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삼아가에서 강희제로 (상)
에포크타임스 문화부

진시황이 중화제국을 창립한 이래 거의 모든 대일통(大一統) 왕조에는 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지닌 명군성주(明君聖主)가 탄생해 천하 백성들을 위해 경제, 군사, 문화의 전성시기를 개창하거나 또는 다져주었다. 이 그림은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 강희 옹정 건륭제 시기의 성세)를 개창한 강희대제(에포크타임스 제작)
들어가는 말
진시황(秦始皇)이 중화제국을 창립한 이래, 거의 모든 대일통(大一統) 왕조마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을 가진 명군성주(明君聖主)가 탄생하여 천하 백성들을 위해 경제, 군사, 문화의 전성기를 개척하거나 기틀을 닦았다. 예를 들면 한조 무제(武帝)의 한무성세(漢武盛世), 당조 태종의 정관의 치, 명조 성조(成祖)의 영락성세(永樂盛世) 등은 함께 천고 영웅인물들의 풍류 시대를 써 내려갔으며, 중화 전통 문명의 휘황찬란한 역사를 주조했다.
만약 우리가 공경의 눈길을 중화 마지막 제국인 대청(大淸) 왕조에 고정한다면, 우리는 300년 청조 13분 황제 중 한 분이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로 존칭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성조(聖祖)는 그의 묘호(廟號)이고, 인(仁)은 시호(諡號)다.
최고 등급의 황제 칭호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이르기를 “옛날에 공이 있는 자를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자를 종(宗)이라 했다”라고 한다. ‘조(祖)’로 추존될 수 있는 황제는 대개 초기 왕조의 기업(基業)을 개척하거나 광대(光大)하게 넓힌 군주다. ‘성(聖)’은 성현(聖賢), 신성(神聖)이라는 뜻이 있는데, 역사상 ‘성조(聖祖)’라는 존호를 가진 전설적인 인물은 네 분이 있다.
강희대제(康熙大帝) 외에 첫 번째는 당 현종이 ‘대성조(大聖祖)’로 추봉한 노자(老子)이고, 두 번째는 당조 때 남조(南詔)의 정매사(鄭買嗣)이며, 세 번째는 송 진종(眞宗)이 추봉한 도교 신선 조현랑(趙玄朗)이다.
이 다른 세 명 중 두 명은 황제가 추봉한 초범입성(超凡入聖)의 신선이며, 나머지 한 명은 스스로 떠벌린 것에 불과하다. 오직 청(淸) 성조만이 나라를 다스리고 부흥시킨 탁월한 공헌에 힘입어 이 미칭을 얻은 유일한 황제이며, 진정으로 이 묘호를 감당할 수 있는 황제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군주가 된 자는 인(仁)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했다. 인정(仁政)은 고대 유가의 정치적 이상이며, 인군(仁君)은 황제의 지고(至高)한 경계(境界)다. 후세 사람이 이 황제에 대해 내린 평가는 가히 최고 등급의 찬사라 할 수 있다.
명청(明淸) 이래 역대 황제는 평생 하나의 연호를 사용했기에, 우리도 흔히 연호로 재위 중인 황제를 존칭한다. 그리하여 이 황제는 더욱 널리 알려진 칭호인 강희 황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본명은 애신각라 현엽(愛新覺羅·玄燁)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강희라는 연호는 ‘만민강녕(萬民康寧 모든 백성이 편안하고 건강함), 천하희성(天下熙盛 천하가 화락하고 번성함)’이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중화 역사상 세운 중대한 공헌 중 하나가 바로 100여 년간 이어진 강옹건(康雍乾) 성세를 개척한 것이다.
이 성세는 청나라 전체의 황금시대였으며, 중화 제국 체제 안에서 마지막 정점을 창조했다.

강옹건 성세는 청나라 전체의 황금시대였으며, 중화 제국 체제 안에서 마지막 정점을 창조했다. 사진은 청조 서양(徐揚)이 그린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 부분이다. (공유 영역)
성세의 기원을 찾아서
강희제는 청조의 세 번째 황제로, 그가 등극했을 때는 청조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에 들어온 지 18년째 되는 해였다. 외부 정권으로서 강희제가 속한 만주족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까?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조상들은 강희제에게 어떤 기업을 물려주었는가?
청조는 만주 사람이 세웠으며, 만주족은 옛날에 여진(女眞), 숙신(肅愼)이라 불린 중화 동북부의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다.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동북해 밖… 대황(大荒)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이 불함(不咸)이라 하고,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했다. 일찍이 순(舜), 우(禹) 시대에 북방의 숙신국은 이민족 부족으로 중원 군주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진한(秦漢)과 위진(魏晉)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연계가 끊이지 않았다.
북송(北宋) 때에 이르러 여진 추장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금조(金朝)를 세워 송, 요, 몽골과 오랜 세월 전쟁을 벌이는 역사를 시작했다. 동시에 유가 문화를 흠모하여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하며 ‘세장(世章 금 세종과 장종) 치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명조 말기, 만주족 정권이 다시 흥기하여 대일통의 청 왕조를 세웠다.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전신은 ‘후금(後金)’으로, 강희제 이전에 태조, 태종, 세조 등 세 명의 군주를 거쳤다. 태조 누르하치는 팔기(八旗)를 세우고 만주 문자를 제정하여 여진을 다시 통일하고 왕업을 처음 창건했다. 태종 홍타이지는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리고 만주(滿洲)라는 족명을 정하며 국호를 청으로 고쳐 중원 입성의 기틀을 닦았다. 세조 복림(福臨)은 어린 나이에 입관하여 황제를 칭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청 황제가 천하의 공주(公主)가 되는 시대를 열었다.
삼대에 걸친 황제들의 노력으로 강희제가 계승한 것은 백업(百業)이 진흥되기를 기다리는 생기발랄하고 젊은 제국이었다. 동시에 청조가 입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희제 또한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그가 마주한 것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겹겹의 험난한 국가이기도 했다.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은 그에 대해 “태조와 태종이 창건한 큰 기틀을 받들어 수성(守成)과 창업을 겸했다. 세조 장황제(章皇帝)의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며 평생토록 사모했다”라고 전한다. 강희제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광활한 제국을 이끌고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강희제의 최고 기록들
강희의 일생을 통틀어 보면,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61년간 재위했으니 중국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제왕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권신을 제거하고 비범한 지략과 용기로 조정을 장악하며 그의 다채롭고 전설적인 집권 생애를 시작했다. 군사적으로는 안으로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통일했으며, 밖으로는 제정 러시아를 몰아내고 막북(漠北 고비 사막 북쪽)을 서정(西征)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정사에서는 근면하게 정사를 돌보고 남서방(南書房)을 설치했으며, 여섯 차례 남순(南巡)을 하며 민정(民政)을 살피니 정치가 소통하고 백성이 화합하는 정통인화(政通人和)를 실현했다. 문화적으로는 유학을 존중하고 예교(禮敎)를 숭상하며 서적 편찬을 조직했다. 천하의 현사(賢士)를 초빙하여 청 초기 문단을 이끌며 문학의 흥성을 가져왔다.
세계를 바라보면, 명청 교체기에 직면한 것은 전례 없는 새로운 국면이었다. 대항해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 무리의 선교사들이 동방의 땅을 밟아 서로 다른 신앙, 기물, 지식을 가져왔고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황실과 귀족의 중용을 받아 궁정 안팎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문무를 겸비한 강희제는 서양 문화에 대해서도 개명(開明)한 태도를 취하여 역법을 혁신하고 서양 학문을 연찬(硏鑽)했으며 서양의 수학, 천문, 지리, 의약 등의 지식을 파악했다. 이로써 강희제는 역사상 가장 박학하고 재주가 많은 제왕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어떻게 한 걸음씩 성장했는가, 또 어떻게 한 걸음씩 정치를 가다듬어 대청 성세를 개척했는가? 우리는 이어지는 글에서 하나하나 이야기할 것이다.
【강희전(康熙傳)】 셋째 아가(阿哥)에서 강희제까지
중화 문화는 신전(神傳) 문화이며, 중화 왕조의 제왕 또한 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제왕을 옛날부터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 불렀으니 이는 군권천수(君權天授)를 상징한다. 제왕이 탄생할 때, 그의 주변에는 흔히 신이(神異)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하늘의 뜻을 예시한다. 사서 중의 제왕 전기에는 대개 그들이 태어나기 전후에 발생한 기이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강희제의 탄생은 역사에 어떤 신적 자취를 남겼을까?
하늘이 선택한 아이
“내가 순치 황제를 임신했을 때도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내렸는데, 이제 동비(佟妃)에게도 이런 길조가 있으니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큰 복을 누릴 것이다.” — 효장문황후(孝莊文皇後)
(출처: 朕妊皇帝實有斯祥, 今妃亦有是, 生子必膺大福. — 《청사고(淸史稿)》)
순치 11년(1654년)은 청 왕조가 중원에 들어온 지 11년째 되는 해다. 황실 궁원인 자금성은 왕조 교체의 전화를 겪은 후, 새로운 왕조 새로운 황제의 손에서 점차 온화하고 존귀한 황실의 기품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음력 3월 18일 사시(巳時), 만물이 소생하는 시절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자금성 내 경인궁(景仁宮)에 울려 퍼졌으니, 청조 두 번째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三阿哥)이 탄생한 것이다.
자금성에서 태어난 이 셋째 아가는 서비(庶妃) 동씨(佟氏) 소생으로,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었지만 그의 탄생은 궁궐 안의 큰 경사였다. 그의 앞선 두 형 중 첫째 아가는 두 살 때 요절했고, 둘째 아가는 한쪽 눈에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셋째 아가는 범상치 않았으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
일찍이 동비가 자녕궁(慈寧宮)의 태후에게 문안을 올렸다. 당시의 태후는 역사상 유명한 어진 왕후인 효장문황후로, 그녀는 평생 두 세대의 황제를 양육하고 세 조(朝)에 걸쳐 존귀함을 누렸으며, 권세를 탐하지 않고 청초 성세를 개척하는 데 걸출한 공헌을 한 청 왕조의 진정한 국모(國母)였다. 그날 동비가 막 물러가려 할 때, 효장태후는 그녀의 옷자락 근처에 신룡(神龍)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어보고 나서야 동비가 이미 잉태 중임을 알게 되었다.
태후는 매우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도 예전에 임신했을 때 몸 주위를 맴도는 용을 보았고 찬란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황자를 낳았으니 바로 순치제였다. 태후는 대청에 또 한 명의 앞날이 무량한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임을 깊이 알고 “훗날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1]
과연 동비가 해산할 때, 경인궁(景仁宮) 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 차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았으며, 오색 구름과 노을이 뜰에 가득하여 태양과 빛을 다툴 정도였다. 당시의 궁녀와 내시들이 모두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셋째 아가가 태어난 후 사서에서는 그의 외모에 대해 “하늘이 내린 모습이 기이하고 위대하며 신채(神彩)가 환하게 빛났다. 두 눈동자는 해가 걸린 듯하고 코는 산악처럼 우뚝 솟았으며, 귀는 크고 소리는 우렁차니 영특함이 하늘이 내린 듯했다”라고 찬탄했다.[2] 어린 황자의 모습은 가히 영준하고 기이한 위엄이 있었으며 신채가 비상했다고 할 수 있다. 중동(重瞳)의 눈동자는 태양이 높이 걸린 듯하고, 오뚝한 콧날은 산악이 솟은 듯하며, 귀가 넓고 울음소리가 홍량하니 천성적으로 총명한 모습이 그야말로 백 퍼센트 제왕의 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머지않은 8년 후, 운명에 따라 소년 천자가 될 것이었다. 이 어린 황제는 태후가 기대했던 대로 ‘강희(康熙)’를 연호로 삼아 61년의 집권 생애를 열었다. 이 60여 년 동안 강희 황제는 만한(滿漢) 신하들을 이끌고 비바람 치는 제국 초창기를 지나, 비범한 문치무공(文治武功)과 웅재대략(雄才大略)으로 300년 청조에서 가장 번영하고 창성했던 100여 년 강건성세를 개척할 것이다.
주석:
[1][2] 《강희조실록(康熙朝實錄)》 권1 참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2/n1213011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