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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동주 제후쟁패 시기─춘추전국 (4)

—전국 칠웅 중 초나라의 흥망사

심연(心緣)

【정견망】

초나라의 흥망사

춘추시대 초나라는 남방에 웅거(雄据)했으며, 초장왕(楚莊王)은 한번 울어 세인을 놀라게 해(一鳴驚人) 오패(五霸)의 하나가 되었다. 초나라는 춘추시대에 전후로 12개국을 병합했다. 진초(晉楚) 쟁패 기간에는 제(齊)나라와 진(秦)나라가 동서로 웅거했다. 춘추 중엽 이후 초나라는 진(秦)나라와 연합하고 진(晉)나라는 제나라와 연합하여 여전히 세력이 막강했다. 그러나 쟁패 전쟁은 각국 내부의 모순을 가중시켰고, 이에 쟁패를 종식시키는 ‘미병(弭兵)’이 나타났다.

기원전 546년, 송(宋)나라 대부 향술(向戌)이 진(晉), 초 등 각국 사이를 분주히 다닌 끝에 14개 제후국의 동의를 얻어 송나라 도성(하남 상구)에서 ‘미병(전쟁을 중단함)’ 대회를 개최했다. 결과적으로 전술한 국가들이 맹약을 체결하여 제, 진(秦) 두 강대국을 제외한 나머지 중소국들은 진(晉)나라와 초나라 두 나라에 모두 조공을 바치고 두 나라를 공동 패자로 인정하기로 규정했다. 이로써 패권은 진(晉)과 초 두 강국에 의해 양분되었다. 역사는 이를 ‘향술미병’이라 부른다.

기원전 528년, 평왕(平王) 기질(弃疾)이 속임수를 써서 두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다. 그는 도성 사람들과 제후들이 자신을 배반할까 두려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진(陳)과 채(蔡) 두 나라의 땅을 돌려주며 두 나라 원래 군주의 후손을 즉위시켰으며, 침탈했던 정(鄭)나라의 토지도 반환했다. 국내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정무(政務)를 밝게 닦았다.

당초 초공왕(共王)에게는 다섯 명의 총애하는 아들이 있었으나 적장자가 없자, 산천의 여러 신령에게 멀리 제사를 지내며 신령께 후계자를 결정하여 국무를 주관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공왕은 몰래 애첩인 파희(巴姬)와 함께 조묘(祖廟)에 옥벽(玉璧) 하나를 묻고 다섯 공자로 하여금 재계한 후 조묘에 들어가 기도하게 했다.

큰아들인 훗날의 강왕(康王)은 옥벽을 훌쩍 지나갔고, 둘째인 영왕(靈王)은 팔꿈치를 옥벽 위에 놓았으며, 셋째 자비(子比)와 넷째 자석(子皙)은 모두 옥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막내인 기질(훗날 평왕) 당시 나이가 어려 남의 품에 안겨 옥벽 위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는데, 마침 옥벽의 끈(襻)을 눌렀다. 결과적으로 공왕이 붕어한 후 강왕이 연장자로서 즉위했으나 군위가 아들에게 전해지자 곧 상실되었고, 둘째인 공자 위(圍)가 영왕(靈王)이 되었다가 결국 살해당했다. 형인 영왕이 죽은 후 자비는 겨우 열흘 남짓 군주 노릇을 했고, 자석은 즉위하지 못한 채 모두 살해당했다. 이 네 공자는 모두 후사가 끊겼으나 오직 막내인 기질만이 마지막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평왕이며, 마침내 초나라의 제사를 이어갔으니 이는 신령이 예시한 바와 완전히 부합했다.

당초 자비가 진(晉)나라에서 귀국할 때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에게 물었다.

“자비가 성공할 수 있겠소?”

숙향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선자가 말했다.

“초나라 사람들과 자비가 모두 초영왕을 싫어해 새 군주를 세우려 하는 것이 마치 장사꾼이 큰 이익을 취하려는 것과 같은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소?”

숙향이 대답했다.

“누가 자비와 친하며 누가 자비와 원한을 같이합니까? 왕위를 찬탈하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총애를 받으나 어질지 못한 것이 첫째요, 어질기닌 하지만 국내 지지 세력의 호응이 없는 것이 둘째요, 지지 세력은 있으나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것이 셋째요, 장기적인 계획은 있으나 백성의 옹호가 없는 것이 넷째요, 백성의 옹호는 있으나 덕행이 없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자비는 진나라에 있은 지 13년이나 되었으나 진나라와 초나라에서 그를 따르는 자 중 학식이 해박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현재(賢才)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문이 망하고 친척이 배반했으니 지지 세력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회가 없는데도 경거망동하니 장기적인 계획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타향을 떠돌았으니 백성의 옹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망명 중에 국내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덕행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왕이 포학하고 거침없어 자멸을 자초했다 하더라도, 자비는 다섯 가지 어려움을 갖추고 감히 임금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돕겠습니까?

초나라를 향유할 자는 아마 기질일 것입니다. 기질은 진(陳)과 채(蔡) 땅을 통치하며 방성산(方城山)을 외속(外屬)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는 사악한 민생이 없고 도적들이 숨어 감히 망동하지 못하며, 결코 개인의 욕망 때문에 민심을 어기지 않으니 백성들이 원망이 없습니다. 선조의 신령이 그를 보우하고 인민이 그를 신뢰합니다.”

과연 최종적으로 즉위한 자는 기질이었으니 숙향의 예언과 같았다.

평왕은 즉위 후 참언을 믿고 점차 태자 건(建)을 멀리했다. 당시 오사(伍奢)가 태자의 태부(太傅)였다. 다시 4년이 지나 평왕은 또 요언을 믿고 태자 건과 오사 및 그의 두 아들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오사의 두 아들 중 형은 오상(伍尚)으로 사람됨이 정직하고 후덕하며 자애롭고 효심이 투철했다. 반면 작은 아들이 오자서(伍子胥)로 총명하고 지략이 있으며 용맹하여 공 세우기를 좋아했다. 평왕이 사자를 보내 거짓말로 형제를 부르자 오상은 초나라로 돌아가 부친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나,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도망쳐 오왕을 보좌해 패업을 이루게 도왔다. 결국 기원전 506년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격파하고 도성인 영도(郢都)에 입성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 초나라의 정벌

초혜왕(楚惠王 재위 기원전 488~432)이 즉위할 무렵 초나라는 어느 정도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81년, 초나라는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초나라의 현으로 귀속시켰다. 기원전 476년, 오왕 부차(夫差)가 강성해져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업신여기고 초나라를 토벌했다. 기원전 473년, 월(越)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447년, 초나라가 채(蔡)나라를 멸망시켰다. 2년 후 초나라는 또 기(杞)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초나라가 취한 책략은 한편으로는 진(秦)나라와 화친하고 한편으로는 동부로 침식하여 지배 영역을 사수(泗水) 일대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혜왕이 죽은 후 간왕(簡王), 성왕(聲王)을 거쳐 도왕(悼王)에게 전해졌다.

초 도왕(楚悼王 재위 기원전 401~381)은 위나라에서 망명한 오기(吳起)를 임용하여 변법(變法)을 단행하고 용관(冗官)을 감축하며 귀족의 세경세록(世卿世棣 주요 관직 세습제)을 폐지하고 법과 명령을 밝히며 사적인 청탁을 금지하니 초나라가 나날이 강성해졌다. 그러나 초나라의 구세력이 너무 강해 초 도왕이 죽자마자 오기는 난전(亂箭)에 맞아 죽었다. 비록 초나라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해 국력이 강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영토가 넓고 인구도 많았다.

다시 3대를 거쳐 회왕(懷王 재위 기원전 328~229)에게 전해졌다. 회왕 11년(기원전 318), 소진(蘇秦)이 산동 6국과 합종해 공동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니 초 회왕이 종장(縱長)이 되었다. 대군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진(秦)나라가 출병하여 요격했고, 6국 군대는 전후로 철수했는데 그중 제나라 군대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 초회왕이 이익을 탐하다 속임을 당하다

회왕 16년(기원전 313), 진(秦)나라가 제나라를 토벌하려 했으나 초나라가 제나라와 합종하여 친선 관계였으므로 진 혜왕(秦惠王)이 이를 걱정했다. 이에 장의(張儀)의 상국 직을 면한다고 선포하고 장의를 시켜 초왕을 만나 설득했다.

“폐국(敝國 진) 국왕께서 가장 존중하는 분은 대왕이시며, 신 또한 대왕의 신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폐국이 가장 통한히 여기는 군주는 제나라 왕이며 신 장의가 가장 섬기기 싫어하는 군주 또한 제나라 왕입니다. 지금 제나라의 죄악이 진왕(秦王)에게 매우 심각하므로 진나라가 발병하여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나, 귀국이 제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고 있어 진왕이 대왕을 잘 섬길 수 없고 신 장의 또한 대왕의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대왕께서 국문을 닫고 제나라와 교분을 끊으신다면, 신이 진왕을 설득해 사방 600리의 상(商 섬서 상남현)·오(於 하남 내향현) 땅을 바치게 하겠습니다. 그리되면 제나라는 후원을 잃고 반드시 쇠락할 것이며, 대왕의 호령을 듣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이와 같이 하시면 초나라는 북쪽으로 제나라의 세력을 꺾고 서남쪽으로는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며 상·오 600리의 땅까지 얻게 되니 이야말로 일거삼득의 상책입니다.”

회왕이 매우 기뻐하여 국상(國相)의 옥새를 장의에게 선사하고 매일 연회를 베풀며 “내가 상·오 땅을 다시 얻었노라”라고 선포했다. 대신들이 모두 축하했으나 오직 객경(客卿) 진진(陳軫)만이 마지막에 알현하며 전혀 축하하지 않았다.

회왕이 물었다.

“과인이 군사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다치거자 죽지 않고 상·오 600리 땅을 얻었으니 이는 외교상의 중대한 승리라 생각하오. 문무백관이 모두 축하하는데 유독 현경(賢卿)만 축하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러자 진진이 대답했다.

“진나라가 대왕을 중히 여기는 것은 대왕께서 제왕과 친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오 땅을 얻기도 전에 제나라와 절교하는 것은 초나라를 고립시키는 일입니다. 진나라가 어찌 고립무원인 우리나라를 중히 여기겠습니까, 반드시 업신여길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가 먼저 상·오 땅을 내준 후 제나라와 절교한다면 진나라의 계책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제나라와 절교한 후 상·오 땅을 찾으려 한다면 반드시 장의에게 속으실 것입니다. 대왕께서 장의에게 속으시면 반드시 그를 원망하실 것인데, 그를 원망하는 것은 서쪽으로는 진나라의 우환을 일으키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의 우호를 끊는 격입니다. 그리되면 진나라와 제나라의 군대가 모두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왕은 진진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장군 한 명을 진나라에 보내 상·오 땅을 인수하게 했다.

장의는 진나라에 돌아가 병을 핑계로 시간을 끌면서 석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초나라는 상·오 땅을 얻지 못했다.

초왕은 “장의가 나와 제나라의 절교가 아직 철저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용사 송유(宋遺)를 북쪽으로 보내 제왕을 모욕하게 했다. 제왕이 대노하여 초나라와의 부절(符節)을 꺾고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진나라와 제나라의 연합이 완료되자 장의가 비로소 조정에 나와 초나라 장군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 땅을 받지 않았소? 모처에서 모처까지 사방 6리요”라고 했다.

초나라 장군이 “내가 명을 받아 인수하러 온 것은 600리지 6리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라고 하고 즉시 초나라로 돌아가 회왕에게 보고했다. 회왕이 대노하여 군대를 보내 진나라를 토벌하려 했다.

진진이 다시 말했다.

“지금 진나라를 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차라리 유명한 성(城) 하나를 주고 진나라를 매수해 진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토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하면 진나라에서 잃은 것을 제나라에서 보상받을 수 있으니 초나라에 손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이미 제나라와 절교하셨는데 지금 진나라의 신의 없음을 꾸짖으신다면 이는 진나라와 제나라의 교분을 강화해 주는 꼴이니 초나라는 필시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왕은 여전히 진진의 건의를 듣지 않고 진나라와 절교한 후 예정대로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와 제나라가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한나라도 군사 동맹에 가입하니, 결과적으로 초나라 군대는 삼국 연합군에게 두릉(杜陵)에서 참패했다.

회왕 17년(기원전 312) 봄, 초군이 단양(丹陽)에서 진군과 교전했으나 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병사 8만 명을 참살하고 초나라 대장군 굴개(屈匄)와 편장군 봉후축(逢侯丑) 등 7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한중(漢中)의 각 군현을 빼앗았다. 초회왕이 격노하여 국내의 전 병력을 동원해 다시 한번 진나라를 습격했다. 두 군대가 남전(藍田)에서 교전했으나 초군이 또 대패했다. 한나라와 위(魏)나라가 초나라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남하하여 초나라를 습격해 등(鄧)까지 쳐들어왔다. 초나라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서 철수했다.

회왕 18년(기원전 311년), 진나라가 사신을 보내 다시 초나라와 친선을 약속하며 한중의 절반을 떼어주어 화해를 청했다.

초왕이 “장의만 원할 뿐 땅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장의가 초왕의 말을 듣고 초나라에 가기를 자청했다.

진왕이 “초왕이 그대를 잡아야만 만족하려 하는데 어찌하려 하오?” 물었다.

장의가 대답하길 “신은 초나라 대신 근상(靳尚)과 우호적이며, 근상은 초왕이 총애하는 부인 정수(鄭袖)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초왕은 정수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릅니다. 게다가 신이 전에 초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상·오 땅을 떼어주기로 한 약속을 어겨 지금 진초(秦楚) 간에 원한이 쌓였으니, 신이 직접 사과하지 않으면 원한을 풀 수 없습니다. 설령 초나라가 신을 죽인다 해도 진나라에 이롭다면 신하의 소망입니다”라고 했다. 장의는 이에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장의가 초나라 도성에 도착한 후 근상을 매수하여 회왕이 자신을 풀어주게 했다. 장의가 초나라를 떠난 후 제나라 사신으로 갔던 굴원(屈原)이 돌아와 회왕에게 간언하기를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니 회왕이 그제야 후회하며 사람을 보내 장의를 쫓았으나 이미 늦었다.

회왕 20년(기원전 309년), 제민왕(齊湣王)이 합종의 맹주가 되려 하며 초나라와 진나라의 연합을 증오하여 초왕에게 편지를 보내 초나라가 진나라와 절교하기를 희망했다. 회왕이 동의해 진나라와 연합하지 않고 제나라와 연합하며 한나라와 우호를 맺었다.

그러나 회왕 24년(기원전 305), 초나라는 다시 제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와 연합했다. 이듬해인 회왕 25년(기원전 304)에는 회왕이 진나라에 가서 진 소왕(秦昭王)과 맹약을 맺었다. 진왕은 초나라의 상용(上庸)을 초나라에 반환했다.

회왕 26년(기원전 303),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가 초나라가 합종의 친선을 어기고 진나라와 연합했다는 이유로 연합하여 초나라를 토벌했다. 초나라는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진나라가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자 삼국은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二十七年(前302),秦国一位大夫私下与楚太子殴斗,楚太子杀死了他逃回楚国。二十八年(前

회왕 27년(기원전 302), 진나라의 한 대부가 사사로이 초나라 태자와 다투다 태자에게 살해당했고 태자는 초나라로 도망쳤다.

회왕 28년(기원전 301), 진나라는 제, 한, 위나라와 공동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 대장 당매(唐昧)를 죽이고 초나라 중구(重丘)를 함락한 후 떠났다.

회왕 29년(기원전 300),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 초군을 대파하고 병사 2만 명과 장군 경결(景缺)을 죽였다. 회왕이 깜짝 놀라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 화해를 청했다.

회왕 30년(기원전 299), 진나라가 또 초나라를 공격해 8개 성을 탈취했다. 진소왕은 맹약 체결을 명분으로 회왕을 진나라로 초청한 후 기회를 틈타 그를 억류하고 초나라에 무(巫), 검중(黔中) 군현을 할양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새 군주 경양왕(頃襄王)을 세워 진나라에 대처하자, 진 소왕이 대노해 무관(武關)으로 출병해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군이 대패하여 병사 5만 명이 죽고 석읍(析邑) 등 15개 성을 빼앗겼다. 훗날 초회왕이 진나라에서 병사하자 진초 간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제후들도 이때부터 진왕의 부정직함을 보게 되었다.

경양왕 7년(기원전 292), 진나라와 초나라가 다시 화해했다.

경양왕 18년, 초나라는 제나라, 한국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토벌하고 기회를 틈타 주(周) 왕실을 도모하려 했다. 주왕 난(赧)이 무공(武公)을 보내 초나라 재상 소자(昭子)에게 말하게 했다. “삼국이 무력을 사용하여 주의 교외 들판을 분할해 운송을 편리하게 하고, 보물(寶器)을 남쪽 초왕에게 운송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후들이 공동으로 존중하고 받는 군주를 죽이고 대대로 이어진 군주를 신민으로 삼는다면 대국이 필시 친근히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많은 것만 믿고 세력 약한 주 왕실을 위협한다면 소국이 분명 순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국이 친근히 대하지 않고 소국이 순복하지 않는다면 위명을 얻을 수 없고 실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위명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무력을 사용해 백성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 왕실을 도모한다는 명성이 나면 제후들에게 호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소자가 말했다. “주 왕실을 도모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주 왕실을 도모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무공이 대답했다.

“적보다 5배의 군력이 없으면 공격할 수 없고, 수비군보다 10배의 힘이 없으면 성을 포위할 수 없습니다. 주나라 하나가 진(晉)나라 20개와 맞먹는다는 것을 귀하도 아실 것입니다. 일찍이 한나라가 20만 병력을 동원해 진(晉) 성읍을 포위했으나 결국 수치를 당하고 정예병이 전사하고 병졸들이 부상했으며 성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귀하는 한나라보다 100배의 병력도 없으면서 주 왕실을 도모하려 하시니 이는 천하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귀하가 주(周)와 원한을 맺고 예의지방인 추로(鄒魯 추나라와 노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제나라와 절교하여 천하에서 명예를 잃으신다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귀하가 주 왕실을 해치는 것은 한나라의 실력을 키워주는 것이니, 방성 이외의 땅은 반드시 한나라에 침탈당할 것입니다. 어찌 이런 결말을 모르십니까? 서주(西周)의 땅은 길고 짧은 것을 합쳐도 사방 100리에 불과합니다. 서주는 명목상 천하 제후들이 공동으로 존봉하는 군주이나 실상 그 땅을 다 차지해도 나라를 강하게 하기 부족하고 그 백성을 다 차지해도 군사력을 증강하기엔 부족합니다. 공격하지 않더라도 명목상 군주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 벌이기 좋아하는 군주와 공 세우기 좋아하는 신하들이 병력을 사용하며 시종 화살을 주 왕실로 향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제기(祭器)와 보정(寶鼎)이 주나라에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차지하려다 이익에 눈이 멀어 군주를 살해한 죄명을 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제기를 초나라로 옮기려 하는데, 저는 천하 사람들이 제기 때문에 초나라를 원망할까 걱정됩니다. 비유를 들겠습니다. 호랑이 고기는 노린내가 나고 그 발톱과 이빨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호랑이를 잡습니다. 만약 큰 늪의 고라니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운다면 사람들이 고라니를 잡으려 함이 호랑이보다 만 배는 더할 것입니다. 초나라 땅을 차지하는 것은 나라를 강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초나라의 명성을 꾸짖는 것은 군주를 존귀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귀하께서 천하 제후들이 떠받드는 군주를 죽이고 삼대로 전해오는 보물을 차지하며 구정(九鼎)을 독점해 모든 군주를 오만하게 보려 하시니 이것이 탐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정치로 일어서려거든 먼저 난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기가 남쪽 초나라로 이동한다면 대군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이에 초나라는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다.

* 초나라의 멸망

경양왕 19년(기원전 280), 진나라가 초나라를 토벌하니 초군이 대패하여 상용과 한북(漢北) 땅을 진나라에 할양했다.

경양왕 20년(기원전 279),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가 초나라 서릉(西陵)을 함락했다.

경양왕 21년(기원전 278), 백기가 다시 초나라 영(郢)을 함락하고 선왕들의 묘역인 이릉(夷陵)을 불태웠다. 경양왕의 군대는 궤멸되어 더 싸우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퇴각해 진성(陳城)을 지켰다.

경양왕 22년(기원전 277),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의 무군(巫郡)과 검중군(黔中郡)을 함락했다.

경양왕 23년(기원전 276), 경양왕이 초나라 동부의 병사 10여 만 명을 모아 다시 서쪽으로 진나라가 점령했던 장강 유역의 15개 성을 탈취해 군현으로 삼고 진나라에 저항했다.

경양왕 27년(기원전 272), 초나라는 3만 명을 보내 삼진(三晉)을 도와 연(燕)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다시 진나라와 화친하고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경양왕 36년(기원전 263), 경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웅원(熊元)이 즉위하니 이가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기원전 262), 진나라와 화친했다. 이때 초나라는 더욱 쇠약해졌다.

고열왕 22년(기원전 241), 초나라는 제후국들과 공동으로 진나라를 토벌했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철군했다.

고열왕 25년(기원전 238), 고열왕이 죽고 아들 유왕(幽王) 한(悍)이 즉위했다. 이원(李園)이 춘신군(春申君)을 살해했다.

유왕 3년(기원전 235), 진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를 토벌했다.

유왕 9년(기원전 229),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유왕 10년(기원전 228), 유왕이 죽고 애왕(哀王)이 즉위했다. 애왕 즉위 두 달여 만에 애왕의 형 부추(負芻)의 무리가 애왕을 습격해 살해하고 부추를 초왕으로 옹립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조왕(趙王) 천(遷)을 포로로 잡았다.

부추 5년(기원전 223), 진나라 대장 왕전(王翦)과 몽무(蒙武)가 초나라 도성에 입성하여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초나라 땅에 3개의 군현을 설치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