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220년)
심연
【정견망】
*화제 이후의 변강(邊疆) 문제
동한 시기의 황제들은 변강 문제에 대해 대부분 안무 정책을 채택하여 일반적으로 가볍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제 이후의 변강 문제는 서북의 강족의 난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북방 부족들도 기본적으로 한실(漢室)에 귀부했다.
동한 초년, 남흉노의 투항에 따라 원래 남흉노에 기댔던 오환(烏桓) 선비(鮮卑)도 한조에 투항했다. 오환은 한조 경내의 북방 변경으로 이주해 몽골 고원을 벗어났다. 선비는 안으로 이주하지 않고 오환의 옛 땅을 탈취했다.
장제 시기, 선비족이 북흉노를 쳐부수자 북흉노 58부가 동한 왕조에 귀부했으므로 요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여 운중(雲中), 오원(五原), 삭방(朔方), 북지(北地) 등 군에 주둔하며 목축하게 했다.
화제 영원(永元) 2년(90년) 9월, 북흉노 선우는 동한 왕조가 그의 동생을 돌려보내 주었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고자 했다. 10월, 두헌은 반고(班固) 등을 보내 마중하게 했다.
영원 3년(91년) 북흉노가 패전하여 서쪽으로 이주함에 따라 남흉노, 오환이 또 속속 요새 안으로 들어왔고, 선비는 마침내 남쪽으로 더욱 광활한 토지를 차지해 지금의 내몽골 초원의 광대한 지역을 영유했으며, 흉노 중 서쪽으로 이주하지 않고 남은 무리 수십만 명을 흡수하여 실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이때부터 동한 왕조의 변방 각 군을 끊임없이 교란했다.
영원 7년(95년) 정월, 동한 왕조는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를 보내 호아영(虎牙營)을 오원군에 머물러 주둔하게 했다. 영원 8년(96년) 봄, 북흉노 좌부(左部)가 서로 의심해 배반하고 다시 삭방새(朔方塞지금의 바얀누르巴彥淖爾 맹 서남부)로 들어왔는데, 대략 만 여 구의 사람이 전부 동한 왕조에 귀부했다. 영원 12년(100년) 도요장군(度遼將軍) 방분(龐奮)이 하남윤으로 전임되자, 동한 왕조는 삭방태수 왕표(王彪)에게 도요장군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안제 영초(永初) 원년(107년)부터 영초 7년(113년) 사이, 지금의 내몽골 지역 북부에 거주하던 선비족 대인(大人) 연려양(燕荔陽)이 친히 도성인 낙양에 와서 조하(朝賀)하자, 동한 왕조는 선비왕에게 인수를 하사하고 선비족이 상곡군(上谷郡)의 영성(寧城 지금의 하북성 선화시 서북쪽)에서 시장을 열어 동한 왕조와 무역을 허락했다.
안제 원초(元初) 5년(118년) 봄, 북흉노 선우 봉후(逢侯)가 100여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삭방새에 이르러 한 왕조에 귀부하자 동한 왕조는 그들을 영천군(潁川郡 지금의 하남성 중부)에 배치했다. 이때부터 북선우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해졌다. 순제 영화(永和) 5년(140년) 동한 왕조는 서하군(西河郡)의 치소를 이석(離石)으로, 상군(上郡)의 치소를 하양(夏陽)으로, 삭방군의 치소를 오원(五原 지금의 바오터우 시 서쪽)으로 옮겼다.
환제 시기, 선비는 그들의 우두머리 단석괴(檀石槐)의 영도 하에 대막(大漠) 남북을 통일하고 유목 군사 정권을 건립했다. 영제 때 선비 정권이 와해되자 막남 지역은 운중군 동쪽으로부터 세 개의 지역 집단으로 나뉘었으며, 각 부의 선비는 각각 분계(分界)가 있었고 동한이 멸망할 때까지 이르렀다.
진정으로 동한에 위협을 준 것은 강족(羌族)의 난이었다. 서한 말년, 강족은 주로 지금의 청해 동북 일대에 거주하다가 후에 내지를 침입했다. 광무제 시기 강족이 여러 차례 한실의 변경을 침범해 소란을 피우자, 그들을 쳐부순 후 내지 즉 지금의 감숙 일대로 이주시켜 거주하게 했다. 동한 후기에는 정치가 어두워 지방 관리들이 국토를 지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강족을 더 안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했고, 이는 강족 민중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안제, 순제와 환제 때 모두 대규모의 봉기가 폭발했다. 비록 최종적으로 동한 왕조에 의해 진압당하긴 했으나 서북은 이미 피폐한 상태에 처했다.
북방의 소수민족 외에도 동북 변경에는 고구려, 부여, 읍루, 옥저 등의 국가 또는 부족 정권이 있었다.
청장고원 위에는 당모(唐旄), 발강(發羌) 등의 부족이 있었는데 당시 중원과의 왕래가 아직 많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문자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고원 동부의 황수(湟水) 유역, 사천분지와 운귀(雲貴)고원에 가까운 강인들은 한인들과 접촉이 비교적 많았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인 지역에 진입했다.
대만섬은 이주(夷洲)라 불렸는데 섬의 주민들은 대륙과 이미 왕래가 있었다. 해남섬은 주애주(朱崖洲)라 불렸으며 대륙과의 왕래가 상당히 빈번했다.
*멸망으로 향하는 동한
환제의 황후 두씨와 다른 많은 비빈들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므로 환제가 죽은 후 황후 두씨가 태후의 신분으로 임시로 정사를 주관했다. 두태후는 아버지 두무(竇武)와 함께 사람을 보내 나이 겨우 13세 된 유굉(劉宏)을 황제로 맞이했으니 이가 한 영제다. 유굉은 한 장제의 현손이자 하간효왕 유개의 증손이며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숙(劉淑)의 손자이고 유장(劉萇)의 아들이다.
영제가 즉위할 때 한 왕조는 이미 만신창이였고 위기가 사방에 도사려 위태로운 경지에 처해 있었다.
당시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유씨의 천하를 진흥시키고자 했으므로, 태부 진번(陳蕃)을 임용해 조정의 정치를 주재하게 하고 이응 등 천하의 명현(名賢)들을 다시 징용해 정사에 참여하게 했으며, 환관 세력을 소멸할 준비를 했다. 뜻밖에 환관들이 선수를 쳐서 169년 한 영제와 두태후를 겁박하고 진번과 두무를 주살했다. 이어 환관들은 환제 유굉을 핍박해 조서를 내려 당옥(黨獄)을 크게 일으켰고, 이응, 두밀 등 100여 명을 체포해 죽이고 700에 가까운 사람을 금고했으며 태학생 1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두 번째 ‘당고의 화’다.
이로써 한대 역사상의 환관 전권은 정점에 도달했다.
영제 유굉은 혼군(昏君)이었다. 그는 재위가 22년에 달했으나 나라를 다스릴 재능은 전혀 없었고 조정의 정치를 환관의 전횡에 내맡겼다. 한가의 천하를 진흥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사치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음란하고 뻔뻔했는데, 심지어 재물을 긁어모으기 위해 상림원에 관작(官爵)거래소를 설립하고 공개적으로 가격을 매겨 관직을 사고 팔았는데 반값이나 외상도 가능했다.
황상이 혼용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환관이 횡포하고 무도하고 간사한 소인들이 득세하고 정부가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며 호강이 백성을 무시하고 억눌렀했기 때문에, 국가의 창고는 텅 비고 백성은 가난하며 재물은 다해 원망이 들끓고 사회 모순이 격화되었다. 마침내 184년 시작된 황건군의 농민 대봉기를 유발했다. 유씨 왕조는 언제든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189년 4월, 한 영제가 병으로 죽으니 향년 34세였고 문릉(文陵 지금의 낙양시 서북쪽)에 묻혔으며 시호는 효령(孝靈)황제다. 하황후가 같은 달 무오일에 14세 된 친생자 유변(劉辯)을 황제로 세웠고 같은 해 연호를 ‘광희(光熹)’로 고쳤으니 이가 동한 역사상의 두 번째 소제(少帝)다.
소제 유변이 즉위할 때 그의 생모 하태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何進)
이 조정의 대권을 잡았다.
이때 천하는 이미 크게 혼란했고 군웅이 다투어 일어났다. 사회 하층(도축업자) 출신의 하진은 하층 호강인 동탁(董卓)에 의지해 환관을 죽이려 했으나, 뜻밖에 환관들이 먼저 발동하여 하진을 죽였다. 하진의 부하 장수들이 이 소식을 들은 후, 중군교위 원소와 호분중랑장 원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가 환관 2000여 명을 죽였다. 동한 역사상의 환관 전권 시기는 이로써 참극으로 끝났다.
궁중에서 혼전이 벌어질 때 소제 유변과 진류왕(陳留王)인 동생 유협(劉協)은 모두 궁 밖으로 도망쳤으며, 성 밖에서 하진의 부름에 응해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오던 병주목(並州枚) 동탁을 함께 만났다.
동탁은 189년 9월 낙양에서 소제 유변을 폐위시켜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하고 동생인 유협을 황제로 세웠으며 연호를 ‘영한(永漢)’으로 고쳤으니 이가 한 헌제다.
한 헌제 유협이 즉위할 때 나이 겨우 9세였으므로 조정의 정치는 동탁이 쥐고 흔들었다. 동탁은 낙양에 들어온 후 황제 폐립에 반대하는 원소를 쫓아내고 소제의 생모 하태후를 죽였으며, 또 사공(司空) 유홍(劉弘)을 면직시키고 스스로 사공이 되어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장기간 동한 황실을 좌우하던 외척은 환관과 함께 철저히 소멸되었다. 이후 동탁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기 시작하며 천하에 횡행했다. 사회는 전례 없는 대파괴와 대분열의 시대로 진입했다.
동탁은 잔인하고 포악한 자였다. 그가 조정을 장악한 후 이미 폐위된 소제 유변을 독살했고, 또 한 헌제를 강박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게 했다. 낙양을 떠날 때 동탁은 낙양에 대해 한 차례 겁난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부유한 집의 재산을 몰수해 자기 것으로 삼는다고 선포했고, 또 불을 질러 궁묘(宮廟), 관부(官府), 가옥을 모조리 태워 낙양 200리 안의 가옥을 깡그리 없애고 닭과 개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외에도 그는 장군 여포를 사주해 한실의 제왕 능묘와 공경(公卿) 이하의 무덤을 무너뜨리고 무덤 속의 보물을 거두게 했다. 동탁의 폭행은 전국의 불만을 격발시켰고 각지의 호걸들이 분분히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 192년 4월, 사도 왕윤(王允)이 계책을 내어 동탁을 주살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 역병 폭발과 동한의 멸망
비록 동탁은 죽임을 당했으나 한가의 천하는 이미 크게 어지러워져 전국이 각종 세력의 할거 혼전 국면에 처했다.
192년 6월, 원래 동탁의 부하 장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가 장안으로 쳐들어가 집정대신 왕윤을 죽였다. 이로써 한 헌제는 다시 이각, 곽사 두 사람이 통제하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195년 3월 이각과 곽사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혼전 속에서 한 헌제는 196년 7월 이각의 부하 장수 양봉(楊奉)에게 겁박당해 이미 망가져버린 낙양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때 일대의 효웅(梟雄) 조조(曹操)는 이미 연주(兗州)를 차지해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196년 8월, 헌제에 의해 진동(鎭東)장군에 봉해진 조조가 낙양에 와서 헌제에게 낙양을 떠나 자신의 세력권인 허도(許都 지금의 하남 허창시 동쪽)로 천도할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헌제는 다시 조조의 괴뢰가 되었다.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맞이한 후 스스로 사공 겸 거기장군이 되어 정사를 조종했다. 208년 조조는 다시 삼공(三公)을 폐하고 승상, 어사대부를 고쳐 설립했으며 스스로 승상이 되었다.
헌제 유협은 조조의 괴뢰가 되려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조조를 주살하고 남에게 조종당하는 국면에서 벗어나려 시도했으나, 유협은 어려서부터 남에게 제약당해 실권이 없었던 데다가 재능과 지혜마저 조조에게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종신토록 벗어나지 못했고 곧 전복되려는 유씨 왕조를 구하지 못했다.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 후 그의 탁월한 정치적, 군사적 재능으로 여포, 원술, 원소 등 할거 세력을 잇따라 격파했고 오환을 정복해 중국 북방을 자신의 세력 범위 내로 통일했다. 213년 조조는 한 헌제를 핍박해 자신을 위공(魏公)으로 봉하게 했고 얼마 후 다시 위왕(魏王)으로 봉하게 했다. 조조는 또 자신의 딸을 한 헌제의 황후로 세웠다.
이때 유비와 손권이 남방에서 궐기하여 조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형세를 형성했다.
동한은 외척과 환관의 간섭 이래 정치가 어두워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큰 역병이 발생했다. 119년(안제 때) 회계(會稽 지금의 소흥)에 큰 역병이 있었고, 125년 낙양에 큰 역병이 있었으며, 151년(환제 때) 낙양에 큰 역병이 있었고, 167년 전국에 큰 역병이 있었으며, 171년에도 전국에 큰 역병이 있었다. 173년(영제 때) 전국에 큰 역병이 있었고, 182년에도 전국적으로 큰 역병이 돌았다.
특히 동한 말년에 이르러 정치는 더욱 어두워지고 군대의 창칼이 어지러이 얽히며 천하에 난리가 나자 군벌들이 할거해 매년 혼전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농업을 버렸고 도시와 전장(田莊)은 대부분 황야가 되었으며 인민들은 떠돌이가 되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각지에서 연속해 역병이 폭발했는데 특히 낙양, 남양, 회계 등지의 상황이 가장 심각했다.
한 헌제 건안 연간에도 여러 차례 역병이 발생했다. 이렇게 연이은 역병의 전파는 사람들의 생활을 비참하기 짝이 없게 만들었다. 217년에는 전국에 아주 심각한 역병이 발생했는데ㅔ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고통이 이전보다 더욱 컸다.
《후한서 헌제본기(獻帝本紀)》에서는 이 해에 발생한 역병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역병으로 조성된 결과가 어떠했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어람》에 보존된 조식의 《설역기(說疫氣)–역병을 말하다》라는 글을 통해 당시 역병에 대해 상세히 요해할 수 있다.
“건안(建安) 22년(217년), 역병이 크게 유행해 집집마다 시신을 두고 통곡하는 아픔이 있었고, 방방곡곡 통곡하는 슬픔이 가득했다. 어떤 집은 온 가족이 몰사하기도 했고, 어떤 집은 가문 전체가 전멸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 역병이 귀신과 신령의 소치라고 여기지만, 병에 걸린 이들은 하나같이 거친 음식을 먹고 가난하게 사는 초가집의 가난한 백성들뿐이다. 반면 고관대작의 집안이나 고운 모피 옷을 입고 두터운 요를 깔고 사는 부유한 집안에서는 이런 병에 걸리는 이가 드물었다. 이는 참으로 음양이 자리를 잃고 추위와 더위의 차례가 뒤바뀌어 생긴 역병일 뿐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부적을 붙여 이를 막으려 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이처럼 역병이 초래한 참혹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수많은 지역에서는 관(棺)마저 동이 났고, 슬피 우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가리지 않고 역병이 번졌으며, 빈궁한 백성들은 돈이 없어 가족의 시신을 묻어주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도처에는 다음과 같은 참상이 펼쳐졌다.
“문을 나서도 보이는 것 하나 없고, 백골만이 평원을 뒤덮었네.”
(왕찬의 시 ‘칠애시’ 중)
“백골은 들판에 그대로 드러나 있고, 천 리를 가도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네.”
(조조의 시 ‘해로행’ 중)
이 해에 조위(曹魏)의 군대는 사마랑(司馬朗), 하후돈(夏候惇), 장패(臧霸) 등의 인솔 하에 동오(東吳)를 정벌하러 나섰는데 부대가 거소(居巢)에 이르렀을 때 큰 역병이 발생해 많은 관병이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연주자사였던 사마랑이 친히 부상병들을 순시하며 그들에게 약을 달여주고 물을 주었으나, 뜻밖에 자신도 병에 걸려 금세 세상을 떠났다.
이 역병은 군대 안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지방으로도 만연했다. 영천(潁川)에서는 새로 부임한 태수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병이 퍼져나가 백성들 중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관부(官府)에 출근하는 차리(差吏 아전)들도 태반이 죽어 태수가 송사를 심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조차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태수의 부인 및 아들도 불행히 병에 걸려, 당시 숭산에 은거해 있던 도인(道人) 유근(劉根)에게 병 치료를 요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역병은 단지 지방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조위(曹魏)의 정치 중심지인 허창(許昌)에서도 비교적 큰 위해를 끼쳤다. 유명한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공융(孔融)과 완리(阮璃)가 일찍 죽은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간(徐幹), 진림(陳琳), 응창(應瑒), 유정(劉楨) 등은 모두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당시 태자였던 조비(曹丕 훗날의 위문제)는 이듬해 오질(吳質)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 몇 사람을 언급하며 “벗들이 대부분 그 재앙에 걸려 서간, 진림, 응창, 유정이 일시에 다 가버렸다”고 말했다.
건안 22년의 이 큰 재난은 사회와 민중의 생활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왔다. 이듬해 4월 조조는 조령(詔令)에서 “지난겨울 하늘이 역려(疫癘 역병)를 내려 백성들이 시들어 다쳤으나 밖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안에서는 논밭의 수확마저 줄어드니, 내가 이를 매우 걱정하노라.”라고 말했으니 역병이 초래한 재난이 전례가 없었음을 설명한다.
역병이 크게 폭발한 지 3년 후인 220년, 위왕 조조가 죽은 후 아들인 조비가 위왕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을묘일, 위왕 조비가 스스로 황제에 올랐고 한 헌제를 폐해 산양공(山陽公)으로 삼았다. 동한 왕조는 14명의 황제가 총 196년 동안 유지되다 여기서 멸망했다. 234년 3월, 망국의 임금 유협이 병으로 죽으니 향년 54세였고 재위 31년 만에 선릉(禪陵 지금의 하남 수무현 북쪽)에 묻혔으며 시호는 효헌황제다.
중국 역사상 찬란히 빛났던 한 제국은 이로써 몰락했고, 중화 제국은 이때부터 분열 시대로 진입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