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劉如)
【정견망】
이번 동맹군의 역적 토벌은 조조와 원씨 형제가 도량과 식견에서 벌인 첫 번째 대결이기도 했다. 조조가 관우를 위해 기회를 주는 과정은 각자의 경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이미 여기서 판가름 난 것이다. 원씨 가문은 결국 조조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패했다. 동시에 조조와 관우의 끊을 수 없는 인연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관우의 출전 요청과 조조의 강력한 지지
유비는 본래 공손찬(公孫瓚)과 친한 사이였다. 제후들이 모여 동탁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원현령(平原縣令)이라는 관직을 버린 채 관우, 장비와 함께 공손찬 휘하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한실 종친의 신분을 전국의 제후들 앞에 공포하게 되었다. 각로 제후들이 사수관(汜水關)에서 화웅(華雄)에게 참패했을 때,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
원소가 말하기를 ‘아깝구나, 나의 상장 안량(顔良)과 문추가 아직 오지 않았구나! 그중 한 사람만 여기 있었어도 어찌 화웅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아래에서 한 사람이 크게 외치며 나왔다.
‘소장이 나가 화웅의 머리를 베어다 휘하에 바치겠습니다!’
사람들이 보니 키가 9척이고 수염이 2척이며, 붉은 봉황의 눈에 누에처럼 진한 눈썹을 지녔고 얼굴은 잘 익은 대추 빛이며 목소리는 커다란 종소리 같은 이가 장막 앞에 서 있었다.
원소가 누구냐고 묻자 공손찬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유현덕의 동생 관우요.’
원소가 현재 직책을 묻자 공손찬이 답했다.
‘유현덕을 따라 마궁수(馬弓手)를 맡고 있소.’
장막 위에서 원술이 크게 호령하며 ‘네가 우리 제후들에게 대장이 없다고 기만하느냐? 일개 궁수 주제에 어찌 감히 망언을 하느냐! 저놈을 매질하여 쫓아내라!’
조조가 급히 만류하며 말했다.
‘공로(公路, 원술)는 노여움을 거두시오. 이 사람이 장담을 하니 필시 용맹한 전략이 있을 것이오. 시험 삼아 출전시켜 보고, 만약 이기지 못하면 그때 벌해도 늦지 않소.’
원소가 말했다.
‘궁수를 내보내 싸우게 하면 필시 화웅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조조가 말했다.
‘이 사람은 풍채가 비범하니 화웅이 그가 궁수인지 어찌 알겠소?’
관우가 말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제 목을 치십시오.’”
이처럼 관우는 모두가 당황하여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소가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은 관우의 직책이었다. 현령 아래의 보잘것없는 마궁수라는 말을 듣자, 원소의 동생 원술은 원소가 입을 열기도 전에 크게 화를 냈다. 관우의 낮은 직책을 깔보고 그를 출전시키는 것 자체가 제후들에 대한 모욕이라 여겨 동의는커녕 매질하여 쫓아내려 했다. 그의 말은 곧 원소의 속마음이기도 했으니, 상대에게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한 것이다.
영웅을 알아보지 못한 채 오직 가문과 출신만을 따지고 체면을 중시하는 원씨 형제의 고리타분한 식견과 좁은 도량, 오만한 품성이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만약 조조가 원소에게 기회를 주라고 권하며 원술과 원소의 체면 치레를 무마하기 위해 ‘풍채가 뛰어나니 상대가 궁수인지 모를 것’이라며 설득하지 않았다면, 관우는 정말로 원술에게 쫓겨나 출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목은 조조와 원소·원술 형제의 도량과 견식을 충분히 대비시켜 누가 높고 낮은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관우의 ‘건곤을 뒤흔든 첫 번째 공’(威震乾坤第一功)
조조가 관우를 위해 출전 기회를 얻어낸 후, 관우를 매우 정중히 대하며 따뜻한 술 한 잔을 권해 마시고 말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관우는 “술을 부어 두십시오, 다녀와서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장막을 나가 칼을 들고 말에 올랐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후들은 관 밖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고 함성이 하늘을 찌르며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에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황을 살피려는데 말방울 소리와 함께 말이 중군에 이르렀으니, 운장(雲長 관우)이 화웅의 머리를 땅에 던졌다. 그런데도 술은 여전히 따뜻했다. 훗날 사람이 시를 지어 찬양했다.
천지에 위엄을 떨친 제일의 공적이요,
원문(轅門)에 울리는 북소리 둥둥 울리네.
운장이 잔을 멈추고 용맹을 떨치니,
술이 채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었도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놀라게 한 관우의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의 신위다. 조조가 준비한 술이 식기도 전에 승전보를 전하며 돌아왔으니 실로 신속했다. 단지 이겼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품격 있고 여유롭게 승리했으니, 제후들의 장수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라서 앞서 제후들이 연이어 참패하며 보여준 화웅의 무적 같은 위용은 결국 관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였을 뿐이다. 즉, 앞에서 얼마나 길게 서술했든 그것은 모두 관우를 위한 포석이었으며, 관우야말로 이 전투의 주인공이었다. 그토록 두려운 맹장을 관우는 식은 죽 먹듯 해치웠다. 훗날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건곤을 뒤흔든 첫 번째 공’이라 찬양한 이유다.
관우의 승리, 원술의 시기, 조조의 경애
관우가 승리한 후, 본문은 조조와 원술의 서로 다른 반응을 묘사한다.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이때 현덕(유비)의 등 뒤에서 장비가 튀어나와 크게 외쳤다.
“우리 형님이 화웅을 베었으니, 이 기세로 관으로 쳐들어가 동탁을 생포해야지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오!”
원술이 대노하여 꾸짖었다.
“우리 대신들도 오히려 겸양하거늘, 한낱 현령 수하의 졸개 따위가 어찌 여기서 위세를 부리느냐! 모두 장막 밖으로 쫓아내라!”
조조가 말했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법인데 어찌 귀천을 따지는 것이오?”
원술이 말했다.
“그대들이 이토록 현령 따위를 중히 여긴다면 나는 물러나겠소.”
조조가 말했다.
“어찌 말 한마디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려 하오?”
그리고는 공손찬에게 현덕, 관우, 장비를 데리고 진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관원들이 모두 흩어지자 조조는 몰래 사람을 보내 소고기와 술을 전달하며 세 사람을 위로했다.
이 대목은 원술의 옹졸함과 시기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폭로하며, 인재를 아끼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벌을 분명히 하는 조조의 도량과 기개를 대비시킨다. 조조는 또 남몰래 술을 보내 유비 삼 형제를 위로하며 영웅에 대한 깊은 존경과 배려를 보였다. 그러니 훗날 원술과 원소 일방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조와 관우는 여기서 선연(善緣)을 맺어, 훗날 오관참장(五關斬將)과 화용도에서 조조를 의롭게 풀어주는 일 등 천고에 전해질 충의(忠義)와 은의(恩義)의 역사를 함께 연기하게 된다.
숙부의 피살에도 무정무의(無情無義)한 원소
다시 원소를 보자. 그의 숙부 원외(袁隗)는 당시 낙양에서 태부(太傅)라는 높은 관직에 있었다. 동탁은 사수관에서 패한 뒤 원소가 맹주라는 사실을 알고 원외의 일가족을 몰살했다. “노소 불문하고 모두 죽였으며”, “원외의 수급을 관 앞으로 보내 본보기로 삼았다.” 동탁은 이에 20만 군사를 일으켜 5만 명으로 사수관을 지키게 하고, 본인은 여포 등과 함께 15만 대군을 이끌고 호뢰관으로 향했다. 이 싸움은 여포가 주장이었기에 난도가 훨씬 높았고, 이로 인해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세 영웅이 여포와 싸우다)’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본문에 원소가 숙부 일가의 참혹한 도륙 소식을 듣고 슬퍼하거나 분노했다는 묘사가 단 한 글자도 없다는 점이다. 동탁이 패배하여 천자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할 때도 그는 추격하지 않았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저히 정황에 맞지 않는다. 훗날 원소가 공손찬을 속여 기주(冀州)를 빼앗고 서약을 어긴 일, 막대한 물자를 얻고도 원술에게 말을 빌려주지 않아 형제끼리 반목한 일을 떠올려보면, 원소와 원술의 됨됨이는 이익 앞에서 의리를 저버리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숙부의 죽음 앞에서도 무관심하고 아무런 동요가 없었으니, 이토록 무정무의하고 이기적인 인물들이 어찌 조조의 상대가 되겠는가. 그러니 필히 패망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이번 의거가 끝난 뒤 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영웅으로서의 견식과 본질은 끝내 가려지지 않는다. 현명한 신하가 주군을 골라 섬기고 천하의 호걸들이 주인을 선택하던 역사적 시기에, 그가 한 지방의 패자가 되어 수많은 의사(義士)들의 선택을 받고 충성스러운 주군이 된 것 자체가 문제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훗날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겸을 공격할 때 도량이 좁고 백성을 학살하는 불인불의한 인물로 묘사된 것은 오직 유비의 인의(仁義)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저자도 이를 서술함에 있어 상당히 모순을 느꼈을 것인데, 앞서 조조가 산동 일대 청주의 황건적 잔당을 소탕할 때 보여준 대의(大義)한 행보와 너무나 상충하기 때문이다. 황건 장졸 30여만 명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관련 백성 100여만 명을 살려준 것은 그가 무고한 이를 함부로 죽이지 않고 대다수 사람에게 살길을 열어주었음을 보여준다. 그 후 정예병을 추려 청주병(靑州兵)을 조직하고 그들을 포용했다. 비록 이 묘사는 짧지만, 그런 견식과 기개를 가진 인물이 훗날 도겸 토벌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죄를 물었을 리 없다. 이는 서술상의 커다란 모순이다.
조조가 의거에 임한 진심을 믿든 아니든, 적어도 큰 뜻을 품고 일방의 패자가 된 인물의 견식과 기개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단정할 수 있다. 어찌 공개적으로 백성을 학살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자신을 도의의 반대편에 두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는가. 더욱이 당시 그의 곁에는 곽가(郭嘉) 등 견식 있는 유능한 참모들이 많았으므로 이를 만류하지 않았을 리 없다. 복수를 위해 도겸을 치는 것은 정황상 맞을지 모르나, 백성을 공개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조조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저자의 붓 끝에서 그가 부정적인 형상이 된 목적은 오로지 유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호뢰관에서 벌어진 ‘삼영전여포’는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다. 8로 제후가 호뢰관에서 여포와 싸우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대항할 힘을 잃었을 때, 공손찬이 여포에게 찔려 죽을 뻔한 것을 장비가 의롭게 구해주면서 시작된다. 이것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여포와 겨루는 전투로 발전했고, 여포는 감당하지 못한 채 패퇴했다. 8로 제후들이 기세를 몰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여포를 물리쳤다. 조조의 호소로 시작된 이번 전국 제후들의 봉기는 조조와 유비 삼 형제라는 두 영웅의 길을 천하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 보였고, 두 쪽 모두 이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52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