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280년)
심연(心緣)
【정견망】
* 서법(書法)
삼국 시기는 서예의 역사적 발전으로 볼 때, 한자 서체(書體)의 변천을 완성하고 전대의 것을 이어받아 후대의 것을 열어준 중요한 시기이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날로 성숙해졌다. 한자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체(字體)의 규범화인데, 해서가 바로 그 규범화의 표현이다.
삼국 시기의 서예 예술로는 당대에 대서예가인 종요(鍾繇)를 으뜸으로 꼽아야 한다. 종요는 서예 예술의 성취가 매우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업적 또한 탁월했다. 종회(鍾會), 양곡(梁鵠), 조조(曹操), 위탄(韋誕), 한단순(邯鄲淳), 호조(胡昭) 등도 당세에 이름난 서예가들이었다.
종요는 자가 원상(元常)이며 영천(穎川) 장사(長社)[현재의 하남성 장갈시] 사람으로, 동한 환제(桓帝) 원가(元嘉) 원년(151년)에 태어나 위 명제(明帝) 태화(太和) 4년(23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대(唐代) 장언원(張彥遠)이 지은 《법서요록(法書要錄)·필법전수인명(筆法傳授人名)》의 소개에 따르면, 채옹(蔡邕)이 신인(神人)에게 전수받아 최원(崔瑗) 및 딸 채문희(蔡文姬)에게 전하고, 문희가 이를 종요에게 전했으며, 종요는 위부인(衛夫人)에게 전하고, 위부인은 왕희지(王羲之)에게 전했으며, 왕희지가 왕헌지(王獻之)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로써 종요가 채옹 서예의 제2대 전인(傳人)임을 알 수 있다. 종요의 서체는 주로 해서, 예서(隸書), 행서(行書)이다. 남조(南朝) 유송(劉宋) 시절 사람인 양흔(羊欣)의 《채고래능서인명采古來能書人名)》에서는 가로되, “종요에게 세 가지 체가 있으니, 첫째는 명석지서(銘石之書)라 하니 가장 절묘한 것이요, 둘째는 장정서(章程書)라 하니 비서(秘書)를 전해 소학(小學)을 가르치는 것이요, 셋째는 행압서(行押書)라 하니 서로 소식을 묻는 것이다.”라 했다.
이른바 ‘명석서’는 곧 정해(正楷)를 가리키고, ‘장정서’는 예서(팔분서八分書)를 가리키며, ‘행압서’는 행서를 손꼽는다. 종요 서예의 진적(真跡 친필 원본)은 동진(東晉) 시대에 이미 실전되어 없어졌기에, 오늘날 사람들이 보는 것은 임모본(臨摹本 베껴 쓴 본)이거나 아니면 위서(偽書)이다. 일반적으로는 ‘오표(五表)’, ‘육첩(六帖)’, ‘삼비(三碑)’가 있다고 여겨진다.
‘오표’란 《선시표(宣示表)》, 《천계직표(薦季直表)》, 《하첩표(賀捷表)》[혹은 융로표戎路表], 《조원표(調元表)》, 《역명표(力命表)》를 가리킨다. 이는 현존하는 종요 서예 중 예술성이 가장 높은 작품들이나 모두 종요의 진적은 아니다. 저수량(褚遂良)의 《진우군왕희지서목(晉右軍王羲之書目)》에서는, 《선시표》는 당대에 전해지던 왕희지의 임본(臨本)이라 했다. 왕희지 또한 서예의 대가였으므로 그가 종요의 진적을 임모한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 속에서 종요 서예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조원》, 《역명》, 《하첩》 삼표(三表) 역시 후인들의 임본이긴 하지만 성취가 비교적 높다. 《천계직표》는 예술적 성취가 매우 높아, 원대의 육행직(陸行直)은 이 표가 “고고(高古)하고 순박하며 초묘(超妙)하여 신의 경지에 들어가니, 진당(晉唐)의 꽃을 꽂은 미인 같은 자태가 없다”라며 ‘무상태고법서(無上太古法書), 천하제일묘적(天下第一妙跡)’이라고 찬사했다.
‘육첩’은 《묘전병태(墓田丙台)》[간칭 병사첩丙舍帖], 《작소환시첩(昨疏還示帖)》[간칭 환시첩還示帖], 《백기첩(白騎帖)》, 《상환첩(常患帖)》, 《설한첩(雪寒帖)》, 《장풍첩(長風帖)》[그 후반부의 또 다른 이름은 안조첩安厝帖]을 가리킨다. ‘육첩’은 전부 임본이며, 《병사첩》과 《환시첩》은 성취가 비교적 높고 종요의 서체(鍾體)에도 비교적 가까워 상승(上乘)의 가작이다. 《백기첩》 등 네 가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전(輾轉) 임모되었기에 이미 종요의 서체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삼비’는 《한을영치백석률사비(漢乙瑛置百石率史碑)》[간칭 을영비乙瑛碑], 《위상존호비(魏上尊號碑)》, 《수선비(受禪碑)》를 말하며, 이것들은 전부 각본(刻本)[비석 등에 새긴 본]이라 종요가 지은 것인지는 이미 고증할 길이 없다.
종요의 서예는 고박(古樸)하고 전아(典雅)하며, 글자 크기가 서로 어우러지고 전체적인 구도가 엄근(嚴謹)하고 치밀하여 역대 평론에서 성취가 극대(極大)하게 높다고 평가받았다.
양 무제(武帝)는 《관종요서법십이의(觀鍾繇書法十二意)》를 찬하여 종요의 서예가 “교묘하고 정밀하면서도 세밀하니, 거의 신령한 기틀과 같다”라고 칭찬했다.
경견오(庚肩吾)는 종요의 서예를 ‘상품 중에서도 상(上品之上)’으로 분류하며 “종요는 천연(天然)이 제일이요 공부가 그다음이니, 허창(許昌)의 비석에서 오묘함을 다했고 업하(鄴下)의 편지에서 지극함을 궁구했다”라고 했다.
장회관(張懷瓘)은 종요의 글씨를 더 높여 ‘신품(神品)’으로 꼽았다. 이 외에 명대 잠종단(岑宗旦), 청대 유희재(劉熙載) 등도 모두 극히 높은 평가를 했다. 서예가로서 서예에 대한 종요의 견해 역시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서론(書論)은 비교적 단편적이라 후세의 문집 속에 흩어져 보인다.
종요는 중국 서예사상 영향이 매우 커서 역대로 그를 중국 서예사의 비조로 인정해 왔다. 그는 서예사상 최초로 해서를 정립해 한자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도종의(陶宗儀)는 《서사회요(書史會要)》에서 “종요와 왕희지가 체(體)를 변형하면서 비로소 고대 예서(古隸)와 지금 예서(今隸)의 구분이 생겼으니, 대개 옛 법을 예서라 하고 지금 법을 해서라 하면 가할 것이다.”라 했다. 종요 이후 많은 서예가들이 다투어 종요의 서체를 학습했으니, 예컨대 왕희지 부자만 해도 여러 종류의 종체(鍾體) 임본을 가졌었다. 후대의 유명한 서예가 장창(張昶), 회소(懷素), 안진경(顏真卿), 황정견(黃庭堅) 등도 서체 창작상에서 다방면으로 종체의 장점과 종론(鍾論)의 요체를 흡수했다.
삼국 시대 과학기술
* 교통 운송 도구
촉한의 제갈량은 사천(四川)의 험준하고 경사가 급한 산길에서 군량과 마초를 운송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우유마(木牛流馬)’라는 교통도구를 발명했다. 목우유마의 형상에 대해 송대의 《진후산집(陳後山集)》에서는, “촉에 작은 수레가 있으니 한 사람이 밀며 8석(石)을 실을 수 있고 앞 모양이 소의 머리와 같다. 또 큰 수레가 있으니 네 사람이 밀며 10석을 실으니, 대개 목우유마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라고 했다.
청대 《하공기구도설(河工器具圖說)》에서는, “토차(土車)는 외바퀴로 재료와 흙을 겸하여 실었다. 《패편(稗編)》에 촉의 승상 제갈량이 출정할 때 비로소 목우유마를 제조하여 군량을 운반했다 하니, 목우는 지금 수레의 앞채(前轅)가 있는 것이고 유마란 지금 홀로 미는 차가 그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전문가들의 연구에 근거하면, ‘목우유마’는 구조가 간단하고 모양이 닭의 머리와 비슷하며 일반적으로 길이가 4척이다. 앞에는 나무로 만든 외바퀴를 장착하고 바퀴 가장자리는 철피(鐵皮)나 가벼운 고무링으로 감쌌다. 바퀴 윗부분에는 철형(凸形)의 바퀴 보호판을 장착하여 사람이 앉거나 물건을 실을 수 있게 했고, 수레몸체(車身) 뒷부분에는 지지대가 있어 세워두기 편리하게 했다. 제비꼬리 모양(燕尾形)의 손잡이가 있어 사람이 두 손으로 이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넓은 선반과 좁은 선반 두 종류로 나뉜다. 넓은 것은 적재 중량이 500킬로그램에 달할 수 있었고, 좁은 것은 200킬로그램 전후를 실을 수 있었다. 가볍고 민첩하며 제작이 간편했다. 이는 당시에 매우 대단한 발명이었다.
반면 동오(東吳)에서는 하천과 바다 교통의 필요성으로 인해 조선업(造船業)이 매우 흥성하여, 바다를 운항하는 해선(海船)이 북쪽으로는 요동(遼東)으로 항해하고 남쪽으로는 남해(南海) 제국과 자주 통했다. 오나라는 건안군(建安郡) 후관(侯官)[현재의 복건성 복주시]에 전선교위(典船校尉)를 설치하고 형도(刑徒 형벌을 받는 죄수)들에게 배를 만들게 시켰다. 장강 속의 전선(戰船) 중에는 위아래로 5층인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병사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업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 수공업
양한(兩漢)의 기초 위에서 삼국의 수공업 또한 여전히 발전하고 있었다. 촉한은 소금, 철, 직금업(織錦業 비단직조업)이 가장 발달했다. 익주(益州)의 여러 지방에서는 모두 정염(井鹽)이 생산되었는데, 사람들이 천연가스로 소금물을 끓이는 기술을 발명해 생산량이 매우 높았다. 당시에 ‘촉금(蜀錦 비단)’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쳐 멀리 오나라와 위나라까지 판매되었으며, 군사비(軍費)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반면 동오의 야주업(冶鑄業)[제철 및 주조]은 무창(武昌)이 가장 발달했으니, 225년에 손권이 일찍이 이곳에서 동과 철을 채굴하여 대량의 병기를 만들었다. 해염(海鹽)[현재의 절강성 해염현]과 사중(沙中)[현재의 강수성 상숙시]에 관원을 두어 이 두 지역의 염업 생산을 관리하게 했다. 삼오(三吳) 지역에서는 ‘팔잠지면(八蠶之綿)’이 생산되었고 제기(諸暨), 영안(永安) 일대에서 생산되는 실(絲)은 품질이 매우 높았다. 오나라 궁정 내의 실크 작업장은 수천 명의 생산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이는 모두 강남의 사직업(絲織業)이 이미 초보적인 발전을 이룩했음을 설명한다. 다만 직조 기술이 아직은 높지 못했기에 촉의 비단 중요한 수입 물자가 되었다.
* 천문학
현대 고고학적인 발견에 따르면, 일찍이 한조 시기 묘실 천장 부분에 채색으로 그리거나 돌에 새긴 성상도(星象圖)[별자리 지도]가 있었다. 이러한 부류의 성도는 비교적 거칠고 조잡하게 제조되었고 내용도 흔히 완전하지 못해, 어떤 것은 단일한 별자리만 그려져 있기도 했다(아마도 당사자가 생전에 지닌 관직의 지위와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삼국 시기 진탁(陳卓)이 성도(星圖)를 편제하여 하늘의 별들이 위치한 배치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이미 실전(失傳)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