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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하나 당조(唐朝) (4)

(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청사에 이름을 남긴 어진 신하들 — 하늘이 태종을 돕다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만세(萬世)에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은,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인덕(仁德)과 탁월한 재능 덕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일심으로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한 어진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 시기에는 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현신들이 대거 등장했다.

재상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 두 사람은 흔히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 불렸다. 방현령은 기묘한 지모와 책략에 능했고, 두여회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인척인 고사렴(高士廉)과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신분이 존귀함에도 자만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짜내었으니 얻기 힘든 소중한 인재들이었다.

간관 위징(魏徵)은 황제의 용안을 거스르는 것을 무릅쓰고 직간했으며, 매번 이치에 맞는 말을 하여 탄복을 자아냈다.

이처럼 훌륭한 신하들이 마치 찬란한 별무리처럼 대당(大唐)을 밝게 비추었다.

방모두단 (房謀杜斷)

방현령은 진사 출신으로, 일찍이 이세민이 수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군중에 들어와 참군(參軍)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사람들은 재물을 약탈하기 바빴으나, 그는 막부(幕府)로 인재를 모으기에 바빴다. 용맹과 지략이 있는 장수나 참모를 보면 반드시 깊이 교류하여 이세민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었으니, 그의 안목과 뜻이 실로 뛰어나고 탁월했다.

무덕 9년, 태자 이건성과 제왕(齊王) 이원길이 진왕 이세민을 살해하려 음모를 꾸밀 때, 방현령과 두여회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이세민의 부름을 받고 부중(府中)에 들어와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이건성은 이세민을 해치지 못했고 도리어 천벌을 받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세민이 등극한 후 공을 논하여 포상할 때, 방현령의 공로를 으뜸으로 인정하며 “군막 안에서 전략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은 재능이 있다”고 찬사하고 재상으로 삼았다. 방현령은 이때부터 밤낮으로 국정을 처리했으며, 그의 공평한 판단 아래 처리된 일 중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고 귀천을 가리지 않아 세상에서 ‘양상(良相 훌륭한 재상)’이라 불렸다.

정관 22년, 방현령은 병세가 위중함에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나랏일을 걱정했다. 태종은 그의 손을 잡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몹시 슬퍼했다.

한편 방현령과 명성을 함께한 두여회는 설인고, 유무주, 왕세충, 두건덕 등을 평정하는 전쟁에서 줄곧 이세민의 곁에서 군사 정세를 분석했다. 그는 식견이 비범해 뛰어난 통찰력으로 이세민을 성공적으로 보좌하며 전국이 할거하는 난을 평정했다.

621년 10월, 진왕 이세민은 문학관(文學館)을 개설하고 두여회를 청해 문학관 18학사의 수좌(首座)로 앉혔다. 이세민이 등극한 후 그 역시 첫째가는 공신으로 추앙받으며 방현령과 명성을 같이하여 ‘방두(房杜)’라 불렸다.

정관 3년, 두여회는 상서우복야로 승진해 방현령과 함께 대국을 지탱했다. 그의 일 처리 능력은 방현령에 전혀 뒤지지 않았고, 큰이를 잘 결단해 전심전력을 다했기에 그 역시 ‘양상(良相)’이라 불렸다. 안타깝게도 두여회는 정관 4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태종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 사흘 동안 조회를 파하니 군신(君臣) 간의 의리가 두터워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쟁신(諍臣) 위징 (魏徵)

“당 태종이 간관 위징을 만들었다면, 위징이 명군 당 태종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조대의 천자에게는 그 조대의 신하가 있는 법이며, 간관은 명군을 만나야 비로소 ‘간(諫)‘할 수 있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통틀어 당 태종 시대에 위징이라는 인물이 나온 것을 제외하면 대간관(大諫官)은 실로 드물었다. 위징은 본래 태자 이건성의 막료였으나, 당 태종은 과거 잘못을 개의치 않고 그를 간관으로 임용해 정사의 득실을 직접 물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번은 당 태종이 병력 자원이 부족하자 재상 봉덕이(封德彝)의 요청에 따라 아직 징집 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중남(中男)까지 군대에 입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서가 문하성에 도달했을 때, 위징이 성지를 어기고 서명하지 않았다.

태종이 대노해 “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거늘, 이 일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라고 질책했다.

그러자 위징이 대답했다.

“못의 물을 다 말려 고기를 잡으면 내년에는 고기가 없고, 숲을 태워 짐승을 잡으면 내년에는 짐승이 없습니다. 중남을 군대에 충원하면 조세와 부역이 줄어들 것이요, 하물며 군사는 그 수가 많은 것보다 정예함이 중요한 법이니 숫자를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당 태종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징집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징에게 금 항아리를 하사했다.

정관 8년, 장손황후가 당 태종을 위해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정씨(鄭氏) 성의 여인을 찾아내 비빈(妃嬪)으로 삼아 후궁으로 들이려 하자 위징이 이에 간언했다.

“이 여인은 이미 육씨(陸氏) 집안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황제는 백성의 여인을 빼앗지 않아야 하며 남의 경사를 망치지 말아야 하니,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백성의 고통을 굽어살피소서.”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육씨와 정씨 사이에 무슨 약혼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육씨 역시 표문을 올려 약혼 사실을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위징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육씨가 이 일을 부정한 것은 살신(殺身)의 화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리한 것입니다.”

태종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끌지 않고 정씨를 후궁으로 맞이하려던 일을 깔끔히 취소했다.

같은 해, 황보덕삼(皇甫德參)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낙양에 동궁(東宮)을 수리하는 것은 백성을 고달프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지조(地租 토지세)의 징수가 과도하며, 부녀자들이 높은 머리를 틀어 올리길 좋아하는 것은 궁중에서 비롯된 폐단입니다.”

태종이 노하여 말했다.

“덕삼은 대당이 한 사람도 부리지 않고, 한 말의 곡식도 거두지 않으며, 궁녀들의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려야만 마음이 족하겠는가!”

그러자 위징이 간했다.

“상소가 과격하지 않으면 주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법입니다. 미친 사람의 말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면 따라야 합니다. 폐하께서 더는 직언 듣기를 싫어하시고 화를 내시니 이전의 넓은 흉금이 사라지셨습니다.”

태종이 노여움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혔으며, 오히려 황보덕삼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시켰다.

나중에 위징이 죽은 후 당 태종은 통곡하며 자신이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대당의 용사 이정(李靖)

617년, 이연이 장안성을 공격할 때 붙잡힌 수나라 장수 중 한 명이 바로 이정이었다. 이연이 그를 죽이려 할 때, 이세민이 곁에서 극력 변호하여 이정의 목숨을 구해 그를 자신의 막부로 거뒀다.

이세민이 초빙한 인재는 결코 범상치 않은데, 이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무덕 4년 10월, 이정은 전광석화와 같은 전략으로 강릉성을 공략해 대당을 위협하던 군벌 소선(蕭銑)을 제거했다.

무덕 7년, 이정은 이효공(李孝恭), 이적 등 7로(路) 군단을 이끌고 강회(江淮) 지역으로 가서 무장 반란을 진압했다. 당 고조 이연이 찬탄하며 말했다.

“고대의 명장 한신, 백기, 위청, 곽거병도 이정과 비교하면 모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

당 태종이 즉위한 후 이정은 자주 원정길에 올랐다.

정관 3년 11월, 이정은 어명을 받아 10여 만 대군을 이끌고 6개 길로 나누어 당시 강국이었던 동돌궐을 정벌했다. 꼬박 2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정양 땅을 무너뜨리고 힐리가한을 생포하자 동돌궐이 멸망했다.

당조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면서 이정은 혁혁한 공로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올랐다. 정관 8년, 토욕혼이 국경을 침범하자 이정이 태종에게 스스로 출정을 자청했다. 당시 환갑이 넘은 나이였으나 이정의 담력과 지략은 예전만 못지않았다. 그는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주력 부대를 수색했으니 참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용자(勇者)였다.

결국 두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했고, 빗발치는 화살과 칼날의 그림자 속에서 양측은 생사를 건 결전을 벌였다. 치열한 혼전 끝에 승리는 대당에게 돌아갔다. 토욕혼의 부하들이 자신들의 맹주 복윤가한을 살해하고 항복하자, 이정은 서북 지역을 안정시키고 개가(凱歌)를 부르며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정은 평생 나라를 위해 동정서토(東征西討)하며 북적(北狄)에 위엄을 떨쳤으니, 실로 “승전고 소리 사막에 분분히 전해지고, 천만리 강산에 오랑캐 먼지 자취를 감추었네”라는 말이 어울렸다.

정관 23년, 이정은 집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

대당 용사의 신(神)은 어디로 돌아갔을까?

오직 태종을 위해 한 차례 왔을 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