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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동주 제후쟁패 시기─춘추전국 (3)

─전국 칠웅 중 제나라의 패권 회복과 그 쇠망

심연(心緣)

【정견망】

제나라의 패권 회복과 그 쇠망

진(秦)과 삼진(三晉)이 다툴 때, 제(齊)는 동방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 진(秦)나라와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제나라뿐이었으며, 투쟁의 초점은 초나라를 포섭하는 데 집중되었다.

제나라는 춘추시대부터 강국이었으나 춘추 후기에 점차 쇠락했다. 하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기전 386년, 제나라 대부 전화(田和)가 강(姜)씨 성을 가진 군주를 대신해 제나라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제나라는 강씨의 나라에서 전(田)씨의 나라로 바뀌었다. 전씨가 제나라를 대신한 후, 제나라는 곧 전국시대의 강국이 되었다.

전씨가 군주를 폐위할 것이라는 예언

제나라 전씨의 조상은 진완(陳完)으로 진(陳)나라 여공(厲公) 타(他)의 아들이다. 진완이 처음 태어났을 때 주나라 태사(太史)가 마침 진(陳)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여공이 그에게 진완의 점을 치게 했다. 《관괘(觀卦)》가 《비괘(否卦)》로 변하는 점괘가 나오자 태사가 말했다.

“괘사의 뜻은 그가 진(陳)나라 군주의 자리를 얻어 국가를 소유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진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일 것이며, 본인이 아니라 그 자손에게 응험할 것입니다. 만약 타국이라면 반드시 강(姜)씨의 나라일 것입니다. 강씨는 제요(帝堯) 때 사악(四岳)의 후예입니다. 사물은 두 가지가 동시에 강성할 수 없으니, 진(陳)나라가 쇠락한 후 이 가문이 창성할 것입니다!”

훗날 진완은 제나라로 망명하여 성을 전(田)씨로 바꾸었다. 진완이 세상을 떠난 후 시호는 경중(敬仲)이라 했다. 경중은 치맹이(稺孟夷)를 낳았고, 치맹이는 민맹장(湣孟莊)을 낳았으며, 민맹장은 문자(文子)인 수무(須無)를 낳았다. 전문자는 제 장공(莊公)을 섬겼다. 전문자가 죽고 그 아들 환자(桓子) 무우(無宇)가 대를 이었다. 전무우는 힘이 세고 장공을 잘 섬겨 총애를 받았다. 무우가 죽고 그 아들 무자(武子) 개(開)와 리자(釐子) 걸(乞)이 태어났다.

리자 전걸은 제 경공(景公)을 섬기는 대부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고, 곡식을 나누어 줄 때는 큰 되를 사용해 암암리에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경공도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씨는 민심을 얻었고 가문은 점점 강대해졌으며 백성들의 마음은 전씨에게 기울었다. 안자(晏子)가 여러 차례 경공에게 간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경공이 죽은 후 경공의 어린 아들 도자가 왕위에 올랐으나 전걸이 무리를 위협해 경공의 다른 아들 양생(陽生)을 군주로 세우니 이가 곧 도공(悼公)이다. 도공이 즉위하자 전걸은 재상이 되어 제나라 정권을 독점했다. 도공 사후 아들인 간공(簡公)이 즉위하나 4년 만에 전씨에게 살해당하자 전상(田常)은 간공의 동생 오(驁)를 평공(平公)으로 세웠다. 평공이 즉위하자 전상을 재상으로 삼았다.

전상은 간공을 죽인 후 각국 제후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노나라와 위(衛)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서쪽으로는 진(晉)의 한씨, 위(魏)씨, 조씨와 조약을 맺고 남쪽으로는 오나라, 월나라와 사신을 통하게 했다. 공덕을 세우고 상을 베풀며 백성들을 친근히 대하니 제나라는 다시 안정되었다.

전상이 제 평공에게 말했다. “은덕을 베푸는 것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이니 군주께서 하시고, 형벌을 내리는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니 신이 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5년을 하자 제나라 정권은 모두 전상의 손에 들어왔다. 이에 전상은 포씨, 안씨, 감지 및 공족 중 강성한 세력을 모두 죽이고, 안평 이동에서 낭야에 이르는 땅을 나누어 자신의 봉지로 삼았다. 그의 봉지는 평공이 소유한 직할지보다 더 컸다.

전상이 죽고 그의 증손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에 이르러 제 강공(康公)을 폐위했다. 서기전 386년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받고 기원을 시작했다. 태공 전화가 재위 2년 만에 죽자 아들인 환공(桓公) 전오(田午)가 즉위했다. 환공이 6년만에 죽자 아들인 위왕(威王) 인제(因齊)가 즉위했다. 이 해에 원래의 제나라 강공이 죽고 후사가 끊기자 봉지는 모두 전씨의 소유가 되었다.

인덕으로 패업을 일으킨 제 위왕(威王)

제 위왕은 전국시대 여러 나라 중 도덕적 위망이 높은 군주였다. 당시 제나라는 경제와 군사력에서 7국 중 으뜸이었을 뿐만 아니라 덕(德)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위왕 즉위 초기에 처한 상황은 국가적 위기였다. “제후들이 아울러 침벌하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 내우외환의 상태가 9년 동안 지속되었다(《사기・전경중완세가》). 나라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위왕은 일련의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첫째, 상벌을 엄격히 했다. 위왕은 즉위 초기에는 국사를 돌보지 않고 정사를 경대부들에게 맡겼으나, 한편으로는 사신을 깊숙한 시골까지 보내 실태를 관찰하고 미복잠행을 통해 실정을 파악했다. 신하들의 행태를 조사한 후 위왕은 상벌을 내렸다.

위왕이 즉묵(卽墨) 대부를 불러 말했다. “그대가 즉묵을 다스린 이래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들려왔소. 그러나 사람을 보내 시찰하니 논밭이 개간되고 백성의 삶은 풍족하며 관청에는 밀린 공무가 없어 동방이 편안해졌소. 이는 그대가 내 좌우 측근들에게 아첨하여 칭찬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에 그에게 1만 호의 식읍을 하사했다.

이어 아성(阿城) 대부를 불러 말했다.

“그대가 아성을 다스린 이래 그대를 찬양하는 말이 매일 들려왔소. 그러나 시찰해 보니 논밭은 황폐하고 백성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소. 지난번 조(趙)나라 군대가 견(甄)성을 공격했을 때 그대는 구원하지 않았고 위(衛)나라가 설릉(薛陵)을 빼앗을 때도 알지 못했소. 이는 그대가 재물로 내 측근들을 매수하여 칭찬을 구한 것이 아니오!” 그날로 아성 대부를 삶아 죽이고 그를 부풀려 칭찬했던 측근들도 함께 삶아 죽였다.

이어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조나라와 위(衛)나라를 공격하고 탁택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위혜왕(魏惠王)을 포위했다. 위혜왕이 관성(觀城)을 바치며 화친을 청했고 조나라 사람들은 제나라의 장성(長城)을 돌려주었다. 이에 제나라 전체가 진동하여 사람들은 감히 허물을 덮으려 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고 제후들은 이 소문을 듣고 20여 년 동안 감히 제나라에 병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둘째,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 추기(鄒忌)가 거문고를 잘 타서 제나라 위왕을 알현하자 위왕은 그를 좋아하여 궁중의 우실(右室)에 머물게 했다. 얼마 후 위왕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추기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 말했다. “거문고 소리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위왕이 갑자기 불쾌해하며 거문고에서 손을 떼고 보검을 누르며 말했다.

“선생은 내 겉모습만 보았을 뿐 아직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잘 탄다는 것을 아시오?”

추기가 말했다.

“큰 줄이 느릿하고 온화한 것은 군주를 상징하며, 작은 줄이 높고 맑은 것은 재상을 상징합니다. 손가락으로 줄을 튕길 때 힘을 주고 늦추는 것은 정령(政令)을 상징하며, 울려 퍼지는 소리가 조화롭고 대소의 배합이 절묘하여 비뚤어진 소리가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은 사시(四時)를 상징합니다. 저는 이로써 왕께서 잘 타심을 압니다.”

위왕이 말했다.

“그대는 음악을 논함에 매우 능하구려.”

추기가 말했다.

“어찌 음악을 논하는 것뿐이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무하는 이치가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위왕이 다시 불쾌해하며 말했다.

“오음(五音)의 조율을 논한다면 선생을 당할 자가 없겠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찌 거문고 줄 사이에 있겠소?”

추기가 말했다. “큰 줄이 온화함은 군주요, 작은 줄이 맑음은 재상이며, 줄을 당기고 늦춤은 정령입니다. 소리가 조화로움은 사시(四時)를 상징하며, 반복되어도 어지럽지 않음은 정치가 밝기 때문이요, 연달아 경쾌함은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문고 소리(琴音)가 조화로우면 천하가 태평해집니다. 치국안민의 도리는 오음(五音)의 이치와 가장 닮아 있습니다.”

위왕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석 달 후 위왕은 추기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1년 후 위왕은 하비(下邳)를 그에게 봉하고 성후(成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여기서 추기가 제나라 왕에게 간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게 한 아름다운 일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기는 서공(徐公)이라는 인물이 매우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어느 날 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 중 누가 더 잘생겼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훨씬 잘생겼으니 서공이 어찌 당신을 따라오겠습니까!”

추기는 자신을 믿지 못해 첩과 손님에게도 물었으나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서공을 직접 본 후 자신이 그만 못함을 깊이 깨달았다. 여기서 그는 많은 이치를 깨닫고 위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국 대부분의 사람이 군주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는 이유는 임금을 사사로이 대하거나, 임금에게 바라는 것이 있거나, 당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건대 왕께서 가려진 것이 너무 깊습니다.”

제위왕은 이 말을 듣고 선(善)을 물 흐르듯 받아들여 명령을 내렸다.

“관리와 백성 중 면전에서 과인의 허물을 지적하는 자에게는 상등의 상을 주고, 글로써 간하는 자에게는 중등의 상을 주며, 저잣거리에서 비판하여 내 귀에 들리게 하는 자에게는 하등의 상을 내릴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 영이 내려졌을 때는 간언하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몇 달 뒤에는 간간이 들리더니, 1년 뒤에는 비록 말하고자 해도 지적할 것이 없었다. 연, 조, 한, 위나라가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에 조공했다.”(《전국책・제책(齊策)》).

위왕 26년, 위혜왕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위왕이 대신들을 모아 “조나라를 구하는 것이 좋은가, 구하지 않는 것이 좋은가?”를 물었다.

추기는 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단간붕(段干朋)은 “구하지 않는 것은 불의(不義)이며 우리에게 불리합니다”라고 했다.

위왕이 이유를 묻자 단간붕이 답했다.

“위나라가 한단을 병탄하는 것이 제나라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만약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조나라 교외에 주둔시킨다면 조나라는 침략을 면하겠지만 위나라 군대도 온전할 것입니다. 그러니 남쪽으로 위나라의 양릉을 공격해 위군을 피로하게 만드십시오. 한단이 함락되더라도 위나라의 피로를 틈타 그들을 꺾을 수 있습니다.” 위왕은 이 계책을 따랐다.

셋째는 어진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중시했다. 위왕은 추기를 재상으로, 전기(田忌)를 장수로, 손빈(孫臏)을 군사(軍師)로 삼아 인재를 널리 모으고 간악한 관리를 처벌하니 제나라는 “제후 중 가장 강성해졌다”(《사기・전경중완세가》).

위왕 23년, 제나라 왕과 조나라 왕이 평륙에서 만났다. 위왕 24년에는 제나라 왕과 위나라 왕이 교외에서 사냥을 했다.

위나라 왕이 물었다.

“대왕께도 보물이 있습니까?”

제위왕이 없다고 하자 위나라 왕이 말했다.

“과인의 나라는 작아도 지름이 1인치나 되는 야명주 10알이 있어 수레 12대를 앞뒤로 비추는데, 제나라 같은 대국에 어찌 보물이 없습니까?”

제위왕이 말했다.

“과인이 보물로 여기는 것은 대왕과 다릅니다. 단자(檀子)라는 신하를 남성(南城)에 보내 지키게 하니 초나라가 동방을 침범하지 못하고 사수(泗水)가의 12제후가 모두 와서 알현했습니다. 판자(盼子)라는 신하를 고당에 보내니 조나라가 동쪽 황하에서 고기잡이를 못 합니다. 검부(黔夫)라는 관리를 서주에 보내니 연나라와 조나라 사람들이 신령의 가호를 빌며 서주로 이사 온 이가 7천여 가구에 달합니다. 종수(種首)라는 신하에게 도적을 경계하게 하니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습니다. 이들은 빛이 천 리를 비추니 어찌 수레 12대에 비하겠습니까!”

위혜왕이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

제위왕의 통치 하에 제나라는 국력이 강해지고 강국 위나라를 격파했다. 이에 제나라는 제후 중 최강국이 되었으며 스스로 왕을 칭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위왕 36년, 위왕이 죽고 아들 벽강(辟彊)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했다. 선왕 원년(서기전 342),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했고 주나라 천자는 진효공(秦孝公)에게 패주(霸主)란 칭호를 보냈다.

간언을 잘 듣고 유세객을 좋아한 제나라 선왕

* 제선왕이 강국을 만든 원인

제선왕은 제나라 후기의 유능한 군주로 인재를 널리 모으고 간언을 잘 듣기로 유명했다. 그는 여전히 추기, 전기, 손빈, 전영(田嬰) 등을 장상(將相)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었다. 사서에 따르면 선왕 때 “제후들이 서로를 왕이라 칭했으며”, “삼진의 왕들이 전영으로 인해 박망(博望)에서 제왕을 알현하고 맹약을 맺고 떠났다.”(《사기・전경중완세가》)라고 했다.

선왕의 또 다른 특징은 충고를 잘 듣고 유세객을 좋아한 것이다. 안촉(顏蜀), 전과(田過), 왕두(王鬥), 여구묘(閭丘茆), 향거(香居) 등의 충고와 간언을 경청했다.

왕두가 간언할 때면 “선왕은 급히 걸어 나가 문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왕두가 선왕의 폐단을 직접 비판하자 선왕은 노여움을 거두고 반성하며 “과인이 국가에 죄를 지었소”라고 사죄했다. “이에 왕두가 다섯 명의 인재를 추천하여 관직에 임명하니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전국책・제책》).

선왕은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부흥시켰다. 직하학궁은 제환공(齊桓公) 때 창설된 고대 최초의 학술 활동 및 정치 자문 센터(일종의 싱크탱크)였다. 도성인 직문(稷門) 아래 세워졌기에 직하학궁이라 불렸다. 이는 150년 가까이 이어졌으며 제선왕 때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곳에는 각국의 도가, 법가, 유가, 명가(名家), 병가, 농가, 음양가 등 제자백가가 모여 자유롭게 강학하고 토론하며 저술했다. 이들은 치란의 이치를 논하고 부국강병의 계책을 헌상하여 군주의 자문 역할을 했다. 또한 군주의 “인재 시장”이 되어 어진 이를 선발하고 정사를 도왔다.

선왕은 학궁을 확장하여 천하의 현사 천 명을 모았고, 그중 76명을 “상대부(上大夫)”로 존칭했다. 맹자, 팽몽(彭蒙), 전병(田駢), 신도(慎到), 윤문(尹文), 순황(荀況 순자), 추연(鄒衍) 등이 유명했다. 그중 순자는 “가장 어른”으로서 세 번이나 “좨주(祭酒)”를 맡아 학궁의 주관자가 되었다. 직하학궁의 창설은 민주적인 의정 활동의 선례를 남겼으며 제나라의 창성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시대 대중화(大中華)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촉진했다.

* 제선왕 시기의 정벌 전쟁

선왕 2년,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한나라와 우호 관계였으므로 함께 위나라를 쳤으나 남량(南梁)에서 패했다. 선왕은 전기를 불러 복직시켰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선왕은 대신들을 모아 “빨리 구원하는 것이 나은가, 늦게 구원하는 것이 나은가?”를 논의했다.

추기는 구해주지 말자고 했고, 전기는 한나라가 위나라에 병탄될 것이니 빨리 구하자고 했다. 손빈이 말했다. “한, 위 두 나라 군대가 아직 피로해지기 전에 구원하면 우리가 한나라 대신 위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위나라는 한나라를 멸망시킬 속셈이므로 한나라는 반드시 동쪽 제나라에 와서 살려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그때 한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위나라 군의 피로를 틈타 공격하면 더 큰 이익과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왕이 좋다고 하며 몰래 한나라 사자에게 구원군을 보내겠다고 알리고 돌려보냈다. 한나라는 제나라의 구원을 믿고 다섯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결국 제나라에 국가를 위탁했다. 제나라는 이때를 틈타 출병하여 전기와 전영을 통솔자로, 손빈을 군사로 삼아 위나라를 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구원했다. 마릉(馬陵)에서 위군을 대파하고 위나라 장수 방연(龐涓)을 죽였으며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삼진(三晉)의 군주들은 전영의 안내로 박망에서 제왕을 알현하고 맹세한 후 떠났다.

제선왕 7년, 제나라 왕과 위나라 왕이 평아(平阿) 남쪽에서 만났고 이듬해에는 견성(甄城)에서 만났다. 위혜왕이 죽었다. 그다음 해에 제선왕과 위양왕(魏襄王)이 서주(徐州)에서 만나 제후들이 서로 왕이라 칭했다. 제선왕 10년, 초나라 군대가 제나라의 서주를 포위했다. 11년, 제나라와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황하 물을 터뜨려 양국 군대를 수몰시켰고 제, 위 군대는 퇴각했다.

제민왕의 교만함이 제나라의 쇠락을 부르다

선왕 19년, 제선왕이 죽고 아들인 전지(田地)가 민왕(湣王)으로 즉위했다. 민왕은 즉위 초기에 어느 정도 업적을 남겼다.

민왕 13년,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민왕 23년, 제나라 군대와 진(秦)나라 군대가 중구(重丘)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24년, 진나라는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25년에 돌려보냈다. 맹상군 설문(薛文)이 진(秦)나라에 가서 재상이 되었으나 곧 탈출했다.

민왕 26년, 제나라가 한, 위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까지 진격했다. 28년, 진나라가 하외(河外)의 땅을 한나라에 떼어주며 화친을 청했고 삼국 군대는 철수했다. 29년, 조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주부(主父)를 죽였고 제나라는 조나라를 도와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민왕 36년, 제민왕은 스스로 동제(東帝)라 칭했고 진소왕(秦昭王)은 서제(西帝)라 칭했다. 소대(蘇代)가 연나라에서 제나라로 와서 제왕을 알현했다.

제왕이 물었다.

“진나라가 위염(魏冉)을 통해 제호(帝號)를 보내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소대가 답했다.

“대왕의 질문이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제호를 받아들이되 당장 칭제(稱帝)는 하지 마십시오. 진(秦)나라가 칭제한 후 천하가 안정되면 그때 칭제해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칭제하여 천하의 미움을 산다면 왕께서는 칭제하지 않음으로써 민심을 얻으십시오. 이는 큰 자산입니다. 또한 두 제국이 병립하면 천하가 제나라를 존숭하겠습니까, 진나라를 존숭하겠습니까?”

민왕이 “진나라를 존숭할 것이오”라고 했다.

소대가 다시 “제호를 포기하면 천하가 제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진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민왕은 “제나라를 사랑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소대가 말하기를 “동서 양 제(帝)가 맹약을 맺고 조(趙)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유리합니까, 아니면 송(宋)나라의 폭군을 토벌하는 것이 유리합니까?”라고 하니, 민왕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폭군을 토벌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했다.

소대가 말하기를 “맹약은 균등한 것이나 진(秦)나라와 함께 황제라 칭하게 되면 천하는 오직 진나라만을 존숭하고 제(齊)나라를 경시할 것이며, 제호를 포기하면 천하는 제나라를 경애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입니다.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송나라의 폭군을 토벌하는 것보다 유리하지 않으므로, 대왕께서 명확히 제호를 포기하여 천하의 인심을 거두시고 맹약을 배반하여 진나라를 떼어놓으며 진나라와 높고 낮음을 다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대왕께서는 이 시기를 이용해 송나라를 함락시켜야 합니다.

송나라를 점유하면 위(魏)나라의 양지(陽地)가 위급해질 것이고, 제수(濟水) 이서 지역을 점유하면 조나라의 아지(阿地) 이동 일대가 위급해질 것이며, 회수(淮水) 이북을 점유하면 초(楚)나라의 동부가 위급해질 것이고, 도(陶)와 평륙(平陸)을 점유하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의 성문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제호를 포기하고 송나라 폭군을 토벌하는 일로 대신한다면, 국가의 지위는 높아지고 명성은 존숭받게 되어 연(燕)나라와 초나라는 형세에 몰려 귀부할 것이며 천하 각국이 감히 제나라를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상(商)의 탕왕(湯王)이나 주(周) 무왕과 같은 의거입니다. 명의상으로는 진나라의 칭제를 존중해 주는 척하면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른바 비천함에서 존귀함으로 변하는 방법입니다. 대왕께서는 진지하게 고려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에 제나라는 제호를 포기하고 다시 왕이라 칭했으며, 진나라 역시 제위를 포기했다.

민왕 38년, 제(齊)나라가 송(宋)나라 폭군을 토벌했다. 송왕은 도주하여 온성(溫城)에서 죽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楚)나라의 회수(淮水) 이북 땅을 점유했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을 침입했으며, 주(周)나라 왕실까지 병탄하여 천자가 되려 했다. 사수(泗水) 일대의 제후인 추(鄒), 노(魯) 등의 나라 군주들은 모두 제나라에 신하로 일컬으며 복종했다.

민왕의 교만함으로 제나라가 일시에 몰락하다

민왕 40년, 연(燕), 진(秦), 초(楚) 및 삼진이 함께 모의해 각기 정예 병사를 파견해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수(濟水) 이서 지역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민왕이 교만하여 적을 가벼이 여긴 탓에 제나라 군대는 궤멸되어 퇴각했다. 제나라는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고, 타지로 도망쳤던 민왕 역시 초나라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이번 참패로 제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그의 아들 법장(法章)이 거(莒)에서 즉위하니 이가 제 양왕(襄王)이다. 양왕 5년에 전단(田單)이 제나라를 회복했으나, 제나라의 쇠락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19년에 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전건(田建)이 즉위했다.

제왕 건 16년(기원전 249년), 진(秦)나라가 주나라 왕실을 멸망시켰다. 제나라 군왕후(君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23년에 진나라는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28년에 제왕이 진나라에 입조하여 조배하니, 진왕 정(政)이 함양(咸陽)에서 주연을 베풀어 대접했다.

35년에 진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다.

37년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38년에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암살하려 했으나 진왕이 알아차려 형가를 죽였다. 이듬해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 수도를 함락시키자 연왕은 요동(遼東)으로 도주했다. 그다음 해에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진나라 군대는 역하(歷下)에 주둔했다.

42년에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대왕(代王) 가(嘉)를 포로로 잡고 연왕 희(喜)를 죽여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제왕 건 44년(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왕은 재상 후승(後勝)의 계책을 따라 교전도 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는 제왕 건을 포로로 잡아 공성(共城)으로 옮겼다. 마침내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하나의 군(郡)으로 개편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