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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하나 당조(唐朝) (6)

(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추배도》 예언의 등장

당조 역사의 막이 막 오르고 태종의 성당(盛唐) 시대에 막 들어섰을 무렵, 향후 역사의 향방을 아직은 아는 이가 없는 듯했던 그때 두 명의 기인(奇人)이 등장하여 후세의 역사를 예언한 도참(圖讖) 《추배도(推背圖)》를 함께 편찬했다. 이들은 바로 당 초기 정관 연간의 관상감(觀象監)이었던 이순풍(李淳風)과 은사(隱士) 원천강(袁天罡)이다. 《추배도》에는 총 60개의 도상이 있으며, 각 도상 아래에는 참어(讖語)와 ‘송왈(頌曰)’이라는 율시(律詩) 한 구절이 붙어 있어, 당조부터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에서 중국에 일어날 큰 일들을 예언했다.

《추배도》는 적중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추배도》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김성탄(金聖歎)의 주석이다. 김성탄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람으로,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왕조 교체를 직접 목도했다. 그는 《추배도》 제33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관내로 들어올 징조이다. 객이 도리어 주인이 되는 것은 기수(氣數)가 그리 만든 것이니 인력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금 이래로 오랑캐가 두 번 중원의 주인이 되었으니, 황황한 한족이 이를 대함에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제34상부터는 김성탄 사후의 일이다. 김성탄은 생전에 예언 내용에 부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이 상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증명하기는 쉬우나 미래의 일을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을 증명하였으니 장래의 일도 추측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바람은 이제부터 내가 ‘평화롭게 다스려질 것’이라 말한 것은 다행히 맞아떨어지고, 내가 ‘태평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 것은 다행히 맞지 않아 내 죄가 없기를 고할 수 있는 것뿐이다. 이 상은 수재나 병란이 천재지변과 함께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니, 이 역시 하나의 난(亂)이다.”

사실 예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으니 바로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명명백백해진다는 점이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언이란 언제나 그럴싸하면서도 모호한 느낌을 주어, 마치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너무 명확히 알려주지 않으려는 듯하다. 따라서 예언은 자주 암시, 동음이의어, 파자(破字), 심지어 오행이나 팔괘(八卦)의 술어를 사용하므로 어려서부터 백화문을 배운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어느 정도는 현대 중국인들의 사상이 진정한 전통문화와 이미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서양의 전통문화는 중국처럼 박대정심(博大精深)하지 않지만, 서양인들은 많은 면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더 아끼고 그 속에서 지혜를 퍼 올리려 애쓴다.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수많은 전통 사상들이, 솔직히 말해 서양에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의 답을 역사는 이미 제시해 주었으니, 관건은 우리가 사상의 틀을 깨뜨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생각해 보느냐에 달려 있다.

향후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추배도》와 결합하여 그것이 지닌 비범한 예견성을 살펴볼 것이다.

《추배도》에 나타난 당조 기수(氣數)에 대한 예언

《추배도》의 제2상은 당조 기수에 대해 예언했다.

제2상의 그림에는 쟁반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21개의 자두(李子)가 놓여 있는데 그중 4번째 자두만 꼭지(蒂)가 없다. 글 속의 송(頌)에서는 말한다.

만물은 흙 속에서 생겨나고
이구(二九)에 먼저 결실을 맺네
일통(一統)하여 중원을 정하니
음(陰)이 성하여 양(陽)이 먼저 다하도다

萬物土中生
二九先成實
一統定中原
陰盛陽先竭

그렇다면 그림 속 21개의 자두는 무슨 뜻일까? 분명 당 황실은 이(李)씨이며, 역사상 총 21대의 황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21개의 자두는 이씨의 당조에 21명의 황제가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중 4번째 열매에 꼭지가 없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마침 당조 제4대 황제는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이었는데, 그녀는 이씨 집안의 며느리일 뿐 자식이 아니었으므로 뿌리와 꼭지(根蒂)가 없었던 것이다.

글 속 첫 구절인 “만물은 흙 속에서 생겨나고”에서 ‘흙(土)’에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천간지지(天干地支) 학설에 따르면 흙은 무기토(戌己土)에 속하는데, 당조 역사를 펼쳐보면 이연(李淵)이 황제를 칭한 해가 바로 무술(戌寅)년, 즉 흙의 해였다.

두 번째 구절 “이구(二九)에 먼저 결실을 맺네”에서 ‘이구’는 당나라가 290년 동안 천하를 누릴 것임을 예시한다. 역사적으로 당조 천하는 정확히 290년 동안 지속되었다.

세 번째 구절 “일통하여 중원을 정하니”는 별다른 은유 없이 직설적인 뜻이며,

네 번째 구절 “음(陰)이 성하여 양(陽)이 먼저 다하도다” 역시 훗날 당조 역사에 의해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당조는 무측천이 칭제(稱帝)한 이후 여성이 정사에 간섭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후(韋后)가 정사에 간섭해 중종이 위후에게 독살당했고, 태평공주가 현종 이융기와 손잡고 위후를 죽인 것 역시 음의 간섭이었으며, 현종 또한 양귀비에게 혹하여 국정을 황폐화시켜 화란을 불러일으켰다.

정관의 치를 계승한 당 고종 시대

* 인효했으나 유약했던 고종

고종 이치(李治)는 당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어머니가 현덕한 장손황후다. 그는 정관 2년 6월에 태어나 5년에 진왕(晉王)으로 봉해졌다. 어릴 때부터 너그럽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효경》을 배운 후 태종이 그에게 “이 책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더냐?”라고 묻자, 이치는 “효라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중간을 거쳐, 스스로 바로 서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군자가 위를 섬김에 있어서는 나아가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악한 점은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를 몹시 총애했다. 정관 17년, 황태자 승건이 폐위되고 위왕 태 역시 죄를 지어 쫓겨나자 태종은 이치를 황태자로 세웠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이치가 제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종이며, 당시 나이 22세였다. 이듬해 진주(晉州)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고종은 군신들에게 자신이 “정교(政教)를 명확히 하지 못한 탓”이라며 군신들에게 직언을 올려 위정(爲政)의 잘되고 못됨을 지적하도록 했다. 그해 옹주, 강주, 동주 등 9개 주에서 가뭄과 메뚜기떼 재해가 발생했고, 제주, 정주 등 16개 주에서는 큰 홍수가 났다. 고종은 조서를 내려 자신을 자책하고 사람을 보내 이재민을 구제했다.

어느 해 가을과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자 고종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조서를 내려 자신의 수라상을 줄였으며, 죄수들의 명부를 직접 확인했다. 그러나 고종이 비록 어진 마음을 가졌고 어진 황제가 되고자 희망했을지라도, 성품이 유약하고 몸에 병이 많았던 그는 심계(心計)와 지모(智謀)가 모두 한 수 위였던 무측천 앞에서 점차 조정 정사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

* 무측천의 난정(亂政)

무측천은 본래 당 태종의 재인(才人)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매랑(媚娘)으로, 아버지는 태원 지방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자 목재 상인이었으나 훗날 공부상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수조 황실인 양(楊)씨 가문의 후손이었다. 당 태종이 후궁을 뽑을 때 형주자사 개문달(蓋文達)이 그녀를 추천했는데, 그녀의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 이름을 무조(武曌)로 바꾸어 궁으로 보냈다.

당 태종은 하늘의 신선처럼 아름다운 이 소녀를 보고 즉시 마음을 빼앗겨 재인으로 봉했다. 이때 관상감이자 《추배도》의 저자인 이순풍이 당조 황실에 친왕(親王)들을 도륙하는 재앙이 있고 여주(女主)가 제위를 전횡하는 운수가 있음을 알고 태종에게 이 일을 직언했다.

태종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순풍은 신통한 점술가였기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시험 삼아 금과(金科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과거) 장원이 누구일지 물었다.

이순풍은 즉시 대답했다.

“금과 장원을 물으신다면, ‘불과 개 두 사람의 뛰어남(火犬二人之傑)’입니다.”

[역주: 이 내용은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적인걸은 당 태종 시기가 아니라 고종 현경 연간에 과거에 급제했다.]

며칠 뒤 조정에서 방을 붙였는데 수석이 바로 적인걸(狄仁傑)이었으니, 정확히 ‘불과 개 두 사람의 뛰어남(狄=火+犬)’에 응험했다. 태종은 이에 이순풍을 믿게 되었고 아픔을 참고 사랑을 단념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관례에 따라 무조는 궁을 나와 감업사(感業寺)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일찍이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던 당 고종이 즉위한 후,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소의(昭儀)로 봉했다. 무측천은 궁으로 돌아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친딸을 직접 살해하고, 그 죄를 고종의 조강지처인 왕(王)황후에게 뒤집어씌웠다. 고종은 이를 사실로 오인해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측천을 새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이 일은 고명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무측천은 고종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예 고종과 함께 대전에 올라 정사를 들었다. 저수량이 나서 반대하자 무측천이 크게 호통쳤다.

” 어찌 저 늙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가!”

조정의 문무백관이 등줄기에 땀을 흘리며 감히 다시는 소리를 내지 못했고, 무측천은 결국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무측천은 자신의 황후 책봉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청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수량, 우지녕, 내제, 한원 등 태종의 중신들을 모조리 유배 보내고 그 자손과 친척들의 관직을 박탈해 서인으로 만들었다. 고종의 친외삼촌인 장손무기 역시 무측천에게 아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눈엣가시가 되었다. 무측천은 그를 뼈저리게 미워했으나 장손무기는 대당 개국 3조(朝)의 원로이자 인척인 동시에 천하 백성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었으며 선제가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형벌을 가하지 말라”는 유조를 남겼던 인물이었다.

이에 무측천은 그에게 목을 매도록 강요한 후 가문 전체를 멸문시켰으니, 천하의 모든 백성이 국구(國舅)의 억울한 옥사에 눈물을 흘렸다. 고종은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잔혹한 본성을 똑똑히 보았고, 비분 속에 상관의(上官儀)에게 황후를 폐위하는 조서를 기초하게 했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 날래게 달려가 무측천에게 비밀리 고했다. 무측천이 분노를 품고 들이닥치자 고종은 당황해 이 일을 상관의에게 뒤집어씌웠고, 그 결과 무측천은 상관의의 구족을 피로 물들이고 조상들까지 무덤에서 파내어 매질했으며, 연좌된 문무대신이 수백 집에 달했다. 이때부터 조정에는 온통 그녀의 심복들만 남아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었으니, 황제가 다시 그녀를 폐위하려 해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660년, 고혈압으로 시력 장애를 겪으며 고통받던 고종은 조정의 정사를 모두 무측천에게 넘겼다. 이때부터 “천하의 대권이 모두 중궁(中宮)에게 돌아갔고”, “천자는 손을 얹고 있을 뿐이라, 안팎에서 이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불렀다.”

무측천, 당을 찬탈해 주(周)를 세우다

* 《추배도》에 나타난 무측천 칭제에 대한 예언

《추배도》의 제3상 그림에는 한 여성이 보도를 손에 쥐고 서 있고 참에서는 말한다.

참(讖)에 가로되:

해와 달이 공중에 떠서
아래 땅을 비추네
남녀 구별이 어려우니
문이 아니고 또한 무라네

日月當空
照臨下土
撲朔迷離
不文亦武

송(頌)에 이르길

부처님께 참례하며 색상(色相)을 잊었다가
하루아침에 다시 제왕의 궁궐에 들어가네
남은 가지 없앴으나 뿌리는 아직 남았으니
꼬끼오 새벽 닭 우니 누가 수컷인가?

參遍空王色相空
一朝重入帝王宮
遺枝撥盡根猶在
喔喔晨雞孰是雄

여기서 찬에서 말한 “해와 달이 공중에 떠서 아래 땅을 비추네”는 무조(武曌)의 이름을 암시하며, 천하에 임하여 곧 아래 땅을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복삭미리(撲朔迷離 남녀 구별이 어려우니)”는 성어로 화목란(花木蘭)이 군대에 들어간 고사에서 유래했다. 목란이 남장을 하고 13년 동안 군대 생활을 할 때 군중에서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 즉 남자인지 여자인지 수컷인지 암컷인지 아무도 분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순풍은 이를 빌려 무측천이 처음 재인(才人)이 되었을 때는 그녀가 훗날 암컷에서 수컷으로 변해 여황제가 될 운명임을 아무도 몰랐음을 설명했다.

“부처님께 참례하며 색상(色相)을 잊었다가”에서, 강산을 중하게 여긴 태종은 여자가 정사를 어지럽힐 것이라는 이순풍의 예언을 믿고 아픔을 참고 사랑을 단념해 무측천을 멀리했다. 당 태종이 붕어한 후, 일찍이 무조의 미모를 사모했던 고종 이치가 즉위하여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소의로 삼으니, “하루아침에 다시 제왕의 궁궐에 들어가네”가 응험했다. 무측천은 궁에 들어온 후 먼저 음모와 수단으로 왕황후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이어 수렴청정을 실시해 고종과 함께 천제(天帝)·천후(天后)로 불렸다.

고종이 죽은 후에는 중종을 폐위하고 공식적으로 칭제하여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으며, 이씨 황실의 종친과 대신들을 대량으로 도륙하고 유배 보냈다. 당시 왕황후 소생의 태자 이단(李旦, 훗날의 예종)은 겨우 몇 살에 불과했는데, 환관 두회(杜回)가 조용히 강하왕(江夏王) 이개방(李開芳)의 처소로 보내어 화를 면하게 했으니, 이 역시 “남은 가지 없앴으나 뿌리는 아직 남았으니”에 응험한 것이다.

“꼬끼오 새벽 닭 우니 누가 수컷인가?”는 당연히 무측천이 칭제한 것을 가리키며, 암컷이 수컷으로 바뀌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새벽 닭의 ‘닭(鷄)’은 닭띠 해의 일을 가리키는데, 무씨가 칭제한 해가 바로 기유(己酉)년, 즉 닭띠 해였다.

* 무측천의 당조 찬탈과 칭제

고종은 즉위한 후 몸이 줄곧 좋지 않자 태자 이홍(李弘)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했다. 무측천은 모자의 정을 저버리고 독주로 태자를 살해했으며, 둘째 아들 이현(李賢)을 새로 태자로 세웠다. 이현은 재능과 문채를 겸비해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으나, 무측천은 그 역시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붕어하고 이현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이가 바로 중종(中宗)이며, 무측천은 황태후의 명의로 칭제하며 정사를 관장했다. 이듬해 이현을 폐위하여 노릉왕(盧陵王)으로 삼고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황제로 세우니 이가 예종(睿宗)이었으며, 무측천이 여전히 조정 정사를 독점했다.

684년, 유주(柳州)사마 서경업(徐敬業)이 당 황실을 복원하고 노릉왕을 옹립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양주(揚州)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인원이 10여 만 명에 달했다. 688년 종친 이충(李沖)이 박주(博州 지금의 산동 요성)에서, 이정(李貞)이 예주(豫州 지금의 하남 여남)에서 다시 무측천에 반대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 두 번의 거병은 모두 무측천이 보낸 군사에 의해 신속히 궤멸되었다. 그리고 이 두 차례 거병에 연좌된 황실 종친과 대신들은 모두 무측천에게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이때부터 황족 중에서는 반대하는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690년 무측천이 정식으로 칭제(稱帝)하고 당조를 주조(周朝)로 바꾸고 낙양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당 예종을 황사(皇嗣)로 강등시켰다. 모든 역사가 참으로 《추배도》에서 예언했던 그대로 일어난 것이다.

무측천 집권 시기

무측천은 조정 정사를 손에 쥐기 시작할 때부터 무씨 가문 사람들을 정치에 등용하고, 밀고자와 혹리(酷吏, 가혹한 관리)들을 발탁해 철권 통치를 시행했다. 이에 무삼사(武三思), 무승사(武承嗣), 내준신(來俊臣), 주흥(周興), 구신적(丘神績) 등이 차례로 조정의 권력을 쥐었다. 이은 뇌물을 탐하고 법을 어겼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서로 견제하여 충량(忠良)한 이들을 해쳤다. 이에 따라 조야에서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비록 무측천이 적인걸, 이교(李嶠) 같은 재능 있고 청렴한 대신들을 발탁하기도 했으나, 살인이 성행하고 부패가 풍조가 된 조정의 강령 속에서는 그저 강물의 한 방울 모래알에 불과했다.

무측천은 재위 20년 동안 연호를 17번이나 바꾸었으니 이는 중국 역대 제왕 중 으뜸이었다. 개원(改元)할 때마다 전국에서 사형수들을 대사면하고 전국에 모여 술을 마시도록 명령했으나, 이것으로 태평을 분칠할 수는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도륙, 분쟁하는 조정, 동요하는 정국, 잔혹한 진압은 백성들에게 무수하고 침통한 재앙을 가져다주었으며, 심지어 하늘과 땅마저 이에 분노했다. 천재인화(天災人禍)가 빈번히 나타나 우박과 홍수가 땅을 덮쳤고, 전국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 죽은 사람과 가축을 헤아릴 수 없었으며, 심지어 경사인 낙양조차 화를 면하지 못하여 수차례 큰 홍수가 발생해 수만 가구를 잠기게 했다.

그러나 무측천의 재위 기간 동안 기본적인 정관 시기의 제도와 정책을 승계할 수 있었기에 경제가 정체되지 않고 일정한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녀는 또한 과거 제도를 매우 중시해 일반 선비들이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올라 나라에 봉사하도록 장려했다. 하지만 무측천이 당나라를 어지럽히고 칭제한 것은 후세에 나쁜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부터 중국 역사상 여성의 난정(亂政)이 몇 차례 더 나타나게 된다.

대당의 복국(復國)

705년 무측천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우우림위(右羽林衛) 대장군 이다조(李多祚) 등과 연계해 정변을 일으키고 무측천을 압박해 중종 이현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한 뒤 대당의 국호를 회복했다. 같은 해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였다. 죽기 전 유제로 “제호를 거두고 칙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부르라”고 명령했으며, 건릉에 묻힌 고종과 합장하도록 지시했다. 무측천은 총 15년 동안 황제로 재위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