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몽골 제국(원나라)이 양번(양양·번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남송이 의지하던 장강 상류의 핵심 관문을 열어젖혔다. 이제 원군(元軍)의 진격은 송군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이번 전투의 결과에 크게 만족하며 장수와 병사들을 포상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 후 많은 대신과 장수들이 승세를 몰아 남벌(南伐)을 진행하자고 건의했다. 유정 역시 조정에 들어와 목숨을 걸고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 남송의 도성으로 곧장 진격하겠다고 자청했다.
남벌의 뜻을 품고 있었던 쿠빌라이는 중신들과 논의를 거쳤다. 비록 북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으나, 그는 남벌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재상 바얀(伯顏)을 송을 멸망시킬 총사령관(主帥)에 임명했다. 또한 형호(荊湖)와 회서정양(淮西正陽) 두 곳에 행추밀원(行樞密院)을 설치했다가, 곧 이를 두 개의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개편했다. 형호 행성에는 바얀, 사천택(史天澤), 아주, 아리해야(阿里海牙), 여문환(呂文煥)을 배치하고, 회서 행성에는 합답(合答 카다크), 유정, 타추(塔出), 동문병(董文炳)을 배치했다.
얼마 후 쿠빌라이는 사천택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령(政令)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회서 행성을 행추밀원으로 다시 바꾸고 바얀에게 행추밀원의 일을 전담하게 했다. 이로써 바얀은 남송 정벌의 군사 대권뿐만 아니라 행정 대권까지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병력이 분산되고 군령이 통일되지 않아 부대의 기동이 둔해지는 고질적인 폐단을 단숨에 해결했다.
총사령관으로서 바얀은 남송 정벌 전쟁에서 지대한 역할을 해냈다. 바얀은 몽골 바린(八鄰)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효구타이(曉古台)는 조상의 관직을 이어받아 종왕(宗王) 훌라구(旭烈兀)를 따라 서역을 개척했다. 바얀은 서역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부터 한문화(漢文化)를 배워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데 능했다. 1264년, 훌라구가 그를 조정에 보내 서역의 일을 보고하게 했는데, 쿠빌라이는 그의 비범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는 수도에 남게 했다.
이후 국사를 논하면서 그의 깊은 식견을 발견한 쿠빌라이는 그를 더욱 중용했고, 중서우승상 안통(安童 무칼리의 후손)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바얀은 광록대부, 중서좌승상, 중서우승, 동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했다.
역사서에 따르면 바얀은 모략(謀略)이 심원하고 뛰어난 결단력을 지녔으며, 20만 대군을 지휘하면서도 마치 한 사람을 부리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모든 장수들이 그를 신명(神明)처럼 경외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이런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은 그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긍정이자 전폭적인 신뢰의 방증이었다.
출정 길의 당부
1274년 6월, 쿠빌라이는 행중서성 및 몽골·한군(漢軍) 만호, 천호, 군사들에게 남송 정벌을 알리는 조서 《흥사정남조(興師征南詔)》를 반포했다. 조서에서는 남송이 몽골 사절단인 학경(郝經) 일행을 억류한 죄를 물어 군대를 일으킨 정당성을 설명했다. 동시에 군사들에게 용맹하게 싸울 것을 독려하면서도,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약탈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7월, 쿠빌라이가 《하강남격(下江南檄)》을 반포하자 바얀은 명을 받들어 남정 길에 올랐다. 출정 직전 쿠빌라이는 바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과거 송조 초기에 조빈(曹彬)은 살상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으로 강남을 평정했소. 그대는 부디 짐의 뜻을 헤아려, 본조(本朝)의 조빈이 되어 주기 바라오.“
쿠빌라이의 인애(仁愛)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실제로 바얀은 이후 남송의 성들과 도성인 임안(臨安)을 함락할 때 쿠빌라이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는 매번 어떤 지역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며 가급적 전투를 피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때도 성을 함락한 뒤에는 장병들을 엄히 단속해 함부로 살상을 금지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중원의 한문화(漢文化)는 불필요한 살인을 가장 꺼리며, 설사 정당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천리(天理)와 양지(良知)의 공도(公道)를 보여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쿠빌라이가 군대의 기강을 잡고 조빈을 귀감으로 삼은 것, 그리고 송조의 잔인한 형벌인 편배(鞭背 채찍으로 등을 치는 형벌)나 경면(黥面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 등을 금지한 것은 한문화가 그에게 준 깊은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원의 군심(軍心)과 민심을 사로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월, 쿠빌라이가 《하강남격(下江南檄·강남을 평정하는 격문)》을 선포하자, 바얀이 명을 받들고 남정을 시작했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파죽지세로 진격해 건강 점령
8월, 남송에서는 고작 3세의 송 공제(宋恭帝)가 즉위하여 할머니인 사태황태후(謝太皇太后)와 어머니 전태후(全太后)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나, 조정의 대권은 여전히 간신 가사도(賈似道)의 손에 쥐여 있었다.
같은 달, 수십 년간 쿠빌라이를 충직하게 보좌했던 유병충(劉秉忠)이 59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쿠빌라이는 깊은 슬픔에 잠겨 신하들에게 말했다.
“유병충은 30여 년 동안 짐에게 충성을 다하며 매사에 신중했고, 힘들고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숨기지 않았소. 그 학문의 깊이는 오직 짐만이 알 뿐이오.”
쿠빌라이는 내탕금을 내어 그를 대도(大都)에 안장하게 했다. 또 사후에 태부, 趙國公에 추증되었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 성종 때는 태사(太師)가 추가되었으며 ‘문정(文正)’으로 시호가 고쳐졌고, 원 인종 때는 상산왕(常山王)으로 추봉되었다. 원조 전체를 통틀어 한인으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이는 유병충이 유일하다.
9월, 바얀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양양에서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했다. 바얀과 아주가 우익의 주력을 이끌고 남송에서 투항한 장수 여문환을 선봉으로 삼아 양양에서 한수(漢水)로 진입해 장강을 건넜다. 좌익 대군은 합답이 이끌고 유정을 선봉으로 삼아 회서에서 양주(揚州) 방면으로 향했다. 나머지 한 갈래는 동문병이 이끌고 회서 정양에서 안경(安慶)을 압박했다.
바얀의 대군은 먼저 영주(郢州)에서 20리 떨어진 염산(鹽山)에 도달했다. 송군이 새로 구축한 영성(郢城) 방어선과 마주했을 때, 여러 장수들은 이 목구멍 같은 요충지를 먼저 함락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바얀은 이렇게 말했다.
“군사를 부리는 완급은 내 마음에 이미 계산이 서 있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 대군이 남정을 온 것이 어찌 이 성 하나를 빼앗기 위함이겠는가?”
결국 영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강을 따라 내려갔다. 영성의 송군 수장 조문의(趙文義)와 범흥(範興)이 2천 기병을 이끌고 기습해왔으나, 바얀은 군대를 돌려 반격하여 조문의를 베고 범흥을 사로잡아 죽였다. 송군 500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후 바얀의 대군은 사양(沙洋, 현 호북 형문荊門)에 이르러 여러 번 항복을 권유했으나, 송군 수장 왕호신(王虎臣)이 이를 거부했다. 원 군대가 공격을 감행해 성이 함락되었고, 왕호신 등은 사로잡힌 뒤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되었다. 신성(新城)에 이르렀을 때는 수장 변거의(邊居誼)가 항복을 거부하다 성이 함락되자 온 가족과 함께 자결했다. 복주(複州)에 이르자 지주 채귀(翟貴)가 항복했다. 바얀은 장수들에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며 위반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12월, 원나라의 수만 척 전함이 한구(漢口)를 통해 장강으로 진입했다. 또한 몽골군과 한군으로 이루어진 수십만 기병을 강북에 배치해 무기를 정비하게 한 뒤 양라보(陽邏堡)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양라보의 수군이 항복을 거부하자 바얀은 장수들을 지휘해 공격했으나 사흘 동안 함락하지 못했다.
바얀은 아주와 상의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을 쓰기로 했다. 아주에게 밤을 틈타 정예 기병 3천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게 한 뒤, 이른 아침 강을 건너 남안의 송군을 기습하게 한 것이다. 이 허를 찌른 공격으로 양라보(陽邏堡)에 있던 구원군이 무너졌고, 양라보 역시 함락되었다. 송군은 대패하여 수십만 군사가 거의 모두 전멸하거나 다쳤다.
바얀의 대군이 다시 악주(鄂州)에 이르렀다. 원 군대가 송의 전함 3천 척을 불태워버리자 악주지부 장안연(張晏然), 지한양군(知漢陽軍) 왕의(王儀), 덕안지부 내흥국(來興國) 등이 잇달아 투항했다. 바얀은 그들의 군대를 원 군대에 편입시켰다.

12월, 수만 척에 달하는 원군 전함이 한구(漢口)를 통해 장강으로 진입했다. 사진은 남송 마원(馬遠)의 〈수도(水圖) 장강만경(長江萬頃·끝없이 넓은 장강의 물결)〉이다. (공유 영역)
1275년 초, 원군은 황주(黃州)에 도착했고, 송 연강제치부사 겸 황주지부 진혁(陳奕)이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기주(蘄州)에 이르자 송 안무사 관경모(管景模)가 항복했다. 이외에도 송 병부상서 여사기(呂師夔), 지주(知州) 전진손(錢真孫), 지남강군(知南康軍) 엽창(葉閶),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겸 안경지부(安慶知府) 범문호(範文虎), 송 도통제(都統制) 장림(張林) 등이 줄지어 귀순했다. 바얀은 이들을 일일이 어루만져주고, 투항하지 않고 자결한 송 관리들의 시신도 정중하게 안장해 주었다.
원군의 파죽지세는 남송 조야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남송의 병력은 70여 만 명으로 원군보다 적지 않았고, 여전히 충의로운 장수들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남송 조정이 현능(賢能)한 인재를 등용했다면 멸망 시기를 조금은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운이 다한 남송은 가사도의 전횡 아래 위아래로 부패해 인심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남경 경호제치사(南京京湖制置使) 왕립신(汪立信)의 말처럼 “지금 천하의 대세가 열에 여덟 아홉은 떠났는데, 군신들은 잔치를 즐기며 근심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왕립신은 양양이 포위되었을 때 가사도에게 두 가지 계책을 올린 바 있었다. 상책(上策)은 70만 병마 중 정병 50여 만 명을 뽑아 장강 연안에 주둔시키는 것이었다. 장강의 방어선은 7천 리에 불과하니, 100리마다 1개의 둔(屯)을 두고 수장을 임명하며, 10개의 둔을 모아 부(府)로 삼아 총독을 두고 요충지마다 병력을 더하자는 방안이었다. 군사들이 “일이 없으면 장회(長淮)에 배를 띄우고 순찰하며, 일이 생기면 동서에서 일제히 분연히 일어나 싸우고 지키는 방책”이었다. 서로 응원하며 연락을 공고히 하고 신뢰할 만한 대장과 친왕을 총지휘관으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중책(中책)은 억류 중인 몽골 사절단을 돌려보내고 세폐를 바치겠다고 약속하여 2~3년의 시간을 번 뒤, 송군을 정비하고 국력을 기른 다음 싸우거나 지키는 방안이었다. 만약 이 두 계책마저 실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늘이 남송을 멸망시키는 것이니 항복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었다.
가사도는 이 서신을 받고 크게 화를 내며 망령된 말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막상 원군이 황주와 기주를 점령하자 남송 조야가 발칵 뒤집혔고, 가사도가 직접 출병해 원에 맞서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자 가사도는 예전 수법을 다시 쓰며 송경(宋京)을 원 군영으로 보내 화의를 청하는 서신을 전했다. 이미 원에 넘어간 주와 군을 돌려달라는 것과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내용이었다.
바얀은 송경을 억류한 뒤, 한편으로는 쿠빌라이에게 사람을 보내 지시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사도에게 전갈을 보냈다.
“우리 군대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화의와 조공이 통했겠지만, 지금 강 연안의 모든 군이 원조(元朝)에 귀부했다. 화의를 원한다면 그대가 직접 와서 면담해야 할 것이다.”
가사도는 당연히 직접 갈 생각이 없었기에, 명목상 100만(실제 13만)이라 일컫는 송군을 징발해 대치시켰다. 태주관찰사(泰州觀察使) 손호신(孫虎臣)에게 정예 병력 7만 명을 주어 지주(池州) 인근의 정가주(丁家洲)에 주둔하게 했고, 회서제치사 하귀(夏貴)에게는 전함 2,500척을 주어 장강에서 원군을 막게 했다. 자신은 무호(蕪湖) 남쪽의 노항(魯港)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가사도는 왕립신을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연강치사(沿江置使), 강회초토사(江淮招討使)로 임명하여 건강부(建康府)로 가 장강 주변 군현들에서 원조할 군사를 모집하게 했다. 왕립신은 사양하지 않고 길을 떠나며 처자식을 심복 장수에게 맡기면서, “내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터이니, 그대 또한 나를 저버리지 말라”고 말해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후 왕립신이 무호에서 가사도를 만났을 때, 가사도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울었다. “그대의 건의를 쓰지 않아 사태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12월, 수만 척에 달하는 원군 전함이 한구(漢口)를 통해 장강으로 진입했다. 사진은 〈장강지리도(長江地理圖)〉의 일부. (대만 고궁박물관 제공)
2월 중순, 원군이 정가주에 도착했다. 바얀은 좌우익 만호에게 기병을 이끌고 강을 끼고 나아가게 했다. 대포 소리가 웅웅거리며 백 리 진동하자, 하귀가 먼저 도망쳤고 가사도는 당황한 나머지 안색이 변해 즉시 징을 울려 군대를 거두었다. 송군은 대패하여 주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가사도는 양주(揚州)로, 하귀는 여주(廬州)로, 손호신은 태주로 달아났다. 그 후 태평주지주 맹지진(孟之縉) 등이 귀순했다. 왕립신은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며 그날 밤 술을 마시고 강개한 슬픈 노래를 부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기간에 남송 정벌의 계책을 내고 공을 세웠던 유정이 6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쿠빌라이는 그를 용호위상장군(龍虎衛上將軍), 중서우승으로 추증하고 ‘무민(武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송군이 궤멸하자 진강(鎭江), 영국(寧國), 융흥(隆興), 강음(江陰)의 수령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3월, 큰 저항 없이 진격한 원 군대는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을 점령했다. 바얀은 쿠빌라이에게 대군의 진척 상황과 향후 진격 방략을 보고했다.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상소를 허락하고, 바얀을 행중서성 승상으로 삼아 건강에 주둔하게 했으며 아탑해(阿塔海)와 동문병은 행추밀원 관원으로 진장에, 아주는 계속해서 양주를 공격하게 했다.
건강에 있던 바얀은 왕립신이 올렸던 두 가지 계책과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감회에 젖어 말했다.
“남송에 정녕 이런 인물과 이런 계책이 있었다니! 만약 그 계책이 쓰였다면 내가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바얀은 사람을 보내 왕립신의 가족을 찾아 잘 보살피도록 명하며 “이곳이야말로 충신의 가문이다”라고 칭송했다.
당시 강동(江東) 지역에는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바얀은 즉시 구제책을 펼치고 백성들을 안심시켜 민심이 점차 원조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싸우지 않고 항복한 임안
바얀을 남정 보낸 것과 동시에, 쿠빌라이는 예부상서 중도해야(中都海牙)와 학경의 동생인 행추밀원도사 학용(郝庸)을 남송에 보내 사절단 억류 사건을 정식으로 문책했다. 이때 가사도가 황제를 속이고 나라를 망친 음모가 천하에 폭로되었고, 남송은 총관 단우(段佑)를 보내 학경을 원나라로 돌려보냈다. 1275년 여름, 학경은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53세로 병사하니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가사도의 패전과 음모가 드러나고 원 군대가 건강을 점령하고 수도인 임안을 압박하자, 남송 조야에서는 가사도를 죽여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사태후는 내키지 않았으나 거대한 압박에 못 미겨 결국 그를 순주(循州, 지금의 광동 용천)로 유배 보냈다. 그 후 가사도를 압송하던 회계현위 정호신(鄭虎臣)이 압송 도중 그를 살해했다. 가사도는 결국 《송사(宋史)》 간신(奸臣)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남송 임안 황궁도(공유영역)
가사도가 유배당함과 동시에 남송은 바얀에게 편지를 보내, 사절단을 억류하고 살해한 일은 조정에선 전혀 모르던 일이며 변방의 장수가 독단한 것이니 죄를 물어 처벌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조공을 바칠 테니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 바얀은 이것이 송나라가 허실을 탐지하려는 궤계라 여겼으나 확인을 위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신마저 송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무렵 쿠빌라이는 바얀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을 다소 우려해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적 경내에 가벼이 들어가지 말라”며 잠시 군사를 쉬게 하고 가을에 다시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휘하의 한인 장수 장홍범(張弘範)의 건언을 들은 바얀은 상소를 올려 반박했다.
“송인(宋人)들은 강과 바다에 의지하고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의 목구멍을 틀어쥐었으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들은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전선의 사정을 더 잘 아는 바얀의 판단이 옳다고 여겨 진격을 허락했다.
5월, 북서방 제왕들의 소요 사태로 인해 쿠빌라이는 바얀을 임시로 불러들여 카이두(海都)의 반란을 평정하게 하는 한편, 남송 공격을 지속할지 논의했다. 바얀은 쿠빌라이에게 남송이 지금 매우 취약하니 멸망시킬 최적의 기회라며 계속 진격할 것을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건의에 동의하여 임안을 공격하도록 명하고, 다른 사람을 북상시켜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7월, 바얀은 중서우승상으로 승진했고 아주는 좌승상에 임명되어 강남을 평정하는 공을 아주에게 양보하도록 했다.
8월 초, 바얀은 남송 황제에게 줄 조서를 품고 행성으로 돌아왔다. 10월에는 양주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대군을 남하시켜 진강(鎭江)에 이르렀다. 11월, 바얀은 세 갈래 대군을 이치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시켜 임안을 압박했다.
당시 임안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많은 관리가 직을 버리고 도망쳤고, 각지의 수령들 역시 관인을 버리고 성을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사태후는 어쩔 수 없이 애통한 조서를 내려 각지에 군사를 일으켜 왕실을 지키라 명했으나, 오직 감주지주(贛州知州) 문천상(文天祥)과 영주수장(郢州守將) 장세걸(張世傑)만이 병력을 이끌고 임안을 지키러 들어왔다. 당시 문천상은 가산을 털어 군사를 모았고 수개월 만에 2만 명의 의군을 조직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송조의 대세가 기운 뒤였다. 원군이 무석(無錫)과 상주(常州)를 함락하자, 바얀은 남송에서 투항한 유개실(遊介實) 편에 쿠빌라이의 조서 부본과 바얀의 명령서를 들려 남송 조정으로 보냈다. 12월, 바얀은 무석에서 황제와 태후의 친서를 지참한 송 신하 장작감 류악(柳嶽) 일행을 만났다. 류악은 다시 한번 군대의 진격을 멈춰달라고 청하며 매년 조공을 바치고 화친할 것과 간신 가사도가 신의를 저버려 나라를 망쳤다고 해명했다. 바얀은 송이 원의 사신을 16년 동안 구금하고 무고하게 사신을 살해한 온갖 불신과 불의한 행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바얀의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는 화의에 동의했다. 이에 바얀은 대장 낭기아다이(囊加歹)를 임안으로 보냈다. 이후 낭기아다이는 송 상서 하사림(夏士林), 시랑 여사몽(呂師孟), 종정소경(宗正少卿) 육수부(陸秀夫)와 함께 송의 국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국서에는 쿠빌라이를 백부(伯父)로 존경하고 송 황제가 대대로 아들이나 조카의 예의를 행할 것이며, 매년 은 25만 량과 비단 25만 필을 바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화의가 진행되는 중에도 바얀은 군대를 계속 전진시켰다. 문천상은 사태후, 전태후, 공제를 이끌고 바다로 피신한 뒤 자신은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겠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76년 초, 원 군대가 가흥(嘉興)에 진입하자 송 안무사 유한걸(劉漢傑)이 항복했다. 송 재상 진의중(陳宜中)이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한 끝에, 송 공제는 국새와 항복 문서를 군영으로 보냈다. 바얀은 이를 접수하고 낭기아다이를 송의 사신이자 임안지부인 가여경(賈餘慶)과 함께 임안으로 돌려보내 송 승상을 불러 항복 절차를 논의하게 했다.
이때 진의중 등 대신들은 익왕(益王) 조시(趙昰), 광왕(廣王) 조렴(趙籨)을 데리고 온주(溫州)로 달아났고, 궁중에는 오직 사태후와 어린 황제뿐이었다. 사태후는 문천상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그를 바얀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바얀은 군사들이 임안성에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고, 여문환을 보내 방문을 붙여 성안의 군민들을 안심시켰다.

문천상(文天祥)의 초상화, 청대 엽연란(葉衍蘭) 그림. (공유 영역)
문천상 일행이 원나라 군영에 도착한 후, 그는 군대를 먼저 철수시킨 뒤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바얀은 문천상이 나라의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로 얻기 힘든 인재라 여겼다. 이에 사신을 붙잡아두지 않는 원나라 군대의 오랜 관례를 깨고 그를 진영에 연금한 뒤, 다른 사람들만 사태후에게 돌려보내 보고하게 했다.
당시 수개월간의 포위 끝에 임안은 혼란의 극치에 달해 있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성안에 역질의 기운이 가득하여 병들어 죽는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곧 남송 멸망의 징조였다.
진퇴양난에 빠진 사태후는 결국 바얀에게 전국옥새와 송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는 항복 문서를 바쳤다. 옥새와 항복 문서를 쿠빌라이에게 압송하는 동시에, 바얀은 좌우 장수들을 거느리고 임안성을 순시하며 남송 종실 대신들을 접견했다. 그리고 진무사 탕구다이(唐古歹)에게 명하여 문천상이 모집했던 2만 여 명의 의병을 해산시켰다. 이어 임안 군민을 위무하고 송 궁정을 호위할 군대를 배치한 뒤, 사신을 보내 구주(衢州), 신주(信州) 등지의 투항을 권고했다.
2월 5일, 송 공제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바얀은 임안을 양절대도독부(兩浙大都督府)로 개편하고 망구다이(忙古歹)와 범문호에게 도독부의 관리를 맡겼으며 장혜(張惠), 아라한(阿剌罕), 동문병, 여문환 등을 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은 남송의 재정과 군량을 정리하고, 백관의 임명장, 부인(符印), 도책(圖冊 토지 및 호적 대장)을 거두었으며 송의 관청들을 폐지했다. 망국의 군주는 다른 곳으로 이주 시켰고, 새로 귀순한 남송 관리들을 보내 호남·북, 양광(광동·광서), 사천 등 아직 함락되지 않은 주군에 투항을 권고했다. 또한 장수들을 요충지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도굴꾼들이 송나라 황실의 능묘를 파괴하는 것을 엄금했다.
당시 동문병은 임안성에 들어간 후 이렇게 건의했다.
“나라는 멸망할지언정 역사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송은 16대 황제를 거치며 300여 년간 천하를 다스렸고 태사(太史)가 기록한 바가 모두 사관에 남아 있으니, 이를 모두 수습하여 조정의 전례로 삼아야 합니다.“
이에 따라 송의 역사와 각종 기록물 5,000여 책이 보존되어 훗날 국사원(國史院)으로 보내졌고, 이는 훗날 《송사(宋史)》를 편찬할 때 매우 신뢰할 만한 사료가 되었다.
바얀이 쿠빌라이의 당부를 받들어 조빈을 스승으로 삼았기에 임안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했고, 도성에 들어온 후에도 군대를 엄히 단속하고 관대하게 위로하는 정책을 폈다. 이 덕분에 “남송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이 바뀐 줄도 몰랐고, 번화한 거리가 조금도 바뀌지 않아 대대로 이어온 번창함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남송 조정이 귀순함에 따라 원조는 37부(府), 128주(州), 2개의 관감(關監), 733개 현을 얻었으며 여기에는 수많은 부유한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3월, 바얀은 송 공제 등을 데리고 상도(上都)로 돌아왔다. 쿠빌라이는 직접 공제를 불러 접견하고 그의 황제 칭호를 폐한 뒤 영국공(瀛國公)으로 봉했다. 훗날 공제와 태후는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바얀은 거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추밀원(同知樞密院)에 임명되었고, 은서(銀鼠)·청서(靑鼠)·지손(只孫, 원대에 내정에서 큰 연회를 할 때 입던 관복) 20벌을 하사받았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16/n1302611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