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사막 원정으로 3차례 갈단 정벌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서북의 철기(鐵騎)에 맞서 강희제는 정무가 매우 바쁜 와중에도 의연히 직접 친정(親征)에 나서 군대를 지휘해 토벌했다. 그림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청 왕조의 동북 변경이 막 평온해지자 서북 대막(大漠 고비 사막)에 다시 전쟁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일통 왕조의 성세는 마지막 대규모 전쟁이란 고험을 직면해야 했다. 만청(滿淸)과 대대로 혼인하며 충심으로 귀부했던 몽골 칸국에서 갈단이란 효웅(梟雄)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서북을 제패해 청조와 남북으로 대치하려 했으며, 강희제의 큰 강적이 되었다.
강희 12년 삼번의 난 평정부터 25년 야크사 전투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내외의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서북의 철기병에 맞서 강희제는 정무가 매우 바쁜 와중에도 직접 군대를 지휘해 토벌에 나섰다. 친정은 일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만주족의 호방한 기개와 포부를 이어갔으며, 성조(聖祖) 황제의 탁월한 무공에 또 하나의 전설적인 장을 기록했다.
준가르부의 난
“짐이 경전과 역사를 읽어보니, 새외(塞外)의 몽골 부족은 자주 중국과 항쟁하여 한당(漢唐)부터 송명(宋明)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가 그 피해를 깊이 입었다. 우리 대청처럼 몽골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그들이 충심으로 귀부(歸附)하게 한 조대는 역사상 출현한 적이 없었다.” —— 강희제

갈단은 제멋대로 칸을 칭하고 마음대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아 대막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조정의 불만을 샀다. 그림은 청 정관붕 등이 그린 《평정준부회부득승도(平定准部回部得勝圖)》 중 ‘아르추르 전투’. (공유 영역)
명말(明末), 북방의 몽골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막남의 내몽골, 막북의 할하 외몽골 및 막서의 오이라트 몽골이며, 막북과 막서 각각 4대 부족이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 시대부터 막남은 청조 판도 안으 들어왔고, 막북과 막서의 여러 큰 부족은 오랫동안 청조에 사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흰 낙타 한 마리와 흰 말 여덟 필을 바치는 것은 매우 높은 규격의 ‘구백지공(九白之貢)’이었다.
원래 몽골 각 부족은 청조의 통치와 비호 아래 화목하게 지냈으나, 막서 준가르 부족의 굴기가 몽골 각 부 사이의 균형을 깨뜨렸다. 우두머리 바투르 훈타이지(巴圖爾琿台吉)는 세력을 마음대로 확장하여 다른 세 부족을 병합하고 막서 몽골을 제패했다. 강희 4년(1665년), 바투르 훈타이지가 세상을 떠나자 준가르 부에 내란이 일어났고, 그의 아들 갈단이 티베트에서 돌아와 난을 일으킨 자들을 가두거나 죽이고 준가르 부의 새로운 훈타이지가 되었다.
갈단 역시 경험이 아주 전설적인 유명 인물이다. 그는 티베트 황교(黃敎)에서 3세 ‘활불’의 전세(轉世)로 인정받아 어려서부터 티베트에서 출가해 불교를 배웠다. 먼저 4세 판첸 라마를 사부로 모셨고 후에 5세 달라이 라마를 따르며 중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불경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무술과 창술을 즐겼으며, 항상 준가르 부의 군정 사무에 유의했다. 준가르 부에 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격적으로 내란을 평정하고 우두머리 자리에 올랐다.
그 후 갈단은 기세를 몰아 계속 확장했다. 강희 16년(1677년), 그는 군대를 일으켜 이미 이주한 호쇼트부를 공격하고 자신의 장인이자 호쇼트부의 우두머리인 오치르투 칸(鄂齊爾圖汗)을 살해했다. 갈단은 제멋대로 칸을 칭하고 여러 부족이 자신의 호령을 듣도록 협박했다. 그의 제멋대로인 약탈과 살육은 대막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조정의 불만도 불러일으켰다.
강희제는 몽골을 우대하며 친선과 화목의 정책으로 몽골 부족의 모순을 처리할 것을 견지했다. 이에 갈단에게 여러 번 권고하며 그에게 격파된 부족의 잔당들을 안무하여 다시 편제하고 명호를 수여하며 식량과 가축을 구제했다. 그러나 갈단은 겉으로는 공순한 척했으나 실제로는 야심만만했다. 조정에 신하를 자처하며 공물을 바치는 동시에, 그는 강희제에게 자신의 칸 지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방에 군대를 동원해 막북 할하 지역을 병탄하려 모의했다.
강희 26년(1687년), 갈단은 할하의 두 날개인 투시예투(土謝圖) 칸부와 자사크투(劄薩克圖) 칸부의 분쟁을 빌미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투시예투 칸부를 공격했으며, 이어 동진하여 체첸 칸부의 목지를 약탈했다. 할하 인들은 세 부족의 병력을 모아 갈단과 3일간 격전을 벌였으나 전군(全軍)이 붕괴했다. 유목민들은 천막과 재산, 소와 양 등을 버리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도주했다.
그 결과 할하 두 부족이 내지(內地 청조 판도 내부)로 귀부하며 청조 ‘대황제’에게 투항할 것을 요청했다. 몽골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 강희제는 식량과 자산을 공급한 후, 새로 귀부한 두 부족의 우두머리들과 내몽골 코르친부 왕공(王公)들을 조직해 성대한 회맹 활동을 거행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갈단에게 뜻을 전해, 몽골족 사람들이 태평을 공유하고 전쟁과 이별의 고통에서 멀어지기를 희망하며, 그가 할하 부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그 목지를 반환하며 본토로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그렇다면 갈단은 어떻게 응답했는가?
타성(駝城)에서의 오전(鏖戰)
“본조(本朝)가 설립 이래 군대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여 무적이었던 원인은, 상벌이 분명하고 제도가 엄격하며 장병이 용맹하고 기계(機械)가 정교하고 우수한 데다 사람마다 국가에 보답할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쟁할 때 제각기 죽음을 아끼지 않고 앞다투어 용감히 나아갔다.” —— 강희제

청 정관붕 등이 그린 《평정준부회부득승도》 중 ‘호스쿨루크 전투’. (공유 영역)
비록 갈단이 할하 몽골 부족을 격파하긴 했으나, 그 부족 사람들이 내지로 이주했기 때문에 갈단은 많은 인구와 가축을 얻지 못했다. 즉 실제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종일관 할하 부족에 대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갈단도 경사(京師)에 사절을 보내 충순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수십만 기병을 믿고, 회부(回部 천산산맥 이남 타림 분지 지역), 청해, 막북의 광활한 땅을 점유하고 있어 날로 교만하고 무례해졌으며 공연히 강희제의 화해 정책에 위반했다. 동시에 그는 거의 매년 러시아와 몰래 소통하며 러시아인의 동맹과 군대, 대포의 원조를 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강희제도 시시각각 갈단의 동향을 주의했다. 강희 27년(1688년)부터 그는 왕공대신들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에 주둔하면 갈단의 남침을 방어하게 했다.
강희 29년(1690년) 5월, 갈단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우르자강을 건너 남하하며 “러시아에 병력을 청해 할하를 함께 공격하겠다”[1]고 큰소리쳤다. 강희제는 즉각 대응 조치를 취하여, 한편으로는 군대를 발동해 전선 지원에 나서고 한편으로는 경사에 머물던 러시아 사신에게 경고하여 러시아군이 《니부추 조약》을 준수하고 갈단 군의 동란에 개입하지 말 것을 명령하여 갈단의 원조를 차단했다.
한 달 후 갈단은 우르회하에 주둔했다. 강희제는 전선의 장령 아라니(阿喇尼)에게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는 오직 갈단군의 행동을 감시할 뿐 교전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라니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무모하게 공격을 발동해 200명을 보내 전봉을 공격하고 또 500명을 보내 치중 부대를 습격했다. 결과적으로 청군은 적군의 재산을 약탈하느라 스스로 진영을 어지럽혔고, 도리어 갈단에게 참패를 당했다. 아라니도 관직이 강등되는 처분을 받았다.
7월, 갈단이 이미 우주무친 지역에 깊숙이 들어오자 강희제는 대담하고 적극적인 결정을 내렸다. 바로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서는 어가친정(禦駕親征)이었다. 그는 세 갈래 대군을 편성했다. 서로(西路)는 유친왕(裕親王) 복전(福田)과 황자 윤제(胤禔)가 이끌고 장성의 고북구(古北口)에서 출발했고, 동로(東路)는 간친왕(簡親王) 야부(雅布)와 다라신군왕(多羅信郡王) 오자(鄂劄)가 군사를 거느리고 희봉구(喜峰口)로 나갔으며, 자신은 중로군(中路軍)을 이끌고 친정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강희제는 출정 후 줄곧 병을 앓아 부득이 보로하툰(波羅河屯 지금의 하북 융화隆化)에 머물렀으나, 여전히 병을 참고 각로의 군무를 지휘하는 것을 견지했다.
7월 말, 갈단은 북경에서 단지 700리 떨어진 마을인 우란부퉁(烏蘭布通)까지 남하했다. 무원(撫遠)대장군 유친왕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쳐 요격 준비를 했다. 갈단은 기이한 ‘타성(駝城)’ 진법을 사용했는데, 낙타 1만 마리로 보호 구역을 만들고 다리를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뒤 등에 상자를 싣고 젖은 펠트를 덮은 것이었다. 적군은 상자 아래에 숨어 틈새로 포화를 쏘고 갈고리 창을 병용해 공격했다.
이 포진법은 공수 겸비였으나 청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봉 장병들이 대포로 타성 진지의 한 구간을 맹공격했고, 오후부터 밤까지 천지를 진동시키고 연기가 자욱할 정도로 싸웠다. 마침내 청군은 낙타성을 대파하여 두 토막으로 끊어 놓았다. 이에 보병과 기병이 기세를 몰아 공격해 들어가 적군을 격파하니 갈단은 밤을 틈타 도주했다. 이 전투는 매우 참혹했으며 강희제의 외삼촌인 동국강(佟國綱)이 전사하고 청군의 사상자도 컸다.
그런데 교활한 갈단이 청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비굴하게 화해를 청했다. 유친왕은 이에 현혹되어 전군에 추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함으로써 갈단을 생포할 최적의 기회를 놓쳤다. 갈단은 성경(盛京), 우라(烏喇), 코르친(科爾沁)을 거쳐 도망쳤는데 뜻밖에도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했다. 강희제는 이 사실을 알고 유친왕 등을 강등하고 녹봉을 삭감해 징계했다. 동시에 갈단에게 어지를 전해 이제부터 할하의 사람 한 명, 가축 한 마리도 해치지 말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조정이 그를 “반드시 끝까지 토벌하여 절대 멈추지 않겠다”[2]고 했다.
한해(瀚海) 깊이 들어가다
“짐이 예전에 갈단을 친정하려 할 때 군신들이 모두 만류했으나 오직 비양고(費揚古)만이 찬성했다. 후에 두 번 출사한 것은 모두 짐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 강희제
(출처: 옛날에 짐이 갈단을 친정하고자 하니 모두가 만류했다. 오직 백(伯) 비양구만이 그를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에 두 번 출사한 것은 모두 짐의 독단이었다. —— 《강희조실록》)

청 낭세녕이 그린 《마술도(馬術圖)》. (공유 영역)
우란부퉁에서 큰 타격을 입은 갈단은 청조 사신에게 ‘참회’하며 다시는 중화 제국의 신민(臣民)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자 효웅의 간사한 면모를 드러내며 다시 흩어진 인원을 소집해 재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처지가 매우 위급하여 군중에 가축이 없고 사졸들은 역병에 감염되어 잇따라 병사했다. 생존을 위해 그는 티베트 달라이 라마에게 구원을 청했을 뿐만 아니라 청조에 은을 하사해 급한 불을 꺼달라고 간청했다.
강희제는 관대하게 그에게 은 1,000냥을 증정하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고하며 그를 우대할 것을 약속했다. 갈단은 그러나 뉘우칠 줄 모르고 여전히 청조에 할하인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며, 청군 주둔지에 관원을 보내 정보를 탐지했다. 강희제는 그에게 엄숙히 꾸짖기를, 만약 다시 악행을 고치지 않고 성지(聖旨)를 무시한다면 청조는 그와의 외교와 무역을 영원히 종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갈단은 들은 체도 않고 사방에서 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도 막남을 침범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러시아인에게 병사 6만 명을 빌려 대거 남침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지난 대전에서 7년이 지난 후인 34년(1695년), 강희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대군을 집결시켜 그를 일거에 섬멸해 영원히 후환을 없애기로 준비했다. 그러지 않으면 청조는 이후에도 계속 변방에 주둔해야 해 국력을 낭비하고 장병과 백성이 모두 고통받기 때문이었다.
이번 대전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강희제는 다시 어가친정에 오를 것을 지시했다. 군신들이 간절히 만류했음에도 강희제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청조의 많은 대전은 강희제가 통일적으로 안배한 것으로, 그의 웅재대략(雄才大略)과 탁월하고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강희제는 한창나이로 기상이 늠름했으니, 갈단을 친정하는 것은 대군을 더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심(軍心)을 진작시킬 수 있어 실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번 출정에 강희제는 10만 대군을 배치했는데 역시 동, 서, 중 세 갈래로 나누었다. 동로(東路) 통수(統帥)는 흑룡강 장군 살포소(薩布素)로 동북 병력을 이끌고 케룰렌강에서 출발해 갈단군을 측면 공격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로(西路) 통수는 무원대장군 비양고(費揚古)이며 섬서와 감숙의 병마를 이끌고 귀화(歸化) 성 밖 사막을 넘어 그 후로를 차단하는 책임을 맡았다. 강희제는 중로를 맡아 케룰렌강 상류 지역을 따라 북상하며 서로와 툴라강(지금의 몽골 경내)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협공을 준비했다.
강희 35년(1696년) 2월, 정돈된 청군은 끝없는 황막한 초원 위를 쉬지 않고 행진했다. 강희제는 사졸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고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세세하게 직접 물었다. 변새의 간고한 환경과 장병들의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목격하고 강희제는 감흥이 일어 《한해》라는 시를 지었다.
“4월의 천산 길,
오늘 아침 한해를 가노라.
쌓인 모래는 절새에 흐르고,
지는 해는 연이은 병영을 지나네.”
四月天山路
今朝瀚海行
積沙流絕塞
落日度連營
청군이 점차 갈단군 주둔지에 접근하자 새로운 난제가 나타났다. 서로군이 대막을 멀리 건너오느라 연도의 수원과 식량 보급이 부족하여 예정대로 툴라강에 도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희제는 심사숙고 끝에 곧 대응 방안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서로군에게 신속히 행군해 툴라강으로 달려가라고 전달하고,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 갈단에게 거짓 회맹을 제안했다. 그는 갈단이 강희제가 친정했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겁에 질려 밤을 틈타 도망갈 것이고, 그때 다시 군대를 내어 추격하면 달려오는 서로군과 만나 양군 협공을 실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했다.
과연 갈단은 강희제가 직접 왔다는 것을 알고 아연실색하여 직접 산에 올라 청군 진영을 멀리 바라보았다. 대영에는 용기가 나부끼고 연가(鑾駕 황제의 어가)가 의젓하게 자리잡고 사방은 휘장으로 둘러싸 황성(皇城)을 이루고 밖에는 망성(網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토록 광대하고 위엄 있는 군용을 보자 갈단은 비명을 지르며 경악했다. “이 병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단 말인가!”[3]
조막다(昭莫多) 결전
“짐은 시종일관 천하의 백성이 모두 태평하고 즐거운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해 왔다. 누군가 관계를 이간질하여 타인의 가정을 파괴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 강희제

그림은 청 정관붕 등이 그린 《평정준부회부득승도》 중 ‘평정회부헌표’. (공유 영역)
모든 변수는 강희제의 장악 속에 있었다. 갈단은 청군과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장막과 기계를 다 버린 채 야음을 틈타 도주했다. 강희제는 내대신 마사합(馬斯哈)을 평북(平北)대장군에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맹렬히 추격하게 했다. 5일 후, 서로의 비양고가 조막다(昭莫多 지금의 몽골 경내)에 도착하여 적과 30리 떨어진 산을 등지고 강을 임한 곳에 진을 쳤다.
조막다는 몽골어로 ‘큰 삼림’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막북의 유명한 전장이었으며, 명 성조 영락제가 일찍이 이곳에서 아루타이를 대파한 적이 있다. 비양고는 먼저 400명의 선봉을 보내 싸우면서 후퇴하게 하여 갈단을 조막다로 유인했다. 그 후 비양고는 대군을 좌우 양익으로 나누어 작은 산에 매복시켰고, 또 한 무리의 한군(漢軍)은 급히 작은 산 꼭대기에 오르게 했으며 나머지는 툴라강을 따라 서면에 진을 쳤다.
이때 갈단이 1만 병마를 이끌고 달려와 산 꼭대기를 선점하려 했다. 청군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활과 쇠뇌, 포화를 일제히 쏘며 험준한 곳에 의지해 아래로 공격했다. 갈단과 그의 아내 그리고 모든 병사가 함께 말에서 내려 포화를 무릅쓰고 맹렬히 돌격했다. 양군이 교전하여 각기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긴박한 순간에 비양고는 적군 후방의 치중 부대를 멀리 바라보고 즉각 전군에 적의 후방을 기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청군은 기세를 타고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갈단군은 황급히 달아났고 벼랑에서 떨어진 자가 부지기수여서 골짜기와 시냇물을 메웠다. 조막다 전투에서 청군은 갈단의 정예를 격파했으며, 이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대전이었다. 강희제는 첩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직접 서로(西路) 대군을 위로하고 조막다에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한 뒤 돌아왔다.
우란부퉁과 조막다 두 차례의 참패를 겪은 후 갈단은 원기가 크게 상하여 다시는 재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의 곁에는 단지 몇 천 명뿐이었고 가축과 식량이 부족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자가 많았으며, 생존자들은 잇따라 흩어져 도망가 청조에 투항했다. 생사의 위기 속에서도 갈단은 여전히 항복을 구걸할 뜻이 없었다.
강희제는 갈단에 대한 처분도 매우 신중히 했다. 한편으로는 변방 장병들에게 이 기회를 틈타 신속히 갈단을 섬멸하라고 당부하며 한시도 늦추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인자한 마음으로 감화시켜 계속 갈단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는 사신을 통해 칙서를 전달하며 70일의 기한을 주었고, 만약 다시 투항하지 않으면 조정이 계속 군대를 내어 정벌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항복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우대와 안무를 베풀었다. 예를 들어 강희제는 특사를 파견해 의복과 음식을 증정하고 투항한 자들이 안거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만약 친척 중에 포로로 잡힌 자가 있으면 일일이 조사해 그들의 가족이 상봉하게 했다. 갈단의 한 측근은 이에 감격하여 말했다. “청나라는 나라가 부유하고 병력이 강성하며 중화 황제는 가히 ‘활불(活佛)’이라 할 만하다. 적군의 부모와 자녀를 상봉하게 하니 누가 이런 일을 들어보았겠는가?”[4]
강희 35년(1696년), 강희제는 북으로 오르도스성에 이르러 비양고를 접견하고 세 번째 갈단 정벌에 대해 비밀히 논의했다. 이듬해 강희제는 영하로 가서 비양고, 마사합에게 각기 한 갈래 병마를 이끌고 갈단이 도주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을 지키게 하여 갈단을 한곳에 고립시켰다. 강희제는 갈단이 도망갈 곳이 없어 항복하거나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자결할 것이며, 그의 말로는 모두 일패도지(一敗塗地)일 것이라고 믿었다.
항복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갈단은 대중이 배반하고 친척이 떠나며 사면초가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다. 강희제가 예상한 대로 갈단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자결해 그의 함부로 전쟁을 벌이다 망친 일생을 마쳤다. 이로써 강희제는 마침내 갈단이라는 반란 세력을 평정하고 몽골 대초원에 다시 화목하고 번성한 풍경을 회복하게 했다.
주석:
[1] 《강희조실록》 권145: 강희 29년 5월 계축 조.
[2] 《강희조실록》 권147: 강희 29년 8월 병자 조.
[3] 《강희조실록》 권172: 강희 35년 5월 계해 조.
[4] 《강희조실록》 권180: 강희 36년 3월 경진 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7/n12141489.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