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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소 전기】 망아산

앙악(仰嶽)

【정견뉴스】

양연소전기──망아산. (샤충펀夏瓊芬/에포크타임스)

망아산(望兒山)은 백망산(百望山)이라고도 불린다. 이 산은 태행산맥에서 화북평원 최동단에 이르는 곳으로, 비록 주봉이 해발 210미터에 불과하나 시야가 매우 넓어 북경성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은 숲이 우거지고 환경이 청유하여 가을이면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드니, 시와 그림 같은 미경이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이 산에 관한 최초의 문자 기록은 당대의 《장안야화(長安夜話)》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망산은 남쪽으로 서호에 막히고 북쪽으로 연평과 통한다. 등을 지고 떠나도 백 리 밖에서 그 봉우리가 보이므로 ‘백망’이라 한다.”

백망산이 망아산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북송의 천파부(天波府) 양가(楊家)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송과 요 전선의 최전방이었는데, 당시에 송 태종이 북벌에 실패하여 유주성(幽州城)에 갇히자 양가 장병들이 구원에 나섰다. 사태군(佘太君)은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직접 이 산에 올라 전황을 살피고, 근처 금산사에서 신불께 예배하며 신명이 보호해주시기를 빌었다. 그리하여 현지에는 천 년을 이어온 감동적인 이야기가 남게 되었다.

양연소는 장병들을 이끌고 삼관을 지키며 요나라에 맞서 연전연승했다. 조정은 그 전공을 치하하여 막대한 재보(財寶)를 내리고 관작(官爵)을 높여주었으나, 양연소는 대부분 표문을 올려 사양하고 받은 재물은 모두 장병들과 현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현지 백성들에게 신명(神明)처럼 추앙받았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추밀사 왕강(王強)은 끊임없이 측근들을 감군(監軍)으로 전방에 보내 증거를 수집하며 죄상을 꾸며 양연소를 모함하려 했다. 그는 수시로 진종 황제 앞에서 양연소를 참언하고 비방했으며, 무장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3년을 기한으로 전방 장수들을 교체하라는 건의문을 올리기도 했다.

사태군은 나라와 가문을 걱정하며 매일 이 일로 시름에 젖었다. 비록 예전 금사탄 전투 때 백망산에서 전쟁터를 멀리 바라보며 양가에 닥친 큰 화를 목격했고, 남편 양업과 아들들이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을 보았지만, 태군은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자주 금산사(金山寺)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그녀는 금산사에 가서 소원을 갚으려 했는데, 변방의 전투가 빈번하자 팔매와 구매가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하여 태군을 모시고 함께 금산사로 향했다. 양가 장병들과 천하 중생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였다.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며칠간 여정을 이어간 끝에 그들은 금산사에 도착했다. 주지 스님이 사태군을 알아보고 정성껏 대접하며 하룻밤 묵어가게 했다. 다음 날 사태군 일행이 작별을 고하려 할 때, 이삼(李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그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이삼이 물었다.

“혹시 삼관 양연소 원수님의 모친이신 사태군이십니까?”

태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자 이삼이 그 말을 듣고 격하게 무릎을 꿇어 절하며 양가 장병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했다. 사태군은 의아했다. 예전에 양가 장병들이 이곳에 온 것은 유주성에 갇힌 태종 황제를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는 것인가? 이삼은 그제야 태군에게 그 시절의 일화를 회상하며 들려주었다.

육랑이 의병(疑兵)을 배치해 지혜로 요군을 물리치다

원래 당시 태종 조광의(趙匡義)가 친히 북벌에 나섰으나 작전에 실패하여 요나라 군대에게 유주성에 갇히게 되었다. 양업과 일곱 아들이 응원하여 수일간 혈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요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태종을 구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요나라 증원군이 도착했고, 대장 한창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추격해왔다. 양가 장병들이 비록 용맹하긴 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계속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양연소는 송나라 군대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스스로 한 무리 장병을 이끌고 후방을 맡았다. 요나라 병사들은 머릿수가 많은 것을 믿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양연소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창을 치켜들고 말을 달려 분전하니, 살성(殺聲)이 하늘을 찌르고 양측은 어둡도록 싸웠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양측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양연소의 곁에는 채 백 명도 되지 않는 장병들만 남았으나 요나라 병사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쫓아왔다. 그는 이 전투가 반나절 넘게 지났으니 태종 황제가 분명 위험에서 벗어났을 것이라 판단하고 퇴각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남은 인마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송 군은 산을 낀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은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축제를 열려는 듯 보였고 산 위의 불탑에도 약간의 등불이 켜져 있었다.

양연소는 이때 한 가지 계책을 떠올리며 말했다.

“옛날 삼국의 명장 장비가 장판교 전투에서 의병(疑兵)을 배치해 조조의 수만 대군을 막아냈는데, 오늘 그것을 재현하겠다!”

그는 몇몇 장병을 마을로 보내 등불을 사 오게 한 뒤 불탑에서 모이라고 일렀다. 이후 장병들을 데리고 산 위 불탑에 진을 쳤다. 그는 모든 등불을 탑의 처마와 주변 높은 곳에 배치하고, 모든 말의 몸에도 등불을 달아 밝게 했다. 또한 몇몇 말들에게 나뭇가지를 매달아 불탑 주변을 돌게 하니 순식간에 땅 위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때 요나라 부대가 산 아래까지 쫓아왔다. 그들이 보니 산 위 불탑 주변에 등불이 환하고 먼지가 자욱한 것이 마치 대군이 매복하고 있는 듯했다. 부대를 이끌던 한창은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적은 어둡고 우리는 밝으며 지형 또한 불리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퇴각하라!” 한창은 군사를 거두어 추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나라 군대가 하나둘 물러가는 것을 보고 양가 장병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산을 내려와 떠나려 할 때, 그 작은 마을에서 백성들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요나라 군대의 한 부대가 마을을 약탈하고 있었다. 양연소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곁에 있던 장병이 말했다. “적군이 약탈에 정신이 없으니 분명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탈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연소가 대답했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장병이 다시 말했다. “마을 안에 요나라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우리는 고작 수십 명뿐입니다. 만약 한창의 대군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양연소가 다시 대답했다.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장병의 천직이다. 전장에서 죽더라도 마땅히 갈 길을 가는 것이니,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장병들을 이끌고 마을 안의 요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백성들을 구했다. 양가 장병의 전투력은 막강했고 약탈하던 요나라 군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기에, 양가 장병들은 일당백의 기세로 그들을 격퇴했다. 날이 이미 저물어 마을 사람들은 송나라 군대에게 하룻밤 쉴 자리를 대접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당시 이삼은 마을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자신들을 구해준 장수가 양연소라는 것을 전해 듣고 마음속에 보답하고자 하는 선념(善念)을 품게 된 것이다.

백망산 망아산

이삼은 이미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기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석조(石彫) 기술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태군을 기념하기 위해 석상 한 구를 깎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처음에는 태군이 사양했으나 이삼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허락했다. 이삼의 기술은 매우 뛰어나 반나절도 되지 않아 석상의 기틀을 완성했다. 사태군은 조각상을 살핀 뒤 사람들과 작별하고 귀로에 올랐다.

조각상을 완공한 후 이삼은 태군의 상을 예전에 사태군 일행이 묵었던 객실에 모셨고, 절을 찾는 신도들도 사태군 조각상 앞에서 예를 표하곤 했다. 훗날 양가장이 나라에 충성한 사적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현지 신도들이 망아산 정상에 사태군묘를 세웠다. 사태군의 석상은 묘 안으로 옮겨져 오랫동안 공양을 받았으며, 후대 사람들도 양연소와 양팔매의 석상을 곁에 만들어 세웠다. 예전에 사태군이 산에 올라 아들을 바라보던 곳에는 사람들이 기념하고 조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이 설치되었다.

근처 산기슭 숲속에는 교자대(敎子台)라는 곳도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사태군이 다시 금산사를 찾았을 때 양연소가 어머니를 호송하여 산에 올랐다. 산기슭에 이르자 사태군은 아들에게 전송할 것 없이 속히 산을 내려가 요나라 군대에 맞서라고 독촉하며, 진심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효를 충으로 옮기라고 가르치고 격려했다. 이 이야기는 현지에서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으며, 이 때문에 현지 사람들은 백망산을 망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르며 망아산의 유적들은 전란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서남쪽에 위치한 향산(香山)에는 양연소가 지혜로 요나라 군대를 물리쳤던 ‘육랑탑(六郎塔)’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파괴를 당해 지금은 허물어진 탑터와 벽돌 조각 몇 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자료:
《楊家將(穆桂英)傳說》北京美術攝影出版社 2015年出版 高雪松 整理
《楊家將外傳》河北少年兒童出版社 1986年出版 趙雲雁 搜集整理
《河北民間故事集》遠流出版社 1998年出版 陳慶浩主編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