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앞서 언급했듯이 태양왕의 세기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처해 있었으니 이 시기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를 겪은 르네상스, 그리고 종교 중심의 소박한 생명관에서 탈피한 유럽의 경험은 18세기 이성 및 과학으로 향하는 계몽주의적 전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구 저편에서 온 귀한 손님』에서 우리는 유럽의 시대적 변화라는 커다란 배경을 언급했다. 루이 14세 시대 후기에 이르러 유럽 계몽운동의 주역들은 이미 각자 팔방미인의 기량을 닦으며 역사의 다음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한림원(Académie française)과 루이 14세가 정성을 들여 건설한 파리, 그리고 유럽의 신흥 왕국인 프로이센, 스웨덴, 잉글랜드, 러시아의 왕실과 과학원 내부에서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뉴턴,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은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서로 충돌하는 사명을 품은 채 묵묵히 작업에 몰두했다. 거대한 시대적 변혁이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사적 변혁에 신비로운 물리적 작용을 주입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전해온 고대 문명이었다. 초기 계몽운동에는 머나먼 고대 중국 문명이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겼다. 중국 철학 및 문화와 처음 접촉했을 때 유럽 학자들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이 동양적 사고방식은 그리스 고전 시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변적 철학과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 정치, 과거 제도에서 농업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유럽에 완전히 새로운 영감을 선사했다.
자신들과 크게 다른 동양 문명을 마주하며 유럽 땅에서는 극적인 긴장감이 감도는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유럽 우월주의라는 종족적 오만을 품은 채, 저 멀리 고대 문명에 대해 경시나 의심의 태도를 보이거나, 곡해하거나, 혹은 유럽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배척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음의 유명한 사건은 당시 유럽 문화계에 중국 철학이 일으킨 파문을 잘 설명해 준다.
1712년,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가 할레 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천 명 이상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는 중국의 자연신학과 공자의 가르침을 찬양하며 유교와 기독교 사이에 충돌이 없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그의 언행은 무신론으로 공격받았고, 결국 그는 직위 해제와 함께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중국 사상이 유럽에서 어떻게 오해되거나 오용되었든 간에(볼프의 본질적인 오해를 포함하여),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 문명의 독특성과 우월성이 의심의 여지 없이 유럽인들의 눈앞에 놓였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첫 10년, 즉 ‘앙피트리트 호’가 루이 항에 도착한 후 10년 동안 유럽에서는 중국에 관한 저작이 599부나 출판되었다. 루소나 디드로 같은 반전통적이고 날카로운 지식인들에게도 중국에서 온 경전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18세기 유럽은 풍운이 일고 모든 사조가 한데 모여들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시대는 정세가 변화무쌍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관해 강조해야 할 점은, 정점에 달한 과학 혁명, 동아시아 식민 무역, 뉴턴의 역학, 데카르트의 이원론, 로크의 경험주의, 태양왕의 절대 군주제와 갓 싹트기 시작한 계몽운동이 서로 격동하고 충돌하던 그때, 중화 제국의 고대 문명이 유럽에 나타나 폭탄급 충격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이 유럽 사상가들 가운데 두 사람은 중국 철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고, 이 고대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두 인물이다. 한 명은 『철학 서간』, 『루이 14세의 시대』를 써서 이름을 떨치고 기성 제도를 맹렬히 비난했던 볼테르이며, 다른 한 명은 검고 큰 가발을 쓰고 평생 세계 각지의 인사들에게 기발한 생각이 담긴 수만 통의 편지를 쓴 독일의 외교관이자 철학적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다.
머나먼 고대 동양 문화에 대해 이 두 유럽 지식인은 각자의 이유와 목적에 따라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 이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중국 철학 및 제도는 유럽 문화의 핵심부로 진입했다.
공문(孔門) 제자 볼테르
볼테르는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젊은 시절 프랑스 왕실을 조롱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몽운동의 선구자가 공자를 만났을 때 묘한 화학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어쩌면 서구인들의 수치일지도 모른다. 어떤 불행 때문인지 우리는 극동까지 가서 한 분의 소박한 현자를 찾아야 했다. …… 이 현자가 바로 공자다. 그는 고대 입법자 중 타인을 결코 속이지 않은 유일한 분이다.” (『철학 사전』)
1763년, 볼테르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천당에 있었고 한 차례의 대심판을 목격했다. 이 심판의 법관들은 인류 역사를 일군 위인들이었다. 이 법관들 중에서 공자는 솔론, 소크라테스 등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가톨릭 이외의 또 다른 전형을 찾던 볼테르에게 공부자(孔夫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져다주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행복하고 체면 있는 시대는 바로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시대다.”
중국의 5천 년 정치사 속에서 볼테르는 개명된 군주제와 그 이성적이고 예의를 중시하는 문명적 풍모를 보았다. 그는 중국의 문관(文官)들을 크게 찬양했다. 볼테르의 눈에 중국의 자연신학은 유럽의 엉킨 마음을 풀 수 있는 열쇠였다. 중국 특유의 도덕 과학은 “가장 중요한 과학”이며, 중국 문관들이 보여주는 “예의와 존엄은 유럽에서 가장 기민한 권신들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만불손했던 볼테르는 유럽에서 공자의 제일가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집에 공자의 초상화를 오랫동안 걸어두었으며, 하늘과 땅을 공경하는 중국의 자연신학을 극찬했다.
“다른 민족들이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때, 중국인들은 진정한 상제(上帝)를 인식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단(天壇)에서 상제께 제사를 지냈다.”
『대화: 중국 답의(Dialogue: Chinese Catechism)』에서 볼테르는 한 공문의 제자와 ‘구(芤)’라는 이름의 왕자 사이의 대화를 상상해 냈다. 이 두 사람이 ‘하늘(天)’에 대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볼테르는 자신의 이념을 서술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창의성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시누아즈리(Chinoiserie, 중국풍)’의 방식이었다.
볼테르가 원 잡극 『조씨고아(趙氏孤兒)』를 바탕으로 개작한 『중국 고아』에서 문학 속의 ‘중국풍’은 절정에 달했다. 『조씨고아』는 유럽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중국 희곡으로, 우리가 잘 아는 앙피트리트 호를 타고 중국에 도착한 드 프레마르 신부가 번역한 것이다. 볼테르 자신의 말에 따르면, 루소가 『학문예술론』에서 중국의 도덕적 힘이 결핍되었다고 비방한 것에 반격하기 위해 그는 책상 앞에 붙어앉아 『중국 고아』를 썼다.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해 배경을 춘추 시대에서 칭기즈칸의 철갑기병이 중원을 침공하는 시대로 일부러 바꾸었다. 볼테르의 헌사에 따르면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해 각색한 5막극”이다. 극 중 여주인공 이다메(Idamé)의 정절과 무사(無私)는 유가의 도덕적 감화력을 보여준다. 극 속의 중국이 아무리 생소해 보일지라도, 이것은 유럽 최초의 공문 제자가 중국인의 도덕적 지조를 위해 답변하며 지은 대본이었다.
볼테르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포츠담 궁전에서 3년 동안 머물며, ‘상수시(Sanssouci) 궁전’ 도서관의 풍부한 동양 장서 속에서 유영했다. 이 기간에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왕실 정원 안에 중국식 건축물을 지으라고 제안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뚝 서 있는, 금색과 청색 장식으로 꾸며져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중국 찻집(Chinesisches Haus)’이다. 바로 이 상수시 궁전에서 볼테르는 프랑스를 뒤흔든 『중국 고아』를 집필했다.
1755년, 『중국 고아』가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Théâtre-Français)에서 초연되었다. 파리 상류 사회의 모든 이가 화려한 성장을 하고 경편 마차를 타고 극장에 왔으며, 극장 앞 광장은 마차로 가득 찼다. 말들은 목을 치켜세우고 울부짖었으며, 공기 중에는 말들의 강렬한 체취와 땀 냄새가 감돌았고, 황혼 속 인파의 소란함은 파리에서 보기 드문 흥분감을 자아냈다. 당시 한 연극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이 다 왔다. 이 비극을 상연하는 것은 국가적인 대사다.”
이때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세기를 가로지르는 『중국 황제』 연회가 열린 지 정확히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반세기 동안 볼테르는 바스티유에 갇혔다 풀려났고, 영국과 프로이센에서 유학하며 영국의 뉴턴주의와 로크의 경험론을 흡수한 뒤 오랫동안 태양왕이 부재했던 파리로 돌아왔다. 동시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번역한 중국 전적들은 파리에서 대량으로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노버의 중국인
“하늘은 나의 조국이며, 모든 정직한 사람은 나의 동포다.”
(I hold Heaven for my fatherland and all right-thinking men for my compatriots.)
라이프니츠는 17세기 말의 ‘중국통’이라 할 수 있다. 그 머나먼 문명에 대해 그는 가장 공정하고도 열성적인 홍보대사였다. 그는 자신의 문에 “중국지식부문(中國知識部門)”이라고 적힌 종이를 붙여야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에게도 “중국인의 언어와 문자, 생활 방식, 예술과 수공예, 심지어 그들의 놀이조차 우리와는 전혀 맞지 않아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동료들과 달랐던 점은 라이프니츠가 중국인에게 유럽인이 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거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으로 중국 문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철학에서 양잠 기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것은 우주적 자아(universal man)를 품은 이 천재를 깊이 매료시켰다. 그는 문명의 길을 찾고 있던 당시 유럽에 고대 동방 국가가 존경할 만한 전형을 제공한다고 굳게 믿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인이 파악한 수많은 자연의 오묘함과 공예 기술은 우리가 아직 탐구하지 못한 것들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중국이나 우리 유럽 모두에게 (서구와의 교류가) 가장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그 일을 위해 공헌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의 주사를 놓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을 한순간에 그들에게 전수할 수 있고, 우리 역시 그들로부터 단번에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류가 없다면 우리는 수 세기가 지나야 이런 지식들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라이프니츠는 일찍이 중국인들이 “관찰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 수 위이며, 우리의 강점은 이론적 사유”임을 꿰뚫어 보았다. “중국인은 유럽인과 선물을 교환하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 한 자루의 밝은 등불로 다른 등불을 밝혀야 한다.”
“우리의 만남과 교류는 중대하며, 그것은 수천 가지 아름다운 성과와 무수한 발명 및 창조를 잉태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기울인 많은 노력은 바로 이 동서 문명의 교차점이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697년, 라이프니츠는 선교사들의 서신을 편집하여 『중국 근사(Novissima Sinica)』를 펴냈으며, 친히 이 책에 “우리 시대를 밝히기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다. 책 속에는 중국의 양잠 방직, 제지 인쇄, 야금 광산, 천문 물리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었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도덕이 급격히 타락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계시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선교사를 보내듯, 중국에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우리에게 자연신학의 운용과 실천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중국 근사』를 읽은 후 부베(白晉)은 특별히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를 보내며 『강희제전』을 증정했다. 백진과의 서신 왕래 중 라이프니츠는 소옹(邵雍 소강절)의 64괘 차서와 방위 도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가의 양극설(兩極說)이 자신이 발명한 이진법과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기쁨에 넘친 그는 강희대제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 국적 취득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표트르 대제에게 자신이 제작한 연산기 복제품을 강희제에게 선물할 것을 제안하며, 러시아가 중국과 유럽 사이의 가교가 되기를 희망했다.
마치 보물 상자를 연 것처럼, 라이프니츠에게 중국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관한 기발한 생각 중 하나는 태양왕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는 희귀한 상형문자인 한자를 기초로 세계 공용어를 만들어 전 세계에 통용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는 심지어 이것이 새로운 계몽운동 학자들의 언어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라이프니츠의 깊은 철학 체계 속에는 중국 철학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중국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열정은 평생 지속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중국인의 종교 사상에 관한 원고인 『중국인의 자연신학에 관한 논고』를 집필하고 있었다.
중국을 향하여
“중국,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곳, 우주의 중심점. 모든 햇빛이 비치고 만물이 생존하는 곳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제국이다.” (도밍고 나바레테(Domingo Navarrete) 『나바레테 수사 여행기』)
유구한 고대 문명은 유럽 성찰의 참조가 되었다. 중국의 평등한 교육 제도는 영국의 교육 개혁에 영향을 주었고, 중화 제국의 5천 년 평화롭고 안정된 정체(政體)는 오랜 전쟁에 시달린 유럽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 체제와 해결하기 어려운 종교 분쟁을 반성하게 했다. 중국의 과거 제도에 대해 유럽인들은 또한 크게 찬탄하며,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등용하는 최고의 제도라고 여겼다. 이는 귀족 제도가 매우 엄격했던 유럽에 좋은 귀감이 되었다. 17세기 말 유럽 농업이 곤경에 처했을 때, 프랑스 경제학자 케네(Quesnay)의 추진 아래 중국의 중농주의(重農主義)는 프랑스에 영향을 미쳤다.
수천 년간 이어진 유가의 경세치국(經世治國) 속에서 유럽 학자들은 완벽한 모델을 발견했으며, 심지어 유럽에 “중국의 정신을 이식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초기 계몽 사상가들에게 중화 제국은 최고의 윤리 원칙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들에게 있어 마테오 리치가 비판했던 중국인의 상무(尙武) 정신 결여는 나약함이 아니라 일종의 미덕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의 브라이턴(Brighton) 연회장 사방 벽에는 관복을 입은 중국 문관과 백성들의 생활을 담은 거대한 채색화가 걸려 인류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다. 오늘날까지도 이 거대한 초상화들은 샹들리에가 높이 걸린 화려한 연회장에 여전히 걸려 있다.
중국 전적과 문헌을 대량으로 출판한 파리는 한학(漢學 중국학)의 수도가 되었다. 1814년, 프랑스 한림원은 한학 강좌를 개설했고, 중국 연구는 정식으로 서구 학계에 진입했다.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된 『도덕경』은 논리와 추론을 중시하던 유럽인들의 머릿속을 열어젖혔으며, 유럽의 현대 인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 오면, 한 세기 전 태양왕의 사절들이 중국으로 출발하며 가졌던 사명은 아름답게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기대했던 대로, 동서양 두 거대 문명의 빛이 교차하며 눈부신 휘황함을 창조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무대 위에서, 광풍은 언제라도 가장 풍성한 결실을 삼키고 인간의 모든 노력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1/9/n4612325.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