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경제가 세상을 떠난 후 무제가 즉위했다. 서한 왕조에서 고조 유방을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40~전 87년)이다. 그러나 성취 면에서 말하자면 무제는 유방을 초월했다. 한마디로 서한은 무제 시기에 전성기에 도달했다.
무제 시기의 서한 제국은 중국 역사상 비교적 강성했던 시기일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역대 왕조의 역사에는 ‘한당성세(漢唐盛世)’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한’은 주로 한무제 시기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흔히 한무제와 진시황을 나란히 비교하여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중앙집권제 국가가 진시황에 의해 창립되고 한무제에 의해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반고가 ‘웅재대략(雄才大略)’이라 칭찬한 무제는 새로운 제도를 개창하고 강력한 시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취와 행위는 이미 화하(華夏) 민족의 역사와 전통 속에 깊이 융합되었다.
이전의 제왕들은 연호가 없었으나, 무제가 즉위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 칭한 시작부터 후세 제왕들이 비로소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 민족의 이름은 그가 은하수를 따라 명명한 연대인 천한(天漢)서 유래했다. 무제 시대에 개척한 강토는 복건, 광동 경애(瓊崖)에서 사천, 귀주, 운남에 이르렀고, 신강 우전(于闐)과 알타이에서 흑룡강, 길림, 요녕에 이르러 훗날 2천 년간 중화 제국의 기본 윤곽을 그려냈다. 이 제국의 영향력이 미친 범위는 성해(成海), 파미르 고원, 힌두쿠시 산맥에서 한반도에 이르렀고, 바이칼호에서 인도차이나에 이르러 한(漢) 문화의 영향이 미치는 거대한 문화권으로 확대시켰다.
무제의 기이한 출생
무제는 기원전 156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한경제 유계(劉啓)다. 마침 이 해는 경제가 등극한 해이기도 했다. 무제가 태어나기 전, 경제는 꿈에 붉은 돼지 한 마리가 구름 속에서 내려와 궁내의 숭방각(崇芳閣)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경제가 깜짝 놀라 깨어나 점을 치는 요옹(姚翁)을 불러 가르침을 청하니, 요옹이 말하기를 “이것은 아주 길하고 이로운 징조입니다. 이 숭방각에 반드시 국가의 운명을 주재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며, 그는 북방의 이, 적 등 이족을 평정하고 국운을 창성하게 하여 유씨 왕조 흥성 시기의 명주(明主)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제가 세 살 때 경제는 그를 무릎 위에 앉히고 황제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무제는 “이 일은 하늘이 안배하는 것이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날마다 황궁 안에서 살며 아바마마 앞에서 놀기를 원할 뿐, 결코 방자하거나 불경하여 아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제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더욱 기이하게 여겨 그에 대한 교육과 배양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며칠 후 경제는 유철을 다시 책상 앞으로 안고 가 어떤 책을 읽기 좋아하는지 묻고 상세히 말하게 했다. 유철은 복희 이래 성현들의 저작을 암송하기 시작했는데, 음양오행과 역대의 유명한 국책 논문을 포함하여 수만 자의 문장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암송했다.
무제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경제는 그의 총명하고 투철함이 범인을 초월함을 보고 이름을 유철로 고쳤다. 그의 모친은 비록 황후는 아니었지만(규정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황후의 아들이 우선적으로 황위를 계승한다), 경제는 최종적으로 그를 태자로 선택했다.
무제는 태자가 된 후 더욱 부지런히 학습했다. 그가 학습한 범위는 매우 넓어 말타기, 활쏘기, 경학, 문학을 포함했다.
무제 등극 후 초기의 개혁 좌절
기원전 140년, 16세의 한무제가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했다. 그는 야심만만하게 문경의 치의 성세를 계속 이어가고자 했으나 초기에는 저항에 부딪혔다. 이는 주로 당시의 태황태후 두씨, 즉 무제의 할아버지인 한문제의 황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가 황후가 된 때부터 무제가 즉위할 때까지 거의 40년이 흘렀기에 두씨 가문은 조정에서 세력이 아주 컸다. 더욱이 태황태후 두씨와 무제의 통치 사상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두씨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제창했다. 이는 한 초기에 백성을 쉬게 하는 정책의 기본적인 치국 사상이었으며, 국가의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문경의 치’라는 성세의 풍경이 출현하도록 촉진했다. 그러나 무제 시기에 이르러 분봉된 제후왕들이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일이 날로 많아졌으므로, 지방 세력을 누르기 위해 중앙 권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무제와 태황태후 두씨의 사상이 다른 부분이었다.
무제는 즉위한 후 자신의 정치적 방략(方略)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전국 관리들에게 중앙에 간언할 수 있는 현량방정(賢良方正)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명령했다.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들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도록 안배했는데, 예를 들어 외삼촌 전분(田玢)을 태위로 삼아 군권을 장악하게 했다. 동시에 많은 유생들도 그에게 중용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당시 추천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무제는 그를 접견해 치국에 좋은 대책을 탐색했다. 동중서는 자신이 발전시킨 유가 치국 사상의 한 세트를 무제에게 설명했고, 무제는 매우 찬탄했다. 동방삭(東方朔) 역시 그때 선발되었다. 그가 처음 한무제에게 상소했을 때 당당하고 장대하여 3천 개의 한간(漢簡 한 대 죽간)을 사용했으며, 한무제는 두 달 만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훗날 그는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다. 한무제를 따라 조정에서 관리로 있은 지 40여 년 동안 군신의 정이 있었다. 그는 한무제를 위해 계책을 낸 지낭(智囊) 인물이었으며, 더욱이 한무제에게 신선의 존재를 알려주었는데, 전제는 반드시 ‘도(道)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제는 이때 아직 두씨와 겨룰 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임명한 중신 조관(趙綰)이 두씨가 더 이상 조정 정사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제기했을 때 두씨를 격노하게 했다. 두씨는 무제에게 압력을 가해 막 실행하려던 일련의 개혁 조치를 폐지하게 하고, 그가 임명한 승상과 태위를 파면했다. 이어 두씨가 총애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중요 직위를 가로채 두씨의 명령을 따랐다. 이는 무제에게 타격이었으나 무제는 나이의 우세가 있었기에 이때부터 소침해지지 않고 오히려 예기를 기르며 때를 기다렸다.
4년 후인 기원전 135년, 두씨가 세상을 떠났다. 무제는 즉시 두씨의 사람들을 전부 파면하고 전분을 다시 중용해 승상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개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무제의 공적
앞서 언급했듯이 약 70년의 회복과 발전을 거쳐 무제가 즉위했을 때 천하는 이미 매우 부유했고 곡식과 물자의 비축이 상당히 충족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문제와 경제 시기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즉, 대내적으로는 각 지방 제후들이 중앙에 대항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한실(漢室) 천하의 장기적인 안정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대외적으로는 흉노가 한실 변경을 위협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밖으로 강토를 개척하여 진대(秦代)의 영역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의 무제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으며, 서한 왕조를 전성기에 도달하게 했다. 무제는 또 시(詩)와 부(賦)에 능하여 원래 문집 두 권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
대외 관계
무제 시기에는 대외 관계 및 변방 소수민족과의 관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흉노(匈奴)와의 전쟁이다.
흉노 전쟁과 북방 개척
일찍이 문제, 경제 시대에 흉노는 끊임없이 한실(漢室) 변경을 침범했다. 무위이치(無爲而治)를 강조한 문제와 경제는 백성들이 전쟁을 피하게 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방어하거나 화친하는 방법만을 취했을 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흉노는 여전히 자주 한조(漢朝) 북부 변경을 침범했다. 무제에 이르러 강력한 경제적 실력은 그가 대외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에 기원전 133년부터 무제는 끊임없이 군사를 파견해 흉노를 공격하고 흉노를 북쪽으로 쫓아내어 다시는 한족 지역에 위협을 주지 못하게 했다. 이외에도 무제는 장건(張騫)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 서역의 일부 국가들과 연합하여 흉노를 협공하게 했으니, 이는 서역 제국에 대한 한조의 종주(宗主) 지위를 확립하고 한조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기원전 133년, 30만 한군이 마읍(馬邑 지금의 산서 삭주朔州시) 일대에 매복하여 선우가 침입하도록 유인해 일거에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계책이 선우에게 간파되어 한군이 포위하기 전에 철수했다. 이때부터 흉노는 침범을 더욱 가중하여 한조 북부는 지금의 섬서 북부에서 요녕 서부 일선에 이르기까지 교란과 약탈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원전 129년부터 한군은 연속적으로 공격을 발동해 선후로 흉노의 백양(白羊), 누번왕(樓煩王)을 축출하고 ‘오르도스(河南地)’를 수복했다. 한조는 이곳에 삭방군(朔防軍 치소는 지금의 내몽골 항금기杭錦旗 북쪽)과 오원군(五原郡 치소는 지금의 포두시包頭市 서북쪽)을 설치하고 진시황 때 몽염(蒙恬)이 쌓았던 성새(城塞)를 수리해 국경을 다시 음산(陰山)산맥 일선으로 회복했다.
기원전 121년, 한군 주력이 서로(西路)로 출격하여 흉노 혼야왕(渾邪王)의 아들을 사로잡았다. 얼마 후 혼야왕은 투항하려 하지 않는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무리를 이끌고 한조에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한조의 영역은 하서주랑(河西走廊) 전체와 황수(湟水) 유역, 즉 지금의 청해호 동쪽과 기련산 동북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한조는 선후로 주천(酒泉 치소는 지금의 감숙 주천시), 무위(武威 치소는 지금의 감숙 무위시), 장액(張掖 치소는 지금의 감숙 장액시 서북쪽), 돈황(燉煌 치소는 지금의 감숙 돈황시 서쪽), 금성(金城 치소는 지금의 감숙 영정현 서북쪽)의 다섯 개 군을 설치했다. 원래 황수 유역에 모여 살던 강인(羌人)들은 더 서쪽 지역으로 쫓겨나 흉노와의 연락이 차단되었다. 한조가 하서주랑을 통제함에 따라 서역으로 통하는 대문이 활짝 열렸다.
일찍이 기원전 138년, 무제는 대월지(大月氏)를 불러들여 돈황, 기련산의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공동으로 흉노를 타격하기 위해 장건을 서역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왕복할 때 모두 흉노에게 구금되었기에 13년이 지나서야 장건은 귀국하여 복명할 수 있었다. 비록 대월지와 연락하려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장건이 친히 대완(大宛 지금의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분지), 강거(康居 지금의 카자흐스탄 발카시호와 아랄해 사이), 대월지와 대하(大夏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거치며 한조가 이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했다.
기원전 119년, 한군(漢軍)이 또 한 번 흉노를 대패시킨 후 무제는 장건을 다시 오손(烏孫)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손에 도착한 후 장건은 부사(副使)를 대완, 강거, 대하, 안식(지금의 이란 일대),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 등 국가에 사신으로 보냈다. 기원전 115년 장건이 귀국함에 따라 한조와 서역 및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교통이 이때부터 개통되었고, 외래 문화의 수입도 이때부터 시작되어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도 이때부터 기쁘고 슬픈 이야기들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조와 흉노의 서역 쟁탈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역은 대략 지금의 신강(新疆) 일대였다. 무제는 서역에 대해 몇 차례 군사 행동을 발동했는데, 가장 큰 규모는 십여 만의 병력, 십여 만 마리의 가축, 십여 만 명의 민공(民工)을 출동시켜 대완을 정복한 것이다. 교통선이 너무 길고 보급이 어려웠기에 한조는 비록 천산남로(天山南路)는 통제했으나 천산 이북(以北)은 자주 통제할 수 없었고, 그곳의 국가들은 여전히 흉노의 위협을 받아 감히 한조에 완전히 복종하지 못했다. 훗날 다시 여러 차례 전쟁을 거쳐 선제(宣帝) 신작(神爵) 2년(기원전 60년)에 이르러서야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천산북로(天山北路)를 완전히 통제하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했다.
무제의 흉노 전쟁은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흉노가 한에 주는 위협을 감소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조 서북 변방의 영토를 개척하여 한조와 서역 및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왕래를 통하게 했으며, 동서 문명 교류의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들은 너무 많은 피비린내 나는 기미로 가득 차 있었다. 반고의 《한서》 기재에 따르면 장군 위청(衛靑)이 흉노를 공격할 때 3천 명의 목을 베었고 훗날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이가 1만 명에 가까웠으며, 곽거병(霍去病)은 선후로 흉노인 8천 명의 목을 베고 3만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무제는 이를 책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포상했다. 이러한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학살한 행위는 무제의 명군(明君) 이미지에 어느 정도 손상을 주었다.
남부 개척
기원전 138년, 남방의 민월(閩越 지금의 복건성 일대)이 동구(東甌 지금의 절강 온주)를 포위 공격하자 동구가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무제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바다를 건너 구원하러 가게 하여 민월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도록 압박했다. 동구인들은 한군이 철수한 후 민월이 다시 쳐들어올까 두려워 장강과 회하 사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3년 후, 민월왕(閩越王) 영(郢)이 남월(南越)을 공격했다. 무제는 남월의 보고를 받은 후 군대를 보내 구원했다. 민월왕의 동생 여선(餘善)이 영을 죽이고 한군에 투항했다. 한군이 오래 주둔할 수 없었기에 무제는 여전히 민월국을 보존하고 여선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여선은 여전히 반복무상했으므로 기원전 111년 한조가 남월을 멸한 후 무제는 군대를 보내 민월을 공격해 점령했고 여선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민월인들 대부분은 장강과 회수 사이로 이주되어 현지는 거의 무인 지역이 되었다. 서한 후기에 이르러서야 잔류한 월인들이 점차 증가해 비로소 지금의 복주(福州)에 야현(冶縣)을 다시 회복했고, 지금의 절강 태주(台州)시 초강구(椒江區) 일대에 회포현(回浦縣)을 설립하여 회계군(會稽郡 치소는 오현, 지금의 소주시)에 예속시켰다.
서남쪽 변경을 개척하기 위해 대략 기원전 130년, 무제는 파(巴), 촉(蜀) 2군(각각 지금의 사천 동부와 중부에 상당)의 군사들을 징발해 북도(僰道 지금의 사천 의빈宜賓 서남)에서 장가강(牂柯江 지금의 북반강北盤江과 홍수하紅水河)으로 길을 닦게 하고, 새로운 건위군(犍爲郡)을 개설하여 치소를 북도에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이(西夷)’의 공(邛 지금의 사천 서창시西昌市 일대), 착(笮 지금의 사천 염원현鹽源縣 일대)의 우두머리들이 귀속을 청해오니 한조는 그 일대에 십여 개의 현을 새로 개설했다. 그러나 도로 건설 공사가 매우 간고한 데다 마침 흉노를 상대하느라 바빴기에 한때 새로 개설한 현의 일부를 취소하기도 했다.
기원전 122년, 한조는 ‘서남이’에 대한 개척을 회복했다. 몇 년 사이에 사천 서부고원과 운귀고원 위의 부족들인 공도(邛都), 착도(笮都), 염방(冉駹), 백마(白馬), 차란(且蘭), 야랑(夜郞) 등이 모두 한조 통치 하에 들어왔고, 무제는 이들 부족이 있는 지역에 새로 5군을 설치했다. 기원전 109년에는 전(滇)과 곤명(昆明) 이 두 부족의 지역에 익주군(益州郡 치소는 지금의 운남 진녕현 동쪽)을 건립하여 한조의 서남 국경은 지금의 운남 고려공산(高黎貢山)과 애뢰산(哀牢山) 일선까지 확장되었다.
영남(嶺南 오령 남쪽)의 통일 역시 이미 대세의 흐름이었다. 기원전 111년, 무제는 군대를 보내 남월과 민월을 멸하고 각각 군현을 설치했다.
이로써 무제의 남방에 대한 개척이 끝나고 한조 남부의 영역을 새로 확립했다.
동북부 개척
서한 초년, 중원 사람 위만(衛滿)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반도에 진입하여 자신의 정권을 건립했다. 이때 조선의 영역은 대략 지금의 요녕성 동부, 길림성 서남부와 한반도의 서북부를 포함한다. 기원전 109년, 무제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멸하고 현도, 낙랑, 임둔, 진번 4군을 설치했으니 관할 경계는 남쪽으로 지금의 한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평설
서한의 영역은 무제 후기에 극성에 도달했다. 이때 서한의 영역은 서북으로는 지금의 신강과 감숙 지역을 포함했고, 동북 방향의 판도는 현재 요동반도와 압록강, 혼강 일대까지 확장되었으며, 서남으로는 지금의 운남 고려공산과 애뢰산 라인에 도달했고, 남으로는 복건, 광동 경애(瓊崖)에 도달했다. 그러나 확장이 너무 빠르고 새로 설치한 군현이 많아 병력과 재력이 적응할 수 없었던 데다 일부 지방관의 가혹한 정치가 현지 민족의 반항을 일으켰기에 이후 일부 지역은 부득이하게 다소 수축되었다. 일부 국부적인 수축을 제외하고 서한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서한 말년까지 유지되었다.
이처럼 무제의 연이은 사방으로의 대외 정벌, 특히 흉노와의 20여 년간의 전쟁은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하여 서한의 쇠락에 복선이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