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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청사진】 태양왕의 세기 (7) 유럽의 백 년 중국 열풍

하도(夏禱)

【정견망】

남경 도자기탑, 『네덜란드 동인도 공사 중국 사절단』 (퍼블릭 도메인)

중국에서 온 거대한 범선

1년 후, 동인도 회사는 눈부신 청화백자가 가득 담긴 상자들과 비단, 최상품 차(茶), 자단목과 화리목 가구, 대모(바다거북 껍질) 병풍, 그리고 방대한 전적들을 수매하여 귀항을 앞둔 ‘앙피트리트 호’의 선실에 실었다. 부두 노동자들이 무거운 나무 상자들을 메고 사다리를 올라 선실을 가득 채웠다. 앙피트리트 호의 흘수선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선체는 묵직하게 해수면을 눌렀다.

170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리셔스 섬의 포트루이스 해안에 장엄한 범선 한 척이 나타났다. 수십 장의 상앗빛 돛이 바닷바람을 가득 머금고 푸른 해면을 가르며 항구로 들어왔다. 해안가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앙피트리트다! 배가 돌아왔다!”

1698년 이 배가 중국을 향해 출항한 이후, 사람들은 중화제국으로 향했던 이 첫 번째 거대한 배를 늘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이 배는 겹겹의 험난한 바다를 건너 중국에서 돌아왔다. 이는 중국에서 직접 출항한 최초의 상선이었으며, 선실 안은 고대 국가의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잦은 전쟁과 당시 해상 무역에서 네덜란드에 한참 뒤처져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거대한 범선이 가져온 선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선원들이 선실을 여는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상자들을 밖으로 실어 날랐다. 포트루이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들이밀며 대선이 가져온 희귀한 물건들을 보려 애썼다. 당시 아시아의 물건들은 대부분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전달되었기에, 중국에서 직접 온 물건들은 매우 희귀했다.

커다란 나무 상자들이 내려졌다. 가끔 포장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는 병풍, 화리목 의자, 침대 등은 그 형체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포장용 천이 살짝 느슨해지기라도 하면 구경꾼들은 흥분하며 외쳤다. “보게! 저게 무엇이오?” 그것은 화리목 탁자 끝에 조각된 사자 발 모양이었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뭘 봐? 당신들에겐 너무 비싼 물건들이니 신경 끄쇼!” 짐을 지키던 일등항해사가 선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아래로 소리쳤다. 험한 바다 위에서 이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화물을 내리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훗날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거대한 배가 포트루이스 항에 닿았던 그 신비로운 날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유럽 최대의 유행

정교한 문양의 청화백자, 은은하게 빛나는 비단, 대모 병풍에 박힌 산수화,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들, 다소 독특한 모양의 의자들. 고대 국가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앙피트리트 호가 실어온 동방의 화물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곧 유럽 귀족들이 앞다투어 수집하는 보물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왕실은 위엄 있는 중국 비단을 입기 시작했다. 흠차대신의 도포를 입었던 부베처럼, 유럽인들은 우아한 중국식 예복을 입었다. 옷감에 수놓아진 문양들은 고대 문명에서 온 고결한 기품을 자아냈다. 사실 중국 비단의 특수한 질감은 이미 로마 제국 시절부터 귀족들의 탄성을 자아낸 바 있다. 이제 유럽인들은 그 비단을 직접 몸에 걸치게 된 것이다.

이미 17세기 중반, 루이 14세와 그의 대신 마자랭, 사관(史官) 라신은 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많은 유럽인은 차가 통풍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1657년 과학자 종케(Jonquet)는 차를 ‘신성한 약초’라 칭송하기도 했다. 18세기 초 파리에서 차의 인기는 스페인의 초콜릿 열풍만큼이나 대단했다. 영국에서 차는 귀족 사회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다. 앤 여왕은 화려한 중국 비단 옷을 입고 중국 가구와 병풍으로 장식된 방에서 ‘중국식 티 파티’를 열었다. 점차 차는 영국인의 일상이 되었다.

중국풍(Chinoiserie 시누아즈리)는 유럽 최대의 유행이 되었다. 프랑스어로 중국을 뜻하는 ‘La Chine’은 독특한 운치를 담고 있었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단어는 당시 유행하던 동방의 정조를 폭넓게 일컫는 말이었다. 18세기에 이 단어는 유럽의 패션과 생활 전반에 스며든 황금빛 유행이었다. 귀족 가문에 청화백자 하나가 없으면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산수와 인물, 꽃과 새, 양잠과 모내기 풍경이 그려진 이국적인 중국 벽지가 귀족들의 거실을 장식했다. 중국의 옥, 회화, 은기, 석조상 등이 유럽 귀족들의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중국풍이 유럽의 유행을 주도했다.

뛰어난 기술력과 깊은 문화적 저력, 그리고 고대 문명의 희귀한 미감(美感)을 지닌 채 중국은 유럽 앞에 나타났다. 유럽인들은 중국에서 온 모든 것에 매료되었다. 동방 고대 국가의 기물들은 특별한 무게감을 지니며 귀족의 지위를 상징했다. 당시 유럽의 도자기 및 칠기 제조 기술은 중국에 한참 뒤처져 있었기에, 매끄럽고 정교한 청화백자는 그 형태와 문양만으로도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금칠을 한 가구들은 부의 상징이었으며, 부유층은 거액을 들여 중국에 가구를 주문 제작하기도 했다.

중국의 보물들은 파리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열풍의 선구자는 다시 한번 ‘태양왕’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속의 ‘중국 황제’

1700년 1월 7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신년 가장무도회의 이름은 ‘중국 황제’였다. 남녀 배우들은 화려한 중국 비단 옷을 입었고, 홀에는 중국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중국풍 장식들로 가득 찬 연회장은 여느 때와 다른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비단 자수가 놓인 중국 도포를 입고 8인용 가마를 타고 황금빛 홀에 등장하자 연회장에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1664년 베르사유 마당에서 중세 기사로 분했던 청년 루이를 기억하는가? 이제 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고대 문명인 동방 제국의 황제로 분했다.

태양왕이 중국 문명을 존중하고 예술과 의례를 엄숙히 대했던 만큼, 이 신년 연회는 단순히 이국적인 흥미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부베의 『강희제전』이 널리 읽히고 있었고, 책 속 강희제의 완벽한 제왕적 이미지는 유럽인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머나먼 곳의 전형이자 광명과도 같은 존재인 중국 황제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연회의 주제가 된 것이다.

태양왕의 일거수일투족은 유럽 왕실의 본보기가 되었다. 1715년 강건왕 아우구스투스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환영식에는 커다란 화개(華蓋)를 얹은 배가 등장했다. 그 아래에는 중국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배우들이 타고 있었으며, 사공들은 운하를 따라 노를 저었다. 이탈리아 북서부 토리노에서는 중국 황제가 카니발의 주제가 되어 거리 행진을 벌였다. 또한 유럽 왕실은 중국 황제가 매년 봄마다 직접 밭을 가는 ‘친경례(耕措禮)’를 모방하여 루이 15세부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까지 이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우리는 유럽이 이러한 방식으로 18세기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중국 탑(Pagoda)

1670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중국 궁전(Trianon de Porcelaine)’을 지었다. 이후 유럽 각국은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니호프의 저서 『네덜란드 동인도 공사 중국 사절단』에는 난징 도자기탑 삽화가 실려 있었다. 넓은 지평선 위에 높이 솟은 정교한 도자기탑, 층마다 매달린 풍경 소리, 엄숙하면서도 순수한 미감을 간직한 그 모습은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정자에서 탑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대지에는 중국풍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프로이센 상수시 궁전의 중국 찻집, 스톡홀름 인근의 드로트닝홀름 궁전 내 중국 정자, 뮌헨 영국 정원의 중국 탑 등은 유럽의 풍경 속에 독특한 자취를 남겼다.

이 중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는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가 지은 로코코 양식의 ‘중국 마을’일 것이다. 동화 같은 색채가 입혀진 마을 내 ‘블루 홀’은 벽지부터 벽난로 위의 도자기까지 강렬한 중국풍을 띠고 있었다. 이 낭만적인 방들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문화 기호였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그런 ‘중국’은 실재하지 않았다. 중국풍이 로코코와 결합할수록 그것은 실제 중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진짜 중국은 존재했다. 아마도 그 실재성 때문에, 그리고 독특함과 헤아릴 수 없는 깊이 때문에 중국은 결코 완벽히 모방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중국 원림(園林)과 유럽의 마음

유럽의 중국 건축 모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원림’이 유럽인의 내면에 준 영향이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 때부터 유럽 선교사들은 중국 원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기록들은 유럽으로 전해져 끝없는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건륭제 시기 원명원(圓明園)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서구식 정원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굽이진 길을 지나면 뜻밖의 풍경이 나타나고, 사물에 따라 경치를 조성하며, 막힌 듯하다가 다시 탁 트이는 중국 원림의 경지는 직선 위주의 유럽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원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 많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곳에는 인공 가산(假山)이 있는데 거친 돌들을 쌓아 산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방과 연못, 나무들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여름철 산 동굴은 서늘하여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러 간다…” (마테오 리치, 『중국 전교기』)

“이 환상적인 풍경은 대리석과 청동, 도자기로 지어졌고 향나무로 들보를 만들었으며 보석과 비단으로 덮여 있다. 시인 기질을 가진 장인들이 선경을 만들어낸 후 정원과 분수, 노니는 백조와 공작을 더했다.” (빅토르 위고, 『버틀러 대위에게 보내는 편지』)

중국에서 수년 동안 생활한 예수회원들은 이 머나먼 타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다른 사고방식, 자연과 소통하는 다른 언어를 배웠다. 이 점이 백 년간 이어진 중국 열풍 속에 담긴 깊은 문화적 함의였다.

5천 년의 고대 문명을 마주하며 유럽이 본 것이 단지 청화백자와 비단뿐이었다면, 이는 동서양 문명 모두에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유럽인들은 달빛 아래 시적인 원명원의 정원과 중국 대지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들을 보았다. 자연을 억압하지 않고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생동감 넘치는 풍격을 발견했다. 프랑스 예수회원 아미오(Amiot)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이 정원을 찾는 이유는 세상의 번뇌를 피하고 자유롭게 호흡하며, 고요히 홀로 있는 속에서 영혼과 사상의 안녕을 누리기 위함이다.”

우리는 고시(古詩) 속에서 문인들이 깊은 산림을 거닐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찾는 모습을 자주 본다. 중국 원림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노닐며 안식하는 곳이자 내면의 고요와 조화를 회복하는 장소다. 이러한 정원 미학은 유럽인들에게 자연과 인간의 또 다른 관계를 일깨워주었다. 유럽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구름과 안개가 감도는 동방의 정취는 많은 유럽인에게 그들의 갈구하는 내면과 더 가깝게 닿아 있었다.

중국의 탑과 정자가 유럽의 지평선에 나타나면서 유럽의 풍경은 깊은 여운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그윽한 정원은 유럽인의 내면에 더 깊은 차원을 부여했다. 미덕을 간직한 비단과 도자기에서 시작하여 천지의 기운을 마시고 뱉는 정원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또 다른 삶, 또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2/24/n460284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