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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초친(劉備招親)

소양춘

【정견망】

들어가는 말

‘유비가 형주를 빌리고(劉備借荊州)’ ‘관우가 방심해 형주를 잃은(關羽大意失荊州)’ 두 가지 역사 고사는 누구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유비초친(劉備招親)은 유비가 형주를 빌리고도 돌려주지 않음으로 인해 유발된 한 차례 흥미진진한 역사 대극이다.

주지하다시피 적벽대전에서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었고, 조조가 크게 패해 돌아가면서 조인(曹仁)만을 남겨 강릉을 지키게 했다. 주유(周瑜)가 다시 조인과 1년 동안 고전한 끝에야 강릉을 차지했다. 주유는 손권에 의해 남군(南郡)태수로 봉해졌고, 장강 남안의 땅을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비는 유강구(油江口)에 주둔하며 잔릉(孱陵)을 공안(公安)으로 개칭하고, 그 기회를 틈타 남부 4군을 거두었다. 유표(劉表)의 아들 유기(劉琦)가 병사하자 유비는 스스로 형주목을 맡았으며, 동오는 노숙을 보내 조문을 핑계로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적벽대전 작전 노선도 (인터넷 사진)

마침 이때 유비의 감(甘)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주유는 이 기회를 발견해 손권에게 능동적으로 여동생을 시집보내 유비와 우호를 맺고, 정치적 혼인을 통해 손유(孫劉 손권 유비) 동맹을 공고히 하여 함께 조조에 대항할 것을 건의했다. 사실 이것은 주유가 형주를 되찾기 위해 설치한 ‘미인계’였다. 유비를 남서(南徐 지금의 진강 경구鎮江京口)로 속여 들여 인질로 연금한 뒤, 사람을 보내 제갈량에게 유비와 바꾸는 조건으로 형주를 되돌려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주유의 계책은 신기묘산하고 지모가 뛰어난 제갈량에게 간파되었고, 제갈량은 장계취계(將計就計)로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주유로 하여금 ‘부인을 잃고 군사까지 패하게(陪了夫人又折兵)’ 만들었다.

중국 고전 명저 《삼국연의》 중 유비의 동오 초친은 제54회 〈오국태가 절에서 신랑을 보고, 유황숙이 신방에서 아름다운 배필을 맞다〉 장절에 등장한다. 그 고사의 줄거리는 그야말로 우여곡절이 많고 고조가 잇따른다. 때로는 칼빛과 칼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때로는 기쁨이 넘치며, 때로는 첩첩산중이다가도 때로는 앞길이 탁 트인다. 지혜와 용기를 겨루면서도 묘한 재미가 있고,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때문에 ‘유비초친’ 이야기는 후세에 경극, 월극 등 여러 지방 전통극에서 수많은 극목으로 각색되어 사랑받았다. 그 이름도 《감로사(甘露寺)》, 《금낭기(錦囊記)》, 《미인계(美人計)》, 혹은 《용봉배(龍鳳配)》, 《회형주(回荊州)》, 《양군사격강투지(兩軍師隔江鬥智)》 등등으로 불리며 천고의 가화(佳話)가 되었다.

1. 장계취계(將計就계)

손권은 주유의 계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남몰래 기뻐하며, 곧 여범(呂範)을 매파로 삼아 형주로 보내 현덕(玄德)을 사위로 삼아 영원히 인척 관계를 맺고 마음을 합쳐 조조를 물리치고 한실(漢室)을 돕고자 했다. 제갈량은 장계취계를 써서 손건(孫乾)에게 여범과 함께 강남으로 가서 혼사를 매듭짓게 했다. 그러나 현덕은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가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제가 이미 세 가지 계책을 정해두었으니, 자룡이 아니면 행할 수 없습니다.”라 하고는 조운(趙雲)을 가까이 불러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는 주공을 모시고 오나라로 들어가되, 이 세 개의 금낭(錦囊)을 받으시오. 주머니 안에는 세 가지 묘책이 들어 있으니 순서대로 행하시오.”

배가 공안에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남서 기슭에 닿았으나, 현덕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조운은 군사(軍師)가 분부한 세 가지 묘책을 떠올리고 이미 이곳에 도착했으니 마땅히 첫 번째 금낭을 열어 보았다. 곧 수행 군사 500명에게 모두 붉고 푸른 옷을 입혀 남서 성안으로 들어가 예물을 사게 하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방에 현덕이 동오의 사위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퍼뜨리게 했다. 또한 현덕에게 양을 끌고 술을 메고 먼저 교국로(喬國老)를 찾아가 기쁜 소식을 전하며, 여범이 매파가 되어 손부인(孫夫人)을 아내로 맞이하려 한다고 말하게 했다.

오국태가 감로사(甘露寺) 다경루(多景樓)에서 유비를 살펴보고, 그가 ‘얼굴이 네모나고 귀가 크며 팔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천자의 관상을 가진 것이 마음에 쏙 들어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인터넷 사진)

한편 교국로는 이교(二喬 각각 손책과 주유의 아내가 된다)의 부친인데, 들어가 손권의 어머니를 뵙고 오국태(吳國太)에게 축하를 전했다. 영문을 모르던 오국태는 계책인 줄도 모르고 깜짝 놀랐다. 손권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는 주유를 크게 꾸짖었다. 속담에 남자가 성장하면 장가들고 여자가 성장하면 시집간다고 했다.

교국로가 얼른 곁에서 거들었다.

“이미 온 성안 백성이 이 일을 알고 있으니 설익은 밥이 다 된 셈입니다. 하물며 유황숙은 한실의 종친이자 당세의 호걸이니, 차라리 가짜 연극을 진짜로 만들어 정말 그를 사위로 삼는 것이 추태를 면하고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국태가 재삼 고려하더니 결국 손권에게 말했다.

“내일 감로사에서 유황숙을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희 뜻대로 하고, 내 마음에 들면 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겠다.”

손권은 즉시 응낙하고 밖으로 나와 여범을 불러 내일 감로사 방장실에 연회를 베풀라 분부하니 국태가 유비를 보려 함이었다. 여범이 말했다. “가화(賈華)에게 도부수 300명을 거느리고 양쪽 복도에 매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국태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때 신호 한 번이면 양쪽에서 일제히 나와 그를 잡아버릴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오국태와 교국로는 미리 감로사 방장실에 자리를 잡았고, 손권은 여범을 시켜 역관으로 가서 현덕을 청하게 했다. 한껏 몸단장을 한 현덕은 안에는 세밀한 갑옷을 입고 겉에는 비단 도포를 걸쳤으며, 종자들이 검을 메고 바짝 뒤따르는 가운데 말을 타고 감로사를 향해 왔다. 조운은 갑옷을 갖추어 입고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행했다. 뜻밖에도 국태는 현덕을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교국로에게 말했다. “정말 내 사위로다!”

교국로가 말했다.

“현덕은 용과 봉황의 자태와 태양 같은 풍모를 지녔으며, 게다가 인덕이 천하에 떨치고 있습니다. 국태께서 이런 좋은 사위를 얻으셨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현덕이 배례하고 감사하며 방장실에서 함께 연회를 즐겼다.

자룡이 검을 차고 들어와 현덕의 곁에 섰다.

국태가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물으니, 현덕이 “상산의 조자룡입니다.”라고 했다.

국태가 “당양 장판파에서 아두를 품고 나온 이가 아닌가?” 물으니 현덕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국태가 “참으로 장군이로다!” 하고는 술을 내렸다.

조운이 현덕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방금 제가 복도를 순찰하다가 방 안에 도부수들이 매복한 것을 보았으니 반드시 좋은 뜻이 아닙니다.”

현덕이 곧 국태의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아뢰었다.

“만약 유비를 죽이려 하신다면 여기서 죽여주십시오.”

국태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하니, 현덕이 “복도 아래에 몰래 도부수를 매복시켰으니 유비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했다. 국태가 크게 노하여 손권을 꾸짖으니, 도부수들은 모두 머리를 감싸고 쥐 죽은 듯 흩어져 갔다.

유명한 경극 대가 마련량(馬連良) 선생이 《감로사》에서 교현 역을 맡은 장면 (인터넷 사진)

전통 경극 《감로사》에서 유명한 경극 공연 예술가 마련량 선생의 긴 창구인 〈권천세(勸千歲)–천세를 권하다〉는 가히 고전이라 할 만하며 지금까지도 넘어서는 이가 없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세를 권하니 살(殺)이란 글자를 입 밖으로 내지 마시고
노신의 말을 처음부터 들어보소서.
유비는 본래 중산정왕의 후예로
한 경제의 현손으로 맥을 이었나이다.
그의 둘째 아우 운장(雲長)은 한수정후이니,
청룡언월도는 사람을 시름겹게 했습니다.
백마파에서 안량을 베고 또 문추를 죽였으며,
고성에서는 늙은 채양의 머리를 힘껏 베었나이다.
그의 셋째 아우 익덕(翼德)은 성격이 호탕하여,
장팔사모로 목구멍 취하기를 예사로 하니.
당양교에서 한 번 고함치니,
다리가 끊어지고 물길이 거꾸로 흘렀나이다.

勸千歲把殺字休出口,老臣言來聽從頭。
劉備本是中山靖王後,漢景帝玄孫一脈留。
他二弟雲長漢壽亭侯,青龍偃月令人愁。
白馬坡斬顏良又誅文醜,古城力斬老蔡陽的頭。
他三弟翼德性情有,丈八蛇矛慣取咽喉。
當陽橋一聲吼,吼斷了橋梁水往倒流。

넷째 아우 자룡은 장수 중의 으뜸이니,
드높은 영명이 구주에 떨칩니다.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해
조조의 군사들을 시름겹게 했나이다.
이런 용맹한 장수들이 어느 나라에 있겠습니까?
또한 제갈공명은 지모가 뛰어
홀로 강하(江夏)로 걸어가,
뭇 선비들과 설전을 벌이니 세상에 비길 이가 없습니다.
초선차전으로 큰 안개가 낄 것을 예견하니,
주랑이 동풍을 생각하며 도리어 그에게 구했나이다.
그대는 유비를 죽일 수 없으니,
도원결의를 맺은 그들이 결코 멈추려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투러 온다면,
두 호랑이가 서로 싸워 쉼이 없을 것이네.
우리 주군께 권하노니 손을 놓아야 할 때 놓으시고,
그만두어야 할 때 그만두소서.
고개를 돌려 태후께 아뢰노니,
장계취계로 봉황의 짝을 맺어 주소서.

四弟子龍將魁首,蓋世英名貫九州。
長阪坡救阿鬥,只殺得曹兵個個愁。
這幾員虎將哪國有?還有諸葛孔明足智多謀。
獨自一人江夏走,舌戰群儒世無侔。
草船借箭料就了大霧有,小周郎想東風反把他求。
你殺劉備不能夠,未必他桃園肯罷休。
倘若是荊州興兵來爭鬥,兩虎相爭鬧不休。
勸吾主得放手來且放手,得罷休來且罷休。
轉面來,奏太後,將計就計結鸞儔。

국태는 현덕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부중(府中)으로 옮겨와 잠시 머물게 하고 날을 택해 혼례를 치르게 했다. 며칠 내에 크게 잔치를 베풀고 손부인과 현덕이 혼인했다. 밤이 깊어 손님들이 흩어지자 두 줄기 붉은 촛불이 현덕을 방으로 인도했다. 등불 아래에서 보니 창과 칼이 가득 차 있고, 시녀들이 모두 검을 차고 칼을 매단 채 양옆에 서 있었다. 현덕은 겁이 나서 혼비백산했다.

손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반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내셨으면서 아직도 병기를 두려워하십니까!” 그러고는 모두 치우게 하고 시녀들에게 검을 풀고 모시게 했다.

2. 온유한 함정

주유는 한 가지 계책이 실패하자 다시 한 가지 계책을 냈다. 손권에게 제안하길 만약 여색과 사냥과 가무로 유비의 뜻을 좀먹게 하면 자연히 제갈공명, 관우, 장비와 멀어지고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그런 후에 형주를 도모할 수 있다고 했다. 유비는 과연 그 함정에 빠져 ‘온유향(溫柔鄕)’에 파묻혔고, 여색에 미혹되어 형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덧 연말이 다가오는데 종일 먹고 마시며 즐기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자 조운이 문득 깨달았다.

“공명이 내게 세 개의 금낭을 주시며 남서에 도착하면 첫 번째를 열고, 연말까지 머물게 되면 두 번째를 열며, 위급하여 길이 없을 때 세 번째를 열라고 하셨다. 안에는 신출귀몰한 계책이 있어 주공을 집으로 모셔갈 수 있다고 하셨다. 이제 한 해가 다 가는데 주공께서는 여색에 탐닉하여 만나주지도 않으시니, 어찌 두 번째 금낭을 열어 계책대로 행하지 않겠는가?”

이에 조운은 짐짓 크게 경악한 기색을 하며 부중으로 뛰어 들어가 급히 유비를 뵙기를 청했다. 조조가 적벽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습격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유비는 급히 형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신혼의 아내를 차마 떠나지 못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손부인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런데 손부인은 뜻밖에도 대의에 밝은 사람이라 “첩이 이미 군자를 섬겼으니 군자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월 초하루에 국태를 뵙고 유비가 강가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핑계를 대고는 알리지 않고 떠났다.

그날 손권은 크게 취해 다음 날에야 현덕이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곧 진무(陳武)와 반장(潘璋)에게 정예병 500명을 뽑아 밤낮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뒤쫓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손권은 쫓아가는 장수들이 군주(郡主 손부인)를 보고 손을 쓰지 못할까 염려하여,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장흠(蔣欽)과 주태(周泰)를 불러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은 이 검을 가지고 가서 내 여동생과 유비의 머리를 가져오너라. 명을 어기는 자는 즉시 참하겠다!” 그러고는 스스로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 왔다.

3. 격강투지(隔江鬥智)–강의 사이에 두고 지혜를 겨루다

한편 현덕은 말을 채찍질하여 밤낮으로 길을 달려 시상(柴桑 지금의 강서 구강) 경계에 이르렀다. 문득 뒤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추격병이 왔음을 알았다! 앞 산자락을 돌아가는데 한 무리의 군마가 또 길을 가로막았다. 원래 주유는 현덕이 도망칠까 봐 미리 서성(徐盛)과 정봉(丁奉)으로 하여금 3,000 군마를 이끌고 요충지에 진을 치고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현덕은 당황하여 말을 멈추고 조운에게 물었다.

“앞에는 가로막는 자가 있고 뒤에는 추격병이 있으니 갈 길이 없구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운이 말했다.

“주공께서는 당황하지 마십시오. 군사에게 세 가지 묘책이 있어 대부분 금낭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미 두 개를 열었고 이제 세 번째가 여기 남아 있는데, 위급하고 어려운 때를 당해서야 열어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현덕이 제갈량의 금낭을 보고는 급히 수레 앞으로 와서 울며 부인에게 고했다.

“지난날 오후(吳侯 손권)와 주유가 공모하여 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 것은 사실 부인을 위한 계책이 아니라, 유비를 가두어두고 형주를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형주를 빼앗으면 반드시 나를 죽였을 것입니다. 이는 부인을 향기로운 미끼로 삼아 나를 낚으려 한 것입니다. 내가 만 번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은 부인께서 남자의 흉금을 지녀 필히 나를 가엽게 여기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후가 해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형주에 난이 났다고 핑계 대어 돌아갈 계책을 세웠습니다. 다행히 부인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함께 오셨으나, 이제 오후가 사람을 시켜 뒤쫓게 하고 주유가 사람을 시켜 앞을 막게 하니, 부인이 아니면 이 화를 풀 수 없습니다. 만약 부인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나는 수레 앞에서 죽어 부인의 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손부인은 수레 휘장을 걷어 올리고 서성과 정봉을 꾸짖었다. 그들 두 사람이 어찌 군주의 눈 밖에 날까 감히 범하겠는가, 곧 병기를 버리고 큰길을 터주어 지나가게 했다. 겨우 5, 6리를 가기도 전에 문득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진무와 반장이 보검을 들고 도착하여 서성, 정봉 네 장수와 합세하여 길을 재촉해 쫓아왔다.

현덕이 다시 부인에게 고했다.

“뒤에 추격병이 또 도착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부인이 말했다.

“낭군께선 먼저 가십시오. 저와 자룡이 뒤를 맡겠습니다.“

현덕은 먼저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가 기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전통 회화 〈양군사격강투지(兩軍師隔江鬥智)–두 군사가 강을 사이에 두고 지혜를 겨루다〉 (인터넷 사진)

손부인이 막 네 장수를 꾸짖어 물러나게 했을 때, 장흠과 주태가 다시 회오리바람처럼 쫓아왔다. 네 장수가 각자 손부인이 호통친 일을 말했다.

장흠이 말했다.

“오후께서 여기 검 한 자루를 내리시며 먼저 그 여동생을 죽이고 다음에 유비를 베라 하셨으며, 어기는 자는 즉시 참하겠다 하셨소!”

네 장수가 말했다.

“그들이 이미 멀리 갔으니 어찌하겠소?”

장흠이 말했다.

“그들은 결국 보군(步軍)이라 급히 가도 멀리 못 갔을 것이오. 서성, 정봉 두 장군은 서둘러 도독에게 보고하여 수로로 빠른 배를 띄워 뒤쫓게 하시오. 우리 네 사람은 육로로 쫓겠소. 수로든 육로든 가리지 말고 뒤쫓아 잡아 죽여야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오.”

현덕 일행은 시상에서 점점 멀어져 본국 경계인 유랑포(劉郎浦 지금의 호북 석수石首)에 이르렀다.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비로소 조금 놓였다. 조운을 시켜 강을 따라 나루터를 찾게 했으나 배가 한 척도 없었다. 문득 뒤에서 먼지가 다시 하늘을 찌르듯 일어나며 군마가 땅을 덮으며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현덕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여러 날 달아나느라 사람도 지치고 말도 피곤한데 추격병이 또 도착했으니 이제 죽을 곳도 없구나!”

한창 급박한 중에 문득 강가 기슭에 이십여 척의 배가 일렬로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현덕과 손부인은 급히 배 위로 뛰어올랐고 자룡도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배에 탔다. 배 안에서 윤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한 사람이 크게 웃으며 나오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기뻐하십시오! 제갈량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현덕은 사지에서 살아나 기쁨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네 장수가 도착하여 어지러이 화살을 쏘았으나 배는 이미 멀리 떠나 있었다. 뒤이어 강물이 크게 요동치며 ‘수(帥)’ 자 깃발 아래 주유가 직접 단련된 수군을 거느리고 왼쪽에는 황개, 오른쪽에는 한당을 거느리고 나는 말처럼 기세등등하게 별똥별처럼 빠르게 뒤쫓아왔다.

제갈량은 배를 저어 북쪽 기슭으로 대게 한 뒤 배를 버리고 모두 상륙하여 길을 떠나게 했다. 주유가 강변에 도착하여 역시 모두 상륙하여 추격했다. 한창 추격하는 중에 북소리가 한 번 울리더니 산골짜기 안에서 한 무리의 도부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우두머리 대장은 바로 관운장이었다. 주유가 당황해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났다. 운장이 뒤쫓아오자 주유는 말을 채찍질해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달아나는 중에 왼쪽에서는 황충, 오른쪽에서는 위연이 두 군사를 이끌고 살포시 나타났다. 오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주유가 급히 배에 오르자 강기슭의 군사들이 일제히 크게 소리쳤다.

“주랑(周郞 주유)의 묘계는 천하를 평안케 하더니, 부인을 잃고 군사까지 패하게 했구나!”

주유가 화가 치밀어 한바탕 크게 소리치더니 배 위에서 혼절했다. 여러 장수가 급히 구하여 대패한 채 돌아갔다.

4. 결수여림(結繡如林)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묘사에 따르면, “경릉 남쪽에서 대강에 이르기까지는 언덕이나 고개의 가로막음이 없다가, 강을 건너 석수에 이르러서야 얕은 산이 나타난다. 석수(石首)라는 이름은 돌이 여기서부터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수림산(繡林山)은 석수현 서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옛 이름은 기양산이다. 한 소열제(유비)가 여기서 손부인을 맞아들였다. 비단 장막이 숲과 같았기에 이름 붙였으며, 산 위에는 옛 수림정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수현지》 역시 “수림산은 유비가 손부인을 이곳에서 맞아들일 때 산에 비단을 걸어 수놓은 것이 숲과 같았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전한다.

유비초친 우표 (인터넷 사진)

원나라 사람이 쓴 《자치통감》 주석에는 “석수현 사보(沙步)에 유랑포가 있는데 촉의 선주(先主 유비)가 오나라 여인을 맞아들인 곳이다.”라고 했다. 유랑포의 원래 이름은 포구였으나, 제갈량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주유의 추격병을 격퇴하고 손부인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유랑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이 이름을 듣고 찾아와 시를 읊고 글을 남겼다. 유랑포를 주제로 한 시편은 셀 수 없이 많으나, 대부분 당대 시인 여온(呂溫)의 〈유랑포구호(劉郎浦口號)〉를 으뜸으로 꼽는다.

오와 촉의 혼인이 이 물가에서 이루어지니,
밝은 구슬과 보행 장막에 황금 휘장이라.
뉘라서 딸자식을 천하보다 가벼이 여겨,
유랑의 삼분지계를 바꾸려 하였는가.

吳蜀成婚此水潯,明珠步障幄黃金。
誰將一女輕天下,欲換劉郎鼎峙心。

5. 용봉희병(龍鳳喜餅)

전설에 따르면 유비가 동오로 장가들러 갈 때, 제갈량이 장인들을 고용하여 특별히 형초(荊楚)의 풍미가 담긴 미식을 제작하여 혼례 선물로 삼았다. 이 둥근 떡의 정면에는 용과 봉황이 ‘희(喜)’ 자를 둘러싸고 춤추는 문양을 새겼다. 이는 용과 봉황이 짝을 이루어 길상하고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용봉희병’이 중국 민간에서 약혼 예물로 쓰이게 된 유래다.

당시 유비는 제갈량의 금낭묘계에 따라 조운에게 500 군사를 거느리고 이 용봉희병을 남서 성안의 각 집집마다 돌리게 했으며, 사방에 노래를 퍼뜨렸다.

“유비가 동오에 장가들러 오니 용봉희병이 매파로다.”

이렇게 하여 온 성안 사람들이 유비가 초친(招親)하러 왔다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비는 직접 교국로를 방문하여 손권이 이미 여동생을 자신에게 허락했음을 알리고, 교국로에게 용봉희병을 오국태에게 전달해달라고 청했다. 국태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급히 손권을 불러 물었다. 손권은 딱 잡아떼었으나 국태가 용봉희병을 내놓자 손권은 마지못해 그 연유를 털어놓았다.

제갈량이 이끄는 영친(迎親) 행렬이 포구에서 손부인을 맞이한 뒤, 다시 양기산(楊岐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형주에서 실어온 비단(천릉촉금川綾蜀錦)을 산기슭부터 산꼭대기까지 길을 따라 붉고 푸르게 장식하고 등불을 달게 했다. 손부인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목격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참으로 비단 수놓은 것이 숲과 같구나!”라고 찬탄했다. 이때부터 양기산은 수림산(繡林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수림산은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손부인 상과 복원된 수림정 등의 명소가 있다.

그 후 손부인은 곧 공안으로 인도되었다. 유비는 공안에 별도의 성을 쌓았는데 이를 손부인성이라 불렀다. 그 유적은 현재 공안현 협죽원진夾竹園鎮 금묘구촌金貓口村에 있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손부인성은 잔릉성 동쪽 5리에 있는데, 한 소열제의 부인이자 손권의 여동생이다. 소열제와 서로 의심하여 별도로 이 성을 쌓아 거주했다.”라고 한다.

6. 절강탈두(截江奪斗)

제갈량이 서천을 얻은 후에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손권은 유비가 서천 정벌에 나선 틈을 타서 주선(周善)을 보내 손부인을 동오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면서 국태가 위독하여 밤낮으로 부인을 생각하니 늦게 가면 얼굴을 보지 못할까 두렵다는 거짓말을 했다. 또한 아두를 데려와 한 번 보게 하라고 했다. 사실 이는 손권이 아두를 인질로 잡아 형주와 교환하려는 조건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부인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일곱 살 된 아두를 수레에 태우고 수행원 30여 명과 함께 각자 칼을 차고 말을 타고 성을 나섰으며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랐다. 제갈량은 이를 전해 듣고 급히 조운과 장비를 보내 강 위에서 부인의 배를 가로막고 어린 주군 유선을 되찾아왔다. 이때부터 손부인은 한 번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고 소식도 끊겼다.

조운이 강에서 아두를 되찾다 (인터넷 사진)

알다시피 ‘온몸이 담덩어리’인 상산 조자룡 역시 충성과 용맹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유비와 의형제를 맺어 ‘넷째 아우’가 되었다. 조운은 처음에 원소와 공손찬을 따랐으나 모두 어진 주군이 아님을 발견했다. 마지막에 일심으로 강산 사직을 바로잡으려는 유비를 선택하여 30년 가까이 추종했으니 “끝내 덕을 배신하지 않았다.” 참으로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고, 어진 신하는 주군을 가려 섬긴다”라는 말 그대로다.

조운은 박망파 전투, 장판파 전투, 강남 평정전에 참가했고, 사천에 들어갈 때 전투, 한수(漢水) 전투, 기곡(箕谷) 전투를 독자적으로 지휘했으며 평생 패배한 적이 없다. 또한 편장군으로 계양태수를 지냈고, 유영사마(留營司馬)로 공안을 지켰으며,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강주를 독찰했다. 가히 삼국시대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지닌 진선진미한 전설적 인물이라 할 만하다.

특히 장판파 전투에서 조조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형주로 남하했을 때, 유비의 당시 실력으로는 저항하기 부족하여 강릉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형주의 10여 만 백성들이 뒤따르는 바람에 행군이 매우 느려졌다. 조조는 휘하의 정예 기병 5,000명을 선봉으로 삼아 순식간에 당양 장판파에서 유비를 추격했다. 위급한 순간에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겨우 조운, 장비, 제갈량 등 수십 기만 데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조운은 위기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단기필마로 몸을 돌려 조조군 속으로 뛰어들어 일곱 번 들어가고 일곱 번 나오며, 수십 만 대군의 겹겹이 쌓인 포위망 속에서 감부인과 아두를 성공적으로 구출해냈다. 그리하여 ‘고독한 영웅’ 조운의 단기구주(單騎救主 단기로 주인을 구하다) 이야기는 민간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널리 전해 내려오고 있다.

7. 별궁제강(別宮祭江)

전통 희곡에서는 손부인을 흔히 손상향(孫尚香)이라 부른다. 그중 경극에는 《별궁제강》이 있고, 천극, 휘극, 진강, 진극, 하북방자(河北梆子)에는 모두 《제강(祭江)》이 있으며, 예극, 월극, 전극, 하남곡극, 산동방자에도 역시 《손부인제강》 등이 있는 등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명나라 때 새긴 역대백미도(曆代百美圖) — 손부인 (인터넷 사진)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손상향은 남편 유비가 백제성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레를 몰아 석수 수림산에 이르러 백제성을 향해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모든 희망을 잃은 그녀는 결국 해가 질 무렵 도도히 흐르는 장강에 몸을 던졌다. 그녀가 강에 뛰어든 곳을 ‘망부대(望夫台)’라 부른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패전하자 오나라에 헛소문이 돌아 유비가 죽었다고 전해졌는데, 손부인이 몹시 슬퍼하며 궁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작별하고 수레를 몰아 강가로 나가 서쪽을 바라보며 멀리 울다가 강에 투신해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강가에 묘를 세우고 효희사(梟姬祠)라 불렀다.

결어

이를 숭상하는 이가 시를 지어 탄식했다.

“선주의 군사가 백제성으로 돌아가니,
부인이 난리를 듣고 홀로 목숨을 버렸도다.
지금까지 강가에 비석이 남아 있어,
천년토록 열녀의 이름을 드날리네.“

비록 삼국시대가 영웅들이 떼 지어 나타난 시대였다고는 하나, 역사의 긴 강물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중국 고대 여인은 가히 적고도 적으며, 또한 각종 희곡으로 각색되어 천고에 노래로 불리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라 하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