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
【정견망】
창밖에는 티끌 같은 세상일들,
창안에는 꿈속을 헤매는 꿈같은 몸.
이 몸이 이미 꿈인 줄 알았으니,
세상일이야 티끌처럼 흘러가든 말든.
窗外塵塵事
窗中夢夢身
既知身是夢
一任事如塵
범성대(范成大)는 자가 지능(至能)이고 호는 석호거사(石湖居士)이며, 남송의 유명한 시인으로 평강 오현 사람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그는 양만리(楊萬里), 육유(陸遊), 우무(尤袤)와 함께 남송의 ‘중흥 4대시인’으로 꼽힌다.
범성대의 시사(詩詞) 풍격은 평이 자연하고 청신(淸新) 완약(婉約)하며 제재가 광범위한데, 특히 농촌의 풍물과 백성의 생활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이 작품 《시월이십륙일삼게(十月二十六日三偈)》는 시인이 반몽반성(半夢半醒) 사이에 지은, 제법 선의(禪意)와 철리(哲理)를 갖춘 짧은 시다.
“창밖에는 티끌 같은 세상일들,
창안에는 꿈속을 헤매는 꿈같은 몸.”
‘창밖’이 가리키는 것은 현실 속의 갖가지 범속한 세상일이며, ‘창안’이 가리키는 것은 꿈속에서의 갖가지 경험이다. 시인의 절묘한 점은 창밖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히 말하지 않았고,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은 채,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바로 설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쉽게 그 속에 대입되어, 자신의 경험과 감수 속에서 공명을 찾게 만든다.
세상일은 대개 사람의 뜻대로 되기 어렵다. 공명, 득실, 인정(人情), 은원은 항상 사람을 번뇌하고 근심하게 만든다. 반면 꿈속의 세계는 종종 사람의 염원과 동경을 기탁한다. 어쩌면 공성명취(功成名就)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소요자재(逍遙自在)일 수도 있으며, 또 어쩌면 세상에서 초탈하여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우리가 이미 알 길이 없으나, 그 꿈과 현실이 뒤섞여 분변하기 어려운 감수는 시구를 통해 명석하게 흘러나온다.
“이 몸이 이미 꿈인 줄 알았으니,
세상일이야 티끌처럼 흘러가든 말든.”
시인은 꿈으로 인해 깨달아, 문득 소위 현실 인생 자체가 본래 한바탕 꿈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의식했다. 인생이 꿈과 같다면, 세상의 갖가지 분쟁과 집착을 또 어찌 그리 과도하게 마음에 둘 필요가 있겠는가?
‘일임사여진(一任事如塵)’은 바로 일종의 내려놓음과 초탈이다. 인간 세상의 명리나 득실을 날아다니는 티끌처럼 보아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게 내버려 두고, 더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바로 집착을 담담히 여기고 세간의 정을 가벼이 보는 경지다.
이로 보아, 시인은 당시에 어쩌면 어떤 번거로운 근심에 곤혹해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꿈속에서 마치 일종의 점화(點化)를 얻은 듯하여 그로 하여금 문득 현실 속의 번잡함을 담담히 보게 했다. 시 속에서 체현된 것은 결코 공명과 이록(利祿)에 대한 염증뿐만이 아니라, 더욱이 일종의 수련과 반본귀진(返本歸眞)에 대한 동경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천우(天宇)를 구원하기 위해, 창세주는 뭇 신(神)・뭇 주(主)에게 하세(下世)하게 하여 이 환경 중에서 사람이 되어 고생을 겪고・제고하고・죄를 없애고, 자신을 다시 만들어 천국으로 돌아오게 하려 했다. (창세주가 사람을 구함과 동시에 우주를 다시 만들기 때문에) 신천우(新天宇)는 절대적으로 순정하고 아름다운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람이 선념(善念)을 유지할 수 있고, 현대 관념의 충격에 직면하여 사람이 전통 관념을 견지할 수 있고, 무신론・진화론의 충격 속에서 신을 여전히 믿을 수 있으면, 이런 사람은 구도되어 천국으로 돌아가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세상에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본래 하늘에서 온 생명이기에, 어떤 특수한 시각에 아마도 꿈속에서 아득히 먼 기억을 어렴풋이 접하고 더 높은 경지에 대한 동경을 낳을 수 있다. 시인이 꿈속에서 세속을 초탈하는 이치를 깨달은 것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세상일이야 티끌처럼 흘러가든 말든”은 이미 세속의 명리를 뛰어넘은 심경을 더욱 드러낸다. 진정한 수련은 인간 세상의 짧은 번화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번잡함 속에서 본심을 지키고 올 때의 염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대법을 위해 왔다. 절대로 세간의 환상에 침취되어 생명의 진정한 귀숙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법을 얻어 수련하고 반본귀진해야만 비로소 생명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5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