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황하를 다스려 20년 동안 천하를 평안케 해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진시황이 중화제국을 창립한 이래, 거의 모든 대일통 왕조마다 웅재대략을 지닌 명군성주(明君聖主)가 탄생해 천하 백성들을 위해 경제, 군사, 문화의 전성기를 열거나 기틀을 닦았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에포크타임스 제작)
속담에 이르기를, 난세에는 병사를 다스리고 성세(盛世)에는 물을 다스린다고 했다.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나오고, 황하가 평온해지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은 역대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안녕을 도모하는 이상이었다. 갈단의 난을 평정한 후 청 왕조에 태평하고 안정된 국면이 나타나자, 강희제는 국정의 주요 에너지를 다시 하천을 다스리는 큰일에 쏟을 수 있었다.
강희 38년(1689년)부터 황하를 다스리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던 단계에서 황제가 직접 하천 공사(河工)를 관리하는 단계로 진입했으며, 강희제 후기 네 차례 남순(南巡)의 장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강희제는 치하(治河)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상류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여겼다. 바로 “상류가 다스려지면 하류는 저절로 다스려진다”[1]는 생각이었다. 상류의 하천은 황하가 역류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기도 했다. 홍택호(洪澤湖) 수위가 낮고 회하(淮河)의 기세가 약하면 황하의 수세를 버티지 못하고 황하와 함께 운하로 흘러 들어갔는데, 이로 인해 하류 지역에 범람 피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강희제의 다스림 이념은 “회하의 물 3할은 운하로 넣고 7할은 황하로 넣어야만 운하의 물길이 안정될 수 있다”[2]는 것이었다.
직접 공정을 관리
“이제 여섯 곳의 차단 댐을 막아 홍택호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회하의 기세가 황하와 맞먹게 하니, 운하에 역류할 우려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하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원인이다.” ——강희제

강희 38년(1689년)부터 황하를 다스리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던 단계에서 황제가 직접 하천 공정을 관리하는 단계로 진입했으며, 강희제의 후기 네 차례 남순의 장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은 청나라 왕휘 등이 그린 《강희남순도권(康熙南巡圖卷)》 일부.(공유 영역)
38년, 강희제는 세 번째 남순을 전개하여 하천 연안 공사를 중점적으로 고찰하고 네 가지 구체적인 조치를 제시했다.
첫째는 황하 물길을 곧게 펴서 모래를 씻어내는 능력을 강화하고 수위를 낮추는 것,
둘째는 황하와 회하가 만나는 청구(淸口)를 동쪽으로 옮겨 황하가 회하로 역류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
셋째는 잘못 건설된 황하 차단 댐을 철거하여 급류가 모래를 씻어내게 하는 것,
넷째는 망도하(茫稻河)와 인자하(人字河)를 통해 하류의 물을 장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환궁하는 길에 강희제는 직접 청구 부근의 황하 남안에 올라 나무 말뚝을 박고, 이곳에서부터 동쪽으로 배수 댐을 쌓아 역류를 방지하라는 어지(御旨)를 내렸다. 이 댐은 어패(禦壩)라고도 불린다.
청구를 옮기는 문제에 있어서 강희제는 더욱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발휘했다. 그는 이전에 하천을 관리한 이들이 만든 하천 지도가 평면적이어서 지세와 수위의 높낮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서양의 입체 기하학 지식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입체적인 청구 이전 모형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니 하천의 흐름과 수세가 한눈에 들어와 더욱 실제적인 치수 방안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천 총독인 우성룡(于成龍)이 병이 중하여 강희제가 정한 조치들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후임인 장붕핵(張鵬翮)이 강희제의 가장 유능한 조력자가 되었다. 강희제는 장붕핵에게 오늘날의 황하 치수는 옛사람과 다르며 하천의 상황이 이미 크게 변했으니, 반드시 몸소 실행하고 상세히 고찰해야만 정확한 다스림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여러 차례 훈계했다.
장붕핵이란 인물은 본래 수리(水利)에 정통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직무에 정성을 다했다. 강희제의 지시에 따라 차단 댐을 철거하고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을 깊게 팠다. 그 후 황하에 다시 대홍수가 발생하여 큰물이 한 달 넘게 빠지지 않았다. 강희제는 각 공사의 홍수 저지 능력을 면밀히 살폈고, 장붕핵도 밤낮으로 제방을 지키며 곳곳의 위험 상황을 순찰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몇몇 제방에 작은 위험이 있었으나 둑이 터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강희제 군신이 수십 년간 노력한 끝에 하천 공사는 마침내 대홍수의 시험을 견뎌냈다. 강희제의 지혜와 장붕핵의 행동력이 결합하여 역사에 새로운 황하 치수의 전설을 남겼다.
42년(1703년) 초, 강희제는 다시 두 달간 네 번째 남순을 행하며 완공을 앞둔 공사를 시찰했다. 결과는 당연히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강희제는 장붕핵에게 두 편의 시문을 내려 그의 공적을 가송했다. 하나는 《하신잠(河臣箴)》이다.
“자고로 물의 환난은 오직 황하가 가장 컸도다.
다스림에 방도가 있으면 백성에게 해가 없으니,
우임금이 아홉 물길을 소통시켜 평안함이 그에 의지했네.
한당(漢唐)에 이르러서도 범람이 끊이지 않았고,
점차 남쪽으로 옮겨져 송원 때에 더욱 넘쳤도다.
지금의 하천은 옛날과 다르니 의논함이 같을 수 없네.
옛날엔 하천 방어에 그쳤으나 지금은 조운까지 겸하노라.
이미 환난을 없앴으니 다시 그 힘을 빌리지만,
이 한 지방의 농사짓는 백성들이 직분을 잃었도다.
물바다의 백성들 슬픔이 지극하니, 이 큰 임무를 맡아 어찌 게으름을 용납하랴.
개미구멍에 금둑이 무너지게 하지 말고, 백성들의 집이 교룡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
헛되이 국고를 탕진하여 형세가 종일 버티기 어렵게 하지 말고,
헛되이 삼지창과 삽을 움직여 공적이 부실하게 하지 말라.
마땅히 일이 생기기 전에 이끌어 내는 계책을 다하고,
때가 늦은 뒤에 깁고 꿰매는 술책을 후회하지 말라.
사사로움으로 공의를 배반하지 말고,
수고로움을 물리치고 편안함을 쫓지 말라.
오직 청렴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생각을 모아 이익을 넓히라.
그러면 환난이 제거되지 않음이 없고 공적은 역사에 빛나리니,
나의 하천 관리들에게 보이노니 공경히 힘쓸지어다.”
다른 하나는 《남회황성(覽淮黃成)》이라는 시다.
“굽이굽이 흐르는 회하와 황하 다스린 지 오래되었으니,
풍진 속에 몇 번이나 다스림의 방도 전했던가.
구곡(九曲)은 예부터 천하에 험하다 했으나,
사방에서 온 물은 진실로 백성들의 상처였네.
맑은 물로 탁한 물 이끄는 일 부지런하고 신중해야 하니,
기세를 나누고 물길 여는 것은 황폐함에 있지 않네.
비록 물결이 잔잔해졌다고 아뢰어 짐의 근심을 덜었으나,
앞을 경계하고 뒤를 잘 마무리해 금성철벽을 만들라.”
“殷曲久矣理淮黃,幾度風塵授治方。
九曲素稱天下險,四來實爲兆民傷。
使清引濁須勤慎,分勢開流在不荒
雖奏安瀾寬旰食,誡前善後奠金湯。”
강희제는 또한 ‘담박녕정(澹泊寧靜)’이라는 편액을 어필로 써서 장붕핵에게 특별히 하사했다. 네 번째 남순은 마침 강희제의 쉰 살 생일과 겹쳤는데, 이때 온 세상이 평안하고 민생이 풍요로운 데다 하천 공사까지 성공했다는 경사가 겹쳐 강희제의 기분은 매우 즐겁고 상쾌했다. 이에 그는 천하에 은혜를 베풀고 온 백성이 함께 성세의 번영과 아름다움을 축하하게 했다.
만년의 치수
“황상께서 백성들이 수해를 입는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여러 번 친히 하천가에 임하시어 황하와 회하를 수리하는 방략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치수 공사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고 다시는 범람하고 둑이 터질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강남 백성들

청조 사수(謝遂)의 《방당인대우치수도(仿唐人大禹治水圖)–당나라 사람의 대우치수도 모방》 일부 (공유 영역)
2년 후 하천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쉰 살이 넘은 강희제는 다섯 번째 남순을 행하여, 황하 중류 남쪽 입구의 개축과 전체 공사의 사후 관리 업무를 친히 시찰했다. 도중에 박학한 강희제는 《춘일전간(春日田間)》, 《남순사(南巡詞)》, 《황선기(皇船記)》 등의 시문을 지었다. 가는 길마다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가에 꿇어앉아 맞이했는데,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으며 매일 감사를 표시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아 그 광경이 매우 장관이었다.
강남 경내에 도착하자 향신(鄕紳)과 군민(軍民)들이 어가를 공경히 맞이하며 아뢰기를, 강희제가 백성들이 수해를 입는 것을 걱정하여 마다하지 않고 여러 차례 지방을 순시하며 다스림의 방안을 연구한 이러한 백성을 위하는 정신은 “고금에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강희제는 흔쾌히 여기면서도 이때가 마침 봄철 농번기라 자칫 농사를 망칠까 우려하여, 지방관에게 분부해 백성들이 감사를 표시하러 오는 일을 면제하게 했다.
강희제는 고가언(高家堰)의 돌 제방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장붕핵을 불러 물었다. 장붕핵은 기존의 ‘풀 제방(草壩)’에 확신을 갖고 있어 돌 제방 공사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강희제가 말하기를, 2~3년이 지나면 풀잎이 썩어 홍수를 견디기 어려우니 반드시 “밤낮으로 신중히 지켜야 한다”고 했다. 강희제는 계속해서 고심하며 그를 훈계했다. “그대들은 단지 청구(淸口)의 물이 흘러가는 것만 보고 큰 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방어할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만약 고가언의 하천 물이 범람하면 황하는 반드시 다시 역류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가언은 요긴한 곳이니 반드시 신중히 방어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3]
그 후 강희제는 혜제사(惠濟祠) 부근에 이르러 주변 제방을 친히 살폈다. 이곳은 5~6년 전만 해도 용솟음치는 황하 물이 거의 제방 높이까지 차올랐던 곳이다. 이제 치수를 거쳐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흐르며 황하의 수세를 막아내니, 황하는 제 물길 속에서만 도도히 흐르고 제방은 수위보다 한 장(丈) 넘게 높았다. 강희제 군신의 수십 년 치수가 비로소 탁월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에 강희제는 제방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러 하천 관리들과 치수의 경험을 회상하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이 형세를 보니 짐의 하천 공사가 크게 성공했구나. 짐의 마음이 매우 즐겁다!”[4] 그는 또한 《양가장신개중하득순풍관민거만영이수(楊家莊新開中河得順風觀民居漫詠二首)–양가장(楊家莊)의 새로 개통한 중하(中河)에서 순풍을 받아, 백성들의 집을 구경하며 흥에 겨워 읊은 두 수》를 지었는데 그중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봄비 내리기 시작하니 버들가지 살랑이고,
고기잡이배 저녁 노래 부르며 시간은 흐르네.
조정에서 늘 회하와 황하 일을 염려하더니,
오늘날 하천이 평온해졌음을 천하가 아는구나.”
春雨初開弄柳絲
漁舟唱晚寸陰移
廟堂時注淮黃事
今日安瀾天下知
이 시는 강희제의 즐거운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2년이 지난 강희 46년(1707년), 하천 관리들이 고가언을 보호하기 위해 홍택호 부근에 별도의 물길을 낼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으며 강희제에게 친히 살펴봐 주실 것을 주청했다. 당시 강희제는 쉰 살이 넘어 더 이상 대중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으나, 하천 공사가 모두 강희제의 결정에 달려 있었고 대신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여섯 번째 남순을 결정했다.
청구에서 강희제는 물길을 낼 예정이었던 유회투(溜淮套) 공사 현장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곳의 지세가 매우 높아 비록 하천을 뚫더라도 물이 청구로 흐를 수 없음을 발견했다. 하물며 새 물길이 묘지(墳塚)를 지나게 되어 백성들의 삶에도 침해가 되었다. 강희제는 즉시 공사를 중단하라는 어지를 내렸다. “이 하천은 절대로 뚫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장붕핵과 여러 하천 관리들을 엄히 꾸짖었다.
동시에 강희제는 다스리는 법을 제시했다. “홍택호의 출구를 준설해서 넓고 깊게 만드는 편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맑은 물이 순조롭게 흐를 것이다.”[5] 그는 또한 다른 공사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건의를 내놓고서야 경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10여 년 동안 황하, 회하, 운하는 제 물길을 따라 평온하게 흘렀으며, 설령 홍수가 발생하더라도 하천 관리들의 조심스러운 방어 속에 각 제방은 큰물의 시험을 견뎌내며 국가의 기틀을 보장했다.
강희 60년(1721년), 고령이 된 강희제는 여전히 치수의 큰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황하는 관계가 가장 크다. 원명(元明) 시기에는 자주 둑이 터져 오늘날처럼 20여 년간 평온한 적이 없었다. 비록 하천 공사가 성공했으나 ‘이미 다스려진 때에 다스림을 도모하고, 이미 평안할 때 평안함을 보존해야(圖治於已治, 保安於已安)’ 한다. 그대들은 계속해서 순찰을 강화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6]
혼하영정(渾河永定)
“관리가 청렴하지 못함은 백성에게 해가 되고, 하천 물이 맑지 못함도 백성에게 이롭지 않으니, 천하의 혼탁한 것들이 모두 이와 같다.” ——강희제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며 백성을 사랑한 강희제는 40여 년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초심을 잊지 않으며 치수를 위해 수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하천이 맑고 바다가 잔잔한 성세의 풍경을 창조했다. 사진은 청 서양(徐揚)이 그린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 일부.(공유 영역)
황하와 회하 및 운하를 다스리는 것 외에도 강희제는 다른 하천의 다스림 역시 매우 중시했다. 그중 영정하(永定河)는 강희제 치수 생애의 또 다른 걸작이라 할 만하다.
영정하의 옛 이름은 ‘무정하(無定河)’로 태행산에서 발원하여 내몽골, 산서, 하북, 북경 등지를 흐르는데 명대(明代)부터 ‘혼하(渾河)’라 불렸다. 상류는 상간하(桑幹河)이고 북경을 흐를 때는 노구하(盧溝河)라고도 했는데, 물살이 급하고 많은 진흙과 모래를 실어 날라 하천 바닥이 심하게 퇴적되어 하류의 물길이 자주 바뀌었다. 이 때문에 이 강은 ‘무정하(정해진 물길이 없는 강)’, ‘작은 황하’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 강은 보정부(保定府) 남쪽의 황하 물과 한데 모여 자주 폭등하고 범람하여 경성의 조운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안의 고을에도 재앙을 가져왔다. 강희 37년(1698년), 강희제는 어지를 내려 관리들이 실지를 조사하고 다스림의 조치를 수립하게 함으로써 혼하의 치수를 시작했다.
그해 우성룡은 명을 받들어 180리에 달하는 제방을 쌓고 145리의 물길을 준설하여 혼하의 물을 바다로 이끄는 공사를 마쳤다. 강희제는 친히 혼하를 ‘영정하(永定河 영원히 물길이 고정된 운하라는 의미)’라 하사하고 묘와 비석을 세워 받들게 했다. ‘영정’이라는 두 글자는 강희제 치수의 원대한 포부와 뜻을 잘 보여준다.
38년, 강희제는 영정하 제방을 노구교(盧溝橋) 남쪽까지 친히 순시했다. 그는 하천 총독 왕신명(王新命)에게 지시했다. “이 강은 정해진 성질이 없고 물살이 급하며 모래가 쌓이기 쉬우니, 수위가 높아지면 제방이 상대적으로 얕아져 물이 넘치기 쉽다.” 그러면서 방략을 제시했다. 물길을 깊게 하고 좁혀서 세차게 흐르며 모래를 씻어내는 기세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하천 물이 길을 따라 평온하게 흘러 범람할 우려가 없게 된다. 강희제는 또한 양안의 하천 방어 공사를 반드시 정성껏 쌓고 하나하나 검토하라고 간곡히 훈계했다.[7]
이어 강희제는 다른 몇몇 공사 현장을 시찰했는데, 곽가무촌(郭家務村)의 제방 위에서는 직접 기구로 측정하며 치수 계획의 타당성을 분석하기도 했다. 강희제는 실무적인 정신으로 영정하의 거의 모든 제방을 두르 다녔으며 실제 상황에 맞춰 구체적인 지도와 계획을 내놓았다.
그 후로도 강희제는 영정하 공사의 진척 상황을 계속 살피며 여러 차례 현장을 시찰했다. 39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수축 공사가 끝났다. 2년 후(1702년), 강희제는 영정하를 다스린 방법이 매우 성공적인 것을 보고 이 법에 따라 황하를 다스리려 했다. 55년(1716년)에 이르기까지 영정하는 여전히 제방이 견고하고 흐름이 안정적이었으며, 과거 연안의 진흙 마을이었던 곳은 높은 건물과 논밭으로 변했다. 백성들은 편안히 거주하며 즐겁게 일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진정한 영구적 안정을 실현했다.
강희제는 평생 하천 업무에 마음을 두었으며 치수를 군사와 대등하게 중요한 치국의 대사(大事)로 여겼다. 그는 일대(一代)의 명군(明君)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리 전문가이기도 했다. 하천 관리로는 전문가를 선발하여 오직 재능에 따라 임용했고, 점검과 검수는 여섯 차례나 강남을 내려가 세밀히 살피고 두루 방문했으며, 수축 방략은 친히 지시하여 엄격하고 치밀하게 했다. 특히 남순 과정에서 직접 제방에 오르고 먼 길을 걸으며 일심으로 백성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며 백성을 사랑한 강희제는 40여 년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초심을 잊지 않으며 치수를 위해 수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하천이 맑고 바다가 잔잔한 성세의 풍경을 창조했다. 강희제는 대우(大禹) 이후 치수의 공적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긴 또 한 명의 군주가 되었다.
주석:
[1][2] 《강희조실록》 권190: 강희 37년 12월 신축조.
[3][4] 《강희조실록》 권219: 강희 44년 윤4월 계묘조.
[5] 《강희조실록》 권227: 강희 46년 2월 계묘조.
[6] 《강희조실록》 권291: 강희 60년 4월 경자조.
[7] 《강희조실록》 권194: 강희 38년 10월 갑술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8/n12144105.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