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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춘추전국시기 문화예술 (1)

심연

【정견망】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동탕(動蕩)과 변혁, 풍운이 변환하던 시기였다. 전쟁이 빈번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과학기술은 여전히 번영했으며, 이 시기의 사상과 문화는 후세 역사문화의 기초를 닦았다.

문화

1. 문학

(1) 산문

은허(殷墟) 복사(卜辭)는 선진(先秦) 산문의 맹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짐승의 뼈와 거북의 껍질에 은상 왕조의 점복 언사를 간략하게 기록했다. 《상서》는 고대에 가장 오래 된 일종의 역사 문헌 편집본이다. 위로는 요순부터 아래로는 진목공에 이르기까지 기재되어 있는데, 대부분 사관이 기록한 제왕의 맹세, 명령, 훈고이며, 중요한 고대 사료 가치를 지닌다. 《상서》는 중국 최고의 산문집이라 할 수 있다. 그 문장 구조는 복잡하고 문구는 간결하다.

춘추 시대 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른 편년사(編年史 편년체 역사)다. 그것은 매우 간결한 문자를 통해 몇몇 중대한 역사 사건을 개괄했으며, 이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포폄(褒貶)을 표시했다. 《춘추》는 후세 역사 편찬에 대해 모범적인 역할을 했다.

《논어》는 춘추전국 시기에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공자의 제자 및 그 재전(再傳)제자들이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재한 한 권의 책이다. 《논어》는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문예 등 여러 방면을 다루고 있으며 내용이 매우 풍부하여 유학의 가장 주요한 경전이다. 표현상에서 《논어》의 언어는 질박하고 정련되며 형상이 생동하여 “시적인 정취”가 농후하며, 어록체(語錄體) 산문의 전형이다.

《좌전》이라는 책은 전국 초기의 저작으로, 《춘추》를 전문적으로 해석한 《공양전(公羊傳)》이나 《곡량전(穀梁傳)》과는 다르며, 중국의 서사가 생동하고 진실성을 갖춘 편년사다. 이 책은 풍부한 언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춘추 시대 사람들의 대화를 기술함에 있어 굴곡이 생동하고 매우 활발하다. 또한 역사 사건, 특히 전쟁 묘사에 있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직접 그 현장에 있는 듯하게 한다. 당대(唐代) 유명한 사학평론가 유지기(劉知幾)는 일찍이 《좌전》의 서사문을 극구 찬양하며 “고금에 탁월하다”(《사통(史通)·잡설상》)고 여겼다. 《좌전》은 본래 유가 경전이 아니었으나, 학관에 세워진 이후 나중에 다시 《춘추》 뒤에 붙여지면서 점차 유학자들에 의해 경전으로 간주되었다.

(2) 시가

민간 가요는 춘추와 전국 사이에 매우 유행했다. 《좌전》, 《국어》 및 제자(諸子)들의 서적에서는 때때로 민간 가요를 인용하곤 했다. 가요의 유행과 발전으로 인해 전국시대의 시가는 문체상 이미 차이가 있었다. 춘추 이전의 시가 총집인 《시경》에서 “아(雅)”는 서주 왕기(王畿)의 바른 소리인 아악이었고, “송(頌)”은 상층 사회 종묘 제사의 무곡(舞曲) 가사였으며, 《국풍(國風)》은 토속 가요였다. “혜(兮)” 자의 유무는 당시 궁정과 민간 가사의 표준을 구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국풍》에서는 “혜”를 어조사로 사용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나, 《대아》, 《소아》, 《주송》, 《노송》, 《상송》 중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다. 본래 “혜” 자의 고음은 “아”로 읽혔으며, 고대 민간 가요에서 상용되던 어조사였다.

춘추와 전국 사이에 이르러 민간 가요 중에는 구법의 장단이 들쭉날쭉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가사가 나타났는데, 이미 《국풍(國風)》처럼 정제된 4자 구를 많이 쓰지 않았다. 이때 민간의 노래는 흔히 음악으로 반주를 했는데, 음악 반주 속에서 장단이 섞인 생동감 넘치는 가사를 부르는 것은 사람을 매우 감동시킬 수 있었다. 형가(荊軻)가 연나라를 출발하여 진왕을 암살하러 갈 때 이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고점리(高漸離)가 축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현악기를 연주하자 형가가 노래했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複還

형가의 노래와 고점리가 연주한 축의 음조는 서로 화합했는데, 전해지기로는 먼저 “변치(變徵)의 소리”(“변치”는 일종의 슬픈 음조다)가 되어 사람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나중에는 “강개한 우(羽)의 소리”(“우”는 일종의 강개하고 격앙된 음조다)가 되어 사람들이 듣고 모두 눈을 크게 떴으며 머리카락도 마치 곤두서는 것 같았다고 한다(《전국책·연책삼》). 이때 남방 민간의 노래는 더욱 곡절 변화가 심하고 귀에 즐겁게 들렸다.

전해지기로는 초나라 경양왕(頃襄王) 때 악군(鄂君) 자석(子晰)이 신파(新波) 가운데에서 배를 띄웠다고 한다. 종과 북소리가 막 그치자 노를 젓던 월나라 사람이 노를 저으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월나라 말로 32개 자음의 노래를 불렀다. 악군이 알아듣지 못하자 사람을 시켜 초나라 말로 번역하게 하니 이와 같은 한 편의 초사가 되었다.

“오늘 밤은 어떤 밤인가,
강 가운데에서 배를 띄웠네.
오늘은 어떤 날인가,
왕자와 한 배를 탔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좋아해 주시니
꾸짖음을 개의치 않노라.
마음은 어찌 이리 간절하여 끊이지 않는가,
왕자를 알게 되었네.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가지가 있으니,
마음으로 임을 좋아하나 임은 알지 못하시네.“
(《설원·선설편(善說篇)》)

《노자》 5천언(千言)은 대부분 운문으로 쓰였으며 언어가 정련되고 생동하며 함의가 깊다.

시가의 대표 : 초사

“초사”라는 이름은 《사기·장탕전》에 처음 보인다. 한대 전기에 이미 이 명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본래 의미는 당시 초나라 지역의 노래 가사를 두루 일컬었으나, 이후에 전용 명칭이 되어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 창작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시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러한 시체는 농후한 지역 문화 색채를 띠고 있는데, 송나라 사람 황백사(黃伯思)가 말한 바와 같이 “모두 초나라 말을 쓰고, 초나라 소리를 내며, 초나라 땅을 기록하고, 초나라 물건을 이름 지었다”(《동관여론》). 서한 말 유향(劉向)이 굴원과 송옥(宋玉)의 작품 및 한대(漢代) 사람들이 이러한 시체를 모방한 작품들을 편집하여 책 이름을 《초사》라고 붙였다. 이것은 《시경》 이후 우리나라 고대의 또 하나의 심원한 영향을 끼친 시가 총집이다.

굴원의 《이소》가 초사의 대표작이기 때문에 초사는 또한 “소(騷)” 또는 “소체(騷體)”라고도 불린다. 《초사》 중에서 《이소》 이외에 주요 작품으로는 《구가》(《동황태일》, 《운중군》, 《상군》, 《상부인》, 《대사명》, 《소사명》, 《동군》, 《하백》, 《산귀》, 《국상》, 《예혼》 포함), 《천문》, 《구장》(《석송》, 《섭강》, 《애영》, 《추사》, 《회사》, 《사미인》, 《석왕일》, 《귤송》, 《비회풍》), 《원유》 등의 편이 있다.

(3) 문자

중국의 고문자는 은주 시대에 이미 예술적 풍미를 갖추고 있었다. 은대의 갑골문은 칼로 새긴 “각사(刻辭)” 이외에도 붓으로 쓴 “서사(書辭)”가 있었다. 서주의 금문(金文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은 주조하기 전에 먼저 글씨 자국을 써야 했다. 그중 여러 작품은 서체가 미관상 아름다워 당시 무명의 서예가 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문자를 예술품으로 삼아 문자를 예술화한 것은 춘추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춘추 말년 오, 월, 채, 초 등 나라는 흔히 의장용 병기(兵器)에 미술 서체를 새겼다. 그것은 당시의 거칠고 소략한 서체와는 정반대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노력했거나, 필획 위에 둥근 점을 더하거나, 일부러 파절(波折 굴곡)을 만들거나, 마땅한 필획 이외에 새 모양의 장식을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조전(鳥篆)”, “충전(蟲篆)” 또는 “무전(繆篆)”의 기원이다.

1965년 호북 강릉 초나라 묘에서 발견된 월왕 구천검은 검신(檢身) 전체에 마름모꼴 암문이 장식되어 있고 “월왕구천자작용검(越王鳩淺自作用劍)”이라는 8자의 명문이 있다. 1977년 호남 익양현 혁석묘 전국묘에서 발견된 한 자루의 청동검은 상하 양면에 모두 “월왕주구(州句 즉 주구朱句)자작용검”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는데, 모두 이러한 조전 서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문자가 민간에서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응용되면서 간략화되고 흘려 쓰는 서체가 대량으로 유행했다. 자형의 변화가 매우 현저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 간 문자 이형 현상도 매우 두드러졌다. 당시 인새(印璽), 화폐, 도기(陶器) 위의 문자, 청동 병기 위의 각관, 청동기 위에 새긴 장인의 이름, 그리고 최근 출토된 죽간, 백서는 모두 이런 서체였으며, 이는 청동 예기(禮器) 위의 정교한 명문과는 분명히 달랐다. 대체로 당시 중요한 청동기 위의 정교한 서체는 여전히 서주 이래 전통적인 서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일반 일용 기물 위의 소략한 서체는 당시 각지 민간의 자유로운 창조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각지 민간의 자유로운 창조에서 나왔기 때문에 글자를 쓰는 법이 매우 불일치하여 편방조차 다름이 있었고, 한대 허신이 말한 7국의 “문자 이형(異形 같은 글자의 모양이 달라짐)” 현상이 나타났다(《설문해자서》).

전국시대에는 아직 서체의 전용 이름이 없었으나 실제 사용 중에는 이미 정교한 것과 거친 것 두 종류의 서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교한 한 종류가 바로 전서(篆書)의 기원이며, 거친 것의 한 종류가 “초전(草篆)”이라 부를 수 있고 “고예(古隸)”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전서에서 예서로 가는 과도기다.

진(秦)나라를 예로 들면 상앙(商鞅) 변법 때 제조된 “상앙방승(商鞅方升 네모난 모양의 되)” 위의 명문은 정교하게 쓰여 서주(西周) 이래 전통적인 전서였다. 그러나 “대량조돈(大良造鐓)” 위에 새긴 글씨는 매우 거칠어서 초전에 속하는 서체다. 진소왕(秦昭王) 때의 두 알의 옥인(玉印 강릉 봉황산 진묘秦墓 출토)은 모두 “영현(泠賢)” 두 자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소전(小篆)이고 다른 하나는 초전(草篆)으로 예서에 가깝다.

“영” 자의 편방은 이미 “수(水)”를 따르지 않고 “삼수변”으로 되어 있다. 전국 후기 진나라 “고노화석동권(高奴禾石銅權)”의 명문은 이미 예서 서체이며, “노(奴)” 자의 “여(女)” 변과 “조(造)” 자의 “착(辶)” 변은 이미 예서와 동일하다. 진시황이 통일을 완성하기 이전에도 실제로 소전과 예서 두 종류의 서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적호부(新嘀虎符)”의 명문은 소전이며, 호북 운몽 수호지(睡虎地)에서 출토된 백서 《위리지도(爲吏之道)》는 예서에 가깝다. 예서와 소전의 가장 큰 구별은 바로 둥근 필획을 모난 필획으로 바꾸고 곡선을 직선으로 바꾼 것인데, 이렇게 하면 쓰는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여러 중요한 청동기 명문(銘文)은 모두 정교한 전서(篆書)를 사용해 미관을 중시했다. 예를 들어 전국 초기 한(韓)나라에서 제작한 편종은 모든 명문을 먼저 방격(方格 사각형 칸)을 그려놓고 방격 안에 정교한 전서를 썼는데 매우 정미(精美)하다. 하북 평산 중산왕 묘 출토 청동기 명문도 모두 정교한 전서다. 이것이 바로 서예의 기원이다.

나중에 진시황이 전국의 문자를 통일할 때도 여전히 이 방법을 사용해 예서를 광범위하게 응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각석과 중요한 청동기 위의 문자는 모두 소전(小篆)을 썼으며 모두 정교하고 아름답게 썼다. 전해지기로는 이사가 바로 서예가였으며 “전서에 능하다고 일컬어졌다”. 많은 각석과 12개의 “종저금인(鍾杼金人)”의 명문이 모두 그의 필치에서 나왔다고 한다(《수경·하수주(河水注)》 위항(衛恒)의 《서전(敘篆)》 인용). 이때부터 서예 예술로서의 문자와 응용 도구로서의 문자는 각각 각자의 길을 따라 앞으로 발전했다.

예술

전국시대의 미술품은 대체로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청동 공예품(금은착金銀錯, 상감 및 동경銅鏡 포함)

② 조소성 미술품,

③ 회화성 미술품,

④ 기타 공예품──칠기, 옥기, 도기 등이다.

전국시대 예술에 대한 대량의 구체적인 자료는 지난 50년 동안의 고고학적 발견 덕분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각지의 출토물은 미술사 연구에 있어 모두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산서 혼원 이욕촌(山西渾源李峪村), 하북의 이현(河北易縣)과 당산, 하남의 휘현(河南輝縣), 급현(汲縣), 낙양 금촌(金村), 산동 임치, 안휘 수현(壽縣), 호남 장사 등이다. 이 지역들에서는 묘장(墓葬)이 발견되었거나 혹은 아직 건축 유적이 남아 있는데, 출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청동기지만 와당, 옥기, 칠기 및 도기 등도 있다.

전국시대의 미술 연구는 특히 최근 하북 당산, 하남 휘현, 낙양 및 호남 장사의 발굴 덕을 보았다. 이러한 발굴들은 지역적 대표성이 있으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있는 진귀한 재료들을 제공했으며, 고대인의 생활과 문화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 청동기

청동기에는 혼원 이욕촌에서 출토된 조(趙)나라 기물, 하북 당산에서 출토된 연나라 기물, 휘현에서 출토된 위(魏)나라 기물, 낙양 금촌에서 출토된 한나라 기물, 안휘 수현에서 출토된 채(蔡)나라 기물 및 초나라 기물, 그리고 각지에서 출토된 제, 진(秦) 기물이 있다. 그중 일부는 춘추 말기의 것이며 그 시대 및 지역의 스타일 변화는 모두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히 공동의 추세를 가지고 있다. 청동기는 서로 유사한 새로운 조형과 서로 유사한 장식 주제 및 장식 방법을 가지고 있다. 장식 부분은 입체화되어 사실풍의 동물 조각으로 향하거나, 혹은 전체에 가득 차 복잡하고 중첩되어 얽힌 조직으로 향한다. 장식 문양은 반치문(蟠螭紋)이 가장 보편적이나 처리 방법은 여러 종류로 다르다.

주조 기술상 투조 장식은 이미 납형법(wax-mold)으로 주조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꽃무늬는 간단한 압인법을 이용하여 청동기의 원형 모형(범형이 아님) 위에 찍었으며, 구리와 주석의 성분도 새로운 비율을 갖게 되었다. 전국 청동기의 스타일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전국 청동기의 화려한 스타일은 특히 금은착 등 상감 기물에서 나타나는데 금, 은 및 홍동(紅銅) 등 금속이나 터키석, 수정, 옥, 마노 등 광석을 청동기 꽃무늬 틈새에 채우거나 상감하여 다채로운 효과를 냈다.

낙양 금촌과 휘현 고위촌(固圍村)의 금은착 및 주옥상감기(珠玉鑲嵌器)는 모두 중국 공예사상의 진품이다. 전국시대의 동경(銅鏡)은 초나라 및 그 인접 지역에서 비교적 많이 발견된다. 원형 동경(소수는 방형이다)의 앞면은 연마하여 사람을 비춰볼 수 있고 뒷면에는 조직이 매우 정밀하고 완전한 도안이 있다. 이러한 도안들은 흔히 조밀한 바닥 무늬 위에 회전하며 종횡으로 놓인 운뢰문(雲雷紋)이나 환상적인 동물 문양이 있다. 상하 두 층이 빛 반사가 달라 대비 효과를 나타낸다.

전국 시대 동경 문양은 중국 도안 문양의 전형 중 하나다. 전국 시대 동경의 합금 중에는 거울 면을 매끄럽고 세밀하게 하기 위해 흔히 소량의 납을 넣었는데, 뒷면의 꽃무늬도 이로 인해 특별히 가지런하고 선명하다.

* 조소(彫塑)

전국시대의 조소 작품은 확실히 동태(動態)를 표현하고 안면 표정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장사에서 출토된 목용(木俑 나무 인형)과 낙양에서 출토된 호녀(胡女) 동상(銅像)은 동태 표현이 매우 미묘하다. 이미 알려진 초기 조소 예술품으로서 이는 평범하지 않은 시도다. 다른 몇몇 공예 장식 성격의 조소, 예를 들어 산서 장치 분수령(長治分水嶺)에서 출토된 원숭이 모양, 앵무새 모양의 청동 장식, 낙양 금촌에서 출토된 다양한 무릎을 꿇고 앉은 호인(胡人) 모양의 청동 인형, 금은착 운문(雲紋 구름 무늬) 및 수문(獸紋 동물무늬)이 있는 청동 동이 위에서 막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한 쌍의 개구리, 이러한 작품들은 동물의 동작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낙양 금촌에서 출토된 금은 수수(獸首 짐승 머리), 용수(龍首 용 머리), 휘현에서 출토된 수레 끌채 머리의 짐승 머리 모양 장식물은 모두 과장된 수법을 채용했다. 또한 금속의 서로 다른 색택을 이용하여 장식하는 데 능하여 생동감 있는 효과를 얻었다.

* 회화(繪畫)

《한비자》에는 화가가 3년의 시간을 들여 주군을 위해 상자를 그렸는데, 강렬한 광선을 배합하자 “용사(龍蛇)와 금수(禽獸), 거마(車馬) 등 만물의 형상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분명히 이것은 전국시대 장식화 중의 주요 소재였다. 초나라 시인 굴원은 《천문》을 짓기 전, 초나라 선왕(先王)의 묘 및 공경(公卿)의 사당 벽화 중에서 “천지산천의 신령과 기이하고 위대한 형상 및 고대 성현과 괴물의 행적”이 담긴 환상적인 신화 도화(圖畫)를 보았다. 고대의 유명한 장인 노반(魯班)은 발로 자신의 모습이 사납고 추하여 사람들이 보는 것을 꺼려 물속에 숨은 “촌류신(忖留神)”의 도상을 그렸다. 제나라 화가 경군(敬君)은 제나라 왕을 위해 구중대(九重台)를 그리느라 집에 돌아가지 못하자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 스스로 위안 삼았는데, 결국 아내가 제나라 옹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제나라 왕의 손님은 사람들이 잘 아는 개와 말을 그리는 것이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귀신을 그리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이로써 당시 회화 예술의 발전 상황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의 회화 작품 중에서는 장사에서 출토된 백화(帛畫 비단에 그린 회화) 《용봉사녀도(龍鳳仕女圖)》를 이미 알려진 첫 번째 회화로 꼽는다. 다른 우리로 하여금 전국시대 회화 예술 수준을 이해하게 돕는 작품으로는 고궁에 소장된 《수륙공전문동호(水陸攻戰紋銅壺)》와 휘현에서 출토된 각문 《연락사렵동감(燕樂射獵銅鑒)》 및 급현에서 출토된 《수륙공전문동감(水陸攻戰紋銅鑒)》 위의 연주, 활쏘기, 궁궐 정경 및 9종의 전투 장면이 있다.

장사에서 출토된 채색화 칠렴(漆奩 칠기 상자) 위에는 나무, 달리는 수레와 말, 사냥 등의 정경이 있다. 당시 회화 예술의 구도 능력을 설명해 준다. 기타 금은착 수렵호(狩獵壺) 및 동감(銅鑒) 위의 거마, 동물 등의 정경도 모두 일정한 정도에서 당시 회화의 일반적인 수준을 표현했다. 공예 미술 범위 중에서는 칠기 공예가 더욱 두드러진다. 위에서 언급한 회화 고사 인물이 있는 칠렴 이외에도 장사에서 출토된 칠둔(漆盾 칠기 방패), 신조반(神鳥盤), 삼봉(三鳳) 및 이봉반(二鳳盤), 채색 칠 화안(畫案) 및 식(軾 수레의 횡목)은 모두 현존하는 가장 이른 완전한 작품들이다. 삼베로 태를 만드는 협저(夾苧) 기술이 이미 매우 보편화되었으며, 칠을 바른 것이 균일하고 색상(빨강과 검정)이 선명하다. 도안의 구도가 매우 교묘하고 정미하며 선무늬는 혹은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혹은 균질하고 중후해 묘사 기술도 고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전국 칠기 도안과 동경 도안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 옥석(玉石)

옥석 공예도 걸출한 표현이 있다. 낙양 금촌에서 출토된 옥패(玉佩), 옥벽(玉璧) 및 각종 동물 모양 옥 장식, 휘현에서 출토된 대옥황(大玉璜), 조금상옥감주은대구(雕金鑲玉嵌珠銀帶鉤)와 옥앵무새(玉鸚鵡)는 기술이 탁월해 고대 옥기 공예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금촌에서는 옥석 공예의 반제품이 발견되어 우리가 그 제작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고대 옥 제작 기술은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다. 전국시대 옥기 공예 중에는 도안 조형 중의 몇몇 기본 법칙이 체현되어 있다.

* 복식(服飾)

동주(東周) 남자의 복식은 서주(西周) 복식과 큰 차이가 없으며, 대체로 상대(商代)의 복제(服制)를 받아들여 단지 약간의 변화만 주었을 뿐이다. 의복의 양식은 상대보다 약간 여유롭다. 복장 스타일의 특징은 우임(오른쪽으로 여밈), 좁은 소매이며 길이는 발목까지 오고 허리에 띠를 묶는 것이 비교적 많으며, 옷 길이가 앉았을 때 바닥에 닿는 정도인 것도 있다. 소매는 크고 작은 두 가지 형식이 있고 깃은 일반적으로 구령(矩領)을 사용했으나 아직 단추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허리에 띠를 매고 어떤 것은 띠 위에 옥으로 만든 장식물을 걸기도 했다. 당시의 허리띠는 주로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실크 직물로 만든 것으로 “대대(大帶)” 또는 “신대(紳帶)”라 불렀다. 다른 하나는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혁대(革代)”라 불렀다.

일반 “사(士)”의 의복은 좁은 소매에 무늬가 있는 직문의(織紋衣)였다. 이러한 복장은 구령이며 깃, 소매, 섶, 옷자락에 모두 테두리 장식이 있고 어깨에는 피견(披肩)이 있으며 허리에는 조대(絛帶 끈띠)를 매고 오른쪽에 옥패를 걸었다.

반면 춘추전국 귀족의 관모(冠帽)와 복식은 일반 사인(士人)과 다소 달랐다. 그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양옆에 조영(組纓 끈)이 늘어져 턱 아래에서 묶었으며, 뒷머리는 땋아 올려 관 안에 넣었다. 몸에는 좁은 소매 장포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맸으며 발에는 신을 신었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전국 옥인(玉人)은 관을 쓰고 넓은 소매 복장을 입은 관리의 모습이다.

춘추 시대에는 호복(胡服) 이외에 “심의(深衣)”라 불리는 또 다른 복식 제도가 있었다. 심의는 상의(上衣 웃옷)와 하상(下裳 치마)이 따로인 것과 달리 상하가 하나로 이어진 의복이다. 이러한 복장은 사회적으로 영향이 매우 커서 귀천이나 남녀, 문무 직별을 막론하고 모두 심의를 입을 수 있었다.

전국시대의 복식에는 비교적 뚜렷한 변화가 있었는데, 비교적 중요한 것은 호복의 유행이다. 이른바 호복은 실제로는 서북 지역 소수민족의 복장으로, 중원 지역의 넓은 옷에 넓은 띠를 매는 한족 복장과는 비교적 큰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짧은 상의, 긴 바지와 가죽 신발로 이루어지며 옷매무새가 날씬하고 좁아 활동하기에 편리했다. 가장 먼저 이러한 복장을 채용한 조나라 무령왕은 중국 복식사상 최초의 개혁가였다. 짧은 옷이 무릎까지 오는 것은 호복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이러한 복장은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 민간으로 전해져 하나의 보편적인 차림새가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