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宇桐)
【정견망】
머리말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역사를 읽으면 사람이 현명해진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속적이고 정확한 역사 기록을 가진 국가로, 5천 년의 역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조대의 교체를 기록해 왔다. 만약 중화문명이 5천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면, 그 이면에는 분명 도덕을 유지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했을 것이다. 중화민족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특히 근대 이후로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주입받은 것은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1. 제1차 아편전쟁
청조 제8대 황제 도광제(道光帝) 시절, 중국 근대사에 심중한 영향을 미친 사건인 1839년의 호문소연(虎門銷煙 임칙서가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운 것) 사건이 발생했다. 1759년부터 영국인이 세운 동인도회사는 줄곧 중국과 무역을 해왔다. 중국인들이 그들에게 판 비단, 차, 공예품 등은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나, 유럽으로부터 물건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무역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중국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후에 임칙서(林則徐)는 많은 사람이 아편을 피우면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군대의 전투력도 잃게 된다며, 서양인들의 아편이 대청(大淸)의 은을 벌어들이는 것을 통탄했다. 그의 건의에 따라 도광제는 그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아편을 소각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시 중국은 외국과의 교류 경험이 부족하여 많은 조치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결과 청 조정이 패배하여, 1842년 양측은 남경에서 《중영남경조약》(남경조약)을 체결했다. 청 정부는 영국에 2100만 냥의 은을 배상하고, 광주, 복주(福州), 하문(廈門),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했으며, 홍콩을 할양했다.
아편전쟁 이후 청 정부는 열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가끔 패배하는 것은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1.1 태평천국 운동
제1차 아편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처음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으나 급속도로 확장하여 남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천왕(天王)’이라 칭하며 ‘태평천국’ 정권을 세웠고, 1864년 증국번(曾國藩)에게 진압당했다.
1.2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과 같은 시기인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하자 함풍 황제는 열하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병사했다. 청 정부는 이 시기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1.2.1 원명원 방화
영·프 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한 후 원명원(圓明園)에 불을 질렀으며, 이는 청 정부에 큰 타격을 주어 황실 정원이 불타버렸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가 틈을 타 침입하여 헤이룽장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100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점령하고, 중국과 《아이훈 조약》 및 《북경 조약》을 체결했다.
2. 일루미나티(광조방)
중공 당국은 영화, 교육 등의 선전을 통해 중국 근대사 속 서구 열강의 침입을 알리며 우리에게 국치(國恥)를 잊지 말라고 가르쳤고, 이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이 열강은 나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제기한 “낙후되면 얻어맞는다(落后就要挨打)”, “과학으로 나라를 강하게 한다(科技強國)”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사실 청조 강희제는 무려 130년에 달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개창했다. 일부 학자들은 ‘강건성세’를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라고 불러야 한다고 보는데, 이는 강희, 옹정, 건륭 세 황제를 가리킨다. 건륭제가 재위할 때 유럽과 미국에서는 천지개벽할 변화가 일어났다.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사회 질서의 전통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폭도들이 미쳐날뛰게 만들었다. 또한 18세기 말 서구의 산업혁명은 사람들이 물질과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가중시켰고, 현대 사회에 신앙의 상실과 인간 도덕의 타락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중화(中華)를 침해하고 중국 문화를 파괴한 주범이 바로 공산당과 한 통속인 자들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중국에 아편을 유입한 것은 일루미나티[Illuminati 중국어로는 광조방光照帮이라 한다]가 통제하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역사학자 제임스 빌링턴 등 학자들의 체계적인 연구에 따르면, 공산당은 18세기 독일 바이에른의 일루미나티(Bavarian Order of the Illuminati)에서 기원했다. 일루미나티의 수괴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 1748~1830)는 악마교(魔敎) 신도로, 사탄 루시퍼(Lucifer)를 신봉했다. ‘의인동맹(正義者同盟)’은 일루미나티가 침투하고 통제한 외곽 조직이었다.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런던에서 제1차 대회를 열고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꿀 것을 선포했다. 같은 해 11월,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선언’의 집필을 위임했다. 다음 해 2월 21일 《공산당 선언》이 출판되면서 공산 운동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일루미나티의 강령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교리는 모두 공산당에게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은 오직 폭력으로 모든 현존하는 사회 제도를 타파해야만 달성할 수 있음을 공공연히 선포한다”고 공언했다. 레닌은 일찍이 우리는 모든 간계, 음모 등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며 진실을 은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시간대에 주목해 보라. 제1차 아편전쟁은 1840년이었고, 《공산당 선언》은 바로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전쟁 사이에 나타났다. 이때 프랑스의 공산당 태동기가 이미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 이후 프랑스의 공산당 조직은 빈번하게 국제회의를 소집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운동을 발동해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혁명을 시도했다. 공산주의의 확장에 따라 중국은 일련의 외래 침략을 겪었고, 청 정부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배후에서는 모두 프랑스, 독일, 영국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3. 양무운동, 청일전쟁, 무술변법
3.1 양무운동 (1861~1894년)
함풍황제가 서거한 후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同治帝)가 즉위했다. 이때 서태후(자희태후)와 자안(慈安)태후, 그리고 증국번,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식견 있는 대신들은 공업과 무기 수준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서양과 싸울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1860년부터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시작되었는데, 주로 기물(器物)을 도입하고 문화의 자립을 꾀하는 것으로 군수 공업과 중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청 정부는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고 공장을 세워 첨단 무기를 생산했다. 동시에 북양, 남양, 복건, 광동의 4대 철갑 함대를 창설했다. 당시 청나라 군함의 배수량은 아시아에서 1위였다. 그러나 1894년에 중대한 좌절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3.2 청일전쟁 (1894년 7월~1895년 4월)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군대도 발전하여 생존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청 정부는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청군의 패배였고, 군함들은 모두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결국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대만을 할양하고 은 2억 냥을 배상해야 했다. 중국인들은 원래 일본을 얕잡아 보았는데, 수당(隋唐) 시대에는 일본이 우리에게 배우기 위해 당에 유학생을 파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게 패배했으니, 이 전쟁은 중국인들의 가슴 아픈 상처였다.
3.3 무술변법, 백일유신 (1898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이후 민간의 힘이 흥기했다. 지식인들과 각지의 거인(舉人)들이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일으다. (《사해》의 설명에 따르면, 1895년 4월 청일전쟁 패배 후 이홍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자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5월 2일 강유위(康有爲)와 1300여 명의 거인(擧人)들이 북경에서 상소를 올려 조약 거부, 천도(遷都) 항전, 변법으로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정부가 과거 응시생들을 운반하기 위해 관용 마차를 사용했기 때문에 ‘공거’란 과거 응시자를 지칭하는데, 이것이 ‘공거상서’의 유래이자 무술변법의 서막이다.) 그들은 청 정부에 개량을 요구하며 서양의 선진 정치 및 교육 제도를 배울 것을 청했고, 이는 민간에서 국정에 참여하는 선례를 열었다. 사람들은 양무운동의 기물 도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제도 역시 개혁해야 한다고 여겨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시작되었다.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정국시조(定國是詔)》를 반포하고 변법유신을 선언하여 제도 개량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서태후도 무술변법을 지지했으나, 일부 사안이 너무 급진적으로 흘러가자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것과 한인(漢人)이 정권을 잡으면 만주족의 이익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중국이 일본과 영국의 통제를 받게 될까 봐 걱정했다. 여기에 담사동(譚嗣同)이 천진 열병식 때 서태후를 납치하려다 계획이 발각되자,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영대(瀛台)에 유폐시켰고 무술변법은 불과 100여 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때문에 ‘백일유신’이라고도 불린다. 광서제 역시 권력을 잃었다.
4. 대청 입헌과 신해혁명
4.1 대청 입헌 및 멸망 (1908~1911년)
비록 무술변법은 실패했으나 개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광서제는 일찍이 교육 제도 개혁 조서를 내려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했으며, 동시에 북경에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현재 북경대학교의 전신)을 창립했다. 비록 국가는 변하고 있었으나 민간과 외국은 더욱 철저한 개혁, 특히 정체(政體) 면에서 입헌군주의 길을 걷기를 희망했다. (입헌군주제는 군주독재제에 대비되는 국가 체제로,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입헌을 통해 국민의 주권을 세우고 군주 권력을 제한하며 실질적인 공화주의 이상을 실현하되 공화정을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 특징은 국가원수가 군주라는 점이다.)
대청 입헌은 1908년에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반포하며 헌정의 길을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서양의 헌법과 매우 달라서, 군권을 구속하기보다는 군권을 보호하는 데 치중했고 황제의 절대 통치를 명확히 했으며 일부 민권도 부여했다. 《흠정헌법대강》이 반포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서태후가 서거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즉위했다.
이때 백성들은 개혁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1860년 양무운동부터 1898년 무술변법, 그리고 1908년 대청 입헌에 이르기까지, 기물 도입, 제도 개혁, 헌정 반포를 거쳤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전이 더디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1911년 신해혁명이 폭발하여 제제를 타도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립했으며, 이는 청나라의 종말을 알리고 역사가 민민국 시기로 진입했음을 상징했다.
4.2 신해혁명 (1911년 10월~1912년 2월)
신해혁명은 1911년(신해년) 10월 10일 무창(武昌) 봉기의 폭발로 시작되었으며, 당시 각지에서 신속히 호응했다. 1912년 원단, 손중산(孫中山)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 시기 전 중국의 혁명 사건들을 통틀어 ‘신해혁명’이라 부르며, 마침내 청나라 선통제(宣統帝 부의가 재위할 때 연호가 ‘선통’이었음)의 퇴위로 막을 내렸다. 나중에 중화민국 대만은 무창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10일을 국경일(쌍십절)로 지정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치 제도가 두 차례의 중대한 변천을 겪었다고 요약한다. 첫 번째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로, 진나라 이전에는 봉건제를 시행하여 천자가 땅을 제후들에게 나누어주고 혈연관계를 유대로 하는 소공동체를 형성했다. 후에 진시황이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여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었으며, 이 제도는 신해혁명 때까지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두 번째 변천은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제제를 종식시키고 공화로 나아간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제에서 민주로의 평화적 전환이었으며, 중화민국의 건립은 인류 문명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 사회는 여전히 매우 복잡한 발전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공화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인민들이 공화가 좋다고 느꼈고, 공화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제도의 부활(왕조 시대의 전장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있었다. 정치 체제, 국민의 심리, 학술 문화, 경제와 사회 구조상의 모든 변화는 지극히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민국 2년(1913년) 10월 6일, 북양군 수뇌였던 원세개(袁世凱)가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북양정부(北洋政府) 또는 ‘민국북경정부(民國北京政府)’로 통칭되는 북경 정부의 공식 수립을 상징했다.
5. 신문화운동, 5·4 운동
5.1 신문화운동 (1915년)
1915년부터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진보주의’ 정치 운동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근원이 공산주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데, 점진적인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더욱 은폐되어 있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미국 교육가 듀이(John Dewey)의 진보주의 교육이 미국을 부식시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중국인 제자들도 앞다퉈 귀국하여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민족 자강의 길을 시급히 찾고자 하는 선량한 소원을 이용해, 1915년 중국인들로 하여금 전통을 부정하는 ‘신문화운동’을 발동하도록 유도했다.
‘신문화운동’에는 세 명의 대표인물이 있었다. 즉 듀이의 제자 호적(胡適), 공산당 창립자 진독수(陳獨秀), 그리고 모택동에 의해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 찬양받은 노신(魯迅)이다. 이 외에 공산당의 또 다른 창립자 이대쇠(李大釗)도 후기에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운동은 중국 전통의 폐단을 핑계로 삼아, 중국의 백년 쇠약을 전통문화의 탓으로 돌리며 “공자점을 타도하라(打倒孔家店)”고 주장하였고, 전통을 ‘구문화(舊文化)’로, 서구 문화를 ‘신문화(新文化)’로 간주하여 “민주(民主 덕선생德先生)”와 “과학(科學 새선생賽先生)”이라는 구호를 통해 전통 신앙을 비판했다. 그들은 《신청년》 잡지와 북경 대학을 근거지로 삼아 신식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였고, 마침내 중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뒤이어 격렬한 ‘5·4’ 운동의 길을 닦아주었으며 전통 가치를 뒤엎는 제1차 파동을 일으켰고, 동시에 서구의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는 기반을 다져주었다. 교육 면에서 ‘신문화운동’의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호적의 창도하에 초등 국문 교육은 전면적으로 백화문으로 전환되었고, 나중에는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고문(古文)을 읽기 어려워졌으며, 《주역》, 《춘추》, 《도덕경》, 《황제내경》 등 전통 경전은 오직 학자들만이 연구하는 대상이 되어 일반 학생들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사람들은 중국의 휘황찬란한 5천 년 문명 내면의 광대함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5.2 5·4 운동 (1919년 5월 4일)
1919년 5월 4일, 신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청년 학생들이 북경에서 대규모 거리 행진을 벌였다. 계기는 이랬다.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산동 반도의 권리를 회수하기를 기대했으나, 파리 평화회의는 오히려 그 주권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 행진을 거행하며 북양정부가 파리 평화회의에 서명하는 것에 반대했다. 학생들은 더 나아가 노동자 및 상공업계와 연합하여 동맹휴업, 동맹파업, 상점 철시를 조직했고, 심지어 방화와 외교관을 공격하는 폭력 행동도 취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중공 선전에서는 5·4 운동을 ‘선진 청년’들이 북양군벌 통치의 부패와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발동한 ‘애국 학생 운동’이라고 미화하며 그 핵심 정신을 ‘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다(愛黨愛國)’고 포장하고 있다.
중국 현대 사상사 학자 펑충이(馮崇義)는 이것이 ‘민족주의’ 선양을 빌려 국내의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민국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여전히 허용했건만, 오늘날의 북경 당국은 과연 허용할 수 있는가? 홍콩 평론가 펀샤오타오(潘小濤)는 당국이 연설에서 말한 “청년들의 사상적 일시적 충동이나 편견에 대해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말 따로 행동 따로(說一套做一套)”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5·4 운동은 신문화운동을 깃발로 내걸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문화적 차원에서 전면적 서구화였고, 그 뒤를 이어 극단적 혁명, 즉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청년 학생들은 급진적인 사상에 쉽게 영향을 받아 전통문화를 단순 부정하게 마련인데, 유가(儒家에서 제창하는 ‘중용지도(中庸之道)’야말로 모든 극단주의를 막는 방화벽이었다. 바로 이 방화벽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헐어버렸을 때, 공산주의라는 이러한 극단적 사상은 아주 쉽게 안방으로 기어들어 오게 되었다.
6. 공산국제 및 중국공산당 창립
6.1 공산국제 및 중국공산당 창립 (1921년)
1886~1890년 사이, 러시아의 레닌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접하기 시작했고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감금과 유배를 겪은 후 그는 서유럽에서 살았으며, 나중에 러시아로 돌아갔을 때는 마침 제1차 세계대전 시기였다. 레닌은 혁명을 선동하고 차르를 타도하여 1917년 10월 혁명을 발동했으며, 소비에트 정권을 세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19년 레닌은 또 전 세계에 ‘혁명을 수출’하는 제3국제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여 각국에서 대리인을 찾았고, 이들 대리인을 조종하여 공산당을 세우게 함으로써 이들 국가의 합법적 정권을 전복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소련)를 위해 복무하게 했다.
1919년 미국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산국제 극동서기처를 설립했고, 슈미야츠키와 비겐스키라는 두 명의 소련인이 중국공산당의 조직을 담당했다. 1921년 7월 23일, 니콜스키와 말린의 조직 하에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10월 혁명의 포성이 우리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다”고 교육한다. 사실 그것은 공산국제의 한 지부에 불과했으며, 애초부터 매국(賣國) 정당이었다.
공산당의 시조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 기독교를 믿다가 후에 마귀 사탄교에 가입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의 첫 강령인 《공산당 선언》에서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고 썼다. 유럽의 수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의 편지, 글, 원고 속에는 방대한 증거가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희곡 《오울라넴(Oulanem)》 속에서 자신이 사탄과 계약을 맺었음을 시인하고 전 인류가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했다.
이것은 단순한 희곡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태동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인과 동란이 끊이지 않았다. 레닌이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인 소련을 세운 이래, 소련에서만 수천만 명의 비정상적인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구소련을 수장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토막 나 무너졌으며,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던 공산국제 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