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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의 진상 (하)

우동

【정견망】

7. 제1차 국공합작과 내전

7.1 제1차 국공합작 (1924~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은 이른바 ‘연러용공(聯俄容共, 소련과 연합해 공산주의를 용인함)’이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는 공산국제(코민테른), 국민당, 그리고 중공 세 주체 사이의 관계가 매우 미묘했던 시기이다. 1921년 중공이 창당되었을 당시 당원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고 세력이 매우 미약했다. 소련은 중공 당원들로 하여금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손중산(孫中山, 손문)의 영향력을 빌려 세력을 확장하도록 교사했다.

역사학자 신호년(辛灝年)의 고증에 따르면, 레닌은 일찍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손중산에게 협력을 타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1922년 남방의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광동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급박하게 지원이 필요했던 손중산이 비로소 소련 공산당과의 접촉에 동의했다. 1923년 1월, 손중산은 《손문-요페 선언》(손중산과 소련 외교부 차관 아돌프 요페가 만나 협력을 논의한 뒤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에서 공산조직과 소비에트 제도는 모두 중국에 도입될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혔는데, 이것이 바로 ‘용공’의 조건이었다. 소련이 “절대 공산제도를 중국에 이식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는 ‘용공’에 동의했다. 주의할 점은 ‘연공(聯共)’이 아니라 ‘용공(容共 공산당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허용한다는 의미)’이었다는 사실이다. 《손문-요페 선언》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합작을 시작했다.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찬탈한 이래, 공산국제와 소련의 역할을 축소하고 역사 발전 속에서의 독립적이고 중요한 자신들의 지위를 부각하기 위해 역사를 끊임없이 왜곡해 왔다. 2021년에 발표된 100부작 세뇌 미니 다큐멘터리 《백련성강: 중국공산당의 100년(百煉成鋼:中國共產黨的100年)》 제7집 <손잡은 국민혁명(攜手國民革命)>에서는, 손중산이 국민당 내부의 부패를 깨닫고 공산당과 관계를 맺었다고 거짓 선전했으며, 손중산이 ‘연러연공(聯俄聯共)’ 정책을 제안했다고 왜곡했다. 그리하여 공산당원들이 개인 명의로 속속 국민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7.2 북벌 방해 (1926~1927년)

중공은 손중산이 생존해 있을 때는 감히 큰 행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1925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중국의 북벌 통일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1920~1930년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고 각지에서 제각기 정치를 하던 시기였다. 통일과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장개석(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1926년 2월부터 북벌을 시작했다.

(북벌은 통상 중국 역사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했던 중대한 군사 행동을 가리키며, 특히 1926년부터 1928년까지의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의미한다. 북방 유목민족의 위협으로 인해 남방 정권이 반격해야 했기 때문에 이 단어는 역사상 여러 차례 등장했다. 남방 정권이 충분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북벌을 조직하곤 했다. 요컨대 중국에서 북벌은 통일을 상징한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중공은 음모적인 수단으로 북벌을 방해했다. 1926년의 ‘중산함 사건’을 통해 장개석을 소련으로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국민정부가 북벌군을 따라 무한(武漢)으로 이전하자, 중공은 이틈을 타 국민당 내의 친공(親共) 인사를 포섭하고 각종 운동을 벌였다. 중앙에서는 권력을 다투고, 지방에서는 토지 개혁, 지주 타파(토지개혁 운동), 징병을 단행하여 자체 세력을 강화한 끝에 결국 국민정부를 둘로 쪼개놓았다(역사에서는 이를 ‘녕한분열(寧漢分裂)’, 즉 국민당 내부의 남경 장개석 중심의 청공(淸共 공산당 청산) 세력과 무한 왕정위(汪精衛) 중심의 용공 세력이 분열된 사건을 뜻하며, 녕과 한은 각각 남경의 옛 이름인 강녕(康寧)과 무한(武漢)을 가리킨다).

호남 등 지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토지혁명을 벌이면서 많은 북벌군 장병의 가족들이 토호열신(土豪劣紳)으로 몰려 투쟁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하여 군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북벌 당시 제7군 군장이었던 이종인(李宗仁)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전방에서 싸우고 있을 때 가족들이 고향에서 박해를 받아 가슴에 분노가 가득 찼다고 술회했다.

공산당의 도발에 직면하여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1927년 4월 12일 철저한 청당(淸黨, 공산당 세력 축출)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진실은 공산당이 이끈 노동자 농민 운동이 먼저 지주와 향신을 학살하고 북벌을 파괴했기에 국민당과 지주의 반격을 유발한 것임에도, 중공은 도리어 적반하장 식으로 장개석이 국민혁명을 배반하고 ‘4·12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으며 공산당이 어쩔 수 없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인민들을 교육했다.

제1차 국공합작 시기 중공은 소련의 지원을 믿고 이 틈을 타 국민당 내부의 권력을 장악했다. 담평산(譚平山)은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 임조함(林祖涵)은 농민부장, 모택동은 국민당 선전부 대리부장을 맡았으며, 수많은 공산당원이 국민혁명군의 대표가 되었다. 이처럼 국민혁명군에 기생한 결과 중공은 1925년의 1천 명 미만에서 1928년 3만 명으로 급증했다.

7.3 남창 봉기, 추수 봉기 (1927년 8월과 9월)

국민당의 ‘청당’ 이후, 소련 공산당의 선동과 지원 아래 중공은 14개 성, 140여 개 도시에 걸쳐 크고 작은 100여 차례의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1927년 8월 1일, 소련 고문 쿠마닌의 직접 지휘 하에 주은래(周恩來)는 남창에 있던 2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병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남창 봉기’이며, 이날은 중공의 ‘건군절(建軍節 군대 창립일)’이 되었다.

중공의 화법 체계는 마치 색안경과 같아서 사람들이 진정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저들이 보기를 바라는 모습의 세계만을 보게 만든다. 중공은 자신들의 창업 역사를 묘사하기 위해 일련의 특수한 어휘를 창조해 냈는데, 만약 우리가 이러한 어휘로 역사를 사고한다면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중공이 우리에게 얻게 만들고자 하는 결론뿐일 것이다. ‘봉기’란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일어나 항거함을 뜻한다. 중공이 이른바 ‘봉기’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은 당시 합법적인 정권에 대한 반란, 폭동, 그리고 전복이다. ‘8·1 건군절’은 중공이 ‘남창 봉기’라고 부르는 폭동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남창 폭동이 국민당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자, 큰 타격을 입은 중공은 정권과 세력권을 탈취하기 위해 9월에 다시 장사(長沙)를 공격하는 추수 폭동(중공 명칭 ‘추수 기의起義’)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 후 공산당은 ‘당 지부를 연(連)에 건립한다(군대 중대 안에 당 지부를 설치한다는 의미)’는 네트워크식 통제를 실행하며 정강산(井岡山) 지역으로 도주하여 농촌에 지방 정권을 세웠다.

7.4 중공의 ‘소련 무장보위’ (1929년)

1929년 중화민국이 중동(中東)철도 주권(1896년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 정부에 강제로 《중러밀약》을 체결하게 하여 동북 삼성에서 중동철도를 경영할 권익을 얻었던 것)을 회복하려 하자, 소련은 이에 항의하며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중국을 상대로 대규모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 총서기 스탈린은 명령을 내려, 오직 충성스럽게 소련을 무장보위하는 자만이 혁명가로 칭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공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소련 무장보위’ 부대를 창설하고 소련 사람들을 도와 중국인들을 공격했다. 전 중공 중앙총서기 진독수(陳獨秀)가 ‘소련 무장보위’에 반대하자 결국 당적에서 제명되었다.

명백히 중국의 주권과 안보가 소련군의 침해를 받았음에도 중공은 도리어 ‘소련 무장보위’를 외쳤으니, 이것이 바로 중공이 수십 년 동안 은폐해 온 ‘소련 무장보위’의 진상이다.

7.5 중공의 제1차 건정(建政) 시도 (1931년)

남창 폭동과 추수 폭동이 실패한 후 모택동 등은 정강산으로 도망쳐 계속해서 힘을 축적했다. 1931년 9·18 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중국 동북 삼성을 점령했다. 역사학자 사유전(謝幼田)은 저서 《중공장대지미(中共壯大之謎)》에서, 국난이 닥친 상황임에도 1931년 11월 7일 중공은 소련 공산당의 조종 아래 중화민국 영토 내인 강서성 서금(瑞金)에 ‘나라 안의 나라’인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무장 폭동으로 국민정부를 타도하려는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중국의 항일 역량을 극도로 분산시켰으며, 이는 중공 전당(全黨)의 중화민족에 대한 집단적인 배반이었다. 이 역사는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중공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7.6 대장정 (1934~1936년)

중공의 소요에 대응하기 위해 중화민국 정부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세를 물리치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수립하고 1930년부터 중공 토벌을 시작하여 강서성과 호북·하남·안휘 지역에서 4년 동안 5차례에 걸친 초공(剿共, 공산당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제2차, 제3차, 제4차 초공 작전은 9·18 사변, 상해 항전, 만리장성 항전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결코 중공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체적인 힘으로 얻어낸 ‘승리’가 아니었다.

1933년 10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중공의 제5차 반초공 작전이 실패하면서 농촌 정권과 근거지를 잃고 부득불 도망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2만 5천 리 대장정의 기원이다. 중공은 ‘대장정’을 북상항일(북쪽으로 올라가 항일함)로 포장해 중국 혁명 신화로 뻥튀기했다. 즉 우리의 승리, 적의 실패로 끝났다고 선전한 것이다.

‘대장정’이라는 세 글자만 나오면 중국에서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설산을 넘고 초원을 건너던 일 등을 떠올리며, 그 고생과 불굴의 정신에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러나 작가 장융(張戎)은 저서 《모택동: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毛澤東——鮮為人知的故事)》에서 당시의 고위 지도자였던 모택동, 장문천(張聞天), 왕가상(王稼祥)은 ‘대장정’ 과정에서 모두 남이 가마에 태워 운반하고 다녔으며, 모택동은 심지어 자신의 여행 도구까지 따로 설계했다고 폭로했다. 장문천의 부인 류영(劉英)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은 자신과 왕가상의 가마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봐요, 우리가 가마를 설계했잖소. 나와 가상은 한 명은 환자고 한 명은 부상병인데, 가마에 태워 가고 있소.’” 이것이 오늘날 사회에서 밑바닥 백성들은 고생을 하는데 권귀(權貴 권력과 부를 가진 기득권층) 이익 계층은 사치스럽고 방탕한 모습과 어딘가 유사하지 않은가?

수많은 자료가 보여주듯 ‘대장정’은 중공 중앙 홍군이 제5차 반(反)‘초공’ 실패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 목적이 물거품이 된 후 감행한 북상 도주 행동이었다. 즉 항일을 가장한 진짜 도주였다. 공산당이 정신(正神) 행세를 하려니 당연히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주로 동북과 화북의 평야 지대에 있었고 주전장은 북경·천진과 산둥 일대였는데, 중공은 오히려 섬북의 고원 지대로 가서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했으니 이야말로 남원북철(南轅北轍 남쪽으로 가려다 정 반대인 북쪽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대장정’의 진정한 노선은 남쪽으로 내려가 서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홍군은 먼저 호남성 서부 지역으로 도주해 제2·6군단과 회합해 호남호북사천귀주(湖南·湖北·四川·貴州) 근거지를 세우고 무장 할거를 꾀했다. 좌절을 겪은 후 다시 사천성 서북부로 도주해 소비에트 구역을 구축했던 장국도(張國濤)와 합류했다. 최종적으로 섬북로 도주해 도착했을 때 중앙 홍군 주력은 8만여 명에서 6천 명으로 급감했다.

대장정 도중 중공은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회의를 개최해 모택동의 군사적 지도 지위를 확립했다. 일본의 침략 속도가 빨라지자 1936년 12월 국민당 장수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으로 하여금 ‘초공’을 중지하고 중공과 연합하여 항일하도록 강요했다.

8. 제2차 국공합작 (1937~1945년)

8.1 서안사변 (1936년 12월 12일)

공식적인 쌍백(雙百) ‘영웅 모범’ 인물 명단에서 장학량과 양호성 이 두 국민당 장령(將領)은 중공의 ‘대은인’으로 꼽힐 만하다. 그들이 1936년 12월 서안에서 장개석을 구금하는 병변(서안사변)을 일으켜 중국 근대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서안사변을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을 압박해 항일을 이끌어낸 ‘병간(兵諫, 무력으로 군주나 지도자에게 직간함)’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주은래를 서안으로 초청해 해결 방안을 논의했고 각 측의 조율 아래 10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성사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국군의 장학량과 홍군이 비밀리에 접촉했던 친필 서한과 서류 등 더 많은 자료에 따르면, 서안사변 이전 장학량과 양호성의 주변에는 수많은 공산당 특무가 있었다. 지하당원 류정(劉鼎)은 송경령(명의상으로는 손중산의 부인이지만 실제로는 장기간 반정부 특무 활동에 종사하며 삼민주의 중국을 파괴하는 공산 운동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을 통해 장학량과 연계를 구축했다. 서안사변 이후 모택동은 류정의 공로를 치하했다.

양호성의 아내 사보정(謝葆貞)은 아예 공산당원이었으며, 양호성의 군 정치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1928년 1월 중공 당조직의 비준을 받아 양호성과 결혼했다. 게다가 나중에 외교부 부부장이 된 왕병남(王炳南)도 수시로 양호성과 접촉했다. 1990년대 초 중국에서 출판된 잡지 《중화아녀(中華兒女)》는 왕병남이 어떻게 양호성의 막료가 되었고 어떻게 서안사변 기획에 참여했는지를 칭송하는 특집 기사를 발표했다. 바로 양호성과 장학량 주변의 수많은 공산당원이 이번 병변을 직접 기획한 것이다.

사변 초기 중공은 장개석을 살해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섬북에서의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선동과 속임수를 통해 병변을 기획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계산에서 친히 장개석을 살해하지 말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택동과 주은래 역시 당시 중공의 힘으로는 국민당을 소멸시킬 수 없으며 도리어 보복을 초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신속히 전략을 수정해, 연합 항일을 명목으로 장개석이 합작을 수용하도록 강제했다. 이로써 중공은 멸문지화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정부에 성공적으로 재진입했고, 홍군은 팔로군으로 전환하여 다시 발전하고 장대해졌다. 이로부터 중공의 교활함과 기만 수단을 엿볼 수 있다.

9. 항일전쟁 (1931~1945년)

항일전쟁은 1931년 9·18 사변에서 시작되어 전후 14년 동안 이어졌다. 국민당은 1932년 ‘제1·28 상해 항전’을 치렀고, 1933년에는 만리장성 항전을 벌였으나, 중공은 9·18 사변이 발생한 지 두 달 만에 장시성에서 할거 정권을 세웠다. 과거 중공은 줄곧 ‘8년 항전을 고수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는 스스로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항전하지 않았음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2017년 초 교육부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8년 항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경우 모두 ‘14년 항전’으로 수정하여 14년 항전 개념을 확립하고 부각할 것을 요구했다. 북경의 역사학자 장립범(章立凡)은 중공이 항일 기간을 바꾼 진정한 목적은 항전에 대한 자신들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간을 바꾼다고 해서 항전의 중추가 공산당 부대가 아니라 국민정부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바꿀 수는 없다.

9.1 국공 전사자 자료 비교

대만 국방부의 통계에 따르면 항일전쟁 기간 동안 총 1,117차례의 대형 전투와 3만 8,931차례의 소형 전투를 치렀으며, 그 과정에서 268명의 국군 장령이 전사하고 321만 8,125명의 장병이 사상(死傷)했으며, 전체 병력의 75%가 항일 과정에서 소모되었다. 중공의 통계에 따르면 적의 후방 항일 무장 세력은 총 61만여 명이 사상했으며, 항전 중에 사망한 고급 장령은 단 좌권(左權) 1명뿐이었다. 2005년 9월 3일 호금도(胡錦濤)는 항전 승리 60주년 기념 연설에서 국민당 군대가 정면 전장에서 치른 역사적 역할을 시인하며 “국민당 군대를 위주로 한 정면 전장이 일련의 대전(大戰)을 조직했다”고 밝혔다.

항일전쟁 기간의 10대 전역 통수권자는 전원 국민당 장령이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공 10대 원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주덕, 팽덕회, 임표 등의 장령들은 항일 이후의 국공내전 지휘관들이었지 항일 당시의 장령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공의 전투영웅 동존서(董存瑞), 구소운(邱少雲), 황계광(黃繼光) 중 그 누구도 항일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1. 송호(淞滬)회전(상해 방어전): 1937년 8월, 장치중(張治中) 지휘

2. 태원(太原)회전: 1937년 9월, 염석산(閻錫山) 지휘

3. 남경보위전: 1937년 12월, 당생지(唐生智) 지휘

4. 서주회전(태아장 전투 포함): 1938년 1월, 이종인 지휘

5. 무한회전: 1938년 6월, 진성(陳誠) 지휘

6. 진남(晉南)회전: 1941년 5월, 하응흠(何應欽) 지휘

7. 장사회전: 1939년 9월, 설악(薛嶽) 지휘

8. 상덕회전: 1943년 11월, 손련중(孫連仲) 지휘

9. 장형회전: 1944년 5월, 설악 지휘

10. 미얀마 북부·운남 서부 회전: 1943년 10월, 위립황(衛立煌) 지휘

전체 항일 기간 동안 중공이 실제로 참여한 것은 ‘평형관 전투(平型關戰役)’와 ‘백단대전(百團大戰)’뿐이다. 평형관 전투에서 중공은 결코 주력이 아니었으며 단지 적의 보급 부대를 매복 공격했을 뿐이다. 중공이 대대적으로 과장 선전한 ‘백단대전’ 역시 중공 내부에서는 당 중앙의 전략을 위배하여 적후 공작에 어려움을 초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전역을 지휘했던 팽덕회는 나중에 문화대혁명 때 그가 타도된 죄상 중 하나가 되었다.

지휘관 개인의 차원에서는 항일 열정이 부족하지 않았으나, 중공 고층부는 항일의 성의가 없었고 오히려 목적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실력을 보존하며 이 전쟁을 이용해 자신들을 발전시키고 장대하게 만들었다. 중일 수교 당시 모택동은 당시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중공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그때 그 항일전쟁이 없었다면 중공은 천하를 빼앗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9.2 ‘애국주의’를 이용한 일본 침략 미화

오늘날 매년 9·18 사변 기념일, 남경 대학살 기념일이 되면 매체들은 일본이 어떻게 중국인을 학살했는지를 선전하기 시작한다. 중공은 매체를 통해 민중의 일본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면서도, 일본 항복일과 항전 승리 기념일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중공이 ‘애국주의’를 이용해 침략을 부각하는 진짜 이유가, 자신이 그 틈을 타 ‘실력을 보존’했을 뿐 항일전쟁의 ‘중추’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임을 이미 깨닫고 있다.

1945년 9월 9일, 중국 전역을 대표하여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이는 모택동도, 그 어떤 공산당 장령도 아니었다. 국민당 육군총사령관 하응흠이 장개석을 대표해 일본측의 항복을 접수했으며, 이는 국민당이 항일을 영도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중공은 역사적 사건을 왜곡함으로써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하고 노예화했다. 당의 어용 영화인들은 관객의 심리를 훔쳐보며 이른바 ‘혁명 역사 제재’ 영화 속에서 기록영화인 양 꾸며낸 허상을 고의로 만들어냈다. 전쟁 영화는 대규모 장면에 집착하며 실감 나는 전쟁의 환상으로 관객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영화 속의 ‘혁명 영수’들은 피와 살을 지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포장되며, 그들의 친정(親情), 애정, 우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과의 거리를 좁힌다. 중공은 ‘항일 신극(神劇 어처구니없는 항일 드라마)’과 소설을 이용해 자신들 ‘팔로군’의 ‘지도전(地道戰 땅굴전)’, ‘유격전’, ‘참새전’ 등을 선전한다.

역사학자 신호년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피로 쓴 사실이지 먹물로 쓴 거짓말이 아니다.” 역사에 객관적인 평가를 부여해야만 전사한 백만 영령들에게 떳떳할 수 있다.

한편, 《재탐항전사(重探抗戰史)》의 주편집이자 미국 후버연구소 연구원인 곽대군(郭岱君) 교수는 역사는 개인과 국가에 관계된 것이므로 과거를 명확히 밝혀야 현재와 미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일본, 미국, 영국 및 중국 대륙과 대만의 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항전 기간의 일기, 회고록, 공식 아카이브 및 최신 1차 사료를 참고했다. 곽 교수는 군사사와 달리 이들의 연구는 ‘인간을 중심’으로 삼아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했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았으며, 중화민족의 발전이라는 기점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10. 연안 정풍 (1942~1945년)

연안 정풍은 항전 시기 모택동이 일으킨 정치·문화 운동으로, 표면적으로는 왕명(王明)과 박고(博古) 등의 공산국제 노선을 청산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상은 특무 색출을 구실로 사람들을 짓밟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학자 고화(高華)는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 연안 정풍 운동의 내막(紅太陽是怎樣升起的——延安整風運動來落脈)》에서 이 운동이 모택동이 사람들을 짓밟고 세뇌하는 과정을 통해 당내 이견을 제거하고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정풍 운동은 어둡고 잔혹한 권력 게임이었다. ‘소부르주아 독소’를 숙청한다는 명목으로 실상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는 것이었다. 우선 개인별 인사 기록을 작성하게 하여 출생 이후 만난 모든 사람, 발생한 일, 시간, 장소 등을 상세히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누락된 부분이 발견되면 문제 인물로 낙인찍었다. 가장 핵심은 당성(黨性) 검토였는데, 사상 의식, 업무 태도, 일상생활 속에서 반당적인 행위가 있었는지를 심사했다. 혁명 전선에 대해 동요한 적이 있는지, 전투 중에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고향에 계신 부모나 처자식을 그리워했는지 등이 심사 대상이었다.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간부 심사 과정에서 고문과 자백 강요를 통해 무수한 억울한 옥사와 조작 사건이 만들어졌고, 지식인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박해로 사망한 사람이 1만 명을 넘었다. 연안 청년극원은 짐마차를 몰던 한 노동자에게 특무임을 자백받기 위해 결박하고 매달아 구타하며 산 채로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이 사상 개조 운동은 인간 지옥과도 같은 정신적 압박으로 묘사되었으며, 공산국제 대표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미칠 지경이었고 공포로 인해 감히 소통하지 못했으며 오직 목숨과 밥벌이를 보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완전히 내팽개쳐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개인의 견해를 발표하지 못했고 오직 당 지도자의 문장만을 앵무새처럼 외워댔다. 연안 정풍은 문화혁명의 원조일 뿐만 아니라 후속 정치 운동들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비록 후속 정치 운동들의 명목은 저마다 달랐으나 그 목적은 늘 한결같았으니, 바로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과거 정풍을 겪었던 한 노간부는 극도의 고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연루된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어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가 막 권총을 쏘려던 찰나 총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심사 간부가 들어와 말했다.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의 정책은 관대합니다.” 여러분도 보았는가? 당은 당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여 ‘충성’을 확인한 후 비로소 통과시켜 준다. 당은 늘 이처럼 당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처넣고 당신이 겪는 온갖 고통과 굴욕을 감상한 뒤, 당신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친절하게 다가와 ‘죽느니보다 억지로라도 사는 길’을 던져주며 은혜에 감지덕지하게 만드는 구세주 노릇을 한다. 현대 의학 연구에 따르면 공포와 고립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기형적인 의존성을 갖게 되며, 일단 작은 은혜라도 얻으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사랑’의 감정까지 품게 된다. 이러한 심리 현상은 중공이 인민을 정신적으로 통제하고 사상을 개조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

예전에는 흔히 “사해(四海)가 모두 형제”라고 말했으나, 오늘날에는 누구나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심지어 친인척과 친구 사이에도 서로를 경계한다. 술자리의 떠들썩함도 그 이면에 감춰진 경계심 가득한 마음을 가리지 못한다. 과거에 우리 모두 순수했고 믿음을 가졌었지만, 온갖 정치 운동을 겪고 나서는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상태가 되었다. 오늘은 네가 나를 잡고 내일은 내가 너를 잡으며, 누구나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경계심을 품고 살아가니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생활의 질은 크게 떨어져 신뢰가 가져다주는 홀가분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며, 정신 건강 문제도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적어도 1억 명의 사람이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경계심은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갈등을 증폭시키니,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 이러한 경계심이 치르는 비용은 가히 계산하기 힘들 정도이다.

11. 제2차 국공내전 (1946~1949년)

11.1 중공이 내전에서 승리한 비결은 특무

1921년 중공 창당부터 1949년까지 이 28년 동안 저들이 주로 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화민국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항일전쟁 이후 우리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마땅히 휴식하며 경제를 회복해야 했으나, 또다시 3년 내전으로 접어들었다. 중공이 사용하는 용어는 매우 미혹성이 강해서, 국공내전 시기를 가치 왜곡하여 ‘해방전쟁’이라 부르며 마치 인민들을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처럼 꾸며댔다.

공산당은 혁명 승리가 세 가지 ‘보물’, 즉 통일전선, 무장투쟁, 당의 건설 덕분이라고 말한다. 국민당은 자신들이 겪은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공산당의 승리 비결에 두 가지를 추가했다. 바로 기만선전과 간첩의 활용이다.

중공은 턱없이 아름다운 ‘중국몽(中國夢)’을 지어냈다. 1945년 모택동은 로이터통신 기자의 질문에 미래의 중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하며, 각급 정부는 보편적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인민에게 책임을 지고 손중산의 삼민주의와 링컨의 4대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중공이 중화민국을 전복한 지 70년이 넘었건만 이 이상들 중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늘날 인민의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및 기타 기본적 자유는 모두 박탈당했다. 그러나 당시 이 ‘중국 몽’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또 다른 수단은 중화민국의 모든 요직 부서에 중공 특무(特務)들을 파견하는 것이었는데, 이 특무들은 당시 지하당원으로 불렸다. 적지 않은 이들이 중공이 지어낸 ‘중국몽’에 ‘고무’되어 사지로 뛰어들며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훔치고 속여 기밀을 캐냈다. 3년 내전 기간 동안 국민당 국방부의 곽여규(郭汝圭)는 방대한 군사 기밀 정보를 끊임없이 중공 측에 송출했다. 게다가 국민당의 군대 동원 대권을 쥐고 있던 류비(劉斐) 역시 중공의 지하당원이었다. 동원되는 군대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연안은 이미 그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맞춰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주은래는 일찍이 “장개석의 작전 명령이 사령관에게 하달되기도 전에 모 주석은 이미 그를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것은 무슨 대단한 전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항일전쟁 기간 국군의 해·육·공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어 이미 원기가 크게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공산당이 의존한 것은 특무와 인해전술뿐이었으며, 이를 통해 정권을 찬탈할 수 있었다. 요심(遼沈), 평진(平津), 회해(淮海) 3대 전투에서 중공이 사용한 전술은 인간의 육신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가장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비인도적인 전술이었다.

11.2 장춘 포위전 (1948년)

기자 두빈(杜斌)이 저술한 《장춘아표전(長春餓殍戰, 장춘 굶주림 전쟁)》의 기록에 따르면,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은 장춘을 포위하여 약 37만에서 46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산 채로 굶겨 죽였다. 이 참혹한 포위전은 중공에 의해 ‘피를 흘리지 않은’ ‘영광스러운 해방’으로 선전되었다.

당시 중공의 동북 야전군은 국민당군이 수비하던 장춘성을 포위하고 식량 등 생활 물자의 유입을 금지했으며 사람들의 성 밖 탈출을 허용하지 않아, 10만 명의 국군과 50만 명의 장춘 시민을 성 안에 가두었다. 당시 국군 장령들은 성 안의 백성들을 내보내어 무고한 평민들이 다치지 않게 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평민들을 이용해 성 안의 식량을 소모시킴으로써 속전속결을 달성하려 했기에 백성들의 성 밖 탈출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단기간에 심각한 식량난이 닥쳤다.

난민들이 애원했다. “우리는 모두 선량한 백성인데, 어떻게 이토록 매정하게 이곳에서 우리를 굶겨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공산당군은 대답했다.

“이것은 모 주석의 명령이오. 우리도 기율을 어길 수 없소.”

어떤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앞으로 걸어 나갔으나 공산당군은 “탕” 하고 총을 쏘아 그를 즉사시켰다.

모두가 알다시피 양군은 교전할 때 가급적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피해야 마땅하지만, 공산당은 백성들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정권을 탈취하는 것만이 최우선이었다. 장춘 포위전을 겪었던 백성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장춘 성 안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널렸고 굶주린 백성들은 사람의 뼈를 갉아먹고 인육까지 먹었다고 한다.

12. 결말

현대 역사학자 전목(錢穆)은 《국사대강(國史大綱)》에서 한 나라의 국민은 본국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온정과 경외심을 품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중공의 창업 역사는 그 정권에 정통성이 없음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1949년 정권을 찬탈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 일곱 글자는 글자마다 모두 거짓말이다. ‘중화(中華)’도 아니고, ‘인민(人民)’도 아니며, ‘공화국(共和國)’은 더더욱 아니다.

폐쇄된 환경 속에서 중공은 사람들과 과거의 연결 고리를 끊어놓았으며, 외부와의 정보 교류마저 차단했다. 정보 통제는 당의 세뇌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설령 중공을 싫어하더라도 부지불식간에 그것들의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사고하게 된다.

공산당은 일반적인 정당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邪敎)다. 그것은 일종의 완비된 사상 체계를 구축하여 우주에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유물론이 유일한 진리이고 인간의 역사는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간다고 역설한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분투하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특유의 인생관을 주입한다.

오늘날 명맥만 유지하는 공산 정권은 이미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끊어진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우리는 그 진면목을 반성하고 폭로해야 한다. 《구평공산당(九評共產黨)》은 공산 정권에 속았던 이들이 그 본질을 똑똑히 간파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공산주의의 유독(流毒)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