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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유교 문화의 위대한 실천자의 하나: 안회(顔回)

소양춘

【정견망】

안회(顔回)는 안자(顔子)라고도 하며 자는 연(淵) 또는 자연(子淵)이다. 춘추 말기 노나라(지금의 산동성 곡부) 사람이다. 주경왕 24년, 노소공 21년(기원전 521년) 경진년 겨울 11월 16일에 태어나 주경왕 30년, 노애공 5년(기원전 490년) 신해년 가을 8월 23일에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도성 동쪽 방산(防山)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 노정공 8년(서기전 502년)에 송나라 여인 대씨(戴氏)를 아내로 맞이했고, 이듬해 아들 흠(歆)을 낳았다.

공묘(孔廟)에서 공자(가운데)와 공자의 가장 뛰어난 네 제자를 배향하는데 바로 안연(오른쪽), 증삼(曾參), 자사(子思), 맹가(孟軻 맹자)이며 이를 사배(四配)라 한다.

여러 제자들 중 덕행(德行) 제일

안회는 공자가 가장 만족스러워했던 제자로 공문(孔門) 삼천 제자 중 으뜸이며 72현 중의 최고였다. 평소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공문의 사배(四配)와 십철(十哲) 중 덕행 과목에서 제일이었다. 그는 타고난 총명과 지혜로 성학(聖學)에 전념했다. 박약(博約)의 가르침을 닦고 극복(克復)의 종지를 들었으며, 덕을 닦아 몸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다스리고 예로 돌아갔다(克己復禮).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적게 하고 천명에 안주해 도를 즐겼으며,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고통을 참고 정진했다. 깊이 생각하기를 잘해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며, 스승을 존경하고 가르침을 중시해 스승과 환난을 함께 했으니 공문의 제자 중 덕행 수양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도덕적 행위 규범을 굳게 지켰으며, 인(仁)과 예(禮)에 관한 공자의 요구에 따라 일은 민첩하되 말은 신중히 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늘 그가 군자의 네 가지 덕을 갖추었다고 찬양하셨으니, 즉 의(義)를 행함에는 강하고, 간언을 받아들임에는 부드러우며, 녹봉을 대함에는 두려워하고, 몸을 다스림에는 신중했다.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는 “나의 수업을 받아 통달한 자가 77명인데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들이다.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다”라고 했다.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기며 배우기를 좋아함

《사기》에서는 또,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다. 공자보다 30세 연하이다.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자신을 다스려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가느니라”고 했다.

공자가 말하길 “어질도다, 회(回)여! 한 대나무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사니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또한 “회는 어리석은 듯하나 물러가 사적으로 살피면 또한 충분히 드러내니, 회는 어리석지 않다”고 했고, “등용되면 행하고 버려지면 은거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가졌구나!”라고 했다.

안회는 나이 29세에 머리카락이 다 희어졌고 일찍 죽었다. 공자가 통곡하며 “내게 회가 있은 뒤로 문인들이 더욱 친해졌다”고 했다.

《논어·옹야》에는 “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으나, 그 나머지는 하루나 한 달 정도 인에 이를 뿐이다”라고 했다.

노애공이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길 “안회라는 자가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불행히 명을 짧게 타고나 죽었으므로 지금은 없으니 아직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천하에 덕을 닦으면 저절로 다스려져

《한시외전》에 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자가 안회, 자로 등과 경산(景山)에 올라 포부를 말했다.

안회가 “작은 나라를 얻어 재상이 되어 임금은 도로써 다스리고 신하는 덕으로써 화하게 하며, 군신이 한마음이 되어 안팎이 서로 응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가르침이 백성에게 행해지고 덕이 사방 오랑캐에게 베풀어지면 병기를 버리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며, 사방의 문으로 모여들어 천하가 다 영원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날고 기는 짐승들까지 각기 그 본성을 즐기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유능한 이에게 일을 시켜 각기 그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 임금이 편안하고 아래로 신하가 화목할 것입니다. 팔을 늘어뜨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며, 동작은 도에 맞고 행동은 예에 합당할 것입니다. 인의를 말하는 자는 상을 주고 전쟁을 말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안회가 지향한 것은 천하에 덕을 닦고 군신이 한마음이 되고 상하가 화목하고, 어진 이를 선발하고 유능한 자를 임용하여 각기 그 재능을 다하며, 인의를 밝히고 무위(無爲)로 다스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사방이 다 복종하는 이상 사회였다.

스승을 공경하고 가르침을 중시해 절개를 굽히지 않다

안회는 13세에 정식으로 공문의 문하에 들어왔다. 소정묘(少正卯)가 공자와 제자를 다툴 때 “공자의 문하가 세 번 가득 차고 세 번 비었으나 오직 안연만은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안연만이 홀로 공자가 성인임을 알았다”고 했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하며 유가 학설을 전할 때 진(陳), 채(蔡) 두 나라 사이의 거친 들판에 갇혀 7일 동안 양식이 끊긴 적이 있었다.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굶주림에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평소와 같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았고, 태연자약하게 제자들에게 강의하고 시를 읊으며 거문고를 탔다. 눈앞의 곤경에 면하여 어떤 제자들은 의구심을 품었으나, 오직 안회만은 마음을 굳게 하여 매일 “문밖에서 나물을 올리는 예를 행하며” 선생의 교화에 대한 예경(禮敬)과 감사, 그리고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는 또한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학설은 사람의 도덕 규범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기 때문에 명리에 집착하는 속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험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곳곳을 다니시며 자신의 이상과 주장을 실행하고 예악이 붕괴된 난세 속에서 천하의 창생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계십니다. 비록 가는 곳마다 벽에 부딪히고 각종 배척과 비난을 받으시지만, 이것이 선생님의 학설 자체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인의(仁義)의 얻기 어려움과 소중함을 더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몸소 행하지 않고 인의의 도를 닦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우리가 온갖 고생을 겪으며 널리 인의의 도를 드날리고 전파했는데도 채택되어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차 각국 제후들의 막대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도의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천하를 공(公)으로 여기고 무사무아(無私無我)한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공자가 듣고 나서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안회가 이런 참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니 참으로 가상하구나! 지란(芝蘭)은 깊은 숲에서 자라나 사람이 보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풍기지 않는 것이 아니며,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움에 곤궁하다고 해서 절개를 굽히지 않느니라.”

〔청〕 초병정(焦秉貞) 《공자성적도(孔子聖跡圖)》

이처럼 안회가 역경에 처해서도 그 뜻을 떨구지 않고 도의를 굳게 지키며 덕(德)을 잃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공자를 따라 천하에 의를 행한 정신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했으며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석채(釋菜)’는 스승을 공경하는 예법으로서 후세에 전해져 중화 대지에서 2천여 년 동안 성행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등불은 이어져

안회는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동쪽 방산의 남쪽에 묻혔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안림(顔林)’이라 불렀다. 공자는 그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며 탄식했다.

안회는 일생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후세에 남긴 저작도 없다. 그의 말은 《논어》, 《공자가어》 속에 수집되어 있으며, 명나라 때의 《누항지(陋巷志)》에도 그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세상에 남긴 유명한 명언은 “남이 나에게 선하게 대하면 나 또한 선하게 대하고, 남이 나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선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선을 쌓아 덕을 이루고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 이것이 바로 안회의 인품이 고귀한 지점이다.

한고조가 동쪽을 순행하며 공자에게 제사 지낼 때 유독 안자(顏子)만을 배향했다. 이때부터 중국 역대 제왕들은 안자와 그 후손들에 대해 끊임없이 시호를 올리고 추봉했다. 당태종은 그를 ‘선사(先師)’로 존숭했고, 당고종은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추봉했으며, 당현종은 ‘연공(兗公)’으로 높였다. 송진종은 ‘연국공(兗國公)’으로 가봉했고, 원문종은 다시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으로 높였으며, 명 가정 9년에 ‘복성(復聖)’이라 고쳐 불렀다.

복성 안자의 고향인 산동 곡부(曲阜)에는 여전히 여러 곳에 안씨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안묘(顔廟), 안부(顔府), 안림(顔林)[이 세 가지를 속칭 ‘삼안’이라 함]이 가장 유명하다. 안묘는 안자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고, 안부는 안자의 직계 후손인 세습 한림원(翰林院五經博士) 오경박사가 대대로 거주하던 저택으로 안한박부(顏翰博府)라고도 한다. 안림은 안자와 그 후손들의 가족 묘다.

안묘는 복성묘라고도 하며 공부(孔府) 뒷산과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현재는 세계문화유산 항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화 전통문화는 도가(道家) 수련문화를 근원으로 삼고 유가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며, 불가(佛家)의 교의로 중생을 널리 구도한다. 춘추 말기 공자가 유가 학설을 창시한 이래 화하(華夏) 2,500여 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유가가 제창한 ‘인, 의, 예, 지, 신’의 핵심 사상과 공자가 후세에 남긴 사람 됨의 도덕 규범은 시종일관 중국 고대 전통 문화의 정수로서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안회는 공자의 가장 득의한 문생(門生)으로서 중국 전통문화와 보편적 가치의 위대한 실천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오늘날 신주(神州) 백성들이 전통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데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