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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꿈에서 깨어나 (19) 유럽에서 시작해 계책으로 중국에 들어가

경사은(敬謝恩)

【정견망】

8. 공산 이론의 해악 3: 인류의 구도를 가로막아

아래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의 전체 역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해본다. 공산 마귀는 인류가 최종적으로 창세주의 구도를 얻는 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왔다. 유구한 역사 이전부터 이미 창세주께서 미래에 법을 전하시는 지점, 즉 우주의 최종 시각에 세상 사람과 우주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법을 전하시는 곳이 중국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마귀가 공산주의를 만든 진짜 배치는 바로 중국을 뿌리로 삼는 것이었다. ‘중국을 뿌리로 삼는다(以中國爲根)’는 것은 두 가지 함의를 포함한다.

첫째는 내용 방면이다. 공산주의의 핵심 내용은 사실 중화문화의 내용과 대비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귀는 중화 전통문화의 실질적인 내용에 근거하여 그에 상응하게 공산주의의 핵심 내용을 확정했다.

둘째는 실천 방면이다. 공산주의는 실천 중에서도 중국을 점거하는 것, 즉 중국인을 겨냥하여 전통 사상을 파괴하고 전통문화를 소멸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수립하는 것을 근본 과제로 삼았다.

고해상도

공산주의 운동 역사 중에는 ‘소련·동구권 격변’이라는, 즉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갑자기 공산주의 깃발을 포기하고 색깔을 바꾼 역사적 격변이 존재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의 많은 사람은 소련을 공산주의의 핵심 역량이자 주요 역량으로 여겼다. 소련·동구권 격변 이후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 역량이 거의 사라졌으며, 중국 등 몇몇 ‘공산주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실질은 반드시 공산주의가 아닐 수도 있는’ 국가들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마귀가 인류에게 만들어 준 가상일 뿐이다. 마귀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의 최종 본질은 ‘인류의 구도를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고, 창세주께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법을 전하기로 미리 안배하신 곳이 중국이므로, 이러한 파괴를 완수하기 위해 가장 근본적인 것은 공산주의로 중국을 점거하여 중국 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중국인을 조종해 창세주께서 법을 전하실 때 더 많은 나쁜 짓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귀의 배치에 따르면 진정한 ‘공산주의 주인공’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다.

(1) 유럽에서 발원해 공산 체제를 만들고 선서와 결합시켜 사악에 대한 숭배를 강화

비록 마귀의 공산주의 안배는 중국을 뿌리로 하지만, 중화문화가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도덕을 중시하는 강렬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귀는 중국에서 직접 공산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귀는 유럽 국가가 많고 종교 신앙이 각기 다르며 교파가 난립하고 역사적 쟁점이 복잡하다는 등의 특징을 이용해 유럽에서 먼저 사탄교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마르크스의 손을 빌려 사탄교의 교의를 공산주의로 탈바꿈시켰다. 이때부터 유럽은 형식상 전 세계 공산주의의 발원지가 되었다.

공산주의는 사실 이론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막 생겨난 후 ‘국제 공산주의’를 기치로 제1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을 잇달아 성립하며 즉시 물질적 실상을 갖춘 첫걸음을 시작했다. 이른바 물질적 실상을 갖추었다는 것은 사회 조직의 형식을 취해 그 당을 드러내고 육성하며, 조직적 수단을 통해 그 구성원들을 속이고 강화하여 당도들이 시종일관 ‘폭력 혁명의 과학적 공산주의’를 지도 사상으로 견지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공산 체제 초기인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공산 체제가 독소를 배양한 주요 수단은 이른바 ‘공산주의 이상(理想)’이었다. 산업혁명이 낳은 경제 형태, 즉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 부른 경제 형태가 초기 발전 단계에서 일부 추악하고 잔인한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아직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추악하고 잔인한 측면을 포착해 폭력 혁명의 공산주의를 선동했고 일부 사람들의 추종을 얻었다. 추종자들이 공산주의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업’으로 여긴 것은 그들의 오해였으며, 그보다 더 주요한 것은 마르크스와 마귀가 실시한 기만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사람들이 공산당에 선서하게 했으나 이는 사실 마귀에게 선서한 것이다. 사실상 이미 마귀에게 선서했기에 사람들은 시비를 명확히 가리는 능력이 더욱 가려졌고, ‘공산주의의 위대한 이상’ 및 ‘마르크스주의 기본 원리’에 대한 숭배를 나날이 심화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이론 배후가 대표하는 폭력론, 무신론 등 사악한 사상 노선에 대한 숭배를 심화했다.

고해상도

(2) 러시아에서 폭력으로 정권을 찬탈해 첫 공산 국가를 세우고 맹렬한 살육으로 독소를 배양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배운 후 러시아로 돌아가 공산주의 볼셰비키를 결성하고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뒤 소련을 건설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체제 국가다. 공산주의 정권 모델은 레닌과 스탈린에게 역사상의 차르나 세계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대통령, 총리 등을 훨씬 능가하는 전례 없는 거대한 권력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정권을 획득한 후 레닌과 스탈린을 우두머리로 하는 공산당원들은 이러한 정권 모델을 유지하여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는 정권을 빼앗지 못하도록 보장해야 했다. 이것이 공산 체제를 수호하는 주요 추동력이 되었다.

또 다른 힘은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공유제를 내세워 정권을 통해 모든 주요 생산 수단을 장악하고 사회의 모든 재화와 자원을 점유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가 정권이 임명한 관리자나 관료 시스템이 이 모든 자원의 실제 점유자이자 수혜자가 된다. 이러한 관료 시스템 자체와 관료들은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공유제 사회 체제를 수호해야 했다. 이것이 공산 체제를 유지하는 또 다른 동력이다.

구체적인 실행 과정에서 스탈린은 내부 특무 시스템을 발전시켜 관료와 국민이 반드시 스탈린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보장했다. 이 특무 시스템은 스탈린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도 계승되었으며,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주요 역량이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정권 탈취, 정권 공고화, 스탈린 등의 기득권 지위 공고화라는 목표를 위해 소련에서 수많은 군사 행동과 정치 숙청 등을 단행했으며, 당시 소련에서 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비정상적으로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거대한 인명 피해를 통해 마귀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악한 속성과 공산주의 운동의 사악한 속성을 더욱 강화하고 공고히 했다.

(3) 백 년 국치로 기초를 다지고 레닌의 입에 발린 말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에 들어가

1840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 정부는 대외 전쟁에서 연전연패했고, 패배할 때마다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모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중화문화에는 애국 전통이 있었기에 많은 지식인은 ‘위대한 대청제국이 왜 패배했는가’를 고심하며 나라를 튼튼히 하고 나라를 구할 길을 찾았다. 그러나 거듭된 탐색은 거듭된 실패로 돌아갔다. 초기에는 무기 체계의 낙후가 군사적 패배의 원인이라 여겨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벌였다. 양무운동을 통해 중국은 방대한 함대를 구축했고 해군력 수치는 세계 전열에 위치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해전에서 뜻밖에 일본에 패하고 말았다. 뼈아픈 반성 끝에 법률 제도의 낙후가 국가 낙후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백일유신(百日維新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일부 정책만 보존되어 표면적으로는 열강과 유사한 법률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수치와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1900년 중국 북방에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민간 무장 세력이 나타났다. 청 정부는 의화단을 믿고 의지하며 여러 나라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고, 선교사와 부녀자, 어린이를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의화단의 무차별 살육을 방조했다. 청 정부의 태도는 각국 연합군의 침공을 불렀고 북경이 함락되자 청 정부는 즉시 도주하며 의화단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버렸다. 이후 청나라 정부는 “중화의 물력을 헤아려 우방국의 환심을 사겠다”며 여러 나라와 《신축조약》을 체결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더 큰 굴욕이었다.

1906년 일본과 러시아가 중국 동북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을 때 청 정부는 본토에서 벌어지는 이 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포했다. 지식인들은 청 정부가 사실 인민을 아끼지도 대표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삼민주의(三民主義) 혁명으로 이어졌다.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황제가 평화적으로 퇴위하면서 중화민국은 헌정(憲政)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헌정을 실시함으로써 세계 다른 나라들과 일치하는 듯 보이자 많은 사람이 혁명이 성공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많은 나라는 중국을 평등한 국가로 대우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인민과 애국 지식인들에게 다시 한번 강렬한 타격이 되었다.

이처럼 1840년부터 1920년 전후까지 약 80년간 반복된 탐색과 좌절을 겪으며 중국 지식인들은 애국심으로 인해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많은 사람이 다급한 나머지 아무 처방이나 구하려 했고 온갖 주장을 제기했다. 공산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사람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숨에 중국에 들어왔으며, 매우 아름다운 형상을 띠고 일부 사람들에게 ‘치국의 양약(良藥)’으로 여겨졌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중국에서 좋은 인상을 얻었을까? 그것은 러시아의 중국 침략 역사와 관련이 있다. 원래 유럽 국가였던 러시아는 동방으로 확장하며 청조 시기 중국의 많은 영토를 침탈했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1917년 공산 마귀는 레닌을 도구로 삼아 러시아를 침입해 볼셰비키를 세우고 정권을 찬탈했다. 이후 레닌은 러시아와 중국 간의 모든 영토 조약을 폐기하고 점령한 모든 중국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선포했다. 훗날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완전히 빈말이 되었지만, 당시 레닌의 이러한 표명은 중국인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청말(淸末)의 일련의 국치 조약들과 대비되어, 중화민국이 막 건국되어 기반이 불안정하던 때에 레닌의 말은 더욱 귀중하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은 레닌이 채택한 ‘공산주의’가 반드시 가장 아름다운 것일 거라 믿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로써 단숨에 중국으로 밀려 들어와 한때의 풍조를 장악하게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