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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3 몽케를 보좌해 한인 지역의 민정을 맡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1241년 11월, 12년 3개월 동안 재위했던 대칸 우구데이는 56세의 나이로 궁궐에서 사냥을 하던 중 사망했다. 우구데이는 생전에 태자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후 대칸의 후계자 문제가 촉발되었다. 궁정 내 일련의 분쟁으로 대칸이 공석이 되었다.

4년이 넘는 지연 끝에 1246년, 대칸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쿠릴타이에 여러 부족의 왕, 장군, 귀족 대부분이 우구데이의 장남인 구육을 새로운 대칸으로 지명하기로 합의했다.

1248년 봄, 구육은 바투를 정벌하기 위해 서진하던 중 재위 1년 8개월 만인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후 정종(定宗)으로 추대되었다.

몽케가 대칸이 되다

1251년 6월, 몽골 초원의 오논 강변에 있는 칭기스칸의 대오르두에서 쿠릴타이가 열렸다. 칭기스칸 가문의 모든 가문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왕자들과 대신들은 칭기스칸의 장자 주치의 차남인 바투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즉 대칸 자리를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장남이자 우구데이의 양자인 몽케가 계승하도록 옹립했다.

몽케는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베키의 장남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한 점성가가 그가 장래에 “매우 고귀할 것”이라고 말해 몽케라는 이름을 얻었다. 몽케는 중국어로 “장생(長生)”을 의미한다.

우구데이가 대칸 지위를 계승하기 전, 몽케를 양아들로 삼아 황후인 앙후이에게 키우게 했다. 몽케가 성장하자 호룰라 부의 호리차와 결혼해 부족민을 그에게 주었다.

우구데이는 애초 몽케를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 우구데이는 몽케를 곁으로 불러,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몽케는 일찍이 우구데이를 따라 수많은 원정에 나서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232년 툴루이가 사망하자 몽케는 툴루이의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돌아왔다.

몽골 국립 박물관에 소장된 몽골 제국 시대 카라코룸 수도의 모형. (공유 영역)

다시 한번 쿠빌라이의 기업을 다진 몽케

몽케는 대칸으로 즉위한 당일, 바로 아버지 툴루이를 황제로 추존하고,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를 황태후로 높였다. 즉위 직후 몽케는 칭기스칸이 규정한 야사(Jasaq, 법령)의 질서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은 조령을 반포했다.

조정 및 제왕(諸王)들이 함부로 발급한 영지(令旨, 명령서)는 모두 회수한다.

제왕들이 마차를 탈 때는 말 세 마리까지만 허용하며, 멀리 갈 때도 네 마리를 초과할 수 없다. 제왕들은 함부로 민가(백성)를 모집할 수 없으며, 여러 지역에 마음대로 명령을 선포할 수 없다. 여러 관속들은 조정에 조회한다는 핑계로 백성의 재물을 부당하게 거둘 수 없으며, 세금을 납부하는 자는 가까운 곳에 상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또한 카라코룸 성 건축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5,000명의 농민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추가적인 정복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몽케는 새롭고 정확한 전국적인 인구 조사를 요구했다. 이번 인구 조사는 제국의 재화와 인력을 파악하고 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하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가축, 과수원, 원자재(예컨대 철과 소금의 비축량) 그리고 인력까지 모두 목록에 올렸다. 조사 범위와 엄밀함의 정도에 있어서 몽케의 통계 목록은 이전 우구데이나 구육의 성과를 능가했다.

또한 그는 칭기스칸과 우구데이 시절의 제도에 따라 노인과 불교(釋), 도교(道), 기독교(네스토리우스교) 등의 성직자 및 신도들에게 정세(丁稅, 인두세)를 면제해 주었다. 서역의 세법을 개정해 소와 말은 100마리당 1마리의 세금을 매기고, 100마리가 되지 않는 자는 면제했다. 특히 쉽지 않고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육과 황후, 황자들이 보석을 구매하며 남긴 상인들의 물품 대금 빚 50만 정(錠)을 자신이 대신 갚을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령을 내려 상환해 준 점이다. 얼마 후 그는 서하(西夏) 사람 고지요(高智耀)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 유사(儒士)들의 요역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는 유사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몽케가 즉위한 이듬해 봄,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기이하고 총명한 여인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 평온하게 떠났다. 사후에 그녀는 남편 툴루이와 칭기스칸의 무덤 곁에 묻혔다.

사람이 ‘굳세고 밝으며 영민하고 굳셌던(剛明雄毅)’ 데다 말수가 적었던 몽케는 우구데이와 구육 시절의 관대하고 방종했던 정책을 바꾸어 대칸의 권력을 강화했다. 우구데이 시절에는 여러 신하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왔고, 구육 시절에는 대칸의 몸이 약해 여러 일을 중신들이 결정했었다. 몽케 시절에 이르러서는 모든 조령을 그가 친필로 썼으며, 때로는 여러 차례 고심한 후에 실행에 옮겼으니, 이는 몽골 여러 황제들 중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전 조정에서 대칸 직할구에 각각 단사관(斷事官 재판 감찰 등 사법기능을 총괄하는 원조 특유의 관직)을 설치한 기초 위에, 몽케는 연경(燕京), 비슈발리크, 아무다리야 세 곳의 삼행상서성(三行尚書省)을 더욱 완비하고 확충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몽케는 ‘여러 신하들을 통솔함이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좌우의 대신들을 훈계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짐의 포상을 받으면 곧 기세가 교만하고 방자해지니, 재앙과 화가 즉각 이르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라.” 또한 그는 점복술(占卜術)을 매우 믿어서, 중대한 일을 행할 때마다 먼저 길흉을 점쳤다.

일상생활에서 몽케는 사치와 호화로운 잔치를 좋아하지 않았고, 후비(后妃)들의 의복과 음식 소비를 엄격히 제한하여 멋대로 낭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번은 위구르에서 수정 대야, 진주 양산 등의 물품을 바쳤는데 그 가치가 은 3만여 정에 달했다. 몽케는 “지금 백성들이 피폐하여 급한 것은 돈일 뿐인데, 짐이 홀로 이것을 가져다 어디에 쓰겠는가”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훗날 대신들의 권유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대금의 일부를 지급했고 단 한 번뿐이며 다시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알렸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몽케는 기독교에 꽤 호감을 가졌으나, 불교와 도교에도 관심이 있었다. 1251년부터 1252년 사이, 그는 도사 이지상(李志常)과 나모(那摩) 라마를 국사(國師)로 임명했다. 1255년에 열린 불교도와 도교도의 변론 대회에도 참석했다. 1256년, 몽케는 카라코룸의 궁전에서 불교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모든 종교는 손의 다섯 손가락과 같다”라며, “불문(佛門)은 손바닥과 같고 나머지는 모두 손가락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불교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1254년 1월, 몽케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사절이자 기독교도인 루브루크를 접견했고, 반년 후 루브루크는 몽케의 답장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대칸 몽케. (공유 영역)

대외 군사 정복 방면에서 몽케는 조부의 발자취를 따라 강역을 계속해서 개척해 나갔다. 그는 친동생인 쿠빌라이와 훌라구(旭烈兀)에게 각각 중국 남부와 서아시아의 정벌을 책임지도록 맡겼다. 쿠빌라이의 정벌에 대해서는 이후 장에서 다시 서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훌라구의 서아시아 원정을 말해보고자 한다.

1253년 6월, 몽케는 훌라구에게 명령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역 원정을 떠나게 했다. 서정군은 막북 초원에서 출발해 1256년 대군이 아무다리야강을 건넌 후 가는 곳마다 거침없이 적을 물리치는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먼저 페르시아 남부의 루르인 정권을 멸망시켰고, 이어서 페르시아 서부에 위치한 무라이국(木剌夷國, 암살파)을 격파했다. 1258년에는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아바스 왕조의 통치를 끝장냈으며, 1260년 3월 1일에는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의 통치권을 빼앗고 군대를 보내 소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그 후 몽케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훌라구의 서아시아 원정이 승승장구하던 때에, 몽케는 다시 한번 남송(南宋)을 공격하는 정벌에 올랐다.

쿠빌라이, 한인 지역 민정 총괄하며 어질다는 명성 얻어

몽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동생인 쿠빌라이(忽必烈)는 조정의 의사결정권에 진입하여 형을 위해 책략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가 몽케의 친동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했기” 때문에, 몽케는 그를 막남(漠南) 한인 지역(漢地)의 민무(民務, 민정 업무)를 총괄하는 친왕(親王)으로 임명했고, 이 두 지역의 민호(民戶) 문제는 모두 쿠빌라이가 재결하도록 했다. 여기서 막남은 고비 사막 이남, 음산 산맥 이북 지역을 가리키며, 현재 중국과 몽골 사이에 분포해 있다. 한인 지역은 몽골에 정복된 중원 지역을 가리키며, 민호는 주로 관부에 등록되어 대칸이 직접 그 세금과 요역을 통제하는 주민을 말한다.

몽케가 쿠빌라이를 선택해 막남과 한지의 사무를 맡긴 것은, 그가 한족 문화와 한인 지역 사람인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고 잘 이해하고 있으며, 주변에 관리를 도울 수 있는 한족이 많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임명으로 인해 쿠빌라이는 중원 각지에 유랑하는 식견 있는 선비들을 모집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그는 “번부(藩府)의 옛 신하들과 사방의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초빙한다”는 기치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인재를 끌어모았으며, 이로써 꽤 유명한 ‘금련천 막부(金蓮川幕府)’가 점차 형성되었다.

막남과 한인 지역의 민정을 총괄하게 된 후, 쿠빌라이는 막북의 카라코룸에만 머물 수 없었기에 연경(燕京) 이북에 새로운 주둔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일찍이 무칼리의 손자이자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바투루(霸突魯)에게 물었다.

“천하가 이제 막 평정되었으니, 나는 주상(몽케 칸)께 위구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를 쉬게 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고 권하고 싶은데, 그대가 보기엔 어떠한가?”

여기서 위구르란 과거 막북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위구르 칸국의 수도(오르두 발리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풍속과 생활방식이 몽골인과 매우 흡사했고 현재 몽골국 오르혼 밸리(Orkhon Valley)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바투루는 이에 찬성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유연(幽燕, 북경 일대) 땅은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 형세가 웅장하여,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하(淮河)를 제어하고 북쪽으로는 대막(大漠)과 이어집니다. 또한 천자는 반드시 중앙에 거처하며 사방의 조현(朝見)을 받아야 합니다. 대왕께서 진정 천하를 통솔하고자 하신다면 연경에 주둔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그는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에 모두 수도이자 정치 중심지였던 지금의 북경 일대를 선택하도록 건의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즉시 깨달았다.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하마터면 과오를 범할 뻔했소.”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주둔지를 북경 일대로 돌렸고, 이전의 번부를 지세의 요충지이자 풍수 명당인 금련천(金蓮川)에 주둔시켰다. 금나라 때 금련천 일대에는 환주(桓州)와 무주(撫州)라는 두 도시가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전략 및 보급 측면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 도시들이었다.

금련천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금나라 대정(大定) 8년(1168년), 금 세종(世宗) 완안옹(完顏雍)이 ‘제왕의 영장(營帳)’을 선택하기 위해 어느 산천에 이르렀다. 이곳의 산과 바위 형상은 사람이나 물건, 혹은 새나 짐승의 모습 같아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고 생생하여, 자못 장백산(長白山)의 풍취가 있었다. 그는 개울(川) 가에 끝없이 피어난 금련화(金蓮華)를 보았고, 온 개울을 가득 채운 금련화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다 보니 번뇌와 근심이 순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이에 금 세종은 ‘련(蓮)은 연(連)과 같다’ 하여, 금지옥엽이 서로 이어진다는 뜻을 취해 이 개울을 ‘금련천’으로 개명했다.

1251년, 쿠빌라이는 금련천에서 조벽(趙璧)에게 명령해 “연경에서 6부를 총괄하게” 했다. 즉, 한인 지역의 재정과 세금 및 행정을 주관하는 연경 대단사관 행서(燕京大斷事官行署, 연경행상서성)의 비치치(必闍赤, 서기·관료) 직책을 맡긴 것이다. “연경에서 6부를 총괄한다”는 것은 곧 연경에서 상서6부를 행한다는 뜻으로, 이는 당시 연경 대자루구치(大札魯忽赤 몽골의 최고 사법행정관인 대단사관을 의미)의 조수이자 대비치치의 한어(漢語) 관직 명칭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듬해, 쿠빌라이는 요추(姚樞)의 건의에 따라, 연경 대자루구치가 정사에 어둡고 한인 지역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하남(河南) 지역을 시험 삼아 다스려 볼 것을 청했다. 즉, 남송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변경(汴京, 개봉)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고, 군량을 하남으로 운송하기 편리하도록 위휘(衛輝)에 도전운사(都轉運司)를 두는 방안이었는데, 몽케가 이를 모두 허락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조벽, 사천택(史天澤), 양유중(楊惟中), 망고(忙哥)를 사절로 임명하여 하남을 경략하게 했다.

쿠빌라이는 변경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하고 남송 공격을 준비했다. 사진은 북송 장택단의 《청명상하도》 일부로, 북송의 도성인 변경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공유 영역)

조벽은 앞선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사천택은 대대로 연경 호족 가문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현지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양유중은 일찍이 오구데이의 모사였으며, 이후 몽골군을 따라 남송을 공격할 때 수십 명의 명사(名士)와 대량의 도서를 확보하여 연경에 태극서원(太極書院)을 건립하고 정주 이학(程朱理學 성리학)을 강론했던 인물이다.

당시 하남은 막 전란을 겪어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하남도총관(河南道總管)이자 만호(萬戶)인 유복(劉福)은 독단적이고 방자했으며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포악해서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벽이 부임한 후 즉시 (유복의 심복인) 동 주부(董主簿)를 체포하자, 유 만호는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워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했다. 그 후 조벽은 하남에서 도적을 잡고, 저폐(楮幣, 지폐)를 발행하고, 부역과 세금을 균등히 하며, 둔전을 세워 민생과 사회 문제를 해결했다. 불과 2, 3년 만에 하남은 “가장 잘 다스려진 곳(以最治稱)”으로 일컬어졌다.

1252년, 쿠빌라이는 금련천에서 환주와 무주 두 주로 처소를 옮겼다. 형주(邢州)는 쿠빌라이의 봉지(영지)로 본래 1만 호가 있었는데, 처음에 공신들의 녹봉을 대기 위해 2,000호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관리를 위해 파견된 자들이 다스릴 줄은 모르고 온갖 수단으로 수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왕부(王府)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주변 모사들의 건의에 따라 쿠빌라이는 측근인 도우토우(脫兀脫), 상서 유숙(劉肅), 시랑 이간(李簡)을 함께 보내 다스리게 했다. 세 사람은 형주에 도착한 후 마음을 합쳐 폐단을 제거하고 탐욕과 폭정을 혁파했다. 그리하여 도망쳤던 백성들이 잇달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호구가 10배로 늘어났다.

몽케 즉위 3년째 되던 해, 동성 종친들에게 봉지를 크게 나누어 주었다. 모사인 요추의 건의에 따라 쿠빌라이는 경조(京兆)를 봉지로 받아들였는데, 경조는 바로 장안(長安)이며 관중(關中) 지역에 속해 예로부터 패업(霸業)을 다투는 자들이 반드시 다투던 곳이었다. 그 후 쿠빌라이는 하동(河東) 해주(解州)의 염세(鹽稅)를 떼어내 군자금으로 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또 경조에 선무사(宣撫司)를 설치해 패란해(孛蘭奚), 양유중을 선무사사(宣撫司使)로 삼아 둔전을 실시할 것을 청했다. 나아가 자신의 친병(親兵 친위대)을 흥원(興元, 지금의 섬서성 한중 일대)에 배치해 남송 병마를 방어하도록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관롱(關隴 관중과 감숙 일대) 지역이 크게 다스려졌다.

1256년, 몽케는 또 회경로(懷慶路) 맹주(孟州, 현재의 하남성 초작焦作)를 쿠빌라이에게 봉지로 추가 하사했는데, 그 관할 구역은 지금의 하남성 수무현, 무척현(武陟縣) 서쪽과 황하 이북 등 지역에 해당했다. 쿠빌라이는 상정(商挺)을 파견해 맹주를 다스리게 하여, 토호와 강한 자들을 타격하고 생산을 발전시켰다. 이후 그곳에 수로를 파고 물을 끌어와 밭에 대어 농업 발전을 촉진했다.

형주, 하남, 관중 세 지역의 통치 상황에 대해, 요추는 훗날 쿠빌라이가 황제가 된 후 올린 상소문에서 매우 명쾌하게 총괄했다.

“태조(칭기스칸)께서 기업(基業)을 개창하심은 전대(前代)를 능가했으나, 채 다스리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후 여러 조정의 관료들은 형벌을 남발하여 민생이 피폐해졌습니다. 폐하께서는 본래 인자하고 성명하시어, 잠저(潛邸 즉위 전 거처)에 계실 때부터 성인의 책을 들으시며 매일 치국의 도를 논하셨습니다. 형주, 하남, 섬서와 같은 곳은 본래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곳들이었으나, 폐하께서 그곳에 안무, 경략, 선무의 삼사사(三使司)를 설치하시고 관리를 엄선해 부임시키셨으며, 녹봉을 지급하고 청렴을 장려하며 탐오를 제거하고 농상(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셨습니다. 3년이 되지 않아 이 지역들이 매우 잘 다스려졌습니다. 각지의 백성들이 자식이 어머니를 바라듯 폐하께서 가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쿠빌라이가 막남과 한인 지역 사무를 총괄한 후 백성들을 구제하고 보살피면서 사사로움 없이 공정하게 처리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다스리는 곳이 번창하고 재부도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 이는 어쩌면 유가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그의 정치가 거둔 첫 시험 무대였을 것이다.

쿠빌라이의 “백성을 사랑한다는 영예(愛民之譽)와 어진 이를 좋아한다는 명성(好賢之名)”은 한인 지역 전역으로 신속히 퍼져나갔다. 바로 이 금련천 시기에 쿠빌라이 주변에는 이전에 모집했던 한족 막료와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가 계속해서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초빙하고 특별 예우로 대우함”으로써 엘리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이로 인해 유명한 ‘금련천 막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쿠빌라이가 막남을 총괄하고, 대칸의 지위를 계승하며, 원 제국을 건설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참고자료:
《新元史》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秘史》
《成吉思汗忽必烈評傳》
《蒙古在俄羅斯的戶口調查》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5/28/n1298297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