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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8): 이백과 두보 시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움과 평가의 변천

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중국은 시(詩)의 나라이며, 중국의 시가(詩歌)는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는 이 문화사에서 나란히 솟은 두 봉우리지만, 이두(李杜) 시의 풍격은 크게 다르다. 후세 문사(文士)들은 이두 시사를 품평할 때 개인의 경지와 시각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는데, 통상 이백을 낭만주의 시인으로, 두보를 현실주의 시인으로 칭한다. 그러나 시사 격온(格蘊 형식과 내함)이란 새로운 시각에서 이두 시사를 가치 층면으로 읽고 해석해 보면, 그들의 서로 다른 품성 함축과 가치 취향의 계시를 발견하게 된다.

선진(先秦) 양한(兩漢) 시기에는 비록 《시경(詩經)》 《초사(楚辭)》만으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했지만 아직 시가의 황금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양한 시기에 시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 이르러서야 시가는 진정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음운학과 시사 격률은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고, 오언시(五言詩)가 찬란하게 융성하며 당시(唐詩)의 번영과 성대함, 중국 시사 문화의 정점이 나타날 수 있는 좋은 기초를 닦았다.

대당(大唐) 왕조는 국력이 강성하고 경제가 번영했으며 문화도 극도로 발달하여 성당(盛唐)의 기상을 나타냈다. 당대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시(唐詩)의 휘황함이며, 성당 시기는 근체시 발전의 황금기로서 근체시(近體詩)가 고도로 성숙해지고 격률도 완벽함에 이르렀다. 당나라가 나라를 세운 지 근 삼백 년 동안, 폐허에서 일어나 흥성하고 전성기를 거쳐 점차 쇠망하는 과정을 겪었다.

시기에 따라 시가 표현하는 내용과 풍격에도 변화가 있었고, 그 시경(詩境)과 격온도 각기 달랐다. 이는 중국 문화사에서 다채롭고 기이한 봉우리가 솟구치며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시대였다. 진자앙(陳子昂),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고적(高適), 잠삼(岑參), 왕창령(王昌齡), 백거이(白居易),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유종원(柳宗元), 이하(李賀),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이처럼 천고에 빛나는 위대한 시인들이 모두 이 시대에 탄생했다.

이백과 두보는 성당 시가의 두 큰 산맥이자 중국 시가사에서 나란히 솟은 두 거인이다. 한유가 〈조장적(調張籍)〉이라는 시에서 “이두의 문장이 있으니, 그 빛이 만 길이나 길도다”라고 형용한 것은 그들에 대한 최고의 평가다. 그러나 이두가 병칭된 것은 두 사람이 생존했을 때의 영향력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두보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점차 나타난 현상이다.

이백은 하지장(賀知章)에게 적선인(謫仙人 귀양온 신선)이라 불렸고, 두보 역시 이백을 찬양하기를 “붓을 들면 비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을 울게 하네. 명성이 이로부터 커졌으니…… 문채가 특별한 은총을 받아, 반드시 세상에 비길 데 없이 전해지리라”고 했다.

이백은 살아 생전에 진자앙과 함께 ‘진리(陳李)’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죽계육일(竹溪六逸 죽계의 여섯 일사)’, ‘음중팔선(飮中八仙 술에 취한 여덟 신선)’의 반열에도 올랐다.

이두를 함께 병칭하는 것은 중당(中唐) 시기인 정원(貞元), 원화(元和) 연간에 점차 형성되었다. 두보의 시가 점차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면서, 특히 원진(元稹), 한유 등의 추대와 큰 관계가 있었다.

정원 10년(794년), 원진의 〈대곡강노인백운(代曲江老人百韻)〉 중 “이두의 시편이 대적할 만하고, 소장(蘇張 소진과 장의)의 필력이 고르다”는 구절이 이두 병칭의 효시가 되었다. 원진의 친구인 백거이도 이 설을 받아들여 사용했다. “또한 시의 호걸이라 하면 세상에서 이두를 일컬으니, 이백의 작품은 재능 있고 기이하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한다.” [1]

‘시선(詩仙)’ 이백은 표일(飄逸)하고 소탈하며 호기가 구름을 찌르고,

‘시성(詩聖)’ 두보는 침울하고 돈좌(頓挫)하며 민생을 마음속에 두었다.

소동파는 일찍이 “이태백과 두자미는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자질로 백 대를 뛰어넘으니 고금의 시인들이 모두 폐해질 정도다. 그러나 위진(魏晉) 이래 높은 풍모와 세속을 벗어난 기운도 조금은 쇠퇴했다. 이두 이후 시인들이 뒤를 이어 나타났으나, 비록 간혹 원대한 운치는 있어도 재능이 뜻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2]

한유의 〈천사(薦士)〉 시에서는 “나라에 문장이 성하니 진자앙이 비로소 높이 밟아 나갔다. 갑자기 흥성하여 이두를 얻으니 만물이 능가하기 어려워 곤란해졌도다”라고 읊었다.

그러나 원진, 백거이의 이두 병칭 속에는 두보를 높이고 이백을 억누르랴는 기색이 숨어 있었다. 정원, 원화 연간에 두보의 지위는 여전히 상승 추세였다.

원화 2년(807년), 고도(顧陶)가 대중 10년(856년)에 엮은 《당시류선(唐詩類選)》이라는 책에서는 심지어 이백과 두보를 ‘두이(杜李)’라고 병칭하기도 했다. [3]

그 후 북송 후기에 이르러 두보의 지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송조 사람 중에는 두 사람을 ‘두이’로 병칭하는 이가 많았는데, 황정견(黃庭堅)의 글에 “문장은 진한(秦漢)을 앞지르고, 시는 두이를 겸비했다”는 구절이 그 예다. [4]

이로 보아 이두 병칭은 중당 시기에 이미 점차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백과 두보 시사가 후세 문사들의 품평에서 순서가 변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리는데, 그의 시를 보면 맑고 자연스러우며 성글고 소탈하다.

“맑은 물에 핀 연꽃 같으니,
천연스러워 꾸밈이 없도다.
뛰어난 흥취가 소박한 가슴에 가득하니,
때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네.”[5]

이는 꾸밈없는 천연의 미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간결하고 명쾌하며, 내면 깊은 곳에서 싹튼 심오하고 그윽한 감정을 함축하고 있다.

“침상 앞 밝은 달빛,
땅에 내린 서리인가 의심하네.
머리 들어 밝은 달 바라보고,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정야사(靜夜思)〉)”,

“내게 왜 벽산에 사느냐 묻기에,
웃으며 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네.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나가니,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로다.
(〈산중문답(山中問答)〉)”

반면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존중받으며

“사람 됨이 성품이 치우쳐 좋은 구절에 몰두하니,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도 쉬지 않겠노라”고 했다. [6]
또한 언어가 정련되고 격률이 엄격하다.
“바람 빠르고 하늘 높은데 원숭이 울음 슬프고,
물가 맑고 모래 흰데 새들이 날아 돌아오네.
끝없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 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오네.
만 리에 가을 슬퍼하며 늘 나그네 노릇하고,
평생 병 많아 홀로 대에 오르네.
어렵고 고통스러운 원망에 귀밑머리 희어지고,
쇠락하고 초라하여 새로 탁주 잔을 멈추었네.
(〈등고(登高)〉)”

이 시는 칠언율시의 으뜸으로 꼽힌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내용이 풍부하고 소박하면서도 묵직하고 침울해서, 사회 현실을 심각하게 묘사하여 ‘시로 쓴 역사’라는 뜻의 시사(詩史)라고 불린다. 또한 대구가 정교하고 소리와 정서가 비장하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만 남아 있고,
성안의 봄엔 초목만 깊었구나.
시국을 느끼니 꽃에도 눈물 뿌리고,
이별을 한하니 새 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봉화가 석 달째 이어지니,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만큼 귀하구나.
흰 머리 긁으니 다시 짧아져,
참으로 비녀를 이기지 못할 듯하네.
(〈춘망(春望)〉)”

이백의 시는 기세가 웅장하고 끝없이 종횡무진하여 “필력이 웅장하면서도 기상이 혼후하다.” [7] 이는 참으로 성당 기상의 원대한 재현이다.

“햇빛이 향로봉 비추어 자줏빛 연기 피어나고,
멀리 폭포가 앞산 시내에 걸린 것을 보네.
날아 흐르는 물줄기 삼천 자 아래로 떨어지니,
마치 은하수가 구만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네.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이백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야랑(夜郃)으로 유배되는 등 낙박한 시절을 겪기도 했다.

“북쪽 기러기 봄에 돌아가는 것 다 보려 하는데,
남쪽에서 오는 예장(豫章)의 편지는 받지 못하네.
(〈남류야랑기내(南流夜郃寄內)〉)”

그러나 중경을 지나 백제성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사면 소식을 듣고 읊었다.

“아침에 채운 사이 백제성을 떠나,
천 리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
양쪽 기슭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가벼운 배는 이미 만 겹 산을 지났도다.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여전히 그 호방하고 경쾌하며, 유려하고 표일하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상을 잃지 않았으니, 다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여 혼연히 이루어졌다. 지난날의 창상은 마치 ‘양쪽 기슭 원숭이 울음’ 같고 ‘만 겹 산’의 험난함 같으나, 하루에 천 리를 가는 ‘가벼운 배’를 어찌하지 못했다.

이백보다 열한 살 어린 두보는 청년 시절 개원의 치세(開元之治)에서 열정적이고 호매하며 기세가 넘쳤다.

“대종(岱宗)은 어떠한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푸름이 끝이 없구나.
조물주가 신령스럽고 빼어남을 모았으니,
음양(陰陽)이 어스름과 새벽을 나누는구나.
가슴을 씻어내듯 구름이 솟아나고,
눈을 부릅뜨고 돌아가는 새를 보네.
반드시 절정에 올라,
뭇 산이 작음을 한눈에 보리라.
(〈망악(望嶽)〉)”

그러나 그의 시사 창작의 중심은 중년 시기, 즉 안사의 난이 발발한 이후였으며, 마치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를 겪은 듯했다. 이로 인해 시대를 아파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전체적인 풍격이 형성되었다.

“붉은 문 안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있구나.
영화와 시듦이 지척 차이로 다르니,
서글픈 마음 다시 서술하기 어렵네.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또한 대표적인 ‘삼리(三吏)’: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무관리(武關吏)〉와 ‘삼별(三別)’: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이 있다. 따라서 두보의 시는 사후에 백거이, 원진 등에게 추앙받으면서 명성이 점점 커졌다. 송대 이후에야 두보는 중국 문학사상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안사의 난은 비록 8년뿐이었으나 당나라에 대한 타격은 파멸적이었다. 중당 이후 ‘원화중흥(元和中興)’을 겪었음에도 쇠락하는 기색을 면하기 어려웠고, 초당의 웅혼한 기운도, 성당의 ‘개원성세’ 기상도 사라졌다.

당대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서는 “원화 이후, 문장에서는 한유의 기괴함을 배우고, 번종사(樊宗師)의 고삽함을 배우며, 가행(歌行)은 장적(張籍)의 방탕함을 배우고, 시장(詩章 시와 문장)은 맹교(孟郊)의 교격(矯激 강직하고 편협)함을 배우고, 백거이의 친근함을 배우고, 원진의 음미(淫靡 관능적이고 화려)함을 배우니 모두 원화체(元和體)라 일컫는다”고 했다.

즉 백거이가 말한 “시가 원화체에 이르러 새로워졌네 (〈여사미진가위육운중기미지(餘思未盡加為六韻重寄微之)〉)”라는 뜻이다. 원백시파(元白詩派)는 두보의 “슬픔과 즐거움에 느껴 일에 따라 시를 짓는다”는 창작 특징을 계승하여, 시 짓기에 실무적이고 통속적이며 극진함을 추구하여 현실을 반영하고 시사를 비판했다.

원진은 〈수효보견증십수(酬孝甫見贈十首)〉 그 두 번째에서 두보의 시를 찬미했다.

“두보는 천재가 자못 절륜하여, 매번 시권을 찾을 때마다 정이 친근한 듯하네. 그가 당시의 말을 곧게 하여, 마음의 근원을 옛사람에게 기대지 않았음을 사랑하노라.”

여기서 ‘당시의 말’이란 민간에서 유행하던 통속적인 언어다. 백거이는 〈기당생(寄唐生)〉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시를 “궁률(宮律)의 높음을 구하지 않고, 문자의 기이함에 힘쓰지 않는다”고 형용했다. 예를 들어 “오직 백성의 고통만을 노래하여, 천자가 아시기를 원하노라. (〈기당생〉)”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문화사에서 왜 시사가 나타났으며, 좋은 시사의 기준은 무엇인가?

《예기·경해(經解)》에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나라에 들어가면 그 가르침을 알 수 있다. 그 사람됨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두터운 것은 시의 가르침(詩敎)이다”라고 했다.

공자는 또한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 것이다. (《논어·위정》)”라고 했다.

이로 보아 공자가 말한 시교의 ‘무사(無邪)’란 바로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없고 순정함으로 돌아가 성정을 도야하며 ‘내외(內外)의 도에 합치’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어지러움에 가려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함으로써 도덕과 경지가 타락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에는 서로 다른 조우가 있어 기복과 비바람을 겪기 마련이다. 이두의 시 속에서 ‘수고(愁苦)’를 묘사한 것은 어떤 형태인가?

이백은 〈의고십이수(擬古十二首)〉에서

“산 자는 떠도는 나그네이고,
죽은 자는 돌아가는 사람이네.
천지는 하나의 여관이니,
함께 만고의 먼지를 슬퍼하노라”라며 인생의 짧음을 감탄하는 동시에 ‘여관(逆旅)’이 천지 사이 인간의 상태임을 짚어주었다. 만고 이래로 모두 그러했으니, 슬퍼하는 것은 생명이 진세에서 겪는 만세 윤회의 고통이다.

이백은 〈춘야연종제도화원서(春夜宴從弟桃花園序)〉에서 더욱 본질적인 표현을 남겼다.

“무릇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요, 광음이라는 것은 백대의 과객이로다. 덧없는 인생이 꿈과 같으니, 즐거움이 그 얼마인가?”

이백은 꿈처럼 떠도는 인생을 ‘부생(浮生)’으로 보았고, 전설 속 신선인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처럼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돌아가기를 동경했다.

“적송자는 금화산에 깃들고,
안기생은 봉래 바다로 들어갔네.
이 사람들은 옛 신선이니,
신선 되어 끝내 어디에 있는가?
덧없는 인생은 번개보다 빠르니,
잠깐 사이에 광채가 변하네.
천지는 시들어 바뀜이 없으나,
얼굴 모습은 변함이 있구나.
(〈상화가사(相和歌辭)〉 그 하나)”

그는 긴 기다림 속에서 창망함과 기대로 가득 찼다.

“푸른 하늘은 넓고 아득하며,
만 겁의 태극은 길기도 하구나.
(〈단가행(短歌行)〉)”,

“바다 사람이 영주(瀛洲)를 말하는데,
안개 파도 아득하여 참으로 찾기 어렵네.
(〈몽유천무음류별(夢遊天姥吟留別)〉)”,

“멀리 구름 속에 신선을 보니,
손에 연꽃 들고 옥경(玉京)으로 조회 가네.
일찍이 아득한 하늘 위에서 기약했으니,
원컨대 노오(盧敖)를 맞이하여 태청(太淸)에서 노닐고 싶구나.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禦虛舟)〉)”

이백의 시에서 나타나는 것이 천지 사이 인간의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리라 (〈장진주(將進酒)〉)”는 적선(謫仙)의 귀향 정서라면, 두보가 시에서 표현한 것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청해 바닷가에 예부터 백골을 거두는 사람 없음을 (〈병거행(兵車行)〉)” 하는 우국우민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수(戍)루 북소리에 사람의 통행 끊기고,
변방의 가을엔 기러기 울음소리 외롭구나.
이슬은 오늘 밤부터 하얘지는데,
달은 고향 달이 밝구나.
형제들은 모두 흩어졌으니,
집이 없어 사생(死生)을 물을 길 없네.
편지를 보내도 도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직 전쟁이 멈추지 않았음에랴.
(〈월야억사제(月夜憶舍弟)〉)”

마음속은 감상과 무력함, 기대로 가득 찼다.

“아아, 노래 한 곡 부르니 노래가 이미 슬픈데,
슬픈 바람은 나를 위해 하늘에서 불어오네.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乾元中寓居同穀縣作歌七首)〉)”,

“듣자하니 장안의 일이 바둑 두는 것 같으니,
백 년 세상일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네.
(〈추흥팔수(秋興八首)〉)”,

“어찌하면 넓은 집 만 칸을 얻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다 감싸 즐겁게 하겠는가!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산처럼 편안하리니.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為秋風所破歌)〉)”

이두 시의 형식과 내함이 다른 점은, 한쪽은 “큰 도가 푸른 하늘 같거늘, 나 홀로 나가지 못하네 (〈행로난삼수(行路難三首)〉)”라는 천지 과객의 일탈 정서다.

“동굴에 들어가 천지를 지나,
진인 되어 옥황상제께 조회하네. (〈증별사인제태경지강남(贈別舍人弟台卿之江南)〉)”
다른 한쪽은 “표표히 떠도는 것이 무엇과 같은가,
천지간의 한 마리 모래톱 갈매기로다. (〈여야서회(旅夜書懷)〉)”라는 세상의 혼란을 슬퍼하며 백성을 연민하는 상처 입은 정서다.

전자는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나가니,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로다(이백 〈산중문답〉)”이며,
후자는 “인생에 정이 있으니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데,
강물과 강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두보 〈애강두〉)”이다.

비교해 보면 이백의 시는 뜻이 하늘 구름 사이에 있어 마치 청풍명월처럼 웅건하고 표일하다. 반면 두보의 시는 민간의 고통에 마음을 두어 마치 ‘국파(國破)’, ‘산하(山河)’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슬픈 바람이 깊고 넓다.

시경의 가르침인 ‘사무사(思無邪)’ 관점에서 보면 이백의 시는 세간의 얽매인 정서가 드물지만, 두보의 시는 근심과 분노가 깊고 넓으며 침울하고 돈좌한 슬픔과 고통의 정서가 나타난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사실 천진무구함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각이 사악함이 있는 ‘사지유사(思之有邪)’를 유발한다.

시사의 격온(格蘊)은 저자가 창작할 때의 품성, 의경(意境), 정신적 함축이 종합적으로 체현된 것이다. 사회 발전 과정에서 시대마다 사회 현실과 풍조가 시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류 사회 각 시기의 전체적인 도덕 수준이 다르고 시인의 경지가 다르기에, 시사의 문구가 짊어진 이면의 함축에 모두 반영되기 마련이다.

명대 양신(楊愼)은 《승암시화(升庵詩話)》에서 이두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서중거(徐仲車 북송의 서적)가 이르기를, 〔태백의 시는 신령스러운 매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하고, 소릉(少陵 두보)의 시는 준마가 먼지를 끊으며 달리는 듯하다.〕 …… 내가 생각하기에 태백의 시는 신선이나 검객의 말이요, 소릉의 시는 아사(雅士)나 소인(騷人)의 사(詞)이다.”

개성적 취향과 풍격이 판이하여 후세 사람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하는 이 두 봉우리는 동시에 당시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백의 시풍은 가행(歌行)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두보의 시풍은 율시(律詩)에서 극치에 도달했다.

이백의 시는 소탈하고 낙락하여 출세(出世)의 의취를 나타내며,

두보의 시는 침울하고 돈좌하여 입세(入世)의 회포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보의 시는 정이 지극하고 정중할지언정 결코 개인적인 감정이나 비고의 발로에 기인하지 않았다. 중당 이후 원백의 시가 개인적인 감정의 격온에 갇혀 원망과 감상이 점차 깊어진 것과는 다르다.

“일찍이 창해를 겪었으니 물이라 하기 어렵고,
무산이 아니면 구름이라 할 수 없네.
(원진 〈이사오수(離思五首)〉 그 네 번째)”,

“이런 한은 사람마다 있음을 참으로 알지만,
가난하고 천한 부부는 만사가 슬프구나.
(원진 〈견비회삼수(遣悲懷三首)〉 그 두 번째)”,

“하늘 길고 땅 오래되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한은 면면히 이어져 기약이 없으리.
(백거이 〈장한가(長恨歌)〉)”,

“가난하고 천하다고 비웃지 말고 부귀를 자랑하지 마라,
함께 마른 뼈 되면 둘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거이 〈방언오수(放言五首)〉 그 네 번째)”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의 저자인 당대(唐代) 시인 사공도(司空圖)는 시를 논하며 “매실은 신맛에 그치고, 소금은 짠맛에 그친다”고 했다. [2]

이는 시풍이 점차 세상의 산전수전과 내면의 감수를 묘사하는 것을 숭상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두 이후 후세의 시풍은 점차 개인의 뜻, 흥취, 우분(憂憤 근심과 분노), 상처 입은 마음에 침잠했다.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왕안석(王安石)의 시사 명구는 바로 이러한 풍격이며, 그 속에는 격앙된 장력과 매서운 풍골이 가득하다.

“뜬구름이 눈을 가림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내 몸이 스스로 최고층에 있기 때문이라네.
(〈등비래봉(登飛來峰)〉)”,

“비록 봄바람에 불려 눈처럼 흩어질지언정,
남쪽 길가의 먼지에 짓밟히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북피행화(北陂杏花)〉)”

원명(元明) 이후 시의 도(道)는 쇠퇴하고 적나라한 감정의 배설과 강렬한 풍골만이 남았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함께하자 하는가?
(원호문 〈막어아·안구사(摸魚兒·雁丘詞)〉)”,

“오동잎 소리 하나에 가을 소리 하나,
파초 잎 점 하나에 시름 한 점,
삼경의 귀향 꿈은 삼경 뒤로다.
(서재사 〈수선자·야우(水仙子·夜雨)〉)”,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져도 전혀 두렵지 않으니,
청백함만은 인간 세상에 남기고자 하네.
(우겸 〈석회음(石灰吟)〉)”

종합하면 이두 시사는 중국 문화사에서 후인(後人)이 미치기 어려운 고봉이다. 이두 시사에 대한 평가는 후세 사회의 발전 상태 및 전체적인 도덕 수준과 관련이 있다. 인류의 도덕 수준이 하락함에 따라 세상의 고난은 점점 많아졌고,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은 먼지에 가려졌으며 생활 속에서 감내해야 하는 각종 형태의 비고한 맛은 가중되었다. 또한 점차 ‘사무사’의 순정함과 평화로움을 잃게 됨으로써 더욱 격앙되고 강렬해지며, 애증이 선명하고 장력이 가득하게 변했다.

시사 격온의 표현 선호는 더욱 자극적이고 장력이 있는 표현으로 기울게 되지만, 시사 격온의 가치 지향은 순정(純淨)하고 순진(純真)하며 순미(純美)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다. 사람의 내면을 평정하고 평화로우며 진실함으로 돌아가게(歸眞) 하는 것이야말로 시사 중의 극품(極品)이라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전당문》(백거이, 권0675)

[2] 송, 소식 〈서황자사시집후(書黃子思詩集後)〉

[3] 당, 고도 《당시류선서(唐詩類選序)》: “본조(本朝) 이래 사람들이 옛것으로 많이 돌아가 덕택이 널리 퍼졌다. 시를 짓는 이들이 뒤이어 나오니, 곧 두보와 이백이 당시에 우뚝 솟아 뭇 인재가 아우를 수 없었다.“

[4] 송, 황정견 《산곡선생연보(山穀先生年譜)》

[5] 당, 이백 〈경란리후천은류야랑억구유서회증강하위태수양재(經亂離後天恩流夜郃憶舊遊書懷贈江夏韋太守良宰)〉

[6] 당, 두보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值水如海勢聊短述)〉

[7] 송, 엄우(嚴羽) 《창랑시화(滄浪詩話)》(부록 〈답출계숙임안오경선서(答出繼叔臨安吳景仙書)〉)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