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화하 역사 진면모 (6): 천하 조종(朝宗) 서주(西周) 하(下)

(기원전 1066년 –770년)

심연(心緣)

【정견망】

서주의 문화

‘오행’과 《주역》

서주 말년에 이미 ‘오행(五行)’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상서·홍범》은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이 다섯 가지 물질을 ‘오행’이라 칭하고 오행의 각 요소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했다. “

수(水)는 윤하(潤下)라 하고, 화(火)는 염상(炎上)이라 하며, 목(木)은 곡직(曲直)이라 하고, 금(金)은 종혁(從革)이라 하며, 토(土)는 가색(稼牆)이라 한다. 윤하는 짠맛을 내고, 염상은 쓴맛을 내며, 곡직은 신맛을 내고, 종혁은 매운맛을 내며, 가색은 단맛을 낸다”라고 여겼다.

“수는 윤하라 함”은 물이 적셔주고 아래로 향하는 특성이 있음을 말하고,
“화는 염상이라 함”은 불이 열을 내고 위로 향하는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목은 곡직이라 함”은 나무가 성장하고 뻗어 나가는 특성이 있음을 말하고,
“금은 종혁이라 함”은 금속이 숙살(肅殺)하고 변혁하는 특성이 있음을,
“토는 가색이라 함”은 흙이 곡식을 심고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서주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주 간의 각종 사물을 오행에 각각 귀속시켰다.

또한 유가 경전 오경의 으뜸인 《주역(周易)》이 서주 시기에 나타났다. 그 내용은 천문, 지리, 기상, 역법,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의학, 무술, 연단(煉丹), 양생,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교육, 민속, 심리, 윤리, 군사, 종교, 복서(卜筮), 풍수 등 수많은 방면을 포괄한다. 《주역》은 팔괘로 구성되어 있으며 괘마다 괘사(卦辭)가 있고 효마다 효사(爻辭)가 있다. 괘사와 효사는 경문(經文)으로 《역경(易經)》이라 부른다. 후대 사람들이 괘사와 효사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며 나아가 발전시킨 문장을 전문(傳文)이라 하며 《역전(易傳)》이라 부른다. 현존하는 《주역》 10권은 《역경》과 《역전》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주본기》에 따르면 서백(西伯 문왕)이 유리에 갇혔을 때 “아마 《역》의 팔괘를 늘려 64괘로 만든 듯하다”라고 한다. 《사기정의》의 해석에 따르면 “《건착도》에서 이르길 황책(黃策 괘)을 드리운 것은 복희이고, 괘를 더하고 덕을 풀어낸 것은 문왕이며, 천명을 완성한 이는 공자”라고 했다. 《역정의》에서는 “복희가 괘를 만들고 문왕이 괘사를 지었으며 주공이 효사를 짓고 공자가 십익(十翼)을 지었다”고 하니, 문왕이 괘를 늘렸다는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사마천은 일찍이 “《역》은 천지 음양과 사시 오행을 저술했기에 변화에 능하다”(《사기·태사공자서》)라고 했다. 《설문해자》 역부(易部)에서는 “일(日) 월(月)이 합쳐져 역(易)자가 되니, 이는 음(陰)과 양(陽)의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했다. 팔괘는 음효(陰爻)와 양효(陽爻)로 구성되고 ‘역(易)’ 자는 위는 해(日), 아래는 달(月)의 형상을 띠니 그 상 또한 음양이다.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다. 음양의 소장(消長), 성쇠(盛衰), 변화(變化)로써 우주 만사만물의 변화 이치를 밝힌 것이다. 선천팔괘도(先天八卦圖)와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도 모두 그러하다.

《주역》은 중국 전통 의학의 원천이며 양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떼어놓을 수 없다. 명대(明代) 명의 장경악(張景岳)이 저서 《의역의(醫易義)》에서 말했듯이 “《역》에는 의학의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의학은 《역》의 쓰임을 얻었으니” “의사는 《역》을 몰라서는 안 되고 《역》은 의학이 없을 수 없다.”

《주역》이 중국과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쇠퇴하지 않고 있다.

* 문자와 문학

서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갑골문과 청동 명문(銘文)은 상대(商代)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서주 시기에 출토된 기물(器物)이 더 많고 명문의 길이도 더 길어서 금문(金文)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 서주 금문은 일반적으로 긴 내용을 담고 있는데 가령 모공정(毛公鼎)은 500여 자에 달해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임동(臨潼)에서 출토된 무왕이 상(商)을 토벌한 기록을 담은 이궤(利簋), 기산(岐山) 동가촌(董家村)에서 출토된 구위(裘衛) 제기 등에도 명문이 있어 서주 사회 역사 연구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괵계자백반(虢季子白盤 西周): 전체 길이 39.5cm, 폭 137.2cm. 청(淸) 도광년 섬서성 보계시 괵천사(虢川司)에서 출토, 현재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기원전 816년에 주조되었으며 제작자인 괵계자 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산씨반(散氏盤), 모공정(毛公鼎)과 함께 서주 3대 청동기로 불린다. 글자 수는 조금 적으나(111자) 제작의 정교함과 크기 면에서 이 반이 으뜸이다.]

괵계자백반(虢季子白盤 西周): 전체 길이 39.5cm, 폭 137.2cm. 청(淸) 도광년 섬서성 보계시 괵천사(虢川司)에서 출토, 현재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서주 선왕(宣王 828~782B.C.) 때 제작된 중요 기물로 제작자 모공의 이름을 땄다. 솥 안쪽에 32행 499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어 현존하는 청동기 중 명문이 가장 길다. 선왕의 훈계와 책명을 담고 있으며 서주 말기 정치 역사 연구와 금문 서예의 전형으로 가치가 높다.]

용경(容庚)이 편찬한 금문사전인 《금문편(金文編)》에는 1950년대 이전까지 출토된 동기 명문 약 3,000여 자를 수록했다. 최근 수십 년간 다시 대량의 상주(商周) 동기가 출토되어 새로운 금문 글자가 많이 늘었다. 이는 서주 시기가 중국 고대 문자의 중요한 발전 시기였음을 설명해준다. 세상에 전해지기로 주 태사 주(籀)가 대전(大篆)을 만들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주문(籀文)은 서법상 금문(金文)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문자였으며 기물에 새겨진 금문과 일치한다.

현존하는 《상서》 〈주서(周書)〉와 《일주서(逸周書)》 등은 후대 사람들이 선별하고 편집하여 보존해온 서주 문헌 전적의 일부분이다. 이 편장들은 당시의 중요한 역사 문헌으로 문장 구조가 복잡하고 문사가 간결하여 당시의 엄격한 문풍을 보여준다.

* 예악

주대는 ‘예(禮)'(제사, 조향朝饗 등의 의식)와 ‘악(樂)'(‘예’에 따르는 음악과 춤)에 대해 처음으로 규정을 만든 시대로 이를 소위 ‘예악을 제정’했다고 한다. 주대의 예악 제도에는 두 가지 기본 내용이 있는데 첫째는 등급을 규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에 따르는 악무를 기본적으로 아악(雅樂)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주대의 예악 제도는 등급이 매우 엄격하여 장소와 신분에 따라 의례가 다를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음악과 악기도 달랐다.

가령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낼 때는 황종(黃鐘)을 연주하고 대려(大呂)를 노래하며 〈운문(雲門)〉 춤을 추었다.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낼 때는 태주(太簇)를 연주하고 응종(應鐘)을 노래하며 〈함지(咸池)〉 춤을 추었다. 제후들이 사신을 접대할 때는 〈사도(四度)〉나 〈황황자화(皇皇者華)〉 같은 소아(小雅)를 썼다. 천자가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옹송(雍頌)〉은 사대부가 쓸 수 없었다.

주(周)의 아악에서 기악, 무용, 가창은 흔히 분리되어 진행되었는데 무용은 관악기와 노래가 배합되고 가창은 슬(瑟)이나 생(笙)이 반주했다. 기악(器樂) 즉 ‘금주(金奏)’는 종, 북, 경의 합주로 천자와 제후만 사용할 수 있었고 대부와 사는 북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황제 때의 〈운문〉, 요 때의 〈함지〉, 순 때의 〈소(韶)〉, 우 때의 〈대하(大夏)〉, 상 때의 〈대호(大濩)〉, 주 때의 〈대무(大武)〉 등 ‘6대 악무’를 볼 수 있었다.

주대(周代)에는 채풍(采風) 제도가 있어 민가를 수집하여 풍속을 살피고 민정을 파악했기에 대량의 민가가 보존되었다. 춘추 시대에 공자가 이를 삭제하여 정리함으로써 우리나라 첫 번째 시가총집인 《시경(詩經)》이 엮어졌다. 여기에는 서주 초부터 춘추 중엽까지 500여 년간의 음악에 들어간 시가 총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경》에서 가장 우수한 부분은 ‘풍(風)’이다. 이것은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근 여러 성에 유포되었던 15국의 민가다. 이 외에도 문인이 창작한 ‘대아(大雅)’, ‘소아(小雅)’ 및 서사시 성격의 제사 노래인 ‘송(頌)’ 등 체재가 있다.

전해 내려오는 문자 분석에 따르면 《시경》 중의 노래는 10종의 곡식(曲式) 구조로 개괄할 수 있다. 서주에서 사용한 아악의 가창 부분은 모두 《시경》 중의 《주송(周頌)》과 《대아》, 《소아》에 속한다. 《국풍(國風)》 중에는 시대가 비교적 이른 《주남(周南)》, 《소남(召南)》만이 등급이 낮은 ‘예(禮)’에 쓰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비교적 후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 두 ‘남’은 기본적으로 서주 말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청대 학자 방옥윤(方玉潤)은 《주남·부이(罘苡)》라는 시를 분석할 때 시가 표현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독자가 마음을 평온히 하고 기운을 가라앉혀 이 시를 음미해 보면, 마치 시골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평원 광야에서 화창한 날씨 속에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여운이 아련하게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들리며 끊어질 듯 이어지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옮겨가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문자 속에서 그 리듬과 운율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주대에는 음악 기관인 ‘대사악(大司樂)’을 세워 음악 방면에서 귀족 자제들을 계통적으로 훈련했다. 《주례·춘관·대사악》에는 대사악이 악무를 가르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악덕(樂德 악의 덕)으로써 국자(國子)를 가르쳤으니 중화(中和), 지용(祗庸), 효우(孝友)요, 악어(樂語 악의 언어)로써 국자를 가르쳤으니 흥도(興道), 풍송(諷誦), 언어(言語)이며, 악무(樂舞)로써 국자를 가르쳤으니 《운문대권(雲門大卷)》, 《대함(大咸)》, 《대경(大磬)》, 《대하(大夏)》, 《대호(大濩)》, 《대무(大武)》를 추게 했다. “《육악(六樂)》으로 백성의 정서를 방지하고 조화로써 가르쳤다”라는 《주례·지관·대사도》의 설명은 당시 이미 음악이 사람의 정서와 뜻에 미치는 영향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말해준다.

《주례·춘관·대사악》에 언급된 《대무(大武)》는 서주의 매우 유명한 악무로, 주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역사적 사건을 표현한다. 《예기·악기》 기록에 따르면 《대무》는 규모가 매우 컸으며, 춘추 시대 공연에는 6성(六成, 여섯 단락)이 있었고 가창(歌唱)과 악대(樂隊) 반주가 있었다. 이는 구조가 완전한 곡식을 갖추고 있어 예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서주 시대의 악기는 수십 종에 달했는데, 《시경》 한 권에만 29종의 악기가 등장한다. 타악기와 취주악기뿐만 아니라 탄현악기도 있었다. 재료에 따라 당시 악기는 금(金), 석(石), 토(土), 혁(革), 사(絲), 목(木), 포(匏), 죽(竹)의 여덟 종류로 나뉘었다. 사서에서는 이를 ‘팔음(八音)'(《주례·춘관》)이라 칭했다. 또한 사서에서 ‘종고지락(鍾鼓之樂)’이라 부르는 대형 관현악단도 서주 시기에 흥기했는데, 이 악단의 주요 악기는 편종(編鐘)과 건고(建鼓)였다. 이때의 편종은 예전에 3개만 있던 것에서 5개, 8개로 발전했다. 섬서 부풍 제가촌(齊家村)에서 출토된 작종(柞鍾)은 총 음역이 이미 3옥타브에 달하며, 기본적으로 우(羽), 궁(宮), 각(角), 치(徵), 우, 궁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주대에는 12율(律) 이론이 이미 확립되었다. 오성(五聲)의 계명(階名 궁, 상, 각, 치, 우)도 확립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이미 오성이나 칠음계에서 궁음(宮音)이 위주가 됨을 알았고, 궁음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선궁(旋宮)이라 하여 조바꿈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율학상의 두드러진 성취는 《관자·지원편(地員篇)》에 기록된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궁음의 현 길이를 기초로 3분의 1을 더하여(익일益一) 궁음 아래의 순4도인 치음을 얻고, 치음의 현 길이에서 3분의 1을 감하여(손일損一) 치음 위의 순5도인 상음을 얻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순서로 계속 추산하면 오음계 각 음의 현 길이를 얻게 된다. 이 법에 따라 한 옥타브 내 12개 반음(12율)의 현 길이를 계산한 것이 ‘삼분손익율제(三分損益律制)’를 구성한다.

이러한 율제는 자연적인 5도 음정의 상생으로 이루어졌기에, 매번 상생하여 만들어진 음이 12평균율의 5도보다 약간 높다. 이 때문에 12번 상생해도 시작 음의 한 옥타브 높은 음을 얻지 못하여 이른바 ‘황종불능환원(黃鍾不能還原)’ 현상이 발생해 선궁 전조에 불편함을 주었다. 그러나 단음(單音) 음악의 선율미를 충분히 체현한 이 율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복식

중국의 복식 제도는 주대에 단계적으로 완비되었으며, 제왕과 귀족은 모두 장소와 신분에 따라 복식을 갖추어 입었다.

주대의 복식은 주로 상체에 ‘의(衣)’를 입었는데 깃이 오른쪽으로 열리며, 하체에는 ‘상(裳)’을 입었는데 상은 곧 치마였다. 허리에는 넓은 허리띠를 매고, 배 앞부분에는 치마처럼 무릎을 가리는 장식 천인 ‘불(韍)’을 더했고 이를 ‘폐슬(蔽膝 무릎을 가린다는 의미)’이라고도 불렀다.

남자 복식 중 면복(冕服)은 예복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으로, 제전(祭典)에서 입는 주요 제복이다. 그 형식은 주로 관(冠), 의, 상, 폐슬 등 요건으로 구성된다. 면복의 주체는 현의(玄衣)이며 의상 위에는 장문(章紋)을 그려 넣었는데, 가장 웅장한 전례 시에는 구장문(九章紋 9가지 무늬) 면복을 입었다. 의상 안에는 흰 모시로 만든 중단(中單), 즉 하얀 속옷을 받쳐 입었는데 고대 속옷은 통상 흰색이었다. 하체 앞에는 폐슬이 있는데 천자의 폐슬은 붉은색, 제후는 황적색이었다. 신발은 가죽과 나무로 밑창을 만든 이중창으로 굽이 높았으며, 주대 천자는 성대한 전례 시 붉은색 신발을 신었다.

변복(弁服)은 격식이 면복 다음으로, 의상의 형식은 면복과 비슷하나 장문을 더하지 않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변복은 작변(爵弁), 위변(韋弁), 관변(冠弁) 등 몇 종류로 나뉘며 주요 차이는 쓰는 관과 의상의 색상에 있다.

현단(玄端)은 천자의 평상복이자 제후와 신하의 조복(朝服)이었다. 심의(深衣)는 고대 예복이 대개 위아래 의상이 연결되지 않은 것과 달리, 상하가 연결되어 있되 따로 재단하여 위아래를 꿰매 붙인 형태다. “몸을 깊이 감싸기” 때문에 ‘심의(深衣)’라고 불렀다.

여자 복식 중 도의(掉衣)는 왕후가 왕을 따라 선왕에게 제사 지낼 때 입는 봉제복(俸祭服)이다. 양적(豔翟)은 왕후가 왕을 따라 선공(先公)과 후백(侯伯) 부인을 도와 제사 지낼 때 입는 조군제복(助君祭服 임금을 도와 제사 지낼 때 입는 의복)이다. 청색 옷에 양적문(豔翟紋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 12장문을 그리며 양적의 깃털 색 또한 오채색이다. 궐적(闕翟)은 왕후가 천자를 도와 여러 소신(小神)에게 제사 지낼 때와 자남(子男) 부인이 임금을 따라 종묘 제사에 참석할 때 입는 제복이다. 적색 옷에 적색 비단의 적문을 새겼다.

국의(鞠衣)는 왕후가 명부(命婦)들을 거느리고 잠신(蠶神)에게 제사 지내며 뽕나무 농사를 고할 때 입는 예복이며, 또한 제후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임금의 종묘 제사를 도울 때 입는 제복이다. 전의(展衣)는 익의(益衣)라고도 하며 왕후가 왕을 예방하거나 빈객을 연회할 때 입는 예복이며, 경대부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임금의 종묘 제사를 도울 때 입는 제복이기도 하다. 녹의(祿衣)는 왕후가 평상시 거처할 때 입는 일상복이며, 선비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제사를 도울 때 입는 제복이다. 순의(純衣)는 귀족 딸의 혼례복이다.

고대의 복식 제도는 사람들의 사회적 예교(禮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장식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신분과 언행 및 몸가짐의 지표가 되었다.

서주의 과학기술

천문학

서주 시기 천문학자들은 항성을 관측하여 황도대와 적도대 양측에 28개 성좌를 표지로 확정하고 이를 28수(二十八宿)라 불렀다. 이 성좌들에 의거해 천체의 위치와 일식, 월식 등 여러 천문 현상이 발생하는 위치를 확정했다. 태양이 28수 중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일 년의 계절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혼단(昏旦)의 성상으로 태양 위치를 관찰해 계절을 정하던 방법보다 정밀했다.

일식 관측에 관해서는 《시경·소아·시월지교》에 명확한 기록이 있다. 이 일식은 주유왕 6년 10월 초하루, 즉 기원전 776년 9월 6일에 발생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일월합삭(日月合朔)을 한 달의 시작으로 삼은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역주: 일월합삭이란 해(日)와 달(月)이 지구에서 보았을 때 같은 경도상에 위치하여 일직선으로 겹쳐지는 현상을 말한다. 전통 역법에서는 이를 한 달이 시작되는 기점, 즉 초하루(초1일)로 삼았다.]

중국 최초의 천문 관측 기구는 해 그림자를 관측하는 토규(土圭)였으며, 가장 먼저 규표(圭表)를 설치한 관측대는 주 초기에 양성에 건립된 주공측경대(周公測景台 유적은 현재 하남 등봉 고성진에 있음)다. 표(表)의 높이는 8척이며 규(圭)는 표와 연결된 받침대다. 태양이 표를 비추어 그림자가 규 위에 떨어지는데, 하짓날 정오의 투영이 가장 짧고 동짓날 그림자가 가장 길다. 토규를 이용해 해 그림자를 관측함으로써 태양년의 길이를 비교적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지리학

군사, 정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서주 시기에는 지도가 이미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예를 들어 주공이 낙읍의 성터를 선정할 때 미리 지도를 제작했다. 《주례》 대사마의 속관에는 직방씨(職方氏)가 있어 “천하의 지도를 관장하여 천하의 땅을 다스렸고”, 사험(司險)은 “구주(九州)의 지도를 관장하여 산림과 하천, 늪지의 험난함을 두루 알았으며”, 대사도의 속관인 토훈(土訓)은 “지도를 설명하여 토지 사업을 도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전직 관리들이 각자 전용 지도를 가졌던 것은 지도 제작이 이미 상당 수준 발달했음을 설명한다.

의학

* 질병에 대한 인식과 진단 치료

갑골문을 통해 이미 상대(商代)에 인체 표면 부위에 대한 기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수(首), 면(面), 목(目), 구(口), 비(鼻), 미(眉 눈썹), 이(耳), 수(手), 주(肘), 굉(肱 팔뚝), 비(臂 팔), 족(足), 경(脛 정강이), 슬(膝 무릎), 지(趾 발가락), 항(項 뒷목), 척(脊 등뼈), 복(腹), 둔(臀 엉덩이) 등이 있으며, 인체 부위별 생리 기능에 따라 이름 붙인 잉(孕 임신), 만(娩 해산), 유(乳), 뇨(尿), 혈(血) 등도 있다. 다만 인체 내부 장부 조직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오직 ‘심(心)’자만 보일 뿐이다.

갑골문에 기록된 질병은 약 20여 종인데, 그중 대부분은 인체 표면 부위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머리병, 눈병, 귀병, 입병, 잇몸병, 혀병, 코병, 목병, 손병, 팔꿈치병, 팔뚝병, 복부병, 오줌병, 발병, 무릎병, 정강이병, 발가락병, 산부인과병, 소아과병 등이다. 또한 질병의 주요 특징에 따라 이름 붙인 기록도 있는데, ‘질언(疾言)’은 말하기 어렵거나 목이 쉬는 증상이며, ‘개(疥)’는 딱지가 앉기 쉬워 붙은 이름이고, ‘고(蠱)’는 뱃속에 기생충이 있음을 나타내며, ‘우(齲)’는 충치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질병에 대해 인식한 범위가 오관과,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질병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갑골문에는 ‘질년(疾年)’, ‘우질(雨疾)’, ‘강질(降疾)’의 기록이 있는데, 질년은 병이 많은 해를 뜻하고 우질과 강질은 질병 발생이 비처럼 쏟아짐을 뜻하니 이는 유행성 전염병에 관한 최초의 기록들이다. 갑골문 연구를 통해 상나라 때 이미 침술, 안마, 접골, 발치 및 약물 치료 등의 치병 방법이 출현했음을 발견했다.

서주에 이르러서는 아직 전문적인 의학 서적이 출현하지 않았으나, 질병 인식에 관한 내용이 당시 문헌인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산해경》 등에 흩어져 나타난다. 이때 사람들의 질병 인식은 상대보다 눈에 띄게 진보하여 열병, 혼미, 부종, 난산과 불임 등의 질병을 인식하고 고정된 병명을 붙였다. 《시경》에는 전(癲, 정신병), 민(閔, 피부병), 광(狂 정신 불안정), 수질(首疾 두통), 예(噎, 기운이 매끄럽지 못함), 구(疚, 마음이 괴롭고 피곤한 병), 몽(朦, 시력 상실), 진(震, 임신), 신(身, 임신), 고(瞽, 맹인) 등 고대 질병명과 증후가 기록되어 있다. 《주례》에도 종양, 궤양, 외상, 학질, 옴, 단저(癉疽 심한 화농성 염증), 발이 붓는 병, 구루병, 대머리, 변협(胼脅 옆구리가 뭉치거나 부어오르는 질환) 등의 질병 내용이 있다.

질병 진단에 관해 《주례·천관(天官)》에는 “오기(五氣), 오성(五聲), 오색(五色)으로써 그 생사를 살피고, 구규(九竅)의 변화로써 두 가지를 대조하며, 구장(九藏)의 움직임을 참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료 면에서는 어떤 이들이 ‘선미이후약(先味而後藥)’이라는 치료 주장을 폈는데, 이는 먼저 식료(食療 음식요법)를 쓴 뒤 약으로 치료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음식은 사계절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대에는 심지어 왕실 식단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관리인 식의(食醫)가 등장했는데, 이는 당시 음식 요법에 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침구, 안마(按摩), 도인(導引) 등 각종 치료 방법이 이 시기에 이미 응용되고 있었다.

*약물지식

상대(商代)의 갑골문에서 약물에 관한 명확한 표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물고기를 이용해 어혈을 풀고 대추로 학질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주와 춘추시대에 이르러 약물의 종류가 증가하고 사람들의 용약(用藥) 경험도 나날이 풍부해졌다. 이때까지는 아직 약물학 전문 서적이 출현하지 않았으나 많은 문헌 속에 약물에 관한 기록이 있다. 《주례(周禮)·천관(天官)》에 기술된 오약(五藥)은 약물에 대한 초보적인 분류라 할 수 있다. 또한 담반(膽礬), 단사(丹砂), 웅황(雄黃), 각석(礐石), 자석(磁石)의 오독(五毒)을 연제(煉制)하여 만든 외용 부식약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중국 고대에서 화학 약물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될 것이다. 《시경(詩經)》에도 약물에 관한 풍부한 기록이 있으며 수많은 동식물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이들 동식물의 약용 작용을 명확히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상당수가 후세에 약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차전초(芣苢), 택사(藚), 갈근, 백미(白薇), 황금, 패모, 백모(白茅), 호로, 모과, 대추 등이다. 《시경》에는 일부 식물의 채집과 채집지 및 식용 효과에 대해서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

*병인학

서주 시기의 사람들은 계절과 기후의 변화가 인체 건강과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인식했다. 당시 전염병은 여질(癘疾)이라 불렸다. 《주례·천관·질의》에는 “사시(四時)에 모두 여질이 있으니 봄에는 머리 질환이 있고, 여름에는 가려운 옴 질환이 있으며, 가을에는 학질과 오한 질환이 있고, 겨울에는 기침과 상기 질환이 있다”라고 기재되어 사시의 흔한 병과 다발 질환을 서술했다.

* 위생보건

하상(夏商) 시기에 사람들은 이미 세수하고 손발을 씻는 습관이 있었으며, 갑골문에도 이 방면의 기록이 있고 은허의 출토 유물 중에도 세면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서주 때 사람들은 음식 위생을 나날이 중시했다. 《주례·천관》에는 “무릇 금수(禽獸 날짐승과 들짐승)를 사용함에 있어 봄에는 어린 양과 돼지를 먹고 소기름을 사용하며, 여름에는 말린 꿩과 물고기를 먹고 돼지기름을 사용하며, 가을에는 송아지와 어린 사슴을 먹고 닭기름을 사용하며, 겨울에는 생선과 기러기를 먹고 양기름을 사용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식의(食醫)》에도 “무릇 조화함에 있어 봄에는 신맛을 많이 하고, 여름에는 쓴맛을 많이 하며, 가을에는 매운맛을 많이 하고, 겨울에는 짠맛을 많이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사람의 음식 취향이 반드시 사시 기후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야 함을 설명했다.

은상(殷商) 시기에 사람들은 이미 환경위생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사람과 가축을 격리했다. 갑골문에는 이미 외양간과 돼지우리, 실내 살충에 관한 기록이 있다. 《주례》, 《시경》에는 모두 벌레를 제거하고 쥐를 잡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벽을 바르고 구멍을 막으며 약으로 훈증하고 재를 뿌리며 집을 청소하고 분석(焚石 불에 달군 돌)을 물에 던져 수중의 병충해를 소멸하는 것 등이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황제(黃帝) 시대에 이미 우물이 있었고 하대에는 백익이 우물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초기 우물은 땅을 뚫어 판 토정(土井)이었으나 상주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점차 정구(井口), 정군(井裙), 정개(井蓋), 정정(井亭) 등 수원 위생 보호 시설을 발명했다. 은허에서 당시 이미 지하 배수관이 발견되었으며 주대 성곽 유적에서도 상대보다 더욱 선진적인 지하 수도가 발견되었다.

일찍이 하상 시대에 사람들은 이미 겨울에 천연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주대는 더위를 피하고 온도를 떨어뜨리는 방면에서 이미 구체적인 조치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여름에 얼음을 사용하여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여질(癘疾 전염병)이 내리지 않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며, 얼음 관리를 전담하는 능인(凌人)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시경》, 《주례》에는 모두 얼음을 갈무리한 기록이 있으며, 고고학 발굴에서도 이 시기에 축조된 빙고(氷庫 얼음창고)와 식품을 저장하던 냉장 우물이 발견되었다.

*의료제도

주대부터 전직 의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최초의 의학 분과가 생겼다. 당시 궁정 의사는 식의(食醫), 질의(疾醫), 양의(瘍醫), 수의(獸醫) 네 과로 나뉘었으며 각각의 편제와 직책 범위가 있었다. 식의는 왕실의 음식과 배선을 책임지는 영양 의사와 유사했고, 질의는 현재의 내과 의사에 해당하며 방내 군중의 질병 치료를 책임졌으며, 양의는 오늘날의 외과 및 상과 의사에 해당하고, 수의는 가축 질병의 치료를 주관했다.

주조는 비교적 완비된 의료 제도를 설립했다. 그 조직은 의사(醫師) 1인, 상사(上士) 2인, 하사(下士) 4인, 부(府) 2인, 사(史) 2인, 도(徒) 20인이었다. 의사는 각종 의료의 책임자(衆醫之長)로 국가의 의약(醫藥)에 관한 정령을 관장하고 왕실과 나라 안의 질병 예방과 치료를 책임졌다. 사(士)는 병을 고치는 의사이고, 부는 약물과 의료 기구 및 회계 사무 등을 관장했으며, 사는 문서와 의안을 책임졌고, 도는 사역에 종사하며 환자를 간호했다.

주조는 또한 완전한 의료 고과(考課) 제도와 고과 표준을 두었다. 《주례》의 기록에 따르면 “연말에 그 의료 실적을 조사하여 봉록을 정한다. 열 번을 치료해 열 번 다 고치면 상(上)이고, 열 번 중 한 번 실수하면 그다음이며, 두 번 실수하면 그다음이고, 세 번 실수하면 그다음이며, 네 번 실수하면 하(下)로 삼는다”라고 했다. 즉 매년 연말에 의사가 의사들의 의료 성적의 우열에 근거해 등급과 봉록을 정했다.

병력 기록과 사망 보고 제도도 이 시기에 이미 출현했다. 《주례》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무릇 백성 중에 질병이 있는 자는 나누어 다스리고, 죽으면 각기 그 이유를 기록하여 의사(醫師)에게 올린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환자를 분별하여 처리할 수 있었고 치료 기록을 세웠음을 설명한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사망 원인 보고서를 작성해 의사에게 제출하게 하여 급별 평정의 근거로 삼았다.

수학

주대는 귀족 자제의 교육을 매우 중시하여 어린아이 때부터 예(禮), 악(樂), 사(射 활쏘기), 어(禦 수레 몰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 등의 기초 지식과 기본 기능을 가르쳤는데 이를 육예(六藝)라 불렀다.

수학은 그중 한 과목으로, 수학 지식이 이미 사회 생활의 각 방면에 광범위하게 응용되어 독립된 과학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주비산경(周髀算經)》 서두에 언급된 구삼고사현오(勾三股四弦五)의 구고정리(勾股定理 피타고라스 정리)는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주공이 제시한 것이다.

[역주: 구(勾)란 직각삼각형에서 짧은 밑변을 의미하고 고(股)란 직각삼각형에서 긴 높이를 의미하며 현(弦) 직각삼각형에서 가장 긴 빗변을 의미한다. 즉 밑변의 제곱과 높이의 제곱을 합하면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원리다.]

서주 세계(世系)

서주(西周)의 역대 왕계는 다음과 같다.

1.무왕(武王, 희발 姬發) —— 2. 성왕(成王, 송 誦) —— 3. 강왕(康王, 조 釗) ——4.소왕(昭王, 하 瑕) —— 5. 목왕(穆王, 만 滿) —— 6. 공왕(共王, 예 繄) —— 7. 의왕(懿王, 간 囏) ——8.효왕(孝王, 벽방 辟方) —— 9. 이왕(夷王, 섭 燮) —— 10. 여왕(厲王, 호 胡) —— 공화정(共和政)——11. 선왕(宣王, 정 靜) —— 12. 유왕(幽王, 궁열 宮涅)

참고서적
1, 《사기》, 사마천, 서한
2, 《여저중국통사(呂著中國通史)》, 여사면(1884-1957), 화동사대출판사
3, 에포크타임스와 정견망 상의 관련 문장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