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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수련 생활의 일을 가늠하니 신기함이 즉시 나타나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며칠 전 동수가 4,000위안(한화 약 80만원)을 주어 무심코 가방에 넣어두었다. 며칠 뒤 돈을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다. 돈을 받은 후 어디에 두었는지 열심히 회상해 보았지만, 그 가방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아침 연공 후 법공부에 사용하는 휴대전화에서 갑자기 사부님의 설법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들어보니 제2강이었는데, 사부님께서 천목(天目) 문제를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분명 사부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점화(點化)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돈을 찾지 못하는 이 일을 속인의 관념으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사람 눈은 사람의 이치만 식별하네”(《홍음4》 <수필(隨筆)>)라고 하셨으니 천목으로 보고, 법 위에서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보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머릿속에 ‘침대 옆 서랍을 보라’는 생각이 스쳤다. 서랍 문을 열자 가방이 수납장 안에 놓여 있었고, 4,000위안은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제야 며칠 전 차 안의 물건을 정리할 때 그 가방에 컴퓨터를 담았던 것이 생각났다. 무심코 가방을 가져오면서 4,000위안이 아직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컴퓨터와 돈이 든 가방을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원래 생활 속에 작은 일이란 없으며 도처에서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는 것을. 왜 주변의 많은 7.20 이전 동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여전히 사람의 관념으로 문제를 처리하고 대처하여 장기간 마난(魔難) 속에 처해 있는가?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여전히 사람의 관념으로 가늠하고, 여전히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층차에 머물러 있어 사상과 관념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일부 수련생은, 그중 일부 노수련생을 포함하여 평소 대법 일을 모두 하고, 법 공부도 빠뜨리지 않지만, 어떤 일은 관건 시각(時刻)에 여전히 넘기지 못한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당신이 속인마음으로 자신을 가늠하면서, 수련인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지 않는데, 이는 수련에 누락이 있음이다.”(《깨어나라》)

정법(正法)이 마지막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정말 자신이 현재 사물을 가늠할 때 도대체 어떤 표준을 쓰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서 걸어 나왔는가?

집주인이 얼마 전 주민위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현지 주민위원회에 등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 때문에 집주인이 내 신분을 알게 되었다. 올해 계약이 만료되어 집을 비울 때 집주인이 ‘선의’로 내게 일러주었다.

“요즘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이름만 알면 집, 차, 명의로 된 어떤 재산도 다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심정이 섞인 말을 몇 마디 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연공할 때 낮의 심태를 회상해 보니, 또다시 사람의 관념으로 집주인의 말을 가늠하고 있었다. 사람의 이치로 가늠하면 정말 어디 살아도 안전하지 않고 방비하려 해도 끝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가 말했듯이,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 관념이 옳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번거로움을 불러온다.”

동수가 교란을 당하거나 심지어 박해를 받는 진정한 원인은 다른 공간의 사악한 생명이 수련하는 제자의 심성(心性) 누락을 잡았거나,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빈틈을 탔거나, 혹은 다른 집착 등이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난 1년 동안 수련생 자신의 업력(業力), 법에 대한 인식 부족과 난(難) 속에서 아직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 고통스럽게 고비를 넘는 중에 정념(正念)으로 대하지 못하는 등등은 모두 사악에 의해 박해가 가중된 주요 원인이자 또한 사악이 진정하게 법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구실이었다.”(《정진요지 2》 <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당신들은 이미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법리(法理)를 알고 있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을 두렵게 하는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진요지 2》 <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진상을 밝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데, 관건은 일을 할 때의 심태(心態), 그것이 빈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002년 보스턴 법회 설법》)

내가 속인과 똑같이 속인의 관념으로 어디에 살지,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가늠한다면 그것은 수련인이 문제를 보는 각도와 방식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자 오랫동안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던 컴퓨터에 갑자기 신호가 잡혔고 영상 화면이 매끄럽고 선명하게 나왔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일념(一念)의 차이가 바로 인신(人神)의 구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랫동안 넘기지 못한 많은 관난(關難)은 우리가 장기간 수련인의 표준으로 문제를 보고 가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끝없이 많은 교란과 박해로 대법제자가 장기간 마난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우리가 줄곧 사람의 관념으로 문제를 가늠하며 법 위에서 문제를 보는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수련에 작은 일이란 없으니, 무심코 일어나는 저런 일념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 법으로 가늠해 보았는가? 저런 아주 자연스럽게 들리는 속인의 도리에 대해, 삼계를 벗어난 정법리(正法理)로 거꾸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식했는가? 예를 들어 속인이 추구하는 일시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의 관념을 거꾸로 보았는가? 사람의 공포, 근심, 두려움 등 칠정육욕의 각종 집착을 실수(實修) 중에 정법리에 따라 닦아버렸는가?

이상은 개인적인 깨달음이니 부족한 점은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