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220년)
심연
【정견망】

동한 시기 문학, 예술, 과학기술을 통해 동한 왕조의 면모를 한 걸음 더 들여다보자.
문화
* 문학
동한 시기의 문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했다.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서한(西漢)의 문풍을 계승하여 언어가 화려했고, 중기에는 정치가 어둡고 사족(士族)의 힘이 약화되어 문학이 저조기에 빠졌다가 이후 서서히 회복되면서 문풍이 전환되었으며, 후기의 문학은 새로운 고봉에 이르러 위진남북조 문학을 직접 열었다.
동한의 문학 작품은 주로 부(賦), 산문(散文), 악부시(樂府詩)의 세 가지 형식을 포함한다. 대부(大賦)는 서한 무제 때 이미 성숙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동한에 이르러서는 더 발전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정감을 서술하고 사물을 묘사하는 각종 소부(小賦)가 이를 대신했는데, 이러한 소부는 대부의 과장되고 판에 박힌 형식을 어느 정도 벗어나 의경(意境)이 비교적 청신했다. 특히 동한 말년 난세의 참상은 소부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하여 자유롭게 감정을 서술하고 고통과 번민의 정서를 배출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산문 방면에서는 주로 동한 반고(班固)가 찬술한 《한서(漢書)》가 있는데, 이는 《사기(史記)》를 이은 또 하나의 사학(史學) 명저이자 동한 산문의 가장 높은 성취다. 동한 후기에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 평론성 산문도 출현했다.
시가 방면에서 동한 악부시는 대부분 ‘슬픔과 기쁨에 감응하여 일로 인해 발생한(感於哀樂,緣事而發)’ 민간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그것들의 내용은 당시의 사회생활을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반영했다. 당시 악부 민가의 영향 아래 악부를 모방하여 지은 오언시(五言詩)도 일부 출현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악부시보다 편폭이 비교적 길고 서사가 곡절이 있었다. 소재가 다양하고 악부의 기교를 흡수하여 사구가 평이하고 감동적이며 의경이 깊고 영원했다.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대표로 해서 동한 후기 문인들의 오언시(五言詩)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 사학(史學)
동한의 역사학자 반고(班固 32~92년)가 찬술한 《한서》는 《사기》를 뒤이은 또 하나의 사학 명저이자 중국 사학 최초의 단대사(斷代史 한 조대의 역사를 서술) 저작이다. 반고는 20여 년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의 대부분을 완성했으나, 나중에 두헌(竇憲)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한서》는 아직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그의 여동생 반소(班昭)와 같은 고향 사람 마속(馬續)이 이를 완성했다.
《한서》의 기사(紀事)는 한 고조(高祖) 원년(기원전 206년)부터 시작해 왕망(王莽) 지황(地皇) 4년(23년)에 끝나며, 12세(世) 230년이다. 십이기(十二紀), 팔표(八表), 십지(十志), 칠십열전(七十列傳)을 포함해 총 100편이다. 내용이 방대하고 구조가 엄밀하며 기, 표, 지, 전의 네 부 편제는 《사기》와 큰 차이가 없다. ‘기’와 ‘표’는 사건과 역사 과정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고, ‘지’는 전장(典章)제도를 기술했으며, ‘전’은 각종 인물 및 소수민족의 역사를 썼다. 《한서》는 《사기》 중의 ‘세가(世家)’ 체제를 폐지했다. 그리고 ‘서(書)’를 ‘지(志)’로 고쳤으며, ‘제기(帝紀)’가 전 책을 통솔하는 지위를 의도적으로 부각하여 ‘기’의 강령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傳)’을 더욱 충실히 했다.
《한서》는 처음으로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고금인표(古今人表)》를 창립했다. 《한서》의 지는 후인들에게 더욱 중시되었다. 《형법(刑法)》,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문(藝文)》은 《한서》에서 처음 만들었다.
동한의 또 다른 사학 저작은 순열(荀悅, 148~209)이 쓴 《한기(漢紀)》인데, 서한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編年體) 사서로 총 30권이다. 순열이 이 책을 찬술한 것은 주로 《한서》의 번잡함을 없애고 간결하게 한 것으로 내용은 기본적으로 《한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기》의 공헌은 《춘추(春秋)》와 《좌전(左傳)》을 이어 다시 편년체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편년체 사서가 기전체와 더불어 나란히 중시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서 체제가 되게 했다는 점이다.
* 언어
중국에서 최초로 자형(字形)을 계통적으로 분석하고 자원(字源 글자의 어원)을 고찰한 자서(字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약칭 《설문》)는 동한 때 만들어졌으며 저자는 허신(許慎)이다. 이 책은 중국 고대 자서의 기초를 닦았으며 후세가 중국 고대 문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설문해자》 원서는 14편, 서목(敘目) 한 편이다. 본문은 소전(小篆)을 위주로 하여 9353자를 수록했고, 또 고문(古文), 주문(籀文) 등 이체중문(異體重文) 1163자가 있으며, 해설은 13만 3441자다. 이 책은 주(周), 진(秦)에서 한(漢)에 이르는 자서의 편찬 방법을 바꾸었는데, 즉 수록된 글자를 사언(四言), 칠언(七言) 운어(韻語)의 형식으로 엮던 것을 최초로 부수(部首) 편제법을 창시해 540부로 나누었다.
허씨는 또 이전의 ‘육서(六書)’ 이론을 총괄해 문자를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창립했는데, 먼저 자의(字義)를 해석하고 다음으로 형체 구조를 분석한 후 다시 독음을 설명했다. 자형을 분석하는 방법은 이전까지 자서에는 없던 것이다. 이 책은 고문자, 고문헌과 고사(古史) 연구에 모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이 책은 유전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고쳐졌는데, 현존 판본은 송대 서현(徐鉉)이 교정한 것으로 원서와 차이가 꽤 많으며, 서씨는 매 편을 상하 이 권으로 나누어 총 삼십 권으로 만들고 9431자를 수록했으며 새로 쓴 글이 1279자이고, 해설 12만 2699자다. 후세 학자들은 《설문》을 연구하는 것을 전문적인 학문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주를 단 학자가 수십 가에 이른다. 그중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계복(桂馥)의 《설문해자의증(說文解字義證)》, 왕균(王筠)의 《설문구독(說文句讀)》, 《설문석례(說文釋例)》와 주즌성(朱駿聲)의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이 가장 유명하다.
예술
* 회화와 조각 예술
동한의 회화는 성취가 매우 높으며, 한(漢) 화상석(畫像石)은 통상 건축, 조각, 회화를 일체로 모았다. 당시 관료와 부호들은 흔히 석재를 사용해 무덤이나 사당을 축조하고 석재 화상(畫像) 위에 조각을 진행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화상석이라 부른다. 화상석의 소재는 풍부해서 어렵(漁獵 낚시와 사냥), 경직(耕織 농사와 직물), 연회와 만찬, 전투, 기악(伎樂), 무도(舞蹈) 등의 장면과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 년간 남양(南陽)에서 출토된 한묘(漢墓) 중에는 화상벽돌, 한묘(漢墓) 벽화, 한대(漢代) 조각이 있었다. 내용은 주로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고 신선 세계를 반영한 것도 있다. 동한의 화공(畫工 화가가 맡은 업무) 종류는 매우 많았는데 등후(鄧后)의 조령 중에는 화공 삼십구 종을 언급한 적이 있다.
2003년 고고학자들이 섬서성 정변현(定邊縣) 한묘에서 발견한, ‘호랑이가 검무를 추고, 개가 거문고를 타며, 개구리와 수달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일상 대화를 나누는’ 대동(大同) 사상이 충만한 동한의 벽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벽화는 색채가 선명하고 화려하면서도 선이 유창하며 기법이 숙련되었으며 구도는 간결하고 조화롭다. 높이 약 2미터, 너비 약 1.8미터, 깊이 약 3미터의 묘실 내에서 정면은 주인 생전의 생활과 재부 상황을 표현한 농경, 수렵도이고, 동쪽 면은 주인의 신분 지위를 나타내는 출행도(出行圖)이며, 상부는 이십팔수 성상도(星象圖)다. 서쪽 그림의 내용이 가장 풍부한데, 주인이 죽은 후 선경(仙境)에 들어가 서왕모의 요대(瑤臺)에서 연회하며 술을 마시는데 춤추는 자, 노래하는 자,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모두 호랑이, 표범, 개, 용, 멧돼지 등 짐승이며 심지어 개구리와 수달도 한가하게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밀어를 나눈다. 만물이 함께 즐거워하고 사람과 짐승이 서로 조화로우며, 그림 속 주인은 마치 관광 엘리베이터 같은 투명한 매개체를 타고 있다.
조각 방면에서도 기법이 매우 성숙했다. 한 영제(靈帝) 때 네 개의 큰 동인(銅人)을 주조하여 관문(關門) 밖에 세웠고, 또 네 개의 큰 동종(銅鐘)을 주조했는데 각각 무게가 이천 근으로 궁전 앞에 매달았다. 2004년 천진 계현(薊縣) 소모장(小毛莊) 묘군에서 발굴된 벽돌과 돌 구조의 동한 대묘(大墓) 중 고고학자들은 매우 높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석각(石刻)과 채회(彩繪 채색화)를 발견했다. 묘실 입구에는 모두 돌로 된 문인방(門楣 문 위쪽을 받쳐주는 부재)이 있었다. 문인방 양측에는 모두 그림이 있는데, 한쪽은 감지부포(減地浮雕)의 조각법을 사용하여 한대의 ‘청룡’, ‘백호’ 등을 희미하게 분별할 수 있었고, 다른 한쪽은 선각(線刻) 수법으로 조류 동물 도안을 조각하고 채색 도료를 칠했다.
* 음악
동한 시기의 음악 풍격은 서한에서 계승되었다. 하남 남양에서 출토된 한화(漢畫) 중에는 악무백희도(樂舞百戲圖)가 있어 당시의 음악과 무용 상황을 반영한다.
악기(樂器) 방면에서 동한은 서한의 우(竽), 슬(瑟), 금(琴)을 보존했다. 쟁(箏)은 동한 말에 발전한 악기다. 쟁은 가장 일찍이 전국시대의 진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그때는 거칠어서 듣기 힘든 악기였으며 서한 때도 그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동한 말, 쟁의 제형이 반절 음상(半截音箱)에서 통체 음상(音箱 울림통)으로 바뀌어 금과 함께 슬을 향해 다가갔다. 개량된 쟁은 즉시 중요한 악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슬보다 작고 음역이 슬보다 높으며 소리가 맑고 밝게 나고 연주 기교가 슬보다 간단하여 점차 슬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우, 슬 위주의 악대(樂隊 악단)는 다시 죽(竹), 피리(笛 가로로 부는 피리), 쟁 위주로 변했다. 이는 위진 시기 음악이 고도로 발전되기 위한 기초를 다졌다.
동한 시기의 무용은 서한과 비슷해 대부분 연회장에 나타났는데 이러한 무용을 ‘잡무(雜舞)’라 부른다. 잡무에 반주하는 악대는 황문고취(黃門鼓吹 황제 직속 황문 소속의 대규모 취타대)다. 그 주요 악기에는 건고(建鼓), 우, 슬, 소(簫, 배소), 훈(塤)이 있고 여기에 종(鍾)과 경(磬)이 더해졌다.
서한 때 발전한 음악 형식인 ‘고취악(鼓吹樂)’은 동한 때도 여전히 채택되었다. ‘황문고취’ 역시 일종의 고취악으로, 한대 황제가 군신들을 향연할 때의 ‘식거악(食舉樂)’을 연주하고 잡무곡을 연주했다.
* 복식
서한 시기 관복(冠服) 제도는 대부분 진(秦)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동한 때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확립되었다.
한조의 의복은 주로 포(袍), 첨유(襜褕 곧고 긴 형태의 통옷), 유(襦, 짧은 의), 치마(裙)를 포함한다. 한대에는 직조와 자수업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돈 있는 집안은 능라주단(綾羅綢緞 화려한 비단 옷)의 의복을 입었다. 일반 집안은 짧은 상의와 긴 바지를 입었고, 가난한 집안은 단갈(短褐, 거친 베로 만든 짧은 상의)을 입었다. 한대 부녀의 의상은 저고리와 치마 두 피스 형식이었고 양식도 매우 많았으며 긴 도포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유선치마(留仙裙)’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자의 관복(官服)은 다음 몇 가지를 포함한다.
예복(禮服): 한조 제사 예복은 진대의 ‘육면(六冕 6종류의 면류관)’을 폐지하고 한 가지 면복으로 천지명당(天地明堂)에 제사 지내는 예복으로 삼았던 방법을 계승했다.
면관복(冕冠服): 가장 존귀한 제사 예복으로, 천자 및 삼공(三公)제후(諸侯), 경대부(卿大夫)가 천지명당에 제사 지낼 때 입는다.
장관복(長冠服): 집사(執事) 백관들이 종묘에 제사 지내거나 오악(五嶽), 사독(四瀆), 산천, 사직 등 각종 소사(小祀) 전례 때 입는 것이다.
위모관복(委貌冠服): 주나라의 관변복(冠弁服)에 해당. 공경이나 제후 대부가 벽옹(辟雍)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할 때 입었다.
피변관복(皮弁冠服): 이러한 관복은 대사례 때 집사자(執事者)가 입는 것으로 의상은 치마의(緇麻衣 검은색 삼베옷), 조령수(皂領袖 목과 소매 깃을 검은색으로 덧댄 것), 소상(素裳 흰 치마)이다.
조복(朝服): 진조(秦朝)부터 포(袍)를 조복으로 삼았는데 한대(漢代)에는 황제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를 조복으로 삼았고 이는 주요 상복(常服)이기도 했으니, 즉 심의제(深衣制)의 포복이다. 다만 신분이 다른 사람이 쓰는 관이 다름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이 있었다. 한대의 조복은 복색이 오시색(五時色), 즉 봄에는 청색, 여름에는 주색, 늦여름에는 황색, 가을에는 백색, 겨울에는 흑색을 따랐다. 조복은 모두 고연(告緣)의 깃과 소매를 댄 중의(中衣)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여자의 정식 복식은 이하 몇 가지 방면을 포함한다.
묘복(廟服): 주대(周代)의 도의(掉衣)에 상당하며 여자 예복 중 지위가 가장 존귀한 종류다.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가 조묘에 배알할 때 입는 복식으로 색깔은 검은 색이다.
잠복(蠶服): 주대의 국의(鞠衣)에 상당한다. 매년 3월 황후가 공경제후 부인들을 거느리고 잠례(蠶禮)에 참가할 때 입는다.
조복(朝服): 이천석(二千石) 부인 이상부터 황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잠의(蠶衣)를 조복으로 삼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