 또 막히고 수원이 막히면 하천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다. 한 나라의 생존은 반드시 산천에 의지해야 하는데 높은 산이 무너지고 하천이 고갈되는 것은 망국의 징조다. 하천이 마르면 산은 반드시 무너진다. 이렇게 보면 나라의 멸망은 10년을 넘지 않을 것인데 10은 바로 숫자의 한 순환이기 때문이다. 상천이 버리려는 것은 10년을 넘기지 않는다.”

그해에 과연 삼천이 마르고 기산이 무너졌다.

이후 서주에는 몇 차례 이상 기후와 자연 현상이 나타났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따르면 “유왕 3년 겨울, 큰 천둥과 번개가 쳤다. 4년 여름 6월, 서리가 내렸다”라고 한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실제로는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추운 이상 기후였다. 겨울이 따뜻하면 해충이 많고 여름이 추우면 농작물이 상한다. 이 모든 것은 서주가 멸망할 때가 멀지 않았음을 예시하는 듯했다.

* 총애하는 부인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다

유왕 3년, 그는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총비 포사(褒姒)의 아들 백복(伯服)을 세우려 했다. 태자의 어머니는 신후(申侯)의 딸로 유왕의 왕후였다. 유왕은 태자를 폐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신후도 폐하여 포사를 왕후로 삼으려 했다.

주 태사 백양보가 역사 전적을 읽으며 한탄했다. “주나라가 곧 망하겠구나.”

전설에 따르면 하후씨가 쇠락했을 때 신룡(神龍) 두 마리가 하제(夏帝)의 궁뜰에 내려앉아 말하기를 “우리는 포나라의 두 선군(先君)이다”라고 했다. 하제는 그것들을 죽여야 할지 쫓아내야 할지 아니면 머물게 해야 할지 몰라 점을 쳤는데 결과가 불길했다. 다시 그들의 타액을 갈무리해두는 것에 대해 점을 치니 그제야 길했다. 이에 폐백과 제물을 차리고 간책을 써서 두 용에게 기도하니 두 용은 사라지고 타액만 남았다.

하왕은 나무함에 용의 타액을 담아 갈무리했다. 하왕조가 멸망한 후 이 함은 은왕조로 전해졌고 은왕조가 멸망한 후 다시 주왕조로 전해졌다. 3대를 이어오며 아무도 감히 함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주 여왕 말년에 함을 열었다. 용의 타액이 전당 위에 흘렀는데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주 여왕이 여인들에게 명하여 벌거벗은 채 타액을 향해 크게 소리 지르게 했다. 그러자 타액이 검은 도마뱀으로 변해 여왕의 후궁으로 기어 들어갔다. 후궁에 6, 7세 된 어린 궁녀가 하나 있었는데 막 젖니를 갈 무렵 그 도마뱀과 마주쳤고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뜻밖에 임신하게 되었다.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자 그녀는 매우 겁이 나 그 아이를 내다 버렸다.

주 선왕 시대에 어린 소녀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산뽕나무 활과 기나무 화살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할 화근이라네.”

山桑弓,箕木袋,
滅亡周國的禍害。

선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마침 산뽕나무 활과 기나무 화살통을 파는 부부를 발견하여 사람을 보내 그들을 잡아 죽이려 했다. 부부는 큰길로 도망치다가 예전에 어린 궁녀가 버린 갓난아이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우는 소리를 듣고 가련히 여겨 아이를 거두었다. 부부는 계속 도망쳐 포(褒)나라로 갔다. 나중에 포나라 사람이 주나라에 죄를 지어 이 아이를 바쳐 죄를 속하려 했다. 원래 버려졌던 아이가 포나라에서 바쳐졌기에 이름을 포사(褒姒)라 했다.

주 유왕 3년, 유왕이 후궁에 갔다가 이 여자를 보고 매우 사랑하게 되어 아들 백복을 낳았다. 결국 신후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태사 백양보가 한탄하며 말했다. “화란이 이미 조성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포사는 웃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왕은 그녀를 웃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포사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주 유왕은 봉화와 북을 설치하여 적이 침범하면 봉화를 올리게 했다. 유왕은 포사를 웃기기 위해 봉화를 올렸고 제후들은 봉화를 보고 모두 달려왔다. 도착해보니 적은 보이지 않았고 포사는 이를 보고 과연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유왕은 매우 기뻐하여 이후 여러 번 봉화를 올렸다. 나중에 제후들은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어 점차 오지 않았다.

주 유왕은 또한 아첨을 잘하고 이익을 탐하는 괵석보(虢石父)를 등용해 정사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유왕이 신후와 태자를 폐하자 신후의 아버지인 신후(申侯)가 매우 분노하여 증(繒)나라, 견융과 연합해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은 봉화를 올려 제후의 구원병을 불렀으나 제후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신후는 유왕을 여산(驪山) 기슭에서 죽이고 포사를 포로로 잡았으며 주(周)의 보물을 남김없이 약탈해 떠났다.

나중에 제후들이 공동으로 유왕의 원래 태자 의구(宜臼)를 옹립하니 이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그가 주나라의 제사를 계승했다. 평왕이 즉위했을 때 관중(關中) 지역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고 견융이 수시로 와서 괴롭혔다. 평왕은 도읍을 낙읍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으니 역사는 이를 ‘평왕동천(平王東遷)’이라 하고 동주(東周)가 시작되었다.

서주 왕조는 기원전 11세기 중반 무왕이 상나라를 이긴 때부터 기원전 770년 주 유왕이 여산 아래서 죽기까지 전후로 총 12명의 왕을 거치며 약 280여 년간 지속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