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은(敬謝恩)
【정견망】
(8) 개혁개방 중에 사회민중의 정신 상태를 이익을 쫓는 방향으로 전향
중공의 개혁개방(改革開放)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찬양, 비판, 풍자 등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다. 이토록 거대한 격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개혁개방을 주도한 진정한 힘이 마귀라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공이 하는 모든 일은 개혁개방을 포함하여 마귀에 의해 주도된다. 마귀가 주도한 작용으로 인해 중국 사회 통치자들의 극단적인 이익 추구가 초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 인민의 정신 경지 역시 다시 한번 하락하게 되었다.
과정 1. 중공 정권 수립할 때 전통문화 교육의 성과 누려
1949년, 중공은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후 중공은 국민정부가 남겨준 대륙의 토지와 인민을 향유했다.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인민들은 주로 세 가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첫째이자 가장 큰 규모의 교육은 중국 전통문화에서 왔다. 중국 전통문화는 삼황오제 시기와 하상주(夏商周)를 거치고 한당명청(漢唐明淸)에 이르기까지 여러 역사 시기를 거치며 축적되어 이미 매우 체계적이었다. 그 표현 형식은 사서오경뿐만 아니라 전통 희곡 공연, 일상생활 방식 등을 포함했다. 이 교육은 주로 국민의 충효와 근면 등 품행을 배양했다.
둘째는 신생 중화민국의 교육이다. 중화민국의 교육은 전통 중국 문화와 민주 헌정 문화의 결합체였다. 민국 기간 중국은 줄곧 빈약한 상태였기에 국가를 구하는 것이 시대적 주제였으며, 따라서 애국, 문명, 과학, 민주 등이 민국 교육의 주제였다.
셋째는 공산주의 교육이다. 공산주의가 중국에 들어온 지 20여 년이 되어 시간은 짧았지만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공산주의 교육의 핵심은 계급투쟁, 토지혁명, 무력에 의한 정권 탈취였으며, 현 정권과 현 사회를 공격하며 오직 공산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중공 정권 수립 후, 통치 아래에 있는 인구 대다수는 여전히 전통 문화 교육과 민국 문화 교육 아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산당과 전통 중국 역대 왕조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통 역사와 같은 상태의 애국심을 품고 있었다.
과정 2. 모택동 시기 국민을 속임과 강압으로 대해 기만당한 이들이 스스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
중공 집권 후 모택동 통치 시기에 일반 백성과 관료를 포함한 중국 인민에게 행한 수법은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핍(逼, 강압)’이고 다른 하나는 ‘편(騙, 속임)’이다.
‘강압’이란 사람들이 모택동과 중공의 지시에 따라 대약진운동(철강 생산), 지주 비판, 상산하향 등 나쁜 짓을 하도록 강요한 것을 말한다.
‘속임’이란 선전을 통해 모택동과 중공의 지시를 ‘인민을 위해’, ‘가장 위대한 이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상산하향, 지주 비판, 철강 생산 등에 참여하도록 기만한 것이다.
이러한 강압과 기만의 환경 속에서 많은 중국 백성, 특히 기층 백성들은 전면적인 정보를 얻지 못해 주관적으로는 자신이 인민과 국가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택동은 문화혁명 당시 수백만 홍위병을 선동하여 각자 ‘모주석 수호’를 외치게 했다. 서로 다른 파벌의 홍위병들이 모두 ‘혁명’과 ‘모주석 보위’를 위한다면서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당시 수많은 가정이 불화하고 스승과 제자가 원수가 된 것은 모두 당시 중국 인민이 속고 강요당하며 정보가 극단적으로 부족해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중공의 ‘군중으로 군중을 싸우게 하는’ 수법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파보다는 좌파가 낫다’라고 여기며 자유롭게 사고할 환경이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중공이 주도하는 강압과 기만의 환경 속에서 수많은 중국인이 객관적으로는 황당하고 독하며 흉악하고 죄스러운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흔히 자신이 숭고하고 위대하며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즉, 이러한 객관과 주관이 어긋나 오랜 세월 깨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남을 속이는 거대한 비극 속에서, 중국 인민은 속고 투쟁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주관적인 정신 경지는 숭고함을 추구하고 있었다.
정치와 무관한 방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우는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5, 60년대를 회상할 때 당시 내면의 열정과 국가 및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곤 한다. 사실 그 시기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공산당에게 철저히 속아 비참하게 이용당한 피해자들이었지만, 속는 과정에서 내면은 진실함과 열정,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정 3. 개혁개방 후 ‘경제 건설 중심’을 제시하자 인민의 사상 경지가 이기적으로 흘러
개혁개방 이후 등소평(鄧小平)은 새로운 세대의 중공을 대표하여 ‘경제 건설 중심’을 내세웠다. 이 구호는 기업의 지도 사상 같아 보이지만, 기업에 적용하기에도 부적절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부를 쌓고 치부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유도되었고, 인민의 사상 경지도 ‘이익 추구’와 ‘재물 추구’로 옮겨갔다. 이때 중국인들은 자신의 생명 가치가 이기적인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왜 불만을 가졌는가?
표면적인 원인은 50년대나 60년대 초와 비교했을 때, 중국인들이 자신의 주도적인 정신 경지가 원래의 ‘위공(爲公)’, ‘타인을 위함’, ‘당당하고 밝음’에서 ‘이익만을 추구함’, ‘사사로움과 자신만을 위함’으로 변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진짜 원인은 중공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 모택동의 개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모택동에게 거듭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 당시에는 모택동 시기의 기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수중의 돈이 늘어나고 먹고 입는 것이 예전보다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경지에서의 상실감을 느꼈다. 동시에 도처에서 발생하는 부패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인민의 정신 상태는 경지 면에서 하락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가? 사실 정말로 이러한 하락이 발생했다. 이러한 하락과 변화의 근원은 바로 중공에게 있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중공의 끊임없는 정치 운동과 국민에 대한 기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중공이 모든 선전 도구와 교육 시스템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제했기에, 많은 중국인, 특히 막 성장한 청소년들은 중공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중공은 스스로 말을 바꾸며 끊임없이 정치 운동을 벌이고 사람들을 기만했다. 예를 들어 지식인들을 속여 우파로 몰아세우고, 학생들을 속여 상산하향(上山下鄉)하게 했으며, 농민들을 속여 ‘인민공사화’, ‘대약진’, ‘허위 보고’를 하게 했다. 사람들은 중공에게 반복적으로 속고 ‘군중으로 군중을 싸우게 하는’ 일을 겪으며, 끊임없는 비판과 위협 속에서 실망하기 시작했고 점차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과거처럼 성실하게 사람을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둘째, 중공 본래의 ‘계급투쟁 위주’라는 부채가 중공이 정상적인 국가 통치로 복구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어느 왕조, 어느 국가든 국민이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며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속한다. 그러나 중공이 30년 동안 반복적으로 계급투쟁을 선전했기에 많은 사람이 계급투쟁을 진리와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중공이 ‘노선’을 바꾸어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려 할 때, 원래의 ‘계급투쟁 위주’를 대체하고 인민들이 감히 따라오게 할 새로운 구호를 외쳐야만 했다. 이것이 중공의 새로운 구호인 ‘경제 건설 중심’이 나타난 배경이자 필연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 구호 자체에도 부작용이 있었다.
셋째, 공산 마귀의 유물주의 무신론이 중국 전통 문화의 올바른 교육 방식을 가로막았다. 중국 전통 문화는 ‘하늘을 공경하고 도를 중시하는(敬天重道)’ 기초 위에 세워졌기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충효를 권하며 ‘의리와 이익의 구분(義利之辨)’을 제창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 문화는 별도로 ‘경제 발전’을 말할 필요가 없었고 ‘경제 건설 중심’ 따위는 더더욱 필요 없었으며, 오직 충효, 도덕, 의리와 이익의 구분을 말하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무신론을 견지하며 감히 ‘하늘을 공경하고 도를 중시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허용하지도 않았기에, 경제 발전 문제에서 직접적으로 ‘경제 건설 중심’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국민 교육의 핵심이 도덕이 아닌 이익이 되자 당연히 인민의 사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중공의 이러한 교육 아래에서 중국인의 사상 경지는 갈수록 자신의 치부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고 날로 물질화되었다. 인민의 정신 경지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과정 4. 1989년 6.4 학살은 많은 이들의 애국 열정을 말살시켰고, 돈을 버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마비시켜
중국 전통문화의 매우 유구하고 거대한 축적 작용으로 인해, 중공의 ‘경제 건설 중심’이라는 편향된 교육 속에서 인민의 정신 경지가 날로 이익을 쫓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 초기에는 염황자손(炎黃子孫)인 중국인들이 여전히 애국을 알고 진정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애국심이 있었기에 1989년 봄과 여름 사이 북경에서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부패 반대를 주요 호소로 내건 청원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고, 북경시와 전국 광범위한 백성들이 학생들의 청원 운동을 널리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발생한 학살은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게 했다. 그것은 바로 부패 그 자체이며, 사람들이 진정으로 국가와 인민을 사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원래 애국심을 가졌던 많은 이들이 부득이하게 애국 열정을 지우고 상업의 바다로 뛰어들어 돈을 버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마비시키게 되었다. 사회 전체의 정신적 추구는 당연히 더욱 물질화되었다. 많은 사람과 기업이 이미 이익만을 밝히는 상태에 들어섰다.
과정 5. 마귀는 중국인이 돈벌이에 전념하도록 유도해 창세주의 설법을 알아듣지 못하게 해
이후 더 나아간 이른바 ‘개혁개방’, ‘국유기업 개혁’ 등의 과정에서 마귀는 사회 전체를 이끌어 고도의 압박을 통해 중국 사회 인민들의 생활 압력을 실제로 매우 크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전체적인 선전을 이용해 모든 사람에게 거대한 돈벌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기업 분야의 각종 교육과 선전은 다른 것은 따지지 않고 오직 돈을 버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규칙과 제도 영역에서도 모든 것이 돈벌이, 증시 상장, 더 큰 부의 장악, 이익 성공을 근본으로 삼아 혁신을 장려하며 다른 것은 따지지 않았다. 정치 분야에서 각종 고과는 생산력을 기준으로 했고, 실행 중에는 GDP(즉 금액 숫자)를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았다. 인사 분야에서 모든 사람은 정치적인 성과만 내면 다른 곳으로 부임했으며, 모든 것이 GDP 숫자를 위하고 눈앞의 이익만을 위했다.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수법을 바꾸고 궁리하며 계획적인 국퇴민진(國退民進), 국진민퇴(國進民退), 신탁 보유, 해외 투자, 역외 운영 등을 진행했다. 이러한 사회 형세와 장려성 보도는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큰돈을 벌지, 어떻게 하면 수법을 혁신해 빈손으로 큰 이익을 얻고 적은 힘으로 큰 성과를 내며 단숨에 하늘에 오르고 크게 성공할지만 생각하게 했으며, 돈을 버는 데만 전념하여 몸과 마음을 다 소모하게 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창세주께서 설법을 시작하셨을 때, 상당수의 사람이 아주 긴 시간 동안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