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행복하고 또한 가장 존경할 만한 시대는 바로 사람들이 공자의 법규를 따랐던 시대다. 도덕 면에서 유럽인은 마땅히 중국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중국에 대해 우리는 찬탄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들을 모방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인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불행이다.” — 볼테르
“중국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일체로 간주한다. 중국인은 인류 그 자체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다른 민족들 이외에, 그들 위에 초연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다른 민족들이 현실적으로는 중국에 예속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중국인의 관념에 따르면 이들 민족은 모두 그들에게 예속된 존재들이다.” — 셸링
“나처럼 살면서 다행히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과, 그리고 『주역』의 예견적 힘과 직접적인 정신적 교류를 나눌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아르키메데스 점’을 접하게 되며, 이 ‘아르키메데스 점’은 심리적 태도에 관한 우리 서구의 기초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빌헬름의 작업은 중국 문화의 유전자를 가져왔으며, 우리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일종의 중국 문화 유전자를 가져왔다. 이것은 빌헬름이 전력을 다해 투신한 문화적 사명이었으며, 그는 동양이 우리 영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보물 같은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 융
유럽에 온 공자
루브르 박물관에 나타났던 첫 번째 중국인 심복종(沈福宗)을 기억하는가? 1684년, 벨기에 예수회 선교사 필리프 쿠플레(Philippe Couplet, 柏應理)는 심복종을 데리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서 태양왕 루이 14세를 알현했다. 그들은 프로스페로 인토르체타(Prospero Intorcetta), 쿠플레 등이 편찬한 라틴어판 『사서(四書)』를 헌정하며 태양왕에게 파리에서의 출판을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논어』, 『대학』, 『중용』을 포함한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다. 출판 당시 책에 실린 태양왕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 극동에서 한 군자가 오셨으니, 그는 중화 제국의 황실 혈통에서 나오셨으며 사람들은 그를 공부자(孔夫子)라 부릅니다. 모든 중국인이 한목소리로 자기 나라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윤리학과 정치학 스승이자 성현으로 받드는 분입니다.”
이 책의 준비 작업은 100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의 심혈이 담겨 있었다. 한 세기 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 이름 마리두利瑪竇)는 이미 『논어』를 라틴어로 거칠게 번역한 바 있다. 그 후 프랑스인, 포르투갈인, 제노바인, 시칠리아인, 벨기에인, 오스트리아인 등 최소 17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번역 및 해설 작업에 참여했다. 유럽인들, 특히 로마 교황청이 유가 철학은 무신론이 아니며 이단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유럽 선교사들은 전력을 다했다.
심복종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보여준 중국 문화와 그가 헌정한 『중국 철학자 공자』는 태양왕을 매우 기쁘게 했다. 그는 새로 완공된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모든 분수를 틀라고 명령했다. 정원에서 마음껏 뿜어져 나오는 장엄한 분수들은 이 동방 고국 문명의 도래를 축하했으며, 고국의 성인과 희귀한 상형문자가 함께 프랑스에 도착한 것을 환호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중국에서 온 ‘앙피트리트(Amphitrite)’를 구경했던 것처럼, 수많은 분수의 환호 속에서 이 생존한 고대 문명은 유럽의 문화 수도인 태양왕의 궁전으로 입성했다.
당시 파리는 유럽 출판업의 중심지였다. 유물들이 모여 있는 파리에 나타난 『중국 철학자 공자』의 책장에는 묘당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한 건축물 앞에 키가 큰 공자가 읍(揖)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동방 성현의 형상이 유럽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유럽은 막 길었던 30년 전쟁을 겪은 후였고, 유럽인들은 지루한 종교 분쟁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5천 년을 이어오며 사라지지 않은 이 오래된 문명은 배울 점이 많은 곳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발굴된 그리스·로마 고전이 유럽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듯, 이제 스스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윤리와 질서를 중시하는 동방 철학이 유럽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철학자 공자』에는 『사서』의 번역 소개(신학과 상충한다고 간주된 『맹자』는 제외)와 더불어 『공자전』, 『주역 64괘와 그 의미』, 『중화 제국 연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정교하게 편찬한 이 서적들은 유럽인들에게 중국 전통 유도(儒道) 철학으로 들어가는 천창(天窓)을 열어주었다. 이 책은 큰 인기를 얻어 같은 해 파리에서 재판되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서구인들은 신비한 동방에서 고도로 성숙한 고대 문명을 발견했다. 지혜로운 항해 탐험가에게 이 발견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가득한 신대륙에 도달한 것과 같았다.
여기서부터 기물(器物), 문화, 철학, 생활을 아우르는 100년에 걸친 유럽의 ‘중국 열풍’이 시작되었다.
중화 제국의 인상
명대(明代)에 북경에 온 마테오 리치로부터 시작하여, 중국 전역에 흩어진 선교사들은 부지런히 풍부한 수기(手記)와 원고를 썼다. 이 원고들은 18세기에 세 권의 방대한 총서로 편집되어 18세기 유럽의 중국 관련 3대 명저가 되었다. 바로 『중화제국지(中華帝國志)』, 『예수회 선교사 서간집』, 『북경 예수회 선교사 중국 기요』다.
그중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장바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가 편찬하여 1735년 파리에서 출판된 『중화제국지』는 유럽 전역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16세기 스페인 선교사 곤살레스 데 멘도사(González de Mendoza)의 『대중화제국지(大中華帝國志)』와 멋진 대조를 이루었다. 책 속의 아름다운 동판화와 백과사전처럼 풍부한 내용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유럽에서는 중국에 관한 방대한 서적들이 출판되었고, 동시에 더 많은 예수회 선교사가 가져온 원고들이 성당 도서실에 소장되어 시간 속에 봉인되었다.
다음은 이 원고들에 나타난 중국의 모습들이다.
“그들이 입는 옷은 우리 고대의 양식과 같다. 긴 치마에 주름이 가득하며, 가슴에는 왼쪽으로 묶는 선이 있고, 소매는 매우 넓고 크다. 겉옷 위에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가사와 장포를 입는데 그 형태는 우리가 입는 것과 같으나 소매가 더 크다. 왕실 혈통과 관직을 제수받은 사람은 의복이 다른 신사들과 다르다.”
“이 큰길에는 짐 실은 말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상업 화물과 다른 물건들을 운반하는데, 대다수는 노새다. 길은 매우 넓어 20명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도 서로 방해되지 않으며, 커다란 돌이 깔려 있다. 다른 성의 큰길 사정도 이와 같다고 한다.” — 멘도사 『대중화제국지』, 1585
“잔치와 새해 축제 연회는 3일간 계속된다. 그들은 이 3일 동안 밤낮으로 연극을 보며 사람들은 연극에 도취된다. 3일 동안 성문은 닫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느라 때때로 통제력을 잃기 때문이다.” — 무명씨, 16세기
“황제는 친절하게 백성들에게 다가갔으며, 북경에서의 관례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애썼다. 그는 호위병들에게 백성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은 그들의 황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여겼으며, 그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성스러운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 그들은 멀리서 이곳까지 달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황제가 이곳에 친히 임하는 것은 그들에게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또한 신민들이 보여주는 정성을 매우 기뻐하며 모든 존엄한 장식을 거두고 백성들이 가까이 오게 함으로써,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소박한 정신을 신민들에게 보여주었다.” —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타타르 여행기』, 1682
“관리들의 관저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여러 겹의 마당을 지나야만 그들이 부하를 접견하고 친구를 만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들이 행차할 때는 위세가 대단하다. 총독(두 성을 관할하는 관리)의 예를 들면, 최소 100명의 수행원이 없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수행원들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각자의 직무를 수행한다. 일부는 전용 제복을 입고 각종 푯말을 들고 총독 앞에서 길을 열며, 때로는 대규모 군인 부대가 총독의 좌우를 도보로 따른다. 총독은 6~8명이 어깨에 메는 크고 황금색인 가마를 타고 전체 행렬의 중간 높은 곳에서 나아간다. 이런 행렬은 종종 거리 전체를 점유한다. 백성들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양옆에 멈춰서 엄숙하게 서 있는다.” — 조제프 앙리 마리 드 프레마르(Joseph Henri Marie de Prémare, 馬若瑟) 신부, 1699
“우리는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 시냇물 속에는 큰 돌들이 가득한데, 모두 비가 오는 날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다. 산벼랑 위에는 초가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경작지가 있어 마치 중국 자기나 다른 공예품의 인물 산수화가 재현된 듯하다. 많은 유럽인이 이것들을 환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모든 것은 진짜다.” — 존 벨(John Bell), 1719~22
빛의 교류(Commerce of Light)
앙피트리트 호 선실에는 자기, 비단, 칠금 가구 외에도 강희대제가 보낸 49권의 중국 고전들이 실려 있었다. 볼테르가 말했듯 “유럽의 왕족과 상인들이 동방을 발견했을 때는 단지 부를 구하는 법만을 알았으나, 철학자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정신적·물질적 세계를 발견했다.” (『풍속론』)
17, 18세기 유럽인들은 기물, 제도, 인륜 도덕 및 문명의 유구성 면에서 중국이 유럽을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덧 유럽 귀족들의 생활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중국에서 온 비단을 입고, 정교한 자기 잔을 들고 중국 차를 마셨으며, 벽난로 위에는 청화자기가 놓였다. 항아리 몸통에 손으로 그린 채색화 속에서 긴 도포를 입은 중국 문인이 산림과 강가에 앉아 있는 모습은 사람들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중국 고전이 대량으로 출판됨에 따라 유럽인들의 중국에 대한 매혹은 문명의 내적 함의를 탐구하는 것으로 상승했다. 왕실 귀족부터 모든 유럽의 문인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반항아 볼테르부터 만능 천재로 불리는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마치 보물 창고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탐험하듯 이 고대 문명의 전적(典籍)들을 갈구하며 읽었다. 중국 풍토와 민정을 소개하는 도판이 곁들여진 책들이 잇따라 출판되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중국 고전 번역물들은 유럽인들의 깊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고 덕분에 중국 문명의 정신이 하나씩 드러났다. 공자, 노자 등 유럽인들이 들어본 적 없는 동방의 성인들이 나타나 유럽인들이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기묘한 말들을 쏟아냈다. 유럽의 앞날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이 펼쳐진 것이다.
유럽인들은 중국의 수천 년 역사를 펼쳐 보았지만, 자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신화 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복희(伏羲), 신농(神農)처럼 이름부터 외모까지 생소한 중국인의 조상들이 과연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혼란스러워했다. 이토록 오래되고 자신들과 다른 문명을 마주하며 유럽인들의 유럽 중심주의 의식은 격렬한 충격을 받았다.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중국의 여러 면을 조롱하며 역사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이 동서양 문화의 충돌 속에서 다원적 문명을 믿는 유럽 문인들은 중화 제국의 미덕을 보았다. 이들에게 이 뛰어난 고대 문명은 보물을 열어 보이며 동서양 문명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보여주었다.
볼테르는 예리한 필치로 동포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이 중국 전적들은 2~3천 년 전, 유럽인들이 아직 글자도 모를 때 쓰였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우리가 아직 문자를 발명하지 못했을 때, 이미 안정된 언어로 연속 기록된 역사를 소유했던 한 민족을 먼저 주목하자.” (『풍속론』)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더욱 생생하다. 그는 유럽과 중국 사이의 교류를 ‘빛의 교환’이라 불렀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가장 위대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유럽과 중국의 과학과 기술의 성장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이것은 문명의 빛을 교환하는 것과 같아서,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그들이 수천 년 동안 분투해 얻은 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그들 또한 우리의 기술을 배우게 하여 양측의 문화 보물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광스러운 위업이다.”
평생 보따리를 메고 다니며 각지에 지식의 씨앗을 뿌렸던 라이프니츠는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최대의 열정으로 중국 문화와 철학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중국 근사(中國近事 Novissima Sinica)』를 편집하여 출판했다.
중국인의 하늘: 유신론 vs 무신론
유럽 선교사들이 중국 고전을 열정적으로 번역한 이면에는 사실 거센 암류가 숨어 있었다. 『철학자 공자』의 원고가 처음 형성된 것은 1667년이었다. 중국의 제사 및 공자 제례 의례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오해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광주(廣州) 예수회원에서 40일간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배경에는 2세기 동안 지속되며 깊은 영향을 미친 ‘중국 전례 논쟁’이 있었다.
같은 가톨릭 내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테오 리치의 전통을 따라 중국 전통 제례를 관용적으로 대했으며, 중국인들이 하늘을 믿고 신을 공경하는 정신을 깊이 이해했다. 그러나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중국인의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았으며, 중국을 신령을 믿지 않는 무신론 국가라고 선언했다. 그들이 로마 교황청에 보고서를 올리자 교황청은 조사에 착수했다.
중국인들이 믿는 천도(天道)와 조상 제사가 기독교 정신과 위배되지 않음을 교황청에 설명하기 위해, 광주 회의에서 쿠플레 등은 마테오 리치 등 초기 선교사들의 간략한 『사서』 번역을 기초로 『사서』를 새로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훗날 유럽인들에게 중국 철학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철학자 공자』가 되었다. 이후 100년 동안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든 역량을 쏟아 한문으로 된 중국의 주요 전적들을 번역했다. 각국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힘겹게 번역한 중국 전적들에는 하나의 사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교황청의 오해를 불식시켜 기독교가 중국에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적들의 번역은 경천신신(敬天信神)하는 중국 문명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이 경건한 고대 문명의 빛을 멀리 기독교를 믿는 유럽에까지 전파했다.
다음은 유럽 선교사들이 중국 전적을 번역한 성과들이다. 18세기 초에는 『사서』가 이미 유럽 문자로 모두 번역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가장 먼저 주희(朱熹)의 주석이 달린 『사서』를 번역했고, 인토르체타와 지롤라모 그라비나(Girolamo Gravina, 郭納爵)가 『논어』와 『대학』을 함께 번역했는데 후자는 『중국의 지혜』라 명명되었다. 인토르체타는 『중용』을 번역했고, 브누아 프랑수아 드 아로데(Benoît François de Harrouët, 蔣友仁)는 『맹자』를 번역했다(미완성).
『오경(五經)』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한 인물은 니콜라 트리교(Nicolas Trigault, 金尼閣)였다. 장프랑수아 푸케(Jean-François Foucquet, 雷孝思)는 『주역』을, 드 프레마르는 『서경』과 『시경』을 선별하여 번역했으며, 장조제프 마리 아미오(Jean Joseph Marie Amiot, 孫璋)는 『예기』를, 앙투안 고빌(Antoine Gaubil, 宋君榮)은 『시경』과 『서경』을 번역했다. 프랑수아 노엘(François Noël, 衛方濟)은 『중국 철학자 공자』를 기초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효경』, 『삼자경』을 합쳐 라틴어판 『중국 6대 경전』으로 번역했다.
이 긴 이름들을 되새겨보며 우리는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건륭제를 위해 대수법(大水法, 분수 시설)을 설계한 아로데, 조아생 부베(Joachim Bouvet, 白晉)와 함께 같은 밸를 타고 중국에 와서 남방의 아름다운 물의 풍경을 처음 보고 문학을 편애했던 드 프레마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황무지로 가서 지형을 관측하며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제작에 크게 기여한 푸케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태양왕이 보낸 이 사절들은 중화 제국에서의 나날을 잘 활용해 하늘이 내린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했다. 상형문자에서 라틴어로 옮겨진 이 두꺼운 책장들은 그들이 두 자루의 촛불을 태우듯 밤마다 한 자 한 자 갈고닦아 만든 결과물이다. 동시에 이 방대한 공정에는 그들의 절박한 마음이 주입되어 있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중국에는 20만 명이 넘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이 신자들(그리고 모든 중국인)의 경천제조(敬天祭祖) 전통을 강력하게 변호하기 위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고대 국가의 국민이 결코 우상 숭배자가 아니며 무신론자도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씨앗을 이 고대 국민의 마음속에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모든 오묘함으로 들어가는 문
라틴어로 번역된 경전 중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노자의 『도덕경』이었다. 16세기부터 『도덕경』은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17개 유럽 언어로 번역되어 총 1,000여 종의 판본이 나왔다. 외국어로 번역된 세계 고전 중 『성경』이 발행량 1위, 『도덕경』이 2위다. 또한 1720년에 이르러 루이 14세가 생전에 확장을 위해 노력했던 국왕 도서관은 1,000권 이상의 한문 서적을 보유하게 되었다.
“도로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훌륭한 여행가는 정해진 계획이 없으며, 어디에 도착하려 하지도 않는다.”
“신비로워 헤아릴 수 없고 오묘하여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모든 기이함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담(李聃, 노자)의 현묘한 문장들이 유럽인들의 심령에 비쳤을 때, 플라톤식 사유 방식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이것이 예사롭지 않은 문화적 조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노자와 공자를 발견했다는 것, 즉 중국 철학의 유도(儒道) 양대 원천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지구상에서 또 다른 견고한 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모든 신대륙이 그러하듯, 이 대륙은 그들을 무한히 광활한 공간으로 인도했다.
중국에서 온 전적들은 유럽인들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밤낮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은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 고대 문명의 정신이 유럽에서 발효되기 위해서는 유럽 본토 지식인들의 안내가 필요했다. 역사의 안배는 실로 절묘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재능 있고 개성 넘치는 두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이 안내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들은 최대의 열정으로 동서양 문화 교류라는 대극(大劇)의 대들보를 짊어졌다. 그리하여 태양왕의 세기에 성대하게 막을 올린 이 문화사적 희극은 감동적인 풍채를 갖추게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1/1/n460812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