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오배의 범상(犯上), 군신의 격돌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오배(鼇拜)를 제거한 것은 소년 강희제가 해낸 첫 번째 멋진 대사(大事)이자, 그가 친정(親政)으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개척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대청 왕조는 중원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변방을 지키는 지방 부족이 아니라 만방(萬邦)이 주목하는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만왕의 왕인 대청 황제의 일거일동은 왕조 흥망성쇠의 향방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천하의 격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청조(淸朝)가 입관한 초기의 두 황제인 순치제와 강희제는 모두 어린 나이에 등극했다. 강희제는 그의 부황처럼 친정 전의 학습과 단련 단계를 평탄하게 걸을 수 있었을까?
강희제가 오배를 제거한 일은 가히 집집마다 다 아는 전설이 되었다. 이는 소년 강희제가 해낸 첫 번째 멋진 대사이며, 그가 친정으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후세의 문예 작품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게 다뤄지는 이야기다. 지략과 용력의 대결이었던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배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보정대신(輔政大臣)
“그 네 사람은 공훈이 있는 원로 중신들이니, 짐은 국사를 온전히 그들에게 기탁하노라. 그들이 정성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어린 주군을 도와 정무를 잘 다스리기 바란다.” — 순치제
(《순치황제유교》)
순치제의 붕어와 강희제의 계승은 순치 18년(1661년)의 신년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대청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순간으로 만들었다. 천자가 등극하면 당연히 나라를 다스리는 제1인자가 되지만, 천자가 연소하면 독립적으로 정무를 처리할 수 없다.
어린 주군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기에 조정에서는 특정한 인물을 선발하여 천자를 대행하거나 보좌하여 정권을 맡기는데, 이것이 곧 ‘섭정(攝政)’이다. 역사상으로도 주성왕(周成王) 시기의 주공(周公), 삼국시대의 제갈무후(諸葛武侯 공명) 등 유명한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 덕망 높은 국사(國士)이자 동량으로서 사직을 위해 몸을 바쳐 많은 미담을 남겼다. 또한 수렴청정을 하는 태후라는 특수한 부류도 있었다.
만청(滿淸)의 옛 제도에 따르면 종실(宗室)의 여러 왕이 국가 정사를 대신했다. 예컨대 순치제가 여섯 살에 등극했을 때는 화석예친왕 도르곤(多爾袞)과 또 다른 친왕이 공동으로 보정했다. 나중에 도르곤이 독단적으로 세력을 키워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까지 승진하며 조정의 정치를 전횡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씀씀이가 황제에 가까웠다. 이 모든 상황은 도르곤이 장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야 바로잡혔다. 강희제의 즉위 상황은 선제(先帝)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으나 역사는 재연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순치제는 유조(遺詔)에서 옛 관습을 고쳐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보정하는 새로운 제도를 확립했다. 그들 네 사람은 수석보정대신이자 사조(四朝) 원로인 소니(索尼, 헤셰리씨, 정황기), 소극살합(蘇克薩哈, 정백기), 그리고 양황기의 알필륭(遏必隆)과 오배였다. 이들 네 명은 모두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상삼기(上三旗) 출신으로, 개국 공신이거나 명문가 후손 혹은 전공이 탁월하여 대청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순치제의 중용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이들 네 대신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컸으나, 탁고(托孤, 어린 자식을 부탁)의 성격을 띤 보정의 중임에 대해 매우 황공해하며 종실의 왕과 패륵(貝勒 베일)들의 저지를 받을까 걱정했다. 유조를 선포할 때 그들 네 명은 종실 구성원들에게 사양하며 말했다.
“선제께서 유조를 내려 저희 네 명에게 어린 주군을 보좌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국가 정무는 본래 종실이 보좌하는 것이니, 저희 같은 이성(異姓) 신하가 어찌 이 중임을 맡겠습니까? 마땅히 여러 왕야와 패륵들께서 공동으로 정사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자 친왕들이 서둘러 답했다.
“선제께서 그대들의 충심을 아셨기에 국가 대업을 기탁하신 것이니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이에 네 보정대신은 순치제의 영전 앞에서 엄숙히 맹세했다.
“신 등은 마음을 합쳐 충성을 다하고 생사를 함께하며 정무를 보좌할 것을 맹세합니다. 친척을 사사로이 돌보지 않고 원한을 따지지 않으며, 종실과 사사로이 왕래하지 않고 파당을 결성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지 않겠습니다. 만약 서약을 어긴다면 하늘의 엄벌을 달게 받겠습니다.”[1] 다른 문무백관들도 대전 위에서 직무에 충실하며 새 황제를 보좌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강희제가 친정하기 전까지 청 조정은 정식으로 4대신 보정 체제를 확립했다. 그들 네 명은 어느 정도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며 ‘보신칭지(輔臣稱旨, 보정대신이 황제의 성지를 일컬음)’라는 명목으로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일반적으로 네 보정대신이 집단 토론을 거쳐 결정을 내리고 공동으로 황제에게 상소했다. 강희제의 주요 임무는 대신들의 주의(奏議)를 경청하고 참여하며 정무 처리 방식을 익히는 공부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할머니 효장태황태후에게 청시(請示)를 올려야 했다.
4대신 보정 체제가 확립된 때부터 강희 8년(1669년) 친정하기 전까지 약 8년 반의 시간이 흘렀는데, 이 과도기를 ‘보정 시기’라고도 부른다. 이 기간에 효장태황태후 역시 중요한 지지와 보좌 역할을 했다. 그녀는 명리에 담백한 심성으로 수렴청정의 특권을 거절했고, 초연하고 존귀한 위망(威望)으로 어린 황손(皇孫)을 극력 지원하고 도왔다.
순치제를 보좌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효장은 정무 처리가 더 여유로웠고 강희제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낫듯, 효장의 교육은 주로 가르침과 격려를 통해 강희제가 제왕의 치국 도리를 깨닫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었다.
효장은 직접 쓴 글귀로 강희제를 훈계했다. “옛사람들이 흔히 이르기를 황제 노릇은 어렵다고 했다. 천하 백성이 모두 황제에게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민심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다(得衆則得國)’는 지극한 이치를 깊이 체득해야 하며, 사해(四海)를 편안히 살게 해야 강산이 견고해질 수 있다.”
그녀는 또한 간곡히 당부했다. “너는 너그럽고 인애(仁愛)하며 온화하고 공손하며,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무에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그래야 조부님과 아버님이 남기신 업적을 계승할 수 있으니 그래야 나도 안심할 수 있겠구나.”[2]
오배의 전횡
“오배와 알필륭이 땅을 바꾸는 일 때문에 상서 소납해(蘇納海) 등 세 명을 죽인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이런 일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죽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죄를 물어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 강희제
강희제는 하루하루 성장해 갔고 온 나라도 좋은 정치 제도 아래 평온하게 운영되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렵고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쉬운 법이다. 보정 제도가 종실의 권력 남용이라는 폐단은 막았으나, 그 네 명의 대신이 정말 맹세한 대로 초심을 지키며 사심 없이 어린 황제를 보좌할 수 있었을까?
네 보정대신 중 가장 기세등등하고 방자했던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오배였다. 초기에 오배는 충심이 지극하고 용맹하게 싸우는 장수였다. 그는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남정북전(南征北戰)하며 탁월한 전공을 세워 심복이 되었다. 그는 만주어로 ‘바투루(勇士)’라는 칭호를 가졌으며 무예가 매우 뛰어났는데, 철로 된 화살을 성문에 쏘아 박으면 시위 열댓 명이 합심해서 당겨도 뽑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사납고 용맹함을 짐작할 수 있다.[3]
오배는 군공(軍功)이 탁월했으나 서열이 마지막이었기에 당연히 남의 밑에 오래 있기를 원치 않았고, 점차 권력을 다투려는 야심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직권을 이용해 이견을 가진 자들을 제거하며 네 대신 보정의 균형을 깨뜨리려 했다. 예컨대 오배는 젊은 시절 내대신 비양고(費揚古)와 원한이 있었다. 보정 2년 차에 그는 몇 가지 죄명을 씌워 비양고와 그 두 아들을 죽였다. 이후 오배는 더욱 독단적으로 변해 조정에 자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의 친척들과 권세에 아부하는 대신들, 즉 그의 동생, 조카, 대학사 반포이선(班布爾善) 등이 차례로 그에게 빌붙었다.
평소 정사를 논할 때 오배의 태도는 더욱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군공을 믿고 언행이 제멋대로여서 모든 관리가 그를 두려워했다.[4] 나머지 세 보정대신은 이를 보고만 있었을까? 《청사고(淸史稿)》에 이르기를 “소니는 늙었고 알필륭은 유약하며 소극살합은 명망이 얕아 오배의 소행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다투지 못했다”라고 했다. 서열 1위 소니는 늙고 병들었으며, 2위 소극살합은 경력이 가장 짧았고, 3위 알필륭은 혼미하고 나약했으니 이들 셋은 모두 오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그의 행동에 분노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오배가 가장 시기하고 미워한 사람은 소극살합이었으며 그를 최대 정적으로 여겼다. 소극살합은 부마의 아들로 황실의 중용을 받았기에 고명대신 중 서열이 소니 다음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극살합과 오배가 사돈 관계였다는 것인데, 본래 당여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러나 소극살합은 오배의 거만한 태도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정사를 논할 때 사사건건 그와 대립하니 두 사람의 원한은 갈수록 깊어졌다.
또한 소극살합이 속한 정백기(正白旗)는 원래 도르곤이 통솔하던 기(旗)였기에 황제가 직접 거느리는 양황기와 구원(舊怨)이 있었다. 그래서 소극살합은 나머지 세 보정대신과 갈등이 많았고 본래 고립된 처지였다. 이에 오배는 땅을 바꾸는 권지(圈地) 사건을 이용해 풍파를 일으켜 소극살합을 더욱 고립시키고 압박할 계획을 세웠다.
일찍이 도르곤이 섭정할 때 권세를 이용해 우선적으로 농지를 차지하며 좋은 땅을 정백기에 나눠주고 그다음이 양황기였기에 양황기 구성원들의 불만을 샀다. 20여 년 후인 강희 5년(1666년) 정월, 오배는 옛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권지의 재분배를 요구했고 이는 과연 황기(黃旗) 대신들과 심지어 보정대신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각 기의 백성이 이미 안착하여 살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이전은 경성의 혼란만 불러올 뿐이었다.
그리하여 정백기 출신의 호부상서 소납해가 반대 의사를 표했다. “권지 사건은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강희 3년에 조정에서 민간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으니 지금 땅을 바꾸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5] 그러나 오배는 독단적으로 ‘황제의 뜻(稱旨)’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강제로 권지 교체 명령을 반포했다. 이 조치로 성안은 떠들썩해졌고 백성들은 전전긍긍했다.
11월에 이르자 북경 인근의 지방관들도 잇달아 반대 상소를 올렸다. 직예성 총독 주창조(朱昌祚)는 “이것이 황제의 뜻이라면 신이 직분을 넘어 상소하지 못하겠으나, 기인(旗人)과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을 목격했으니 즉시 조서를 내려 땅 바꾸는 일을 멈추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순무 왕등련(王登聯) 역시 “조서가 내려진 뒤 기의 땅은 바뀌기를 기다리고 민간의 땅은 차지되기를 기다리느라 모두 농사를 짓지 않아 땅이 황폐해졌으니 즉시 이 일을 멈춰야 합니다”라고 말했다.[6]
불과 한 달 만에 오배는 황제의 명을 사칭해 소납해, 주창조, 왕등련을 한꺼번에 체포해 참수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종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나 오배는 죽이고 싶으면 죽였으니 그 심보가 얼마나 독하고 권세가 컸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강희제는 불과 13세였으나 권지 사건이 북경 민생에 직결됨을 알았기에 특별히 네 보정대신을 불러 이 일을 물었다. 황기(黃旗)와 백기(白旗) 사이의 갈등 때문에 소극살합만 침묵했을 뿐 소니와 알필륭도 소납해 등 세 명을 엄벌에 처하는 데 동의했다.
이성적인 소년 천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끝내 오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신의 기세가 등등하여 여전히 천자의 이름을 빌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다. 세 사람의 죽음은 강희제에게 큰 아픔이 되었다. 40년이 흐른 뒤에도 강희제는 신하들에게 이 일을 회상하며 여전히 그들이 “너무나 억울했다”라고 칭하며 안타까움과 통심함을 드러냈다.
동요하지 않는 태도
“오배는 고명대신이라 칭하면서도 오로지 권세를 도둑질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 강희제
(《십엽야문(十葉野聞)》)
오배는 아래로는 생사여탈권을 장악했고 위로는 더욱 오만무례했다. 그는 어린 강희제가 인자하고 관대함을 보고 점차 강희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으며, 흔히 그를 “어린아이”라고 직설적으로 부르거나 심지어 불손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한 필기 소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오배가 정사를 보고하려 준비하다 강희제가 유가 서적을 읽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해하며 무례하게 ‘직간’했다. “우리 대청의 제도에 따르면 황상께서는 라마교 경전을 많이 읽으셔야지 유생들의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강희제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대청(大淸)이 중원의 주인이 되었는데 공자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짐은 삼교(三敎)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경은 어찌 견식이 넓지 못한가?”
그러자 오배는 분노하며 말했다. “황상께서 막 친정하시자마자 신의 충직한 간언을 거절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국사를 묻겠습니까!”라고 하며 소매를 떨치고 물러나려 했다.
강희제는 여전히 부드러운 말로 그를 안심시켰다.
“짐은 간언을 거절하는 군주가 아니며 독서 역시 나쁜 일이 아니다. 경은 마음을 평안히 하고 살펴보라.”
오배는 그래도 굽히지 않았다.
“황상, 부디 신의 말을 여러 신하에게 맡겨 논의하게 하소서. 만약 신의 말에 오류가 있다면 신은 죽음으로 죄를 갚겠습니다.”
강희제는 그의 성정이 교만함을 알고 따지지 않고 웃어넘겼다.
또 한 번은 오배가 자기 가문의 한 선배를 가봉(加封)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이유가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조선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강희제가 거절하며 말했다. “그의 공적이 현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선제께서 그에게 내린 은상이 이미 넉넉했기 때문이다. 어찌 오늘 다시 봉작을 청하는가? 짐은 선황(先皇)의 정례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경은 스스로 자중하라.”
오배는 명을 받들지 않고 크게 항변했다. 강희제는 속으로 그의 방자하고 무례함이 몹시 싫었으나 고명대신의 체면을 고려해 차분히 달랬다.
“짐에게 따로 뜻이 있으니 경은 너무 마음 쓰지 말라.” 오배는 즉시 사례하며 스스로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니 그 무모한 전권이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7]
오만한 오배와 대조적으로 강희제는 나이를 초월한 예지(睿智)와 함양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생사의 시험 앞에서도 강희제는 동요하지 않고 위기를 무형으로 해소했다.
필기 소설에는 이런 일도 기록되어 있다. 오배가 어느 날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자 강희제가 직접 그의 저택으로 문병을 갔다. 오배의 침실에 이르렀을 때 경계심이 강한 한 시위가 오배의 안색이 이상한 것을 보고 즉시 침상 앞으로 달려가 자리를 걷어내니 침상 위에 단검 하나가 환히 드러났다. 이 당혹스럽고 위급한 상황에서 강희제는 덤덤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칼을 몸에서 떼지 않는 것은 만주의 옛 풍습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 말을 마치고 유유히 궁으로 돌아왔다.[8]
겉으로 보기에 강희제는 오배에 대해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한 걸음씩 양보하는 듯했으나, 사실 그는 반격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효장과 다른 보정대신들 역시 음으로 양으로 강희제를 도와 오배를 견제하며 강희제가 하루빨리 친정을 실현해 오배의 권력을 해제하기를 바랐다. 강희 4년(1665년), 강희제가 대혼(大婚)을 치렀는데 효장은 그를 위해 명문가 규수이자 소니의 손녀인 헤셰리씨를 황후로 간택했다. 6년 3월, 강희제가 14세가 되어 친정할 나이가 되자 소니는 4대 보정대신을 대표해 여러 차례 강희제의 친정을 청했다.
처음에 강희제는 시기상조라 여겨 상소문을 궁중에 머물게 하고 내보내지 않다가, 얼마 후 소니가 병사하자 세 보정대신을 거느리고 효장을 배알하여 친정 대전을 정했다. 7월 초사흘, 강희제는 태화전에서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고 천하에 친정 소식을 알렸다. 이후 강희제는 순치제 시기의 ‘어문청정’ 제도를 이어 정식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오배는 권세에 미련을 두어 계속 정사에 간섭했고 조정의 문무백관 상당수가 그의 문하생이었기에 황제의 뜻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때 소극살합이 보정대신의 수장으로서 강희제를 돕고 나섰다. 그는 효장에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보정의 직을 내려놓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저녁에 정권을 황상께 돌려드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선제의 능을 지키러 가겠습니다.”[9] 일단 소극살합이 물러나면 보정 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오배도 독점적 권력을 유지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에 오배는 소극살합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오배는 여론을 이용하고 그의 당여들과 함께 온갖 모략을 꾸며 소극살합에게 24가지 죄명을 씌웠으며, 그를 능지처참하고 가문을 멸하려 했다.
강희제는 당연히 오배의 흉악한 속셈을 알았기에 그의 상소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오배는 한 걸음씩 다가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아가 며칠 동안 강제로 아뢰었다.” 그는 천자 앞에서 신하의 예의는 물론 대장부의 풍모도 없이 소매를 걷고 팔을 휘두르며 강희제에게 온종일 소리를 지르고 질문을 퍼부으며 소극살합의 처형을 고집했다.
이것이 군신의 첫 번째 정면 격돌이었다. 십 대 소년 강희는 무예가 뛰어나고 교만하게 권세를 부리는 오배를 마주하여 “청한 바를 견결히 허락하지 않으며”[10] 소극살합의 목숨을 보전하려 힘썼다. 그러나 이번 논쟁의 결과는 여전히 오배가 우위를 점하여 소극살합의 가문은 멸문되었다. 또다시 흐른 피는 강희제로 하여금 오배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게 했고, 그는 더 이상 선제가 탁고한 정분을 고려하지 않고 오배를 제거할 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주석:
[1] 《강희조실록》 권1: 순치 18년 정월 신축 조.
[2] 《성조인황제어제문집》 제2집 권40: 성조모께서 글을 지어 어린 아들을 훈계하며 이르시기를 “옛날부터 이르기를 군주 노릇은 어렵다 하셨다! 백성은 지극히 많으나 천자는 한 몸으로 그 위에 군림하여 기르고 보살피니 모두가 목을 빼고 바라본다. 반드시 민심을 얻어야 나라를 얻는다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 사해 안이 모두 평안하고 풍요로워지게 해야 대대로 무궁하게 이어질 것이니 오직 아름다울 뿐이다. 너는 부디 너그럽고 인자하며 온화하고 공손하며 위엄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며 밤낮으로 삼가고 부지런히 하여 조상님들의 유업을 받들어 나 또한 마음의 병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
[3] 《남정필기(南亭筆記)》 권1: 오배는 청 세조 때 이미 추밀(樞垣)에 들어갔으며 힘이 장사라 일찍이 강궁을 당겨 철화살로 정양문 위에 꿰뚫으니 시위 십여 명이 뽑으려 해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4] 《청사고》 권249: 오배는 특히 공이 많아 의기가 거만하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5] 《강희조실록》 권17: 강희 5년 정월 병신 조.
[6] 《강희조실록》 권19: 강희 5년 11월 병신 조.
[7] 《십엽야문》 권2: 〈고명제문3칙〉.
[8] 《소정잡록(嘯亭雜錄)》 권1: 〈성조나오배(聖祖拿鼇拜)〉.
[9] [10] 《강희조실록》 권22: 강희 6년 7월 기미 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3/n1213166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