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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16

【강희대제】 태자 폐립 풍파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는 인생의 만년에 접어들어 국정을 처리하는 틈틈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심사숙고했는데, 그것은 바로 청 왕조를 위해 가장 적합한 후계자를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청 성조 인황제(仁皇帝) 강희는 일생 동안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신중했으며, 재위 61년 동안 청초의 태평성대를 창건해 역사상 유일하게 성(聖)과 인(仁)을 한 몸에 지닌 현명한 군주가 되었다. 인생의 만년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국정을 처리하는 외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고민했는데, 그것은 바로 청 왕조를 위해 가장 적합한 후계자를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복과 수명을 모두 갖춘 강희제는 5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황자(皇子)만 35명이었고 이중 성인이 된 이가 24명이었다. 황자들을 대함에 있어 강희제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엄격한 아버지였으며, 그들의 덕과 재능을 기르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황자들이 장성한 후에는 대부분 재능이 뛰어났다. 청조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강희제의 아들들은 가장 우수한 황자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에서 고민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강지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간직했던 강희제는 일찍이 태자를 책봉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궁정 풍파를 겪으며 황태자는 두 번이나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고, 다른 황자들은 후계자 자리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자탈적(九子奪嫡–9명의 아들이 태자 자리를 다툼)’ 사건이며, 노년의 강희제에게 많은 슬픔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후계자를 선정하여 성세가 이어지게 했을까?

부자간의 깊은 정

“적자 윤잉(胤礽)은 외모가 영무(英武)하고 위엄이 있으며 천성이 총명하다. 짐은 태황태후와 황태후의 자애로운 명을 받들어 전례를 거행하고 그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 강희제

강희의 첫 번째 황후 혁사리씨(赫舍裏氏). (공유 영역)

청나라 황위 계승에는 황제 생전에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는다는 조훈(祖訓)이 있었으나, 강희조에서는 예외였다. 강희제와 조강지처인 혁사리 황후는 어린 시절 부부가 되어 10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정이 깊었다. 혁사리씨는 매우 어질고 덕이 있었으며, 사람됨이 정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검소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후궁을 다스려 강희제가 친정 초기 단계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혁사리씨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 승호(承祜)는 천성이 총명하여 황제와 황후가 애지중지하는 보배였으나 안타깝게도 네 살 때 요절했다. 황후는 비통함에 잠겨 이로 인해 큰 병을 얻었다. 강희 13년(1674년), 혁사리씨가 다시 황자를 낳자 강희제는 매우 기뻐하며 아이의 이름을 보성(保成)이라 지어 평안하게 자라기를 빌었다. 이가 바로 적차자(嫡次子) 윤잉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혁사리씨는 난산으로 인해 그날 오후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붕어했다.

경사가 갑자기 상사(喪事)로 변하자 강희제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렀으며, 거의 매일 그녀의 재궁(梓宮) 앞에서 애도했는데 한번 가면 반나절이나 머물곤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강희제는 황후의 기일마다 잠시 조정을 멈추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그는 또한 친히 죽은 황후를 위해 시문을 지어 그녀의 어진 덕을 추모했다. 이것은 강희제가 여성을 위해 지은 유일한 책시문(冊諡文)으로 제왕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희제는 조강지처에 대한 감정을 남겨진 아이에게 쏟았다. 윤잉이 겨우 두 살이 되었을 때 강희제는 만청의 조훈을 바꾸어 효장태후의 동의를 얻은 후 천하에 공포하고 윤잉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윤잉은 청조에서 유일하게 황제에 의해 친히 책봉된 후계자가 되었다.

태자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강희제의 곁에서 자라며 세심한 부친의 사랑을 받았다. 강희제는 그를 국가의 미래 황제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대했다. 강희 17년(1678년) 11월, 네 살의 윤잉이 천연두에 걸리자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강희제는 모든 정무를 중단하고, 27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모든 상소문을 내각으로 보내 처리하게 한 뒤 자신은 전심전력으로 아들 곁을 지키며 위험한 시기를 넘기도록 보살폈다.

강희 18년(1679년), 강희제는 특별히 궁전을 보수하여 이름을 ‘육경궁(毓慶宮)’이라 하고 태자의 동궁으로 삼아 은총을 표시했다.

태자가 성장함에 따라 강희제는 태자의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윤잉이 아주 어릴 때 강희제는 정무를 처리하는 틈틈이 친히 글을 가르쳤으며, 여섯 살 때는 대학사(大學士)를 태자의 스승으로 정해 유교 경전을 강해하게 했다.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자는 높이 계신 부황에게 의지하고 경애하는 마음이 컸으며 부자간의 정 또한 두터웠다. 윤잉이 14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문무를 겸비한 소년 후계자로 성장해 있었고, 강희제의 뜻에 따라 고된 학당 생활을 시작했다.

태자의 사람됨

“황태자는 오로지 책 읽는 것만 알 뿐, 다른 유희나 향락은 일절 알지 못한다.” —— 강희제

《일상사서해의(日講四書解義)》, 랍살리(拉薩哩)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 강희 16년(1677년) 내부 간본. (사인맹자/Wikimedia Commons)

청조 황제들은 매우 부지런히 정사를 돌봤으며, 황자들 또한 학업에 지극히 정성을 다했다. 여섯 살부터 공부를 시작해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배워야 했으며, 일 년 중 쉬는 날은 설날, 단오, 추석, 본인 생일, 황제 생일(이틀), 섣달그믐(반나절) 등 6일 반밖에 되지 않았다. 어떤 황자는 30세 무렵까지 공부를 계속하기도 했는데, 그 고된 정도는 오늘날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강희기거주(康熙起居注)》 중 ‘강희 26년(1687년) 6월’ 기사에는 윤잉이 전용 학당인 ‘무일재(無逸齋)’에서 공부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때는 한여름으로 오늘날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보낼 시기였지만, 황태자는 이미 개학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최소 10시간 이상의 빽빽한 수업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묘시(5~7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윤잉은 스승이 오기 전에 서재에 들어가 아침 공부를 했다.

오전에는 세 명의 스승 탕빈(湯斌), 경개(耿介), 달합탑(達哈塔)이 윤잉에게 예를 표하고 동쪽에 모시고 서며, 기거주관(起居注官)은 서쪽에 섰다. 윤잉은 《예기》의 편목과 경의 중 한 편을 총 120번 낭독했다. 이어 윤잉은 책을 스승에게 맡기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때때로 강희제는 퇴궐 후 학당에 들러 태자의 공부를 묻고 스승들과 학습 요령이나 책의 대의를 토론했다.

부황이 떠난 후 윤잉은 자리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다. 보통 사시(9~11시)에 윤잉은 글씨 연습을 시작하여 한문(漢文)을 수백에서 천 자까지 쓰고 만주어로 한 장(章)을 썼다. 스승이 서법을 품평하면 그는 다시 《예기》 등의 편목을 총 120번 읽었다.

정오에 윤잉은 스승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잠시 쉬지 않고 공부를 복습하거나 글씨를 썼다. 오후에 윤잉은 활쏘기를 연습한 뒤 다시 무일재로 돌아와 스승에게 문장의 요지를 설명했다. 사제 간의 교류가 끝나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학(下學)했다.

윤잉의 학업은 지루하고 번거로웠으며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단지 120번의 독서 과정만으로도 심성을 단련하기에 충분했다. 이 독서법은 강희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일찍이 “짐은 어릴 때 독서를 반드시 120번을 채워 읽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장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기에 태자와 여러 황자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라고 말했다.[1] 윤잉도 매우 총명하여 보통 여덟 번 정도 읽으면 암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령 책의 내용에 아주 익숙해졌더라도 여전히 강희제의 말을 따라 120번을 채워 읽고서야 끝마쳤다.

첫 번째 태자 폐위

“한당(漢唐) 이래로 태자가 어리면 오히려 일이 없지만, 만약 태자가 장성했는데 주변의 소인배들이 당여(黨與)를 만들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기 시작하면, 자기 분수를 지키며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 강희제

윤잉의 초상화. (공유 영역)

이처럼 총명하고 부지런한 태자는 강희제 젊은 시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윤잉이 위를 잇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조용히 변하기 시작했다.

강희 29년(1695년), 강희제는 갈단을 친정하는 도중 중병에 걸렸다. 윤잉과 황삼자(皇三者) 윤지(胤祉)는 어지를 받들어 행궁으로 가서 부친을 간병했다. 윤잉이 강희제를 알현할 때 얼굴에 슬픈 기색이 전혀 없자, 강희제는 이를 보고 매우 불쾌해하며 그에게 임금을 충성으로 대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하며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냈다.

윤잉은 왜 타인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을까? 태자는 태어날 때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로 고귀한 위치에 익숙해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청사기사본말(清史紀事本末)》은 태자의 성격이 어질고 유약하며 일을 함에 있어 제멋대로 하여 내면의 생각을 감출 줄 몰랐다고 보았다. 그는 황제 앞에서 많은 예절을 소홀히 했다. 강희제가 여러 번 그를 꾸짖으면서 부자 사이의 틈과 의심이 점차 생겨났다.

이외에도 윤잉의 성격 변화에는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우수한 황자들로부터 오는 압박감이 있었다. 강희제의 20여 명 황자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는데, 황장자 윤제(胤禔)는 황제를 따라 출정하고 순시하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황삼자 윤지는 문채가 풍부하여 책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황팔자 윤사(胤禩)는 영민하고 수완이 좋아 널리 인연을 맺어 조정 내에 옹호하는 자가 많았다. 다른 황자들도 대부분 재능이 출중하여 그들은 다소간 후계자 자리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또 한 가지는 강희제가 비록 태자를 아끼긴 했으나 국사가 바빠 늘 태자 곁에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태자 주변에는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관리와 시종들이 많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영향을 받아 오만하고 무례한 성품이 형성되었다. 설령 태자가 찬탈할 마음이 없었더라도, 천박하고 속된 세리소인(勢利小人)들은 장래의 부귀영화를 위해 ‘새 주인’에게 투탁하기를 즐겼으며, 예법을 넘어서거나 심지어 법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며 황제와 후계자 사이의 모순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강희제는 이런 위기를 발견한 후 단호하게 이들을 엄벌하여 동궁의 환경을 숙청했다.

강희 36년(1697년), 강희제는 네 명의 하인을 처분했는데 심부름꾼, 차 시중, 음식 시중 등을 유폐하거나 사형에 처했다. 42년(1703년)에는 ‘태자당’의 우두머리이자 외척 중신인 색액도(索額圖)를 파면하고 종인부(宗人府)에 보내 구금했다. 색액도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황태자의 모든 의복과 용품을 황색으로 쓰게 하고 모든 예의 제도를 황제와 거의 같게 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강희제는 윤잉이 “교만하고 방종해진 것이 실로 이로 말미암았다”라고 여겼다.[2]

황제와 태자 사이의 갈등은 마침내 5년 후 폭발했다. 강희 47년(1708년), 강희제가 여러 황자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 궁에서 어린 황십팔자가 병으로 요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희제는 비통함을 금치 못했으나 윤잉은 전혀 슬픈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희제는 크게 실망하여 친형제에 대해 우애가 전혀 없다고 질책했다. 그러자 윤잉은 오히려 분노하며 심지어 사람을 보내 행궁 내 강희제의 거동을 훔쳐보게 했다.

강희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왕과 백관을 소집하여 윤잉을 무릎 꿇린 뒤, 눈물을 흘리며 태자 폐위의 유지(諭旨)를 선포했다. 조서에는 윤잉의 죄가 크게 다섯 가지라 적혀 있었다.

첫째는 조상의 덕을 법 삼지 않고 황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음이요,
둘째는 사치가 한도 끝도 없어 황제를 훨씬 능가함이요,
셋째는 형제를 무시하여 무정하고 무의함이요,
넷째는 당여를 길러 황권에 대항함이요,
다섯째는 임금이자 아버지를 엿보고 거동을 탐지함이었다.

이런 태자에게는 도저히 천하를 맡길 수 없었기에 강희제는 태자를 폐위하여 유폐하고 황장자(皇長者)에게 감시하게 했다.

태자 폐위의 결정은 강희제와 윤잉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유지 선포를 마친 뒤 강희제는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상심했다. 어릴 때부터 고귀한 자리에 있던 윤잉은 갑작스러운 타격을 받아들이지 못해 정신이 이상해졌다. 낮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한밤중에야 음식을 먹었고, 밥을 일곱여덟 그릇이나 먹어도 배부른 줄 몰랐으며 술을 수십 잔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고 행동에 법도가 없었으며, 매일 의심과 두려움에 떨며 천둥 번개라도 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포에 질렸다.

강희제는 이를 지켜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다른 황자들의 격렬한 후계자 쟁탈전은 그를 더욱 번뇌하게 했다. 후계자 자리가 비자 장성한 황자 중 황장자와 황팔자가 태자 자리를 다투며 암투를 벌였고, 나머지 황자와 대신들이 앞다투어 줄을 서며 당여를 결성해 복잡한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주석:
[1] 《康熙起居注》:康熙二十六年六月初十日丙辰條。
[2] 出自《皇朝通典》卷53。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6/4/n1216212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