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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15): 공자의 ‘문소망미(聞韶忘味)’에 담긴 가치 탐색

왕사미

【정견망】

노 소공 25년(기원전 517년) 9월, 계평자(季平子)와 후소백(郈昭伯)의 투계(鬪鷄) 사건으로 인해 노나라에 내란이 발생했다. 《사기·공자세가》에는 “공자 나이 35세 때, 계평자와 후소백이 투계 때문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자를 공격했으나, 평자가 맹손씨, 숙손씨의 가문과 함께 소공을 공격하니 소공의 군대가 패해 제나라로 도망갔다. …… 노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제 경공과 소통하려 했다. 제 태사(太師)와 음악을 논하다 소(韶)를 듣고 그것을 배웠는데,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다.”

여기에서 ‘문소망미(聞韶忘味)’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즉 공자가 제나라에서 순임금 때 음악인 《소(韶)》를 듣고 깊이 매료되어 몰두하면 배운 나머지, 꽤 오랜 시간 고기를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후세에는 흔히 음악이 매우 절묘하여 사람을 무아지경에 빠뜨리는 경지를 비유할 때 이 성어를 쓴다.

《논어·술어》에도 이 일이 나온다.

“공자께서 제나라에서 소를 들으시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하셨다.”

공자의 이 말은 “음악이 이토록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라는 뜻이다. 소동파는 《산촌오절(山村五絕)》 제3수에서 “어찌 소를 듣고 맛을 잊음을 알겠는가, 요사이 석 달 동안 소금 없이 먹었노라(豈是聞《韶》解忘味,邇來三月食無鹽)”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후세에 이 ‘망미(忘味, 맛을 잊음)’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개인이 처한 경지에 따라 ‘상달(上達, 높은 차원의 이해)’ 혹은 ‘하달(下達, 낮은 차원의 이해)’이라는 상이한 이해가 존재한다.

《소》는 상고시대 우순(虞舜 순임금) 때의 악무(樂舞)로 전해진다. 기(夔)가 만든 음악으로 퉁소[簫]를 주 악기로 하며, 무용수들이 긴 퉁소를 손에 들고 그윽하고 청아하며 부드러운 가락 속에서 천천히 춤을 춘다. 후에 소악(韶樂)은 음악 교육의 대표가 되었다. 소악은 ‘대소(大韶)’, ‘소소(韶箾)’, ‘소소(簫韶)’ 등으로도 불린다. 소악은 선진(先秦) 시기 역사 문헌에 널리 기록되어 있는데, 《죽서기년》에는 “제순 유우씨 원년 기미년에 즉위하여 기(冀)에 거처하며 《대소》 음악을 지었다”라고 실려 있다.

선진 전적에는 ‘구소(九招)’라 기록한 것도 있는데, 《여씨춘추·중하기(仲夏紀)》에는 제곡(帝嚳) 시대에 구소를 지었고 제순(帝舜)이 질(質)에게 명하여 이를 수정하게 했으니 그 내용은 순임금의 덕이 요임금을 계승했음을 찬양하는 것이라 했다.

《주례·춘관·대사악(大司樂)》에서는 ‘대소(大韶)’를 주대 ‘육악(六樂)’ 중 하나로 꼽았다.

《좌전·양공 29년》에는 계찰이 주나라 음악을 관람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소를 춤추는 자들을 보고 말하기를, ‘덕이 지극하구나! 위대하도다! 하늘이 덮어주지 않음이 없고 땅이 실어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비록 지극히 성대한 덕이라도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겠구나! 관람은 이것으로 끝이다. 혹 다른 음악이 있더라도 내 감히 청하지 않겠노라’라고 했다.”

이 글에서 보다시피 그는 소의 악무를 극찬하며, 소악이 광활한 천지를 포용하듯 위대함이 비길 데 없다고 여겼다.

《논어·팔일(八佾)》에서도 소악에 대한 공자의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

“공자께서 소(韶)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아름답고[盡美] 또한 지극히 선하다[盡善]고 하셨다.” 단지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지극히 선한 내함(內涵)과 에너지를 널리 전했다는 점이다.

당대의 배도는 《소소구성부(簫韶九成賦)》에서 노래했다.

“아득한 대공(大空)에 음악이 그 가운데서 생겨나니,
소리는 교화에 따라 감응하고 율(律)은 하늘과 통한다.
사계절의 기운을 두루 통하게 하고
삼광(해·달·별)의 빛을 조화롭게 꿰뚫는다.
그러므로 계찰은 그 소리를 듣고 깊이 감동했고,
공자는 그 맛을 잊으셨다.”

茫茫大空。樂生其中。
聲隨化感。律與天通。
交四氣之溥暢。貫三光乎昭融。
故季劄聆音而感深。宣尼忘味於甘否。

《상서·익직(益稷)》에 소악을 연주할 때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소소(簫韶)가 아홉 번 연주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

이는 아악(雅樂)이 신령(神靈)과 서로 통할 수 있으며 상서(祥瑞)로움을 예고하는 것이다.

《주례·춘관(春官)》에 따르면, 주나라에서는 대소의 악무를 써서 사망(四望), 즉 사방의 별과 바다, 산하 등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당대 유지기(劉知幾)가 쓴 《통전(通典)·악(樂)》에서는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한 뒤 육대(六代) 묘악(廟樂) 중 오직 소(韶)와 무(武)만이 보존되었다”라고 했다. 진대(秦代)까지 소악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선진 시대의 소무(招舞)가 한 고조에 의해 ‘문시(文始)’로 개명되었음을 설명한다. 이는 왕자가 앞선 음악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음을 나타내는데, 한대(漢代) 이후 소악은 완전히 실전(失傳)되었다.

《상서》에서는 “덕(德)은 순임금으로부터 밝아졌다”라고 했고, 《사기·오제본기》에서는 “천하의 밝은 덕은 모두 유우(순임금)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한비자·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에는 “옛날 순임금이 오현금을 타며 〈남풍〉의 시를 노래하니 천하가 다스려졌다”라고 했다.

《상서·순전》에는 순임금이 음악에 능통한 기(夔)를 악관으로 임명한 일과 소악의 내면에 대한 순임금의 요구가 기록되어 있다.

“기야! 네게 명하여 악교(樂教)를 주관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노니, 곧으면서도 부드럽고 너그러우면서도 엄숙하며, 강하면서도 사납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오만하지 않게 하라. 시는 뜻을 말하고 노래는 말을 길게 읊는 것이다. 소리는 읊조림에 의지하고 율은 소리에 조화되어야 한다. 팔음(八音)이 잘 어울려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아야 신(神)과 사람이 조화로워진다.”

즉, 순임금이 음악을 통해 담아낸 것은 덕(德)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내함과 밖으로 드러나는 위덕(威德)이었다.

《여씨춘추·상덕(尙德)》의 기록에 따르면 “삼묘(三苗)가 복종하지 않자 우(禹)가 공격하기를 청했다. 순임금이 이르기를 ‘덕으로 하면 된다’라고 하셨다. 덕을 행한 지 3년 만에 삼묘가 복종했다”라고 했다. 이를 통해 소악에 담긴 덕화(德化)의 위력을 엿볼 수 있다.

《송서(宋書)·악지(樂志)》에 따르면 “주나라에는 육대(六代)의 음악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진대(秦代)에 이르러서는 오직 《소》와 《무》만이 남았다”라고 한다.

주나라의 최고 예치 의식인 육제(六祭)에 쓰인 것은 고전적인 ‘육악(六樂)’이었다. 《무》는 주족의 악무로서 종주(宗周)의 예악 중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확(濩)》과 《무(武)》를 볼 수 있었고 제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소(韶)》를 보게 되었다. 소악과 대비한 후 공자는 “《무》는 지극히 아름다우나 지극히 선하지는 않다(《논어·팔일》)”라고 평했다. 《무》가 비록 형태적인 미감은 갖추었으나 그 내용이 정벌을 반영하고 있어 지극히 선한 것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성자(聖者)는 묘하여 도(道)에 합치되고, 지자(志者)는 우러러보며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오음(五音)을 즐기며 정직함을 펴니 누가 귀먹었다 하겠는가. 육부(六府)의 평화에 이르면 절로 맛을 잊는다. 풍속(風)을 살펴 팔풍이 조화롭고, 덕을 관찰하여 구덕(九德)을 밝게 선포한다. 우주의 음양에 감응하고 일월에 광명을 빛내어, 순임금의 덕이 쇠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표방하도다.(당대 진서陳庶의 《문소부(聞韶賦)》)”

공자가 소악에서 도(道)에 합치되는 덕성(德性)의 내함과 보다 높은 경지에서 진선(盡善)이 심령(心靈)을 정화하는 빛을 느꼈기에 세간의 범속한 맛을 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을 세간의 속된 취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의미의 방종한 향락이나 욕망이 충족될 때의 미혹이나 도취가 아니다.

또한 ‘정위지음(鄭衛之音)’이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이는 춘추전국시대 정나라와 위나라 등의 민간 음악이 아악(雅樂)과는 달리 음란하고 저속했음을 뜻한다.

《예기·악기(樂記) 위문후》에는 정위(鄭衛)의 소리에 빠진 위문후(魏文侯 ?~기원전 396)와 자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위 문후가 말했다.

“내가 관을 바로 쓰고 고악(古樂)을 들으면 오직 졸음이 올까 걱정되는데, 정위의 소리를 들으면 지칠 줄을 모르오. 감히 묻노니 고악은 저러하고 신악(新樂)은 이러함은 어째서요?”

그러자 자하가 대답했다.

“지금의 고악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일제히 가지런하고 소리가 조화롭고 아정(雅正)하며 기세가 넓습니다. 모든 악기가 북소리에 맞춰 절제되고 북을 쳐서 시작하며 징을 쳐서 끝내니, 무용은 빠르면서도 우아하여 속되지 않습니다. 군자는 이러한 특징으로 고악을 칭송하며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논하고, 가깝게는 자신의 수신, 제가, 평천하의 일과 연결시킵니다. 이것이 고악의 작용입니다. 지금의 신악(新樂)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굴곡지고 구부렸다 폈다 하며 변화만을 구할 뿐 가지런함을 구하지 않습니다. 소리는 음사(淫邪)하여 빠져서 돌아올 줄 모르고, 광대들이 그 사이에 끼어 남녀의 구별이 없고 부자 존비도 모르니 원숭이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이 끝난 뒤에 남는 여운이 없고 옛일과도 연결되지 않으니 이것이 신악의 작용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물으신 것은 악(樂)이지만 좋아하시는 것은 음(音)입니다. 악과 음은 비록 가깝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위 문후가 물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자하가 대답했다. “옛날에는 천지가 조화롭고 사시(四時)가 마땅하여 선덕(善德)을 수양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매년 오곡이 풍성하고 질병이 돌지 않으며 요사스러운 기운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태평천하입니다. 후에 성인이 나타나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를 강기(綱紀)로 삼으시니 강기가 확립되어 천하가 안정되었습니다. 천하가 안정된 후에 육률을 제정하고 오성을 조화시키며 악기와 노래를 배합하니 이것이 이른바 덕음(德音)이며, 덕음이라야 비로소 악(樂)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아마도 닉음(溺音, 빠져들게 하는 소리)이겠지요?”

위 문후가 또 물었다.

“닉음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자하가 답했다. “정나라 음악은 경박하고 방탕하여 마음을 음사하게 하고, 송나라 음악은 가냘프고 섬세하여 의지를 소침하게 하며, 위나라 음악은 리듬이 급박하여 의지를 피로하게 하고, 제나라 음악은 오만하고 사벽하여 의지를 교만하게 합니다. 이 네 가지 음악은 모두 사람을 성색(聲色)에 빠지게 하여 덕행에 해로우니 제사 때는 그것들을 쓰지 않습니다.”

《논어·위령공》에 기록된 공자의 말씀에 “정나라 소리를 물리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라. 정나라 소리는 음란하고 아첨하는 자는 위태롭다”라고 하셨다.

즉 정나라의 노래를 버리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라는 뜻이다. 정나라 노래는 매우 음란하고 아첨하는 자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기·악기(악본)》에서도 “정위(鄭衛)의 소리는 난세의 소리이다. …… 무릇 모든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음악의 덕성(德性) 내함은 편곡자의 덕행 경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세인이 어떤 음악을 편애하는가 역시 그 사람의 도덕 수준과 내면 경지를 반영한다. 인류 사회의 도덕 수준이 전체적으로 하락함에 따라 퇴폐적인 음악들이 점점 범람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게 되었다.

특히 인류 사회의 말후(末後) 시기, 공산 사령(邪靈)이 중국 대륙을 점거한 시기에는 전통문화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당문화(黨文化)에 찌든 환경에서 나타난 ‘혁명’ 가요나 음악들은 그 선율과 곡조를 포함하여 모두 사악한 마성(魔性)의 독소를 내뿜으며, 격앙되어 거칠고 선정적이며 나태하다. 그러므로 세간에 미혹된 사람들은 역사가 오래되어 순임금 시대의 ‘곧으면서도 부드럽고 너그러우면서도 엄숙하며 강하면서도 사납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소악(韶樂)의 진선(盡善)·진미(盡美)한 경지를 체득하거나 도달하기가 이미 매우 어렵게 되었다.

공자가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오래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나 곧 그와 동화되고, 선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 오래되면 그 비린내를 맡지 못하나 또한 그와 동화된다(《공자가어·육본》)”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중국 문화에는 오천년 문명의 축적이 있으며, 인류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순환해 온 데에는 반드시 깊은 원인과 의미가 있다. 《추배도》에서 “미인이 서쪽에서 오리라” 했고, “오직 바깥 뿌리 나무 위에 삼십 년 만에 자손이 맺히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 중화 문명의 부활의 빛은 이미 나타났으며, 찬란한 광채로 온 우주를 밝게 비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