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삼아가에서 강희제로 (하)
에포크타임스 문화부

진시황이 중화제국을 창립한 이래, 거의 모든 대일통 왕조마다 웅재대략을 가진 명군성주가 탄생해 천하 백성들을 위해 경제, 군사, 문화의 전성기를 개척하거나 기틀을 닦았다. 사진은 강옹건(康雍乾) 성세를 개척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지극한 효심을 가진 황자
“부친이신 세조(世祖) 장황제(章皇帝)께서는 짐이 어릴 때 마마(천연두)를 앓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모들에게 명령해 나를 자금성 밖에서 보살피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단 하루도 부모님의 무릎 아래에서 재롱을 떨며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60년 동안 깊이 유감스럽고 송구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 《강희조실록(康熙朝實錄)》
일찍이 《예기(禮記)》에서는 천자, 제후, 대부 등이 자녀를 위해 유모를 둘 수 있다고 언급했다. 청조 궁정에도 규칙이 있었는데, 황실의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반드시 생모를 떠나 유모나 보모 등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강희제도 그러하여 유모들과 밤낮으로 함께 지냈으며, 정해진 시간에만 생모를 면회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황자들에게는 일생 동안 여러 명의 어머니가 생기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적모(嫡母 부황의 황후), 생모(生母 낳아준 모친), 서모(庶母 황후 이외 부황의 후궁들), 유모(乳母 젖을 먹여 키운 모친), 양모(養母) 등이다. 일반적으로 적모는 부황의 정실부인인 황후를 말하고, 서모는 다른 비빈(妃嬪)들을 뜻하며, 생모의 지위가 낮을 경우 지위가 높은 다른 후비(后妃)가 양모를 맡기도 했다.
강희제의 적모는 보르지기트씨인 효혜(孝惠)장황후였고, 생모는 동비(佟妃)인데 나중에 동가씨(佟佳氏)로 고쳐지고 효강(孝康)장황후로 추봉되었다. 그의 유모 중 한 명인 손씨(孫氏)는 매우 유명한데, 바로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曺雪芹)의 증조모다. 강희제는 손씨와 감정이 매우 두터워 그녀를 “우리 집안의 어른이다”라고 찬양했으며, 그녀의 저택에 ‘훤서당(萱瑞堂)’이라는 세 글자를 어필로 써주기도 했다.[1]. 유모의 젖을 먹여 키워준 은혜를 잊지 않았기에 강희제는 그녀의 가족을 매우 중히 여기고 돌보았으며, 이로 인해 조씨 일족은 한때 세력이 대단했다.
강희제는 태어난 후 곧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그는 역대 황자들과 달리 어릴 때 자금성 밖으로 나가 북경 서쪽 교외의 한 사찰에서 자랐다. 이는 그가 부황의 총애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순치제가 어린 아들이 ‘천연두’를 피할 수 있도록 내린 결정이었다.
천연두는 고대에 사망률이 매우 높은 전염병이었으나, 완치된 사람은 평생 면역력을 얻었다. 청조 초기에 천연두가 여러 차례 북경을 휩쓸었는데, 만주족은 한족(漢族)처럼 백신 접종법을 알지 못했기에 발병률이 높았고 많은 어린이가 감염되어 요절했다. 순치제는 소아가(小阿哥)가 마마를 앓은 적이 없음을 고려해 고심 끝에 유모를 붙여 궁 밖에서 거주하게 한 것이다.
궁 밖에서 손씨 등이 매일 정성껏 소황자를 보살폈음에도 그는 뜻밖에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효장의 예언처럼 셋째 아가는 큰 복이 있었기에, 곧 기적적으로 완치되었으며 어린 얼굴에 옅은 곰보 자국만을 남긴 채 얼마 후 궁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금성으로 돌아온 소황자는 부황 및 모비(母妃)와 더 많은 접촉을 가졌으나,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순치제가 붕어했다. 강희제가 제위에 오른 2년 후에는 태후 동씨마저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강희제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잇달아 여의는 비통함을 겪어야 했다. 부모님 곁에서 재롱을 떨며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은 강희제 일생의 큰 한으로 남았다.
강희제는 동씨와 함께한 시간이 매우 짧았음에도 지극한 효자였다. 그가 채 열 살도 되기 전 동씨가 병석에 눕자, 어린 강희제는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지키며 직접 탕약을 맛보았고, “눈도 붙이지 못하고 옷의 띠도 풀지 못할” 정도였다. 동비가 위독할 때 강희제는 걱정으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금세 수척해졌다. 효장태황태후에게 문안을 올릴 때마다 그는 슬픔을 억누르며 할머니를 위로했고, 물러나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동씨가 붕어하자 강희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음식도 들지 않았다. 곁에 있던 시종들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2]
할머니의 보살핌과 교육
“할머니의 양육과 교육에 힘입어 나는 성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었다.” — 강희제
(《성조인황제성훈(聖祖仁皇帝聖訓)》)
강희제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었기에 할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가장 친한 혈육이 되었다. 강희제가 태어날 전후의 상서로운 광경 때문에 효장태후는 이 어린 손자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순치제와 동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난 후, 효장태후는 강희제에게 무한한 심혈을 기울여 그가 걸출한 황제가 되도록 전력을 다해 기르고 보좌했다.
강희제가 어릴 때 효장은 자신이 신임하는 시녀 소마라고(蘇麻喇姑)를 보내 손자를 돌보게 하고 그를 계몽하는 스승으로 삼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소마라고는 손재주가 좋아 청조 개국 초기의 의관 양식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에도 정통하여, 강희제는 그녀의 가르침 덕분에 아름다운 만주 문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3]
속담에 “손주 사랑은 할머니”라고 하지만, 강희제에 대한 효장 태황태후의 교육은 매우 엄격했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효장은 제왕의 기준으로 그를 길렀다. 강희제가 막 걷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효장은 음식, 거동, 언어 등 모든 면에서 규칙을 정해주었다. 비록 혼자 있을 때라도 강희제는 규칙을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의 엄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4]
효장의 고심 어린 독려 아래 강희제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행동 습관을 길렀다. 예를 들어 그는 걷거나 멈출 때, 앉거나 심지어 누워 있을 때도 뒤를 돌아보거나 곁눈질하지 않을 수 있었다.[5] 강희제 등극 후, 조정에서 신하들과 역사를 논하며 정사를 의논할 때나 후궁에서 가족들과 한담을 나눌 때나 늘 “엄연히 단정하게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6] 기개가 당당하고 풍채가 늠름한 천자는 이처럼 시시때때로 고상하고 엄격한 황실의 풍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평소의 좋은 습관은 강희제의 초상(超常)적인 정력과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는 정신을 형성했다. 청 황실은 황자 교육을 매우 중시했는데, 강희제는 다섯 살 때 조상들이 만든 제도에 따라 서당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했으며 역사를 거울삼아 고대 성명(聖明)한 군주들로부터 치국(治國)의 도를 배웠다. 그는 역사상 유명한 독서광 황제로,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책을 읽을 때 매우 정성을 들여 반드시 글자마다 외울 수 있게 했고 문장의 내실을 파악했다. 깊고 어려운 대목을 만나면 곳곳에 겸허히 가르침을 구하거나 스스로 반복해서 생각했다.[7]
강희제는 학문을 함에 있어 엄격하고 성실한 끈기가 있었다. 아마 남들은 독서가 힘들다고 느꼈겠지만 그는 즐거워하며 지칠 줄 몰랐다. 강희제가 너무나 공부에 열중했기에 그의 유모 박씨(朴氏)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러 번 책을 감추며 황제가 좀 쉬기를 바랐으나, 강희제는 기어이 책을 찾아내어 공부를 계속했다. 효장은 이 소식을 듣고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파서 말했다. “네가 이미 귀한 천자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과거 시험을 치르려는 선비처럼 고생스럽게 책을 읽느냐?”[8]
언젠가 한 지방 고관이 어린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란 앵무새 한 마리를 진상했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했다.[9] 그때 그는 겨우 열 살 아이였고 한창 놀기를 좋아할 나이였다.
사서에는 또한 강희제가 등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장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대답했다. “오직 천하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며 태평성대의 복을 함께 누리기를 원할 뿐입니다.”[10] 이처럼 국가와 백성을 염려하는 말이 소년 천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효장태황태후의 가르침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다
“동비가 낳은 황자는 여덟 살이지만 총명함이 남달라 조종(朝宗)의 기업(基業)을 계승할 수 있으니, 이제 그를 황태자로 세우노라.” — 순치제(《순치황제유조(順治皇帝遺詔)》)

순치 18년, 순치제가 붕어하고 강희제가 태화전 내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사진은 청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 부분으로, 앞쪽은 태화문이고 뒤쪽은 태화전이다. (공유 영역)
순치 17년(1660년) 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온 나라가 즐거워할 때 자금성 안은 수심이 가득하고 인심이 흉흉했다. 한창나이의 순치제가 이때 뜻밖에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이전에 그는 역병을 피하기 위해 중대한 의례를 취소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타지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으나, 결국 이번 역병을 피하지 못했다.
천연두는 당시 무서운 불치병이었기에 순치제는 곧 병세가 위독해졌다. 청조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기틀이 아직 견고하지 않았으므로 새 군주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순치제는 양심전(養心殿)에서 요양하며 황실 사람 중에 누가 이 중임을 맡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에게는 생존한 황자가 여섯 명 있었는데, 둘째 아가는 겨우 아홉 살이었고 셋째 아가인 강희제는 여덟 살이었으며 나머지 네 명의 아가는 더욱 어렸다. 순치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전통을 이어 성인(成人) 중에서 황제를 뽑아 정권이 평탄하게 이양되기를 바랐으나, 효장과 상삼기(上三旗)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실 순치제가 가장 기대를 걸었던 아들은 황사자(皇四子)였다. 그의 생모 동악비(董鄂妃)는 황제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리하여 넷째 황자가 태어났을 때 순치제는 기뻐하며 그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선포했다. 안타깝게도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죽자 순치제와 동악비는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여러 황자 중에서 강희제는 어떻게 선택되었을까?
대략 2년 전의 한 일이 순치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그때 강희제와 둘째 아가, 다섯째 아가가 순치제에게 문안을 올렸다. 순치제가 그들에게 포부가 무엇인지 묻자 다섯째 아가는 어려서 대답하지 못했고, 둘째 아가는 “신은 어진 왕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강희제는 “신은 스스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자라서 아버님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순치제는 이 말을 듣고 그를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11]
강희제의 즉위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청조 초기 유명한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이다. 그는 청 조정의 첫 번째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으로 청조의 천문 역법을 관장하여 황제의 중용을 받았으며, 순치제는 그를 ‘마파(瑪法, 만주어로 할아버지라는 뜻)’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순치제는 임종 전에 특별히 그의 의견을 물었다. 아담 샬은 한 가지 점을 언급했는데, 셋째 아가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으므로 평생 면역이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다른 황자들은 언제든 천연두에 감염될 위험 속에 있었다.
어린 시절의 고난이 강희제 인생의 큰 조력자가 된 셈이다. 순치제 자신이 천연두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에, 아담 샬의 말은 그로 하여금 셋째 아가가 진정 최적임자임을 확신하게 했다. 품행 면에서 보더라도 강희제는 효장의 가르침 아래 언행이 규칙에 맞았고 어린 나이에 이미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학식 면에서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 책을 읽으면 열 줄씩 한꺼번에 읽고 한 번 보면 잊지 않았으며, 끈기 또한 대단하여 매번 밤늦도록 책을 읽었으며 제왕의 정치와 성현의 철리(哲理)에서 육경(六經) 서적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2]
대청은 말 위에서 세운 왕조이기에 용사를 숭상했는데, 만승지존(萬乘之尊)인 강희제 또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예컨대 《강희조실록》은 그에 대해 “15균(鈞)의 활을 당기고, 화살 13악(握)을 사용했다. 좌우로 말을 타고 활을 쏘면 반드시 적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균은 450근에 해당하며, 악은 손으로 한 움큼 쥐는 양을 말한다. 송대 명장 악비(岳飛)에 대해 《송사(宋史)》에서는 3석의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대략 300근 정도다. 강희제는 또한 말 위에서 좌우로 활을 쏘아 백발백중이었으니 그가 힘만 센 것이 아니라 기사 솜씨가 얼마나 정묘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실록》에서는 강희제를 “재능과 능력이 많고 문무를 겸비했다”, “인의(仁義)가 지극해서 오래되자 도화(道化)가 완성되었다”라고 찬양했다. 강희제의 등극은 참으로 천명이며 인심(人心)이 향하는 곳이었다.
순치 18년(1661년) 정월 초여드레 새벽, 순치제가 붕어하며 1,000여 자의 유조(遺詔 유언으로 남긴 조서)를 남겼는데 그중 많은 부분은 자신의 일생 동안 집권하며 저지른 과실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나 유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셋째 아가의 이름을 현엽(玄燁)으로 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책립한 것이다.
슬픈 곡소리와 함께 자금성은 온통 소복 차림이었다. 다음 날, 할머니인 효장태황태후의 부축을 받으며 효복(孝服)을 입은 셋째 아가는 천지와 종묘에 제사를 올리고 선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등 의식을 거행했다. 그 후 그는 최고 등급의 관포 예복을 갖춰 입고 태화전 용상에 앉아 즉위 조서를 반포했다. 할머니를 태황태후로, 적모와 동씨를 모두 황태후로 높였으며, 선황제를 장황제(章皇帝)라 하고 묘호를 세조(世祖)라 정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이듬해 연호를 고쳐 ‘강희 원년’이라 칭했다.
이로부터 여덟 살 어린아이 애신각라 현엽은 강희 황제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생애를 시작했다. 비록 효장의 보좌가 있다고는 하나 강희제는 어쨌든 나이가 어렸으니, 그가 조정의 문무백관을 진심으로 승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어떤 정치적 국면에 직면할 것인가? 이 방대한 제국을 그는 또 어떻게 다스려 나갈 것인가? 성세(盛世)의 명군 강희 황제의 전설적인 큰 막이 이미 열렸다.
주석:
[1] 《청패류초(淸稗類鈔)》 권10: 강희 기묘년(38년) 여름 4월, 성조가 남순에서 돌아오다 강녕직조 조인(曺寅)의 관저에 머물렀다. 조인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친신(親臣)과 세신(世臣)의 반열에 있었기에 어머니 손씨를 받들어 알현하게 했다. 황제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며 위로하기를 “이분은 우리 집안의 어른이다”라고 했다. 하사품이 매우 넉넉했다. 마침 뜰에 원추리꽃(萱花)이 만발하여 ‘훤서당(萱瑞堂)’이라는 세 글자를 어필로 써서 하사했다.
[2] 《강희조실록》 권7: 강희 2년 2월 경술 조.
[3] 《소정속록(嘯亭續錄)》 권4: 소마라고는 효장문황후의 시녀다. 성품이 기교 있고 영리하여 국초의 의관 장식을 모두 그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인황제(仁皇帝 강희제)가 어릴 때 그녀의 훈도에 힘입어 직접 만주 글자를 배웠으므로 궁중에서 매우 높은 대접을 받았다.
[4] 《성조인황제어제문집》 제2집 권40: 성조모(聖祖母)의 자애로운 훈계에 따라 모든 음식, 거동, 언어에 규칙이 있었다. 비록 평소에 혼자 있을 때라도 감히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치셨으며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 꾸짖으셨다.
[5] 《정훈격언(庭訓格言)》: 훈계하기를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시에 뒤를 돌아보거나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6] 《정훈격언》: “여러 신하와 정사를 의논하거나 문신들과 서경과 역사를 강론할 때, 혹은 가정에서 너희들과 한가로이 담소할 때나 늘 엄연히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는 모두 내가 어려서부터 익혀온 것이며 평소 함양해온 바에 따른 것이다.”
[7] 《성조인황제성훈》 권5: 상유(上諭)에 이르기를 “짐은 다섯 살 때부터 글 읽는 법을 알았다. 여덟 살에 제위에 올라 늘 《대학》과 《중용》의 훈고를 좌우에 물어 대의를 얻은 후에야 유쾌했다. 날마다 읽는 책은 반드시 글자마다 외우게 했으며 결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 나는 모두 반복해서 탐색하여 반드시 마음과 이치가 맞닿게 했으며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았다. 진실로 의리가 마음을 기쁘게 했기에 즐거워하며 지칠 줄 몰랐던 것이다”라고 했다.
[8] 《강희기거주(康희起居注)》: 강희 23년 11월 17일 무인 조.
[9] 《강희조실록》 권9: 강희 2년 11월 경인 조.
[10] 《만수성전초집(萬壽盛典初集)》 권29: “내가 여덟 살에 즉위했을 초기에 태황태후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기를 ‘신은 다른 욕심이 없고 오직 천하가 안정되고 백성이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며 태평성대의 복을 함께 누리기를 원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11][12] 《강희조실록》 권1 참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3/n1213193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