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
【정견망】
서양인들에게 ‘중국식 햄버거’라 불리는 궈쿠이(鍋盔 밀전병)는 대륙 곳곳에 거의 다 있지만, 이 지역 특색 음식이 군량(軍糧)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이것이 삼국시대 유비의 군사 제갈량(諸葛亮)이 발명한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아래에서 이 전통 음식 뒤에 숨겨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유비는 원래 한 종실로 예주목(豫州牧)이었으나, 초기에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러 제후에게 의탁했으나 시종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관도대전 때 유비는 원소와 힘을 합쳐 조조를 공격하려 했으나 결국 조조에게 패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남하해 같은 종친인 형주태수 유표에게 투항했다.
제갈량이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손으로서 신의가 사해에 떨치고 계시며, 영웅들을 불러 모으고 어진 이를 찾으시기를 마치 목마른 듯이 하십니다.”라고 말했듯 유비 곁에는 ‘도원결의’를 맺고 생사를 함께한 관우와 장비라는 두 명의 맹장이 있었지만, 시종 ‘막사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모사(謀士)를 찾지 못해 고심했다. 그리하여 유비는 형주에 들어온 후 어진 이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사방으로 인재를 모집했다.
그는 일찍이 수경 선생 사마휘로부터 “와룡과 봉추, 두 사람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 ‘와룡’은 제갈량을 가리키고 ‘봉추’는 방통을 말한다. 이후 유명한 모사 서서(徐庶)의 추천으로 유비는 몸소 삼고초려하여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찾아가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을 보필하며 대업을 함께 도모해 줄 것을 청했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진술한 “선제(先帝)께서 신의 비천함을 가리지 않으시고, 몸소 굽히어 신의 초옥을 세 번이나 찾아주셨습니다”라는 대목이다.

유비가 삼고초려하며 제갈량의 출산을 청하다. (인터넷 사진)
공교롭게도 ‘와룡’ 제갈공명을 얻은 뒤로 줄곧 실의에 빠져 있던 유비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고,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제갈량의 대책에 따라 유비는 겨우 신야현 하나뿐이던 땅에서 신속히 궐기하여, 형주와 익주 두 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화친하며 천하의 변화에 대처했다. 마지막에는 조위(曹魏)로 반격하여 위, 촉, 오가 솥발처럼 대치하는 형세를 형성함으로써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차지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중국 고전 명작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를 맡은 직후, 조조도 이미 하북을 평정하고 남쪽 정벌을 결심했다고 언급한다. 조조는 하후돈을 주장으로, 우금과 이전 등을 부장으로 삼아 십만 대군을 이끌고 유비의 주둔지인 남양 신야로 내려가게 했다. 제갈량은 비록 학식이 풍부하고 적을 물리칠 계책이 가슴속에 가득했으나, 관우와 장비는 제갈량이라는 시골뜨기 선비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유비의 상방보검을 빌려 두 사람을 위엄으로 굴복시켰다. 그들에게 각각 천 명의 병마를 이끌고 예산과 안림 속에 매복하게 한 뒤, 하후돈의 군사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매복병과 화공으로 공격하게 했다. 또한 조운을 선봉으로 파견해 노약한 병사들을 이끌고 조나라 군대를 거짓으로 공격하게 한 뒤, 패한 척하며 후퇴하여 하후돈을 산림의 좁은 길로 유인하게 했다. 또 관평, 주창, 유봉 등을 조나라 군대 후방으로 잠입시켜 군수 물자를 불태워 조나라 군대를 공포에 빠뜨리고 앞뒤를 살피지 못하게 했다.
조조와 유비 양측의 교전이 시작된 후, 모든 것은 신기하게 앞을 내다보는 제갈량의 지휘에 따라 전개되었다. 하후돈과 우금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할 때, 후방에 있던 이전이 전방의 하후돈에게 급히 통보하여 적군의 화공을 방비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조나라 군대는 좁은 도로에 갇힌 데다 나무가 뒤섞인 곳에 처해 있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사상자가 매우 처참했다. 결국 그들은 패퇴하여 허도(許都)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박망성을 점령하고 오호대장군 관우에게 병사를 이끌고 주둔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화소박망파(火燒博望坡 박망파에서 불을 지르다)’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날씨가 몹시 가물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성안의 고정(古井)이 말라붙어 수원이 끊겼으며 밥을 지을 물조차 충당하기 어려웠다. 장병들이 기갈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군심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관우는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서둘러 편지 한 통을 써서 밤을 도와 신야로 보내 군사에게 철군 명령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제갈량은 위급한 문서를 받고 생각했다. ‘박망은 군사 요충지인데 어찌 쉽게 군대를 물리고 성을 버릴 수 있겠는가?’ 밤새 고심한 끝에 답장 한 통을 써서 사람을 시켜 박망성으로 급히 보냈다.
관우가 뜯어보니 군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알려주었다. “밀가루를 사용하되 물을 적게 스며들게 하여 딱딱한 덩어리로 반죽하고, 솥에 구워 먹을 것을 만들어 장병들에게 먹이면 군심이 안정될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면서도 물을 아끼는 식품 제조 방법이었고, 이로써 군대의 급박한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평소 자존심이 높았던 관우도 마음속으로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략이 뛰어난 군사가 용병에 능할 뿐만 아니라 음식 만드는 법에도 정통하다니, 참으로 기인이로구나!’ 관우가 군사의 말대로 만든 궤떡(饋餅)은 방패처럼 크고 술잔처럼 두꺼웠으며, 맛이 바삭하고 향긋하며 먹기에 좋았다. 만들기도 간편하고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마른 건량으로도 쓸 수 있었다. 장병들은 마침내 이 음식에 의지해 고비마다 난관을 넘기며 박망성을 굳게 지켰다.
속담에 신관이 부임하면 세 번 불을 지른다고 했다. 제갈량은 처음 등장하자마자 “박망에서 화공을 써서 지휘함이 여유로운 담소 속에 있네. 곧 조공의 간담을 서늘케 하니 초려에서 갓 나온 첫 번째 공이로다”라는 일화를 남겼다. 동시에 관우와 장비 등도 제갈량을 다시 보게 되었으며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아울러 ‘박망 궈쿠이’가 사방으로 명성을 떨치게 했다.
“병마가 움직이기 전에 식량과 풀이 먼저 가야 한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빌려 유강구에 주둔하고 공안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자연스럽게 제작이 간단하고 먹기 편하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게다가 물을 많이 소비하지 않는 이 ‘군량’을 그 지역에 가져왔다. 동시에 보릿고개를 피하고 수재와 가뭄 등 천재지변을 방지하며 풍년으로 흉년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군량을 비축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중원 지역의 밀 재배법도 이곳에 가져왔다. 그리하여 기후가 온화한 남방에서 윤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겨울을 이용해 밀을 심고 여름에는 벼를 심거나, 밭을 이용해 밀을 심고 논을 이용해 벼를 심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원래 장강 유역에서는 여름에만 벼를 재배하는 줄 알았던 북방 사람들은 나중에 이곳에서 겨울 밀도 파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무한(武漢) 열건면(熱幹面), 사시 조당면(沙市早堂面), 공안 궈쿠이(公安鍋盔) 등 밀가루 음식의 지명도가 면식을 주로 먹는 북방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공안 궈쿠이는 ‘얇고, 납작하고, 바삭하고, 아삭하며, 향긋한’ 특징이 있으며, 안에 여러 가지 맛의 소가 들어 있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인터넷 사진)
일방(一方) 수토(水土)에 일방의 사람, 일방 수토에 일방의 맛이라, 제갈량이 발명한 ‘박망 궈쿠이’가 어미지향(魚米之鄕)인 공안에 전해진 후 민간에서는 이를 크게 개선했다. 현지인들은 예전의 단순한 밀가루 반죽에 맛있는 고기 소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소를 넣었고, 반죽 표면에 향긋한 파와 깨를 뿌렸다. 혹은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다 구워진 궈쿠이에 매콤한 고추장 등의 양념을 덧바르기도 했다. 궈쿠이의 모양과 크기도 마치 헝겊 신발의 밑창처럼 변했다. 그리하여 맛이 제각각이고 종류가 다양한 이 음식은 더욱 사람들의 군침을 돌게 하여 한 번 맛보면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에 공안에 주둔했던 장비가 군사를 이끌고 야외 작전에 나갔을 때, 차림이 간편했던 장병들은 종종 지형지물을 이용해 투구(盔)를 벗어 그 안에 반죽을 놓고 땔감을 태워 떡을 구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망 궈쿠이’는 ‘공안 궈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어 천 년을 이어오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55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