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쿠빌라이 유년기와 청년기 성장은 가족뿐만 아니라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칭기스칸이 위업(偉業)을 다진 후, 몽골 제국은 우구데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발전했다. 광활한 초원에는 웅장한 천막들이 즐비했고, 본토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상인들, 그리고 칸과 몽골 귀족들을 찾아와 피난처를 찾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양한 상품과 언어가 존재했다. 농업과 축산 외에도 농업과 수공예품이 발달했다. 대칸의 유르트(牙帳)가 있던 카라코룸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가 건설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쿠빌라이는 대외 전쟁 경험은 없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몽골 제국 바깥 세상에 대해 배우고 더 넓은 시야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넓은 시야와 사고방식은 그에게 다양한 야망을 안겨주었고, 더 많은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자신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을 찾게 되었다.
툴루이가 사망한 후, 소르칵타니는 우구데이에게 영지를 내려달라고 요청했고, 우구데이는 1236년에 그녀에게 하북 진정(河北眞定)을 주었다. 총명했던 그녀는, 초원 방목 경제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즉, 지역 농업 경제를 진흥할 방법을 모색했다. 같은 해, 막 성년이 된 쿠빌라이는 하북 형주(邢州 지금의 형대시)에 1만 가구의 봉지(封地)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수도 호룸에 거주하던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영지에 대해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취했고, 원격으로만 관리했다. 동시에 그는 또 고승 해운(海雲)에게 불법(佛法)을 전파하도록 요청했고, 몇몇 저명한 유학자들을 영입해 치도(治道)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소르칵타니는 초원 방목 경제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즉, 지역 농업 경제를 진흥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 그림은 청 초병정(焦秉貞)의 《경직도(耕織圖)》의 일부. (공유 영역)
고승 해운 법사가 불법을 말하다
당시 북방의 고승 해운은 이름이 인간(印簡), 속가의 성은 송(宋)으로 산서 영원(寧遠) 출신이었다. 그는 8세에 출가했고 불학에 정통했다. 금현종(金玄宗)으로부터 “통원광혜대사(通元廣慧大師)”라는 법명을 받았다.
1214년, 칭기스칸의 대군이 금나라와 대전을 벌일 때, 수하의 대장 무칼리는 칭기스칸의 “라마(승려)와 불경이 있는 사원은 파괴하지 말라”는 명령을 준수해, 금나라의 승려들을 별도로 안치한 후, 사람을 보내 대한(대칸)에게 보고했다.
“해운 화상과 그의 스승을 이미 찾아냈습니다.”
칭기스칸은 즉시 무칼리에게 당부했다.
“네가 사람을 보내 말한 대장로(大長老)와 소장로(小長老)는 모두 하늘과 소통하는 사람들이다. 너는 그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공급하여 잘 공양하라. 만약 다시 승려들이 있거든 일제히 잘 안치하고, 그들에게 장생천(長生天 텡그리)을 향해 기도하고 축복해 달라고 청하라.”
여기서 말한 ‘소장로’가 바로 해운 법사였다.
이후 해운 법사는 몽골 대칸과 왕공 귀족들의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1242년, 쿠빌라이는 초원을 행각하던 해운 법사를 처소로 초빙해 ‘불법 대의(佛法大意)’를 설명해줄 것을 청했다. 쿠빌라이는 해운 법사를 지극히 존경하며 진심으로 대했고, 아무리 정무가 바쁜 와중에도 반드시 시간을 내어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쿠빌라이가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지 묻자, 해운 법사는 먼저 천인(天人)의 관계와 인과응보를 설명한 뒤 불법의 여러 핵심개념을 설파했다.
이에 쿠빌라이가 “불법(佛法) 중에 천하를 안정시키는 법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법사는 “불법은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없는 것이 없습니다. 위정(爲政)의 목표는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은 정책과 천심(天心)에 달렸는데, 정책은 사람마음(人心)이고 천심(天心) 또한 마음이니, 모두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국가 대사에 대해서는 ‘대현석유(大賢碩儒, 현명한 대 유학자)’에게 가르침을 청할 것을 권고했다.
해운 법사가 머물던 기간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쿠빌라이의 차남이 태어난 것이다. 쿠빌라이는 해운 법사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다. 해운 법사는 이를 수락하며 갓난아기의 관상을 보기를 원했다. 쿠빌라이가 아들을 안고 오자, 신기하게도 이제 막 눈을 뜬 아기가 해운 법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기의 눈빛은 빛나고 영롱했으며, 갓난아기에게서 볼 수 있는 두려움이나 아득함이 전혀 없었다. 해운 법사는 미소를 지으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진금(眞金)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말하며, 아이의 이름을 ‘진금(眞金)’이라 지었다.
해운 법사의 수행으로 보아, 아마도 갓난아기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진금’이 훗날 쿠빌라이가 대원(大元) 왕조를 건국한 후 첫 번째 황태자가 된다.
해운 법사는 떠나기 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이자 불교·유교·도교에 모두 정통한 기재(奇才)인 석자총(釋子聰, 곧 유병충劉秉忠)을 쿠빌라이의 곁에 남겨두었다. 그는 훗날 쿠빌라이가 천하를 통일하고 다스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보좌(輔佐) 중신이 되었다.

청 《古聖賢像傳略》에 등장하는 유병충(劉秉忠). (공유 영역)
승복을 입은 “총(聰)서기“
유병충의 원래 이름은 유관(劉寬)으로, 대대로 요(遼)와 금(金)에서 관직을 지낸 가문 출신이ㅣ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 관리인 무칼리 밑에서 일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다. 그는 여덟 살에 학교에 입학했을 때 매일 수백 단어를 암송할 수 있었다. 그는 열세 살에 원수부(帥府)에 인질이 되었다. 열일곱 살에 그는 형대절도사(邢台節度使) 부의 영사(令史)가 되었다. 영사로 있을 때, 그는 종종 울적해져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느껴 사직하고 무안산(武安山)에 은둔했다. 몇 년 후, 그는 천녕사(天寧寺) 허조선사(虛照禪師)의 도제가 되었고 이름을 자총(子聰)으로 개명했다. 그 후 운중(雲中)을 행각하며 남당사(南唐寺)에 머물렀다.
해운 법사가 운중을 지나며 행각할 때, 석자총이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동행을 요청했으며, 그 후 함께 쿠빌라이를 만나러 갔다. 석자총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특히 《역경(易經)》 및 송나라 소옹(邵雍 소강절)의 황극(皇極)에 관한 책을 깊이 연구했고, 천문, 지리, 율력(律曆), 점복(占卜)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 천하의 일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았다. 쿠빌라이가 매번 그와 함께 천하 대사와 치국방략(治國方略)을 논할 때마다 그는 물 흐르듯 대답했으며, 쿠빌라이는 그의 재능을 매우 감탄하고 아껴 마침내 그를 곁에 머물게 하여 수시로 물어볼 수 있게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자총과 쿠빌라이는 “정(情)과 우호가 날로 친밀해져 대화를 나누면 반드시 밤이 깊었으니,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듯하고 호랑이가 산에 있는 듯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쿠빌라이의 곁에는 승복을 입은 군사(軍師)가 한 명 더 많아졌다. 동시에 그는 또 부저(府邸, 막부)의 각종 문안(文案, 문서)을 관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법호 중 한 글자를 취해 그를 ‘총서기(聰書記)’라 불렀다.
몇 년 후, 석자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친상을 치르러 집으로 돌아갔는데, 쿠빌라이가 금 백 냥을 하사하여 장례 비용으로 쓰게 했고, 또 사람을 보내 그를 형주(邢州)까지 배웅하게 했으니, 그를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복상(服喪) 기간이 만료된 후, 쿠빌라이는 그를 다시 카라코룸으로 불러들였다.
명유(名儒)를 초빙해 치세의 도를 묻다
아마도 해운법사 및 석자총과의 담화에서 계시를 얻었을 텐데 쿠빌라이는 1242년부터 일부 한인(漢人) 막료들을 초빙해 임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유학을 신봉하는 유생들이었고 일부는 그 지방의 명유들이었다. 예를 들면 조벽(趙璧), 두묵(竇默), 요추(姚樞), 장덕휘(張德輝) 등이었다. 명유를 한 명 초빙할 때마다 쿠빌라이는 모두 그들에게 유가 문화, 특히 유가 경전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역》, 《자치통감》 등을 강의해 달라고 청했다.
유가 사상 속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리는 쿠빌라이를 깊이 매료시켰으며, 그가 똑같이 흥미를 느낀 것은 역대 왕조의 치란흥쇠(治亂興衰)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 및 치세의 도(治世之道)였다. 쿠빌라이가 유가 문화를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명유(名儒)들은 또한 바다처럼 많은 문화 전적 중에서 일부 편장을 선별해, 그를 위해 《오경요어(五經要語)》 무릇 28류를 엮어 독본(讀本)으로 삼았다. 여기서 쿠빌라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명유 몇 명을 먼저 소개한다.
◎ 조벽(趙璧): 자가 보신(寶臣)이며, 운중(雲中) 화인현(懷仁縣 지금의 산성성 회인현) 사람이다. 소년 시절 명사(名師)인 구산(九山) 이미(李微), 금성 난광정(蘭光庭)을 따라 유술(儒術)을 연구했는데, “아침으로 외우고 저녁으로 익히니” 학업의 진보가 매우 빨랐다.
그의 명성을 들은 쿠빌라이는 1242년 그를 호룸으로 불렀다. 당시 조벽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당시 막북(漠北)으로 오는 유생은 많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그를 만난 후 존경의 표시로 이름 대신 “수재”라 불렀다. 또한 세 명의 하인을 주고 아내에게 옷을 지어 입히도록 했고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쿠빌라이의 지우(知遇, 자신을 알아주고 잘 대우해 줌)의 은혜에 감격한, 조벽은 한편으로는 몽골어를 진지하게 배워 10명의 몽골족 학생에게 유가 문화를 강의했고, 몽골어에 정통해진 후에는 명을 받들어 쿠빌라이를 위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번역해 강의했다. 쿠빌라이는 일찍이 그가 한인(漢人)이면서도 “국어(몽골어)을 이처럼 깊고 세밀하게 할 수 있다”며 감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쿠빌라이의 명을 받들어 각지에 떠돌던 금조(金朝)의 명사(名士)들을 초빙해 쿠빌라이를 보좌하게 했는데, 요추(姚樞), 왕악(王鶚) 등의 사람들이 바로 그가 찾아낸 이들이다.
1251년, 쿠빌라이의 친형인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자, 조벽을 불러 어떻게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지 물었다. 조벽은 “먼저 근시(近侍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 더욱 좋지 못한 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즉 주변에 아첨하는 신하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뭉케는 이를 듣고 매우 불쾌해했다. 나중에 쿠빌라이가 그에게 말했다. “수재(秀才)여, 그대는 온몸이 담(膽)으로 가득 찼구려! 나 역시 그대 때문에 두 손에 땀을 쥐었소.“

조벽은 한편으로는 몽골어를 진지하게 배워 10명의 몽골족 학생에게 유가 문화를 강의했다. 그림은 명 구영(仇英)의 공자의 〈퇴수금서도(退脩琴書圖)〉 일부. (공유 영역)
◎ 두묵(竇默)은 자가 자성(子聲)이며, 광평(廣平) 비향(肥鄉 지금의 하북 한단에 속함) 사람이다. 어릴 때 독서를 좋아했고 의지가 확고했다. 몽골 군대가 금나라를 칠 때 두묵은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셨으나, 고향 또한 전화(戰火)에 휩쓸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 모두 병이 났다. 그 후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는 병을 앓는 몸으로 어머니를 장사 지냈다.
몽골 군대가 다시 습격해 오자, 두묵은 남쪽으로 도망쳐 황하를 건너 외삼촌 오씨(吳氏)에게 의지해 살았으며, 아울러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명의(名醫) 이호(李浩)를 만나 그에게 동인침법(銅人針法)을 전수받았고, 이때부터 의술이 크게 진보해 나중에 일대(一代)의 명의가 되었다. 북쪽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고향에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되 돈과 재물을 따지지 않고 보답을 구하지 않았으며, 병이 있어 문하에 구하러 오기만 하면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 차별 없이 대했고 조금이라도 보답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의덕(醫德)의 고상함을 볼 수 있다.
금나라 애종(哀宗)이 채주(蔡州)로 천도하자, 두묵은 몽골 군대가 침입할까 두려워 마침내 덕안(德安)으로 달아났고, 이곳에서 안심하고 독서했다. 금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한 후, 몽골국의 중서(中書) 양유중(楊惟中)이 성지를 받들어 유·도·석(儒道釋)의 선비들을 소집하자, 두묵은 이로 인해 북쪽으로 돌아왔으나 대명(大名)에 은거하며 요추(姚樞), 허형(許衡)과 아침저녁으로 학습하고 토론하여 침식을 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다시 비향으로 돌아와 유가 학설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로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쿠빌라이가 두묵의 명성을 들은 후, 그의 친구를 통해 그를 부저(府邸)로 초청했다. 쿠빌라이의 부저에 도착한 후 쿠빌라이가 그에게 치세의 도를 물으니, 두묵은 가장 먼저 유가의 삼강오상(三綱五常)을 언급했는데, ‘삼강’은 즉 세 가지 윤리인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며,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는 것이다. ‘오상’은 즉 다섯 가지 인륜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다. 두묵이 보기에, 한 사회가 조화롭고 질서 있으려면 반드시 삼강오상을 준수해야 했다.
두묵은 또 쿠빌라이에게 말했다. “제왕의 도는 성의정심(誠意正心,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으니, 마음이 이미 바르면 조정의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감히 바르지 않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즉, 만약 제왕이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윗사람이 행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본받아 각급 대신(大臣)들도 감히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묵의 말은 쿠빌라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하루 세 번씩 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대답이 쿠빌라이의 뜻에 부합했다. 그 후로 쿠빌라이는 그를 특별 대접하고 곁을 떠나지 않게 했다.
쿠빌라이는 그에게 지금 시대에 누가 치도에 밝은지 물었다. 두묵이 요추와 허형을 추천하자 쿠빌라이는 즉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불러오게 했다.
그 후 쿠빌라이는 두묵을 사랑하는 아들 진금의 사부로 삼았다. 그는 또 그에게 옥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를 주며 말했다. “이것은 금조(金朝) 내부(內府)에서 온 것입니다. 당신은 노인이니 이것을 차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하면 왕자가 이 물건을 보면서 마치 나를 보는 것처럼 할 겁니다.”
◎ 요추(姚樞)는 자가 공무(孔茂)이고 유성(柳城) 사람인데 나중에 낙양(洛陽)으로 옮겨갔다. 그가 어렸을 때 양유중이 그와 함께 우구데이를 조현했다. 1235년, 몽골 군대가 남쪽에서 송나라를 공격하자 요추에게 양유중을 따라 군대에 가서 유가, 도가, 불가, 의술, 점술가들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몽골 군대가 조양(棗陽)에 침입해 대장이 성 주민들을 죽이려고 했다. 요추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황제의 칙령의 의도가 아니며, 앞으로 황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했다. 결과적으로 살육이 중단되었다.

요추는 자가 공무(公茂)이고 호는 설재(雪齋) 또는 경재(敬齋)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공유 영역)
1241년, 요추는 연경행대낭중(燕京行台郎中)에 임명되었고 금부(金符)를 하사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뇌물을 거절한 일로 관직을 버리고 떠났으며, 가솔을 이끌고 휘주(輝州)로 이주해 그곳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특별히 방 한 칸을 두어 공자 및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등을 봉안했다. 경서를 간행하는 일 외에, 그는 매일 독서하고 거문고를 타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1250년, 쿠빌라이는 조벽을 보내 요추를 일단 번저(藩邸, 번왕의 막부)로 초청해 상빈(上賓)의 예로 대우했으며, 치국의 도를 물었다. 요추는 수천 마디의 글을 올렸는데, 먼저 이제(二帝 요순)와 삼왕(三王)이 천하를 다스리고 평정하는 도리를 8가지 조항으로 나열했으니, 즉 수신(修身 자신의 몸을 닦음), 역학(力學 힘써 학습), 존현(尊賢 어진 이를 존중), 친친(親親 가까운 이와 친하게), 외천(畏天 하늘을 두려워함),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호선(好善 선한 이를 좋아함), 원녕(遠佞 간사한 이들을 멀리함)이었다.
그다음으로 시대의 폐단 구하는 30가지 조항을 나열했는데, “본말을 모두 갖추었고 미세함과 거대함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가 언급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서성(中書省)과 각 부(部)를 설립해 정령(政令)을 통일하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
② 현능한 이를 선발해 임용하고 평범하고 무능한 자를 도태시킬 것,
③ 봉록을 지급해 뇌물 수수를 막을 것,
④ 법률을 제정하고 옥사를 심리해 생살(生殺)의 권력을 조정으로 거두어들여 억울한 자가 누명을 벗을 수 있게 할 것,
⑤ 감찰기관을 설치해 관원 중 능력 있는 자는 올리고 무능한 자는 내릴 것,
⑥ 세금 강제 징수를 중지해 부족들이 재물을 약탈하거나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할 것,
⑦ 역전(驛傳)을 정돈하고 축소해 주군(州郡)의 부담을 덜어줄 것,
⑧ 학교를 수리하고 경서(經書)를 제창하며 절효(節孝, 절개와 효도)를 표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을 순화할 것,
⑨ 농업을 발전시키고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서 할일없이 노는 것을 금지할 것,
⑩ 군정의 규율을 엄숙히 해서 백성을 괴롭히지 않게 할 것,
⑪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이를 진휼할 것,
⑫ 둔전(屯田)을 실시해 변방을 수비하고 국방을 공고히 할 것,
⑬ 내부 운하의 조운(漕運)을 개통해 경성의 창고를 풍족히 할 것,
⑭ 고리대를 금지해 채무자가 파산에 이르지 않게 할 것,
⑮ 상평창(常平倉)을 설립해 식량을 저축하고 흉년에 대비할 것,
⑯ 도량형 제도를 건립해 간사한 장사꾼이 속이지 못하게 할 것,
⑰ 무고를 근절해 불필요한 소송을 줄일 것……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모두 한인(漢人)이 국가를 다스리는데 효과적인 방식들이었다.
요추의 건언을 본 후, 쿠빌라이는 그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여겼고 이에 자주 그를 불러 물었으며, 그를 자신의 주요 모신(謀臣)으로 삼았다. 아울러 그를 초빙해 자신의 장자(長子)에게 경서를 강의하게 했다.
◎ 왕악(王鶚)은 자가 백일(百一)이며, 조주(曹州) 동명(東明) 사람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큰 새가 뜰에 와서 멈추었기 때문에, 이름을 ‘악(鶚 물수리)’이라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민첩해서 매일 천여 구절을 암송할 수 있었고, 자란 후에도 사부(詞賦)에 능했다. 금나라 애종 정대(正大) 원년(1224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금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다. 채주(蔡州)가 몽골 군대에 의해 함락된 후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구출되어 보주(保州)에 정착했다.
1244년, 그는 쿠빌라이에 의해 막북의 부저(府邸 친왕의 저택) 초빙되었는데, 쿠빌라이는 그를 각별히 우대해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자리를 내주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장원(狀元)’이라 불렀다. 왕악은 매일 쿠빌라이를 위해 《효경》, 《서경》, 《역경》 및 제가(齊家)치국(治國)의 도를 강의했고, 고금 사물의 변화를 진술하여 자주 밤깊도록 강의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년 남짓했다. 쿠빌라이는 일찍이 그의 주장에 감동해 “내 지금은 비록 즉시 실행하지 못하나, 훗날에 행할 수 없다고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했다.
나중에 왕악이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쿠빌라이는 그에게 자신 곁에 머물기를 청했고 아울러 그에게 큰 저택을 하사했다. 쿠빌라이는 또 자신의 측근인 코코(闊闊), 염희헌(廉希憲), 채정(柴禎) 등 5명으로 하여금 왕악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문화(漢文化)를 배우게 했다.
◎ 장덕휘(張德輝)는 금나라의 대유(大儒)로, 일찍이 금나라 어사대에서 근무했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대장 사천택(史天澤)의 휘하에서 관직을 지냈다. 1247년에 쿠빌라이가 불려갔다. 장덕휘는 《영북기행(嶺北紀行)》 중에서 쿠빌라이를 알현한 경과를 기재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쿠빌라이가 장덕휘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공자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그 성(性)은 어디에 있는가?”
장덕휘가 대답했다.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종시(終始)를 함께하시니, 가는 곳이 없고 어디든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능히 성인의 도를 행하신다면 곧 성인이 되시는 것이니, (공자의) 성(性)은 진실로 이 장전(帳殿 유르트) 안에 있습니다.”
쿠빌라이가 또 물었다.
“어떤 이가 말하길, 금나라는 유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설이 있습니까?”
장덕휘가 대답했다.
“금나라 재신(宰臣 대신) 중 비록 한두 명 유신(儒臣)을 기용하기는 했으나, 그 나머지는 모두 세습된 무장들이었으며, 군국대사를 토론할 때는 유신을 결코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생으로서 나아가 재신이 된 자는 대개 30분의 1에 불과하여, 그저 장부나 열람하고 송사를 듣고 재물을 다스렸을 뿐입니다. 금나라의 존망은 스스로 책임질 할 사람이 따로 있으니, 유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쿠빌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고 여겼다.
쿠빌라이가 “조종(祖宗)의 법도가 모두 존재하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많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는 의문을 제기했을 때, 장덕휘는 은쟁반을 가리키며 비유를 들어 말했다.
“국가의 대업(大業)을 개창하는 것은 이 은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은(白金)과 훌륭한 장인을 엄선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제작한 후, 이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영원히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신중하고 후덕한 사람에게 맡겨 관리하게 해야만 영원히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가질 뿐만 아니라, 도난될 위험마저 있습니다.”
쿠빌라이는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이오.”
쿠빌라이가 또 중원에서 어떤 인재를 등용할 만한지 묻자, 장덕휘는 위번(魏璠), 원유(元裕), 이치(李治) 세 사람을 포함해 20여 명을 천거했다. 여기서 원유는 바로 원호문(元好問)을 말하며, 이치와 함께 모두 장덕휘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원사(元史)》 장덕휘 전(傳)에서 언급된 이른바 ‘봉룡산삼로(封龍山三老)’ 중 두 사람이다.
1248년 봄, 쿠빌라이와 장덕휘의 두 번째 대화에서 쿠빌라이는 왜 공자에게 제례를 올려야 하는지 물었다.
장덕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자는 만대(萬代)에 걸쳐 천하를 주재하는 이들의 스승이시니, 역대 군주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의 사당을 매우 엄숙하고 장엄하게 짓고 때맞춰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를 숭배하느냐 아니냐는 성인에게 아무런 이득도 해도 되지 않지만, 이를 통해 군왕이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마음(崇儒重道)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앞으로 이 예법을 폐하지 말라”고 말했으니, 즉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전(大典)을 영원히 지속하라는 의미였다.
그 외에도 장덕휘는 “군대를 거느리는 것과 백성을 다스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백성에게 가장 해를 끼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덕행이 있는 사람을 임용해야만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피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일찍이 “천하에 큰 뜻을 펼치고자” 했던 쿠빌라이는 확실 이러한 한족 고승과 명유(名儒)들의 강론을 통해 불법(佛法)을 더욱 깊이 이해했고, 유가 문화를 이해했으며, 어떻게 제왕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배웠다. 이는 그의 조부(칭기즈칸)가 이루지 못했던 사업을 완수하는 데 탄탄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또한 쿠빌라이는 역대 제왕들 중에서 당 태종, 송 태 및 금 세종을 아주 중시했다. 그중 금 세종은 금나라가 전면적인 한화(漢化)로 나아가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당 태종은 즉위 전 진왕(秦王) 시절 방현령, 두여회 등 한 무리의 인재를 불러 모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한 시대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이 역시 쿠빌라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훗날 나라를 다스리고 처세하는 방면에 있어 쿠빌라이 역시 이들 명군을 의도적으로 본받으려 했는데 여기에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당시 쿠빌라이의 행보를 보면, 그는 이미 유가가 국가에 ‘큰 이익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가로 천하를 다스리려는(以儒治天下)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훗날 그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원조 황제가 된 후에도 유가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传》
《大藏经》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5/25/n12975184.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