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대내 정책
무제는 대외로 강토를 개척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도 개혁을 시작했다. 낡은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무제가 줄곧 전력으로 추구한 바였다. 무제 원삭(元朔) 원년의 조서에는 “짐이 듣건대 천지가 변하지 않으면 시화(施化)가 이루어지지 않고, 음양이 변하지 않으면 사물이 번창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원삭 6년 조서에는 또 “오제(五帝)는 예를 서로 반복하지 않았고, 삼대(三代)는 법(法)을 달리했다”라고 했다.
개혁의 목적은 당연히 백성들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광(元光) 3년, 동중서가 책론 세 편을 올리니 역사에서는 이를 ‘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 부른다. 무제가 그를 접견하여 묻기를 “삼대가 천명을 받은 상서로운 징조는 어디에 있는가? 재이(災異)의 변화는 무슨 인연으로 일어나는가? 성명(性命)의 정(情)은 혹 하늘에 달렸거나 장수함에 있고 혹 인자함에 있거나 비루함에 있으니, 함께 일컫는 것을 익히 들었으나 그 이치를 명백히 알지 못하겠노라. 바람이 흐르듯 명령이 행해져 경솔함과 간사함이 고쳐지고 백성들이 화락하며 정사가 밝게 펼쳐지게 하며, 어떻게 닦고 어떻게 정돈해야 단 이슬이 내리고 온갖 곡식이 풍성하며…… 덕택(德澤)이 넘쳐흘러 평안함이 외방에 베풀어지고 뭇 중생에게 미치겠는가?”라고 했다.
의미는 즉, 하상주 삼대가 천명을 받은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천지 사이의 재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사람 수명의 장단, 사람 성품의 선악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가르치고 다스려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명령이 행해지고 금지가 전해지며 정사가 상화(祥和)롭고 오곡이 풍성해 천하 백성들이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은 그가 국가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매우 원대하게 고려했음을 설명한다. 그가 탐색하고 사고한 것은 한때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인 다스림과 평안이었다.
치국 사상에서 무제는 동중서의 ‘백가를 몰아내고 유술을 독존’하라는 주장을 채택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지방의 제후 세력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은 유가를 독존하고 기타 백가 학설을 폐지할 것을 강조하며, 군왕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임을 강조한다. 이외에도 인정(仁政)을 실시할 것과 ‘덕주형보(德主刑輔 덕을 주로 하고 보조적으로 형벌을 시행)’를 강조한다. 이는 강온이 겸비된 치국 방침으로, 무제에게 채택된 후 이로써 한조 다른 황제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지도 사상이 되었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제가 구체적으로 취한 조치는 우선 재상권을 약화시킨 것이다. 당시의 승상은 문무백관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실권이 대단히 컸기에 황제가 때로는 승상의 권력보다 크지 못했으니, 이는 황제들이 용인할 수 없었다. 무제는 승상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있었는데, 원래 승상을 맡던 이들이 모두 개국 공신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늙었거나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었다. 무제는 이 유리한 시기를 이용하여 수많은 유생들로 하여금 원로들을 대신하게 하여 국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는 동시에 승상을 타격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124년, 무제는 평민 출신의 유생 공손홍(公孫弘)을 발탁해 승상을 맡게 했으니, 이로써 이전에는 항상 귀족들이 승상을 하던 관례를 바꾸었다.[역주: 이전까지 승상은 반드시 제후의 반열에 있는 고위 귀족 중에서만 선발했고 그러다 보니 인재풀이 적었다.]
이어 제후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했다. 내용은 주로 다음을 포함했다. 제후왕의 왕위는 적장자(嫡長子)가 계승하는 외에 ‘추은'(즉 은혜를 널리 베풀어 더 많은 사람이 특권을 누리게 함)의 형식으로 다른 아들들을 원래 후국(侯國) 내에서 분봉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후국은 원래 왕국의 제한에서 벗어나 지역이 독립되며, 정치적 권력도 기본적으로 박탈당해 현지 군현 관리의 관할을 받게 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 독립적이었던 지방 왕국들이 자동으로 권력을 국가에 상납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지방의 왕과 후(侯)는 오직 물질적인 특권, 즉 자기 봉지의 조세를 향유할 뿐 이전의 정치적 특권은 없어졌다. 이렇게 하여 매우 자연스럽게 이전의 제후들이 중앙정부와 대항하던 문제를 해결했다.
이외에도 황제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무제는 어사(禦史)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지방의 호강(豪强 토착 세력), 관리들을 감독하게 했다. 기원전 106년, 무제는 전국을 13개 감찰구로 나누고 각 구를 부(部)라 불렀으며, 부마다 한 명의 자사(刺史)를 파견했다. 이중 수도권을 관할하는 자사는 사예교위(司隸校尉)라 불렀고 기타 12개 주는 모두 자사라 불렀다.
자사는 주로 여섯 가지 방면에서 지방을 감독했으니 즉 ‘6가지 일을 조사’했다.
첫째는 호강이 제한 수량을 초과하여 전지를 점유하고 세력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것,
둘째는 군수가 조서와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백성을 속이고 억압하며 지방에서 횡포를 부리고 탐오부패하는 것,
셋째는 군수가 안건을 심판할 때 백성을 가엽게 여기지 않고 사람 목숨을 해치며 마음대로 상벌을 주어 백성들의 시기를 받는 것,
넷째는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할 때 공평하지 못해 현능(賢能)한 사람을 배척하고 소인을 기용하여 관리를 삼는 것,
다섯째는 군수의 자제들이 세력을 믿고 사람을 기만하며 군수 역시 자제들을 위해 부하에게 청탁하여 부하로 하여금 법을 굽혀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
여섯째는 군수가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고 지방의 호강들과 결탁하여 정경유착을 하며 국가 이익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자사의 역할은 주로 군수와 지방의 호강들이 서로 결탁하여 중앙에 대항함으로써 원래 동성왕들이 황제를 범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국면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자사는 중앙에 비교적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관리를 추천하는 책임도 맡았으며 정적이 좋지 못한 자는 파면할 수도 있었다.
자사의 지위는 당시에 상당히 높아 흠차대신(欽差大臣)에 상당했고 더욱이 상임직이었으며 지방에 자신의 업무 장소도 있었다. ‘자사’ 이름 자체로 말하자면 사실 그것은 이미 이러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었다. ‘자’는 즉 자거(刺擧 몰래 죄상을 알아보다)로서 불법을 탐지하여 보는 것이고, ‘사(史)’는 황제가 파견한 사자를 가리킨다.
동시에 유용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무제는 한편으로는 한 초기의 찰거제(察舉制)를 계속 추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찰거의 범위를 확대했다. 찰거제는 추천제라고도 하며 주로 각급 관리들의 추천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점은 추천되는 이들이 대개 추천자의 친척이나 친구여서 진정 좋은 인재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무제는 찰거의 범위를 확대했다.
한초 찰거제에는 현량(賢良)과 효렴(孝廉) 두 과만 있었으나 무제는 유학(儒學), 명법(明法 즉 법령을 밝게 익히고 통달함) 및 덕행(德行), 학술(學術) 등 과를 증설했다. 이외에도 무제는 관리와 백성들이 상소하여 정사를 평론하는 것을 허용했다. 무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덕이 있고 재능이 있는 인재를 최대한도로 선발해냈다.
무제는 또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성에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이 역시 중국 역사상 국가에서 설립한 최초의 대학교로 유가 경전을 주요 강의 내용으로 삼았으며, 학생은 국가가 선발한 뛰어난 청년들과 각지 군국(郡國 군 및 제후국)이 추천한 청년들이었다. 태학에서 1년간 학습한 후 다시 시험을 쳐서 성적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관리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귀족 가문이 아닌 평범한 유생들이 대량으로 국가 관리 체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제 방면에서 무제는 국가의 경제에 대한 관리 권력을 강화하고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실행했다. 구체적인 조치는 다음을 포함했다.
첫째, 거대한 이익이 남는 소금, 철, 술 등 백성들의 생활 및 국가 안정과 관계되는 상품의 전매권을 중앙으로 거두고, 제조, 야련(冶煉), 양조(釀造)에서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가가 책임을 지고 경영하도록 하여 염관(鹽官)과 철관(鐵官)을 설립했다. 경제 명맥과 관계되는 큰 수공업과 공업도 통제했다. 그리고 법령을 제정하여 사인(私人)의 경영을 엄격히 제한했다.
둘째, 균수령(均輸令)과 평준령(平准令)을 추진했다. 이는 무제 시기에 봉건 국가가 행정적 수단을 운용하여 시장에 간섭하고 물가를 조절한 중요 조치였다. 평준이란 즉 중앙 대사농(大司農)의 속관인 평준령(平准令)으로 하여금 경성과 기타 대도시의 물가를 다스리는 작업을 책임지게 한 것이다. 풍년이 든 계절에는 곡식 가격이 비교적 낮으므로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고, 이듬해 곡식이 비쌀 때 다시 국가가 평균 가격으로 판매해 물가를 다스리는 목적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이는 대상인들이 사재기를 하여 폭리를 취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정국을 안정시켰다.
셋째, 고민령(告緡令)을 추진했다. 기원전 119년 무제는 ‘산민(算緡)’을 추진했는데, 이는 상인에게 징수하는 일종의 재산세로 상인들이 모두 관부에 자신의 재산 액수를 신고하게 한 후 재산에 근거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으니 2천 전마다 1산을 징수했으니 즉 120전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적게 내거나 내지 않기 위해 은닉하여 보고하지 않거나 적게 보고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114년 무제는 다시 ‘고민령’을 실행하도록 명령했으니, 즉 사람들이 ‘산민’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고발하도록 장려한 것이었다. 고발한 사람은 피고발 상인 재산의 절반을 포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명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상인들은 심한 타격을 받았으며 중등 이상의 상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파산했다.
무제의 이러한 억상 정책은 비록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으나 상인들의 적극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당시의 상업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했다. 무제 시기에는 다른 억상(抑商) 조치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상인은 수레를 탈 수 없고 비단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무기를 휴대할 수 없고 그의 후대도 관리를 할 수 없게 했다. 이러한 상인을 차별하는 사상은 훗날의 왕조들에 영향을 주었다.
무제는 그가 즉위한 후 20년 동안 화폐제도를 정리해 화폐의 주조와 발행을 직접 통제했으며, 각종 열악한 동전을 폐기하고 ‘오수전(五銖錢)’을 통일적으로 추진했다. 상술한 경제 정책의 실행은 한 왕조의 재정을 충실하게 했다.
이외에도 무제는 수리(修利)를 일으키는 데 주의를 기울여 선후로 위수(渭水)와 분수(汾水)를 황하로 끌어들이고, 사수(斜水)를 위수로 끌어들이는 등의 수로를 수리했다. 이렇게 하여 배의 운항도 가능하고 전지(田地)에 관개할 수도 있게 했다. 또한 황하를 다스리도록 명령하고 백성을 이주시켜 변방에 주둔하게 하고 해마다 이랑과 고랑을 바꿔 생산력을 늘리는 ‘대전법(代田法)’을 실행했다.
무제 개인에 대한 평가
사가들이 무제에 대해 내린 평가는 제각기 다른데, 이는 그가 웅재대략이고 탁월한 안목을 지닌 군주일 뿐만 아니라 허물을 알면 고치고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이며 현능한 이를 임용할 줄 아는 명주(明主)였기 때문이다. 그의 거시적이고 원대한 모려(謀慮)는 이때부터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2천 년간 중국의 군주 법헌(法憲)제도에 대해 상당히 안정되고 성숙한 한 세트의 모델과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으로서 그는 문장과 부(賦)에 능하고 풍류를 알고 호탕하며 호색, 교만, 허영, 자사(自私), 사치 향락을 좋아하여 보통 인성 중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부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예컨대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풀 베듯 죽이기도 했다.
무제와 같은 시대에 있은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를 사치스럽고 방사들에게 잘 속는 군왕으로 묘사했다. 동한 때의 반고(班固)는 그 편파적인 측면을 바로잡아 한무제를 찬양하여 말하기를 “한(漢)은 백왕(百王)의 폐단을 이어받았는데 고조가 혼란을 다스려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했고(撥亂反正)했고 문제와 경제는 백성을 잘 기르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고대의 예문(禮文을 상고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빠진 것들이 많았다. 효무제가 처음 즉위하여 탁월하게 백가를 몰아내고 《육경》을 표장(表章)했다. 마침내 천하에 널리 물어 재주와 덕행이 뛰어난 이들을 천거하게 해서 그들과 더불어 공을 세웠다. 태학을 일으키고 교사(郊祀)를 정비했으며 정삭(正朔)을 고치고 역수(曆數 역법)를 정했으며 음률을 조화롭게 하고 시와 음악(樂)을 지었다. 봉선의 예법을 세우고 여러 신들에게 예를 갖추었으며 주나라의 후손을 이어주고, 호령과 문장이 분명히 진술해 후사(後嗣 후계자)들이 홍업(洪業 홍대한 제업)을 준수해 삼대의 기풍을 보였다. 만약 무제와 같은 웅재대략에 문경(文景)이 공손하고 검약함으로 백성을 구제한 일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비록 《시》, 《서》에서 칭송한 일이라 해도 어찌 덧불일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반고는 한무제의 웅재와 위략(偉略)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청대 조익은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에서 여전히 편파적인 면이 있음을 지적하여 “오직 무제의 문사(文事)에 대해서만 찬양하고 무공(武功)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두지 않았다. 우러러 생각건대 황제의 웅재대략은 바로 무공에 있다”라고 했다.
송조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한무제를 평론하여 말했다.
“효무제는 사치와 욕망이 극에 달했고, 형벌을 번잡하게 통치하며 세금을 무겁게 거두었으며,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일을 벌였다. 신괴(神怪)를 믿고 미혹되었으며, 끝없이 순유(巡遊)해 백성들을 지치고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일어나 도적이 되었다. 그가 진시황(秦始皇)과 달랐던 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진은 이로 인해 망했고 한은 이로 인해 흥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효무제가 선왕(先王)의 도리를 존중할 줄 알았고 (국가의) 통치와 수성의 근본을 알았으며, 충직한 말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이 속이고 가리는 것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어진 이를 임용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상과 벌을 엄격하고 명확하게 내렸으며, 말년에는 허물을 고쳤고, 후사를 부탁할 사람(곽광 등)을 제대로 얻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진이 멸망에 이르게 한 실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이 맞이했던 파멸의 화는 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무제의 공적은 앞서 이미 상세히 서술한 바 있으며, 사가들이 무제에 대해 질타하는 바는 주로 그의 사치와 연이은 대외 정벌에 있다. 예컨대 그도 진시황처럼 순유하기를 좋아하여 횟수 또한 십여 차례나 되었는데, 기원전 110년의 그 순유 이정은 1만 8천 리에 달했다. 장안에서 출발하여 먼저 북쪽으로 가 열병하고 다시 남하하여 중악 숭산에 도달한 후 동쪽으로 바닷가를 순유하고 이어 태산에서 봉선한 뒤 다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갈석(현재의 하북 창려)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서쪽으로 구원(현재 내몽고 포두)을 거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번 순유 여정 비용 모두 진시황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의 대외 정벌 또한 거대한 인력과 물력을 소모했다.
그러나 무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청성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만년에 위청에게 말하기를 “한가(漢家)는 제반 사정이 초창기인 데다 사방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범하고 있다. 짐이 제도를 변경하지 않으면 후세에 법도가 없을 것이다. 군사를 내어 정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불안할 것이다. 이 일을 함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없노라. 만약 후세가 또 짐이 행한 바와 같이 한다면 이는 진나라가 망한 자취를 잇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종사한 ‘내흥공리 외사사이(內興功利,外事四夷)’ 정책이 모두 제도를 창립하고 후세에 본보기를 남기며 국가 안전을 도모하려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정책이 백성을 수고롭게 함을 인정했으며, 그의 후대가 백성을 요란하게 하는 정치를 본받기를 원치 않았고 진나라가 신속히 패망한 전철을 밟는 것을 반드시 경계하여 피하라고 후대에 경고했다.
무제는 도를 향했고 또 도를 닦기도 했다. 《한무내전(漢武內傳)》 중에는 그가 즉위한 후 특히 신선의 도를 좋아하여 자주 명산대천과 오악(五嶽)에 가서 기도함으로써 신선을 구했다는 기재가 있다. 훗날 그 성심(誠心)이 하늘을 감동시켜 서왕모가 궁전에 강림하여 그에게 진경을 전해주었다. 한무제는 진경(真經)을 얻은 후부터 6년간 수행하여 마음이 맑고 상쾌해지며 격조가 고아(高雅)해짐을 느꼈으며, 상계(上界) 대선(大仙)의 친전(親傳 직접 전수)을 얻었으니 자신은 반드시 도를 얻어 성선(成仙)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든 후 점차 자신 품덕(品德)에 대한 단속을 느슨히 했고 또 대대적으로 궁전과 정대(亭臺 정자 누대)를 축조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소비했으며, 남방과 북방의 이민족에 대해 원정과 토벌을 진행했고 투항한 포로들도 잔혹하게 산채로 매장하거나 도살함으로써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고 시신이 산처럼 쌓이게 했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 11월 을유일에 이르러 천화(天火 저절로 난 불)가 진경(真經)을 봉안한 백량대(柏梁臺)를 불태웠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경서와 경서를 담은 상자가 함께 없어졌다. 이는 왕모가 무제가 그녀의 가르침을 준수하지 않고 허튼 짓을 하는 것을 알고 천화로 백량대를 소각한 것이다.
그가 방사(方士)를 임용하여 자신을 위해 신선을 찾고 도(道)를 방문하게 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방사 난대(欒大)의 화와 강충(江充)의 ‘무고’라는 재앙이 출현했다.
만년(晩年)의 무제는 자주 병이 들어 의심이 아주 깊었다. 한 번은 꿈에 수천 개의 나무 인형이 자신을 때리는 것을 보았고 깨어난 후 다시 병이 들었다. 그는 약을 먹어 조리하지 않고 대신들과 백성들이 자신을 저주했기에 병을 얻은 것이라 말했다. 이에 그는 방사 강충에게 명령하여 각지에 가 이 일을 조사하게 했고, 강충은 기회를 틈타 반대 세력을 공격해 선후로 수만 명을 비명횡사하게 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중에는 승상과 무제의 두 딸도 있었다.
훗날 또 누군가가 태자의 궁 중에 무제를 저주하는 목우인(木偶人 목각 인형)이 있다고 들추어내니, 태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성지(聖旨)를 조작해 강충을 잡아 죽이는 동시에 군사를 파견해 장안의 많은 관서를 강제로 차지하고 강충을 처형하고자 했다. 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해 승상을 시켜 태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쌍방의 군대가 장안에서 며칠간 격전을 벌였고 패배한 태자가 결국 자살했으며 위황후(衛皇后)도 자살했다.
이듬해 무제는 태자가 억울하게 무함(誣陷)을 당했음을 조사해 밝혀내어 태자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훗날 승상 유굴리(劉屈氂)와 장군 이광리(李廣利)마저 뜻밖에 무고 활동으로 무제를 저주했다는 무함을 당했고, 결과적으로 유굴리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해 거느리고 가던 7만 군대를 전부 잃었다. 이는 흉노에 늘 승리하던 무제에게 의심할 바 없이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마침내 무제는 소위 ‘무고(巫蠱)’의 화가 모두 강충이 독단적으로 날조한 것임을 밝혀냈고, 분노한 무제는 강충의 전 가속을 주살했다.
기원전 89년, 무제는 마지막 순유(巡遊)에 나서 태산을 지나갈 때 태산의 명당(明堂)에서 천신(天神)과 대신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검토하게 했다. 얼마 후 그는 대신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방사들을 쫓아냈다. 훗날 무제는 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죄기조(罪己詔)를 내렸다. 이때부터 무제는 일련의 유효한 조치를 취했으니, 예컨대 백성을 쉬게 하고 능력 있는 대신을 임용했다. 이렇게 2년이 지나자 정치와 경제가 모두 비교적 크게 개선되었고 한조는 다시 활력을 회복했다. 이는 또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와 증손인 선제(宣帝) 시기의 ‘소선중흥(昭宣中興)’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기원전 87년, 무려 54년을 재위한 무제는 병이 위독해져 어린 아들 유불릉(劉弗陵)을 태자로 세우고 몇 명의 보좌 대신을 임용한 뒤 이튿날 곧 서거했다. 사후 시호를 ‘무제(武帝)’라 했다. 무제의 능묘는 무릉(茂陵)이라 부르며 지금의 섬서 서안 부근에 있다.
비록 한무제에게 여러가지 결점들이 가득함에도 이 모든 것들이 한 위대한 황제로서 그가 가졌던 빛을 가릴 수는 없으며, 그는 중국 역사상 천년이 지나도 쇠퇴하지 않는 짙고 무거운 필치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