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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청사진】 태양왕의 세기 (6) 중국 황제의 초상화

하도(夏禱)

【정견망】

왼쪽: 루이 14세 기마 초상화; 오른쪽: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건륭황제대열도(乾隆皇帝大閱圖) 축, 비단에 채색, 건륭 23년 남원 대열 시 그림. (퍼블릭 도메인, 에포크타임스 합성)

머나먼 동방에서 온 서신

지구 반대편의 중화제국에 도착한 박학하고 근면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만주어와 한문을 익혔으며, 부지런히 업무를 전개했다. 그들은 사방을 분주히 다니며 중국 지도를 측량했고, 가장 외진 시골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열정적으로 전교(傳敎)했으며, 황제와 황자들에게 기하학, 악리(樂理), 인체 구조를 가르쳤다. 매일 바쁜 업무 외에도 그들은 회색과 푸른색의 지혜로운 눈으로 중화제국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유럽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서신들이 한 통씩 도착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 도덕, 풍속 습관과 학설 신조에 매우 집착하며, 오직 중국만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기독교가 위대하고 신성하며 불변의 종교임을 인정하게 했을 때 그들은 입교할 준비가 된 듯 보였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냉담하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우리 책에서는 당신들의 종교에 관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이것은 외래 종교인데, 만약 중국 이외에 정말로 좋은 것이나 진실한 것이 있다면 우리 성인(聖人) 학자들이 몰랐을 리 있겠소?'” (프랑수아 노엘 신부가 가스파르 카스테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03년, 강서 무주부撫州府)

“주강(珠江)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중국이 어떤 모습인지 보기 시작했습니다. 주강 양안에는 끝없이 펼쳐진 논이 아름다운 큰 잔디밭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무수히 교차하는 작은 수로들이 논을 한 칸 한 칸 나누고 있었습니다. 멀리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는 것만 보일 뿐 배 아래의 강물은 보이지 않아, 마치 배들이 잔디밭 위를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더 멀리 있는 작은 언덕 위에는 나무들이 울창했고, 계곡은 마치 튈르리 정원의 화단처럼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마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 전원의 신선한 기운이 풍겼습니다. 천태만상의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발길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출발해 8개월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11월 6일에서 7일 사이 밤에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조셉 드 프레마르 신부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고해신부 라 셰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699년, 광주)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고 가장 부유한 국가라는 식의 말은 더 이상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여러분께 수천 번은 써 보내드렸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그 궁정의 화려함, 고위 관료들의 부유함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선 눈을 뗄 수 없이 화려한 실크, 도자기, 가구와 보물 소장품에 강한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반드시 더 화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 유럽 공예품들보다 훨씬 더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조셉 드 프레마르 신부가 가스파르 카스테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00년, 강서 무주부)

“이 불행한 이들의 노고는 사람들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한 중국인은 온종일 두 손으로 땅을 일구며, 종종 무릎까지 빠지는 논에서 노동합니다. 하지만 저녁에 아무런 맛도 없는 맑은 물 국에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이것이 그의 일상입니다. 많은 이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토록 자연스러운 욕망을 그들에게서 제거한다면, 그들 품행의 순결함은 가난 및 노동 강도와 매우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조셉 드 프레마르 신부가 가스파르 카스테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00년, 강서 무주부)

이 편지들은 중화제국과 유럽 사이에 하나의 교량을 열었다. 이것은 유럽인 앞에 실제로 놓인 문명 고국(古國)의 부유함과 가난함, 자부심과 어리석음이었다. 이 서신들은 70년에 걸쳐 편집되어 『예수회 선교사 서신집』으로 탄생했으며, 18세기 상반기 파리에서 잇따라 출판되었다. 그중 10권은 중국의 정치 제도, 풍속, 역사 지리, 철학 사상에 관한 관찰 실록이었다. 중국의 기물들이 대량으로 유럽에 도착하기 전, 이 서신들은 머나먼 고대 국가에서 온 사절과 같이 유럽인들에게 먼 곳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해 주었다. 동시에 이 서신들은 유럽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쏟은 노고와 끊임없는 경작을 기록했다.

Israel_Silvestre_Versailles_ 1682年的凡尔赛宫。(维基百科公共领域)

이스라엘 실베스트르, 1682년의 베르사유 궁전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베르사유 궁전으로의 귀환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정사에 힘쓴 강희제에게 조아생 부베 등은 만청제국이 서구 문화 지식을 흡수하는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왕립 과학원 설립을 도울 더 많은 ‘국왕의 수학자’가 필요했고, 이어지는 탐사와 문화 전파를 완수할 음악, 예술, 과학, 지리에 재능 있는 선교사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1693년, 강희제는 부베를 프랑스로 파견해 더 박학한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불러오게 했다. 여기서 부베의 신분에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만청(滿淸) 흠차대신(欽差大臣)의 도포를 입고, 강희대제의 조서와 상자 가득한 귀한 선물을 지참했다. 프랑스 태양왕의 사절에서 청 강희대제의 신하로 변모한 그는 두 번째로 거대한 파도를 가로지르고 험난한 해로와 육로를 거쳐, 12년 전 처음 출발했던 브레스트 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고향을 떠난 지 수년 만에 부베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때는 이미 1697년이었다. 떠날 때 아직 준공되지 않았던 베르사유 궁전은 이제 주요 궁전들이 휘황찬란하게 완공되어 햇빛 아래 서 있었으며, 전 유럽이 우러러보는 왕궁다운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부베는 동양의 비단 도포를 입고 베르사유 궁전의 거대한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꿈속에서 자신은 기이한 방언을 내뱉는 것 같았으나, 깨어났을 때는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모든 신하와 귀족들을 경악하게 만든 광경 속에서, 청 흠차대신의 도포를 입고 목에는 천주교 십자가를 건 부베가 나타났다. 베르사유 궁전은 물론이고 파리 전체가 요동쳤다.

눈이 깊고 코가 높은 부베는 귀한 고대 국가 대신의 비단 도포를 입고 태양왕 앞에 섰다. 처음 6명의 국왕 수학자를 중국에 파견할 당시, 예수회 선교사가 이 신비한 나라의 옷을 입고 중국 황제의 사절로 탈바꿈해 프랑스로 돌아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부베는 태양왕에게 강희대제가 보낸 귀한 선물 상자들과 49권의 진귀한 중국 전적을 헌상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한문 서적이 23권뿐이었기에, 이 49권의 중국 전적은 루이 14세를 매우 기쁘게 했다. 부베가 가져온 것 중에는 자신이 저술한 『강희제전(康熙帝傳)』과 『중국 현황』도 있었다. 『강희제전』은 수년 전 출사할 때 루이 14세가 명했던 것이었다. 이제 부베는 명을 어기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다.

康熙大帝铜板画像,杜赫德《中华帝国通志》,1736(维基百科公共领域)

강희대제 동판 초상화, 뒤 알드 《중화제국 통지(中華帝國通志)》, 1736년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곧 파리에서 출판된 『강희제전』은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강희대제의 풍채 당당한 판화 초상화가 실려 있었는데, 이 초상화의 기품은 유럽인들이 머나먼 중국 황제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유럽의 독자들은 이 황제가 신궁이자 뛰어난 기사, 시인일 뿐만 아니라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숙독하고 측량기로 천상을 관측할 뿐만 아니라 바로크 음악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중국 악기뿐만 아니라 피아노까지 칠 줄 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불가사의했다. 말할 것도 없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이 중국 황제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강희제는 올해 44세로 재위한 지 이미 36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황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나 품덕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위풍당당하고 의표가 훤칠하며 체격이 크고 거동이 비범합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며 코끝은 약간 둥글면서도 매부리코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비록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조금 남아 있으나, 그의 아름다운 형상에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서서 쏘든 말을 타고 쏘든, 말이 멈춰 있을 때든 달려갈 때든 좌우로 활을 당겨 백발백중시킵니다. 날짐승과 길짐승이 가만히 있든 날아가든 달려가든 화살을 헛되이 쏘지 않습니다. 각종 무기, 심지어 현재는 폐기되어 쓰이지 않는 무기까지도 모두 정통합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의 화기를 자국의 활처럼 익숙하게 다룹니다. 타타르인들이 잘하는 승마술에 있어서도 강희제는 독보적입니다. 그는 기마술이 뛰어나고 자세가 우아하며 평지든 가파른 비탈이든 자유자재로 다스리며 나는 듯이 달립니다.”

“매일 황제께서는 우리와 한두 시간 동안 함께 계셨으며, 그동안 방 안에는 두세 명의 환관만 모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황제와 서양 과학, 서유럽 각국의 풍속, 소문 및 기타 각종 문제에 대해 담소했습니다. 그중 우리가 황제께 가장 말하기 좋아했던 화제는 바로 루이 대제의 원대한 업적이었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강희 황제가 가장 듣기 좋아했던 화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담화를 나눌 때 황제께서는 우리를 옥좌 양옆에 앉게 하셨는데, 아시다시피 황자 외에는 그 누구도 황제의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조아생 부베, 『강희제전』)

이 전기의 첫 번째 독자인 태양왕에게 지구 반대편의 강희대제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음악과 예술에 대한 두 사람의 유사한 애호,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문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이 두 군주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부베의 또 다른 저서 『중국 현황(L’état Present de la Chine)』이 동시에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채색 수필화 모음집으로 중국 사회 각 계층의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제왕, 황실 귀족, 만청(滿淸 타타르) 관료, 장수와 병사, 승려와 비구니, 문관 사대부 및 중국인의 생활상 등 삼라만상을 포괄했다. 이러한 입체적인 도상들은 머나먼 동방 고대 국가의 사람들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유럽인 앞에 펼쳐 보였다.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인 17세기에 이러한 화첩은 매우 소중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고대 국가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당시 파리가 유럽의 문화 수도였던 것처럼, 파리는 ‘중국 열풍’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국 황제가 가가호호 알려짐에 따라 이 동방 제국에 대한 유럽의 열광은 최고조에 달했다.

동서방 군주의 거울 이미지

17세기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극동에서 식민지를 확장하고 잇따라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전쟁을 벌였으며, 이는 프랑스에 큰 압박을 주었다. 1664년 루이 14세의 재무대신 콜베르는 동인도 회사를 창설하고 아시아 무역을 강력히 추진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부베는 프랑스 왕에게 무역과 전교를 결합한 대표단을 구성해 중국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1698년 3월,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앙피트리트(Amphitrite) 호’가 라로셸 항을 출발해 중국으로 향했다. 이는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직항한 최초의 원양 범선이었다. 이 배는 흠차대신 부베뿐만 아니라, 부베가 강희제를 위해 불러들인 9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태우고 있었다. 이들 중 도미니크 파르냉(중국 이름 파다명巴多明)은 박학다식하여 청 조정에서 외교 인재를 양성하고 중국 의학을 연구했다. 장바티스트 레지(중국 이름 뢰효사雷孝思)는 지리 측량 전문가로서 훗날 『황여전람도』 제작 시 큰 공헌을 했으며 또한 『노자』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남광국(南光國)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악기 제작에도 정통하여 강희제를 위해 하프시코드와 팀파니를 제작했다. 조셉 드 프레마르는 중국 문학을 깊이 연구하여 프랑스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조씨고아』를 번역했다.

皇家波维丝织锦画制作,国王之旅。(Google Art Project,维基百科公共领域)

왕립 보베 태피스트리 공장 제작, 국왕의 여행 (Google Art Project,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같은 해 11월, 앙피트리트 호가 광주(廣州)에 도착했다. 태양왕이 보낸 이 최초의 거대한 배에 대해 강희제는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프랑스인들이 광주에 상관(무역 거점)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특별히 두 명의 선교사를 흠차로 임명해 한 명의 만주족 관리와 함께 멀리서 온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을 영접하게 했다. 이 두 명의 흠차 중 한 명은 바로 수년 전 부베와 함께 중국에 왔던 국왕 수학자 클로드 드 비스들루였다.

康熙大帝 船上旅行,绘于18世纪。(维基百科公共领域)

강희대제의 선상 여행, 18세기 그림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부베 일행이 북쪽으로 향할 때 강희제는 남순 중이었다. 진강(鎭江)에서 황제는 그들을 자신이 타고 있는 어주(禦舟 황제 전용배)에 오르게 하여 새로 온 9명의 선교사를 접견했고, 3개월 동안 동행하게 했다. 어주 위에서 강희제는 중국에 갓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어전 연주를 명했다. 파르냉이 바이올린을 켜자 강 위에서 어주가 가볍게 흔들렸고, 태양왕 궁정에서 온 바로크 음악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함축적인 뜻을 담아 중국 황제의 귀에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凡尔赛宫铜版画,这些版画是路易十四赠送各国君主的礼物。(维基百科公共领域)

베르사유 궁전 동판화, 이 판화들은 루이 14세가 각국 군주들에게 보낸 선물이다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이번에 중국으로 돌아오며 부베는 루이 14세가 증정한 귀한 선물들을 가져왔다. 수많은 선물 중에는 루이 14세의 유화 초상화 한 점이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부베는 한 편지에서 강희제가 초상화 속 늠름한 태양왕을 얼마나 자세히 뜯어보았는지 묘사했다.

太阳王画像, 罗浮宫藏。(章乐/大纪元)

태양왕 초상화,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장러/에포크타임스)

“우리는 강서성 성도인 남창부(南昌府)에서 황제께서 이미 경성을 떠나 강소성으로 향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황제께서 운하를 따라 남하하셨기에 우리는 운하 연안의 두 상업 요충지인 양주(揚州)와 회안(淮安) 사이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군주께서는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르비용 신부를 시켜 배로 우리를 당신의 용선(龍船)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관례에 따라 우리는 그분의 배에 다가가자마지 무릎을 꿇고 황제께 문안을 올렸습니다. 이때 그분은 창가에 나타나셔서 저에게 몸은 건강한지 물으시며 안부를 전하셨는데, 그 인자하신 표정은 가장 철석간장 같은 사람이라도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선물들을 정연하게 정리해 보여드리자, 선물을 본 몇몇 조정 대신은 찬탄을 금치 못하며 궁중에서 이토록 희귀하고 진기한 물건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황제께서는 자세히 감상하기를 원하시어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각종 공예품에 대해 매우 정통하셨기에 그 평가 또한 누구보다도 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가장 관심을 보이신 것은 프랑스 왕궁의 그림들이었으며, 특히 국왕의 초상화였습니다. 황제께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초상화를 주시하셨는데, 마치 이 색채가 자연스럽고 선명한 초상화가 우리에게 들었던 우리 존엄한 군주의 모든 기적을 그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듯했습니다.” (조아생 부베 신부가 국왕의 고해신부 라 셰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699, 북경)

여기까지 읽다 보면 우리는 동서양 두 영주(英主) 사이의 놀라운 유사점을 떠올리게 된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 끝에 거주하면서도 그들은 각기 백마를 탄 기마 초상화를 남겼다. <루이 기마 초상화>에서 한창 전성기인 태양왕은 두 발을 높이 치든 백마 등에 올라 칼을 앞으로 겨누고 있다. <강희 사냥도(康熙行獵圖)>에서 백마 위의 강희제는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땅에 무릎 꿇은 백성들을 자애롭게 바라보고 있다. 우연히도 그의 손자 건륭제 역시 백마 위에 올라 사열하는 기마 초상화 두 점을 남겼다. 건륭제는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려 했던 강희제의 업적을 계승하여 서구 문화와 예술을 중국에 더욱 깊이 도입했다.

왼쪽: 루이 14세 기마 초상화;오른쪽: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건륭황제대열도(乾隆皇帝大閱圖)》 축, 견본설색, 건륭 23년 남원(南苑)대열 때 그려졌다.(퍼블릭 도메인 에포크타임스 합성)

강희제가 눈도 떼지 않고 태양왕의 초상화를 응시할 때, 우리는 마치 위대한 시대를 창조한 이 두 군주가 서로를 향해 걸어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는 듯하다. 이 시대 속에서 동서양 문명은 겸손하고 간절하게 하늘로부터 온 서로의 미덕을 흡수했고, 서로를 균형 있게 조율하며 스스로를 완벽하게 가꾸려 노력했다. 전체 인류 문명사 속에서 이는 희귀하고 기념할 만한 찰나였으며, 마치 우담바라가 피듯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시대였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5/12/16/n459709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