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8 – 【칭기스칸】 서하를 세 차례 정벌해 도움 얻고 금나라를 겨냥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三征西夏得助力 剑指大金国
칭기스칸(에포크타임스)

1204년 나이만부를 정복한 후 테무진은 주변 인접 국가와 부족들, 가령 북부의 키르기스(오늘날 예니세이강 상류 위치)와 겸겸주(謙謙州)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나이만인들을 받아들여 몽골인들과 적대하는 행위를 따져 물었고, 두 부족에게 몽골인들과 원수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즉시 항복하라고 일렀다. 두 부족의 수령은 자신들이 몽골인들과 대항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았기에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테무진의 사신은 다시 남부의 토번(吐蕃 오늘날 청해, 티베트)에 이르러 똑같은 말로 토번 수령을 깨우쳤으나, 토번 수령은 항복을 거부하고 몽골 사신을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 테무진은 이 때문에 토번을 토벌하고자 했으나 토번과 우호 관계인 서하(西夏)가 틈을 타 공격해 올까 염려했다. 게다가 서하는 금나라와도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테무진은 서정(西征) 길목에 있는 서하를 먼저 공격한 뒤 토번이나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서하는 서북쪽으로 나이만부와 이웃했고 동북쪽으로 케레이트부와 이웃했으며 두 부족과 우호적이었기에, 칭기스칸이 이 두 부족을 멸망시킨 뒤 서하는 북쪽으로 몽골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그 동쪽은 금나라였고 남쪽은 남송의 서북 국경과 접해 있었으며 서남쪽은 토번, 서쪽은 위구르 등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1205년, 테무진은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그가 제대로 편성된 국가를 공격한 최초였다. 몽골인들은 당시 서하를 금나라를 따라 그들을 ‘하서토번’ 혹은 ‘탕구트’라 불렀으며, 송과 동맹을 맺은 이래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에 몽골인들의 갑작스러운 침공에 당혹스러워했다. 몽골인들과 맞설 수 없음을 안 서하 임금은 각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 위주로 임할 것을 명했다. 몽골인들은 야전에는 능숙했으나 공성 작전 경험과 공성 병기가 없었고 오래 머물 수 없었기에, 서하의 변방 도시에서 약간의 재물과 가축 등을 약탈한 뒤 돌아갔다.

칭기스칸이 1206년 대몽골국을 건국한 후 마주한 것은 남쪽의 금, 서하, 남송 등 여러 국가가 정립한 국면이었다. 야심만만했던 칭기스칸은 과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금나라를 토벌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침 금나라에서 온 투항자 4명이 금 황제의 포악한 폭정을 누설하자, 칭기스칸은 부하들과 함께 정벌할 일을 논의했으나 여전히 염려가 많아 쉽게 군사를 출동시키지 못하고 다시 한번 서하로 목표를 겨누었으니, 그 목적 중 하나는 금나라와ㅏ 서하 사이의 동맹을 무너뜨려 금나라를 진공하는데 장애물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1207年蒙古帝国版图。(<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ongol_Empire_c.1207.pn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Khiruge/Wikimedia Commons提供</a>)

1207년 몽골 제국 판도. (Khiruge/Wikimedia Commons 제공)

서하와 금의 쇠락

서하는 서북에 거주하던 강족(羌族)의 한 갈래인 탕구트족이 건국했다. 1038년, 이원호(李元昊)가 정식으로 건국하고 칭제했으며, 그 도읍은 중흥부(中興府 오늘날 영하)였다. 서하의 건순(乾順)과 인효(仁孝) 부자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한문화(漢文化)를 숭상하였으며, 특히 후자는 유학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송 제도를 모방해 태학(太學)을 세우고 국가 악률(樂律)을 재정비했으며 공자묘를 지어 공자를 제사 지내고 과거제를 시행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인효는 불법(佛法)을 공경하고 믿어 사람들을 조직해 불경을 대규모로 번역하게 했다. 웅재대략을 갖추고 한화를 숭상하고 불교를 숭상한 두 서하 국군의 통치 아래 서하의 국력은 한때 매우 강성해졌고 요, 금, 송나라와 연달아 맞설 수 있었다.

금나라는 흑룡강 유역에 정착한 여진족 완안부(完顏部)의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가 1115년에 건국하였으며, 회녕부(오늘날 흑룡강 아성 남쪽)에 도읍했다. 이후 나라가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송 휘종과 흠종 등 3천여 명의 황실 구성원과 대신들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북송을 멸망시켰다. 남송이 임안(臨安)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금조(金朝)는 사실상 중국 북방의 대부분 영토를 통치했다.

금나라 역시 한문화와 공자를 숭상했으며, 특히 세 번째 황제인 금 희종(熙宗)은 어려서부터 한문화의 훈도를 받아 즉위하자마자 한제(漢制) 개혁을 추진하였고 한인(漢人)을 중용하고 유학을 숭상했으니, 그의 관제는 상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삼성제(三省制)를 세워 기본적으로 한화되었다. 금 희종부터 금나라는 공자를 존숭하고 공자묘를 세우기 시작했다. 금나라 사람들은 후기에 이르면 스스로를 ‘한인(漢人)’이라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몽골이 부흥할 무렵에 이르면 금과 서하 모두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니, 이것 역시 아마도 역사의 필연이었을 것이다.

金朝的创始者——金太祖完颜阿骨打。(公有领域)

금나라의 창시자 — 금 태조 완안아골타. (공유 영역)

두 번째 서하 정벌

1207년 가을, 칭기스칸은 두 번째 서하 정벌에 나섰는데, 그 목적 중 하나 역시 더 많은 공성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서하 조정 내부에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게다가 하양종(夏襄宗) 이안전(李安全)은 혼암하고 무능하여 주색에 빠져 있었기에 몽골인들의 공격 그다지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다.

몽골인들이 맨 먼저 공격한 곳은 서하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인 오로하이성(오늘날 내몽골 우라트중후기 서쪽 경계)이었다.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몽골인들은 심리전 전술을 채택하여 길에서 붙잡은 서하의 양치기를 돌려보내 성 안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했다.

“만약 감히 성을 의지해 지키려 한다면 성이 함락된 뒤에 반드시 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도살할 것이다.”

그러나 서하인들은 이에 현혹되지 않고 여전히 성곽을 의지해 굳게 지켰으며, 몽골인들은 여전히 공성 방법이 부족했던 탓에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양측은 40여 일 동안 대치했다.

나중에 칭기스칸이 화공(火攻)을 채택한 후에야 비로소 오로하이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몽골 대군이 그 성에 주둔하자 서하 양종은 우상제로(右廂諸路)의 군사들을 총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금나라도 병사를 보내 지원하였으며, 양측의 대치는 5개월 동안이나 이어져 몽골군은 끝내 진격하기 어려웠다. 다음 해 봄, 군량과 마초(馬草)가 부족해지자 칭기스칸은 군사를 물리었다. 이번 대결에서는 양측 모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세 번째 서하 정벌로 금-서하 동맹을 차단

1년여 동안 정비한 후, 칭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1209년 가을 세 번째 서하 원정에 나섰다. 주된 이유는 금나라 황제가 즉위 조서를 무릎 꿇고 영접하길 거부한 칭기스칸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며, 칭기스칸 또한 금나라와의 신속(臣屬) 관계를 벗어나 금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발발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금나라와 동맹 관계에 있는 서하가 금나라를 도울 것을 대비해야 했다.

이때 위구르는 이미 자발적으로 칭기스칸에게 신복(臣服)했고, 이는 서하의 하서 지역이 몽골과 서하 사이의 완충 지대를 잃게 만들었다. 그후 몽골군은 다시 오로하이성을 공격했다. 서하 장수이자 양종의 아들인 이승정(李承禎)이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풍주(豐州 오늘날 내몽골 후호하오터)의 사목(謝睦)이 성을 지키던 부사령관에게 항복을 권유한 끝에 오로하이성은 몽골인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오로하이성을 손에 넣은 칭기스칸은 승세를 몰아 서하의 도읍인 중흥부로 진군했고, 그 최종 방어선인 하란산(賀蘭山) 서쪽의 케이먼(克夷門)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서하의 대장 외명령(嵬名令)공이 비록 복병을 펼쳤으나 여전히 몽골 군대에 패배하였고, 마침내 중흥부는 몽골 군대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서둘러 성을 공격하지 않고 서하 각지의 군사력을 끌어모아 하나씩 소멸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성을 포위한 지 한 달이 넘도록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금나라의 위소왕(衛紹王 금 7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나중에 폐위되어 왕으로 강등)마저 방관하며 돕지 않아 하양종은 호소할 곳이 없었다. 기다리던 서하의 구원병이 오지 않자 칭기스칸은 수공(水攻)으로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제방을 쌓아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성을 물에 잠기게 하려 했으나, 성이 채 물에 잠기기도 전에 제방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몽골인들의 진영이 휩쓸려 나가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대치를 피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사신을 보내 하양종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우대 조건을 내걸었으나, 양종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딸을 바쳐 화친을 청했다. 몽골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정벌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뒤 양측은 화약을 체결하였고, 서하를 굴복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한 칭기스칸은 군사를 물렸다.

이로부터 서하와 대몽골국은 10년 동안 평화롭게 공존하였으며, 이는 또한 칭기스칸이 여유 있게 금나라를 공격하고 오늘날의 신장 및 바이칼호 서쪽의 여러 소국과 부족들을 서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반면 서하가 몽골의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정벌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이후, 본래의 동맹이었던 금나라를 강제로 공격해야만 했고, 이는 금나라와 서하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나중에 서하가 멸망할 때 더욱 고립무원에 빠지게 만들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서하와의 세 차례 교전을 통해 칭기스칸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쟁 양식을 터득했으며, 적 주변의 후방 보급을 끊고 성채 주변의 촌락을 소탕하며 백성들을 성 안으로 몰아넣어 물자를 소모시키는 등 성을 공략하는 전법을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것이다. 돌과 물로 해자를 메우고 물을 끌어들여 성을 잠기게 하는 등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칭기스칸은 서하에 있던 한인 장인(기술자)들이 투석기, 발사기 같은 공성 병기를 제조하는 법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 병기들은 먼 거리에서 대량의 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파괴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이를 매우 중시해 전쟁 중에 투항한 장인들에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는 한편 포로들 중에서 장인을 선발해 몽골 군대에 편입시킴으로써 몽골 공병 부대의 일원으로 삼았다. 이후의 전쟁에서 경험과 교훈 및 공성 무기에 힘입어 몽골인들은 계속해서 성채를 공략해 나갔으며, 그 성공은 거듭할수록 더욱 커졌다.

1142年,西夏王朝,金/女真王朝,宋朝和大理王国版图。(<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of_China_1142.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Yu Ninjie/Wikimedia Commons提供</a>)

1142년, 서하 왕조, 금 왕조, 송 및 대리 왕국 판도. (Yu Ninjie/Wikimedia Commons 제공)

주변 부족들이 신복하자 칭기스칸이 다시 조력을 얻다

서하를 정복하는 동시에 칭기스칸은 몽골 주변 지역의 부족들과 소국들을 굴복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1207년, 칭기스칸은 장남 주치를 보내 북부 시베리아 지역의 삼림 지대로 군대를 이끌게 하였고, 그는 힘들이지 않고 그곳의 삼림 부족들을 항복시켰다. 이에 대해 칭기스칸은 매우 만족해하며 이 부족들을 주치에게 포상으로 내렸다.

1210년, 후빌라이는 칙명을 받들어 카를루크를 정벌하러 나섰다. 카를루크는 튀르크어족 부족으로 처음에는 알타이산맥 서쪽 이르티시강과 울룬구강 일대에 거주하다가 8세기 초 후돌궐 칸국의 공격을 받아 점차 북정(北庭 오늘날 신강 지무사얼吉木薩爾 북쪽) 부근으로 남천했다. 그 후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발하시호 동남쪽에 이르렀다. 12세기에는 서요(西遼)의 번속(藩屬)이 되었고, 그 영지 내에는 카스피해 동쪽 카파르 부근의 카프리, 알리말리(오늘날 신강 훠청霍城 서북쪽) 등의 성이 있었다. 그 군주는 ‘아르슬란 칸’이라 칭했고 서요에서 파견한 소감(少監)의 감시를 받았다.

서요는 거란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이 1124년에 건국했으며, 1141년 중앙아시아의 패주가 되었고 위구르, 서카라한국, 동카라한국 및 호라즘 등이 번성기의 서요에 차례로 신복했다. 몽골이 부흥한 후 서요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 군대가 도달하자 카를루크의 아르슬란 칸은 서요의 소감을 죽이고 후빌라이에게 항복했으며, 후빌라이를 따라 입조(入朝)했다. 칭기스칸은 그가 싸우지 않고 항복한 것을 치하해 은전과 포상을 내리고, 칙명을 내려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도록 했다. 이로부터 카를루크의 아르슬란 칸 가문은 칭기스칸의 황족과 혼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서요의 부속이었던 위구르의 이두헵(국왕에 대한 세습 존칭)은 칭기스칸이 흥기하여 나이만을 격파하고 서하를 두 차례 공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요 소감의 포악한 감시에서 벗어나 도량이 너그러운 칭기스칸에게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1209년, 그는 서요 소감을 죽이고 사신을 보내 칭기스칸을 알현하며 귀순의 뜻을 밝혔다. 1211년 봄, 그는 다시 친히 칭기스칸을 알현하고 칭기스칸의 딸과 혼인시켜 달라고 청했다. 칭기스칸은 그가 자발적으로 귀부해 온 것을 가상히 여겨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로부터 이두헵 왕족과 칭기스칸 황족 역시 세대 대대로 이어지는 혼인 관계를 형성했다.

다른 정복 국가들과는 달리 위구르는 일종의 몽골 대칸의 번신(藩臣)으로서 인질 납부, 조공 바치기,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기 등 번신의 의무를 다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두헵은 자신의 영지와 백성들에 대해 일정 정도의 자주권을 누렸다. 더욱 중요한 점은 13세기 위구르족이 불교를 믿었으며 문화가 몽골보다 높았고 많은 위구르인들이 여전히 유목에 종사하며 몽골인들과 언어 및 풍속 면에서 비교적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몽골인들은 한문화를 대량으로 흡수하기 전에 주로 위구르 문화를 흡수했다. 13세기 중엽에 출현한 가장 이른 시기의 몽골 역사서인 《몽골비사(蒙古秘史)》는 바로 위구르 비치게치(必闍赤 행정관)가 몽골인들의 구전 설화를 받아적어 편찬한 것이었다. 게다가 위구르는 동서양 교류의 통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몽원(蒙元) 시대 동서양의 경제, 문화, 과학기술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高昌回鹘王供养图(敦煌壁画中的供养人)。(公有领域)

위구르 왕 공양도 (돈황 벽화 속의 공양인). (공유 영역)

금국을 겨눠 조상의 원수를 갚고 장생천의 가호를 빌다

서하를 세 차례 정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정벌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여 금나라의 날개를 꺾은 후, 칭기스칸은 드디어 한 세기 동안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통치해 온 금나라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일찍이 몽골의 여러 부족은 줄곧 금나라에 신복했으나, 몽골인들과 금나라 사람 사이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원래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숙조(叔祖)인 암바가이 칸이 타타르인에게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보내졌고, 금나라 사람들이 모역 죄를 명목으로 그를 목려(木驢) 위에 못 박아 죽였던 것이다. 몽골 여러 부족들은 이 때문에 타타르인과 금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게다가 금나라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3년마다 병사를 북쪽으로 보내 소탕하고 이를 ‘감정(減丁 인구 솎아내기)’이라 불렀으며, 이 행위는 11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단되었다. 금나라 사람들의 잔혹함은 몽골인들에게 뼛속 깊은 증오를 심어주어 대를 이어 잊을 수 없었다.

칭기스칸이 몽골 여러 부족을 통일할 당시, 타타르인들을 타격하기 위해 일찍이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금나라에 신복해 해마다 조공을 바치기로 동의했으며 금나라로부터 관직을 수여받기도 했다. 칭기스칸이 초원을 통일하고 대몽골국을 건국한 후에는 당연히 금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어느 날 금나라의 평범한 위왕(衛王) 윤제(允濟)가 조공을 받으러 오자 칭기스칸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윤제가 귀국한 뒤 군사를 보내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에 의해 거절당했다. 1208년, 윤제(완안윤제, 후세에 ‘위소왕’이라 칭함)가 황제로 즉위하고 사신을 보내 칭기스칸에게 새 황제에게 신하를 칭할 것을 요구했다. 칭기스칸은 몹시 경멸하며 그의 즉위 조서를 무릎 꿇고 영접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금나라 도읍을 향해 이렇게 내뱉었다.

“내 중원의 황제는 천상의 사람이 하는 줄 알았더니, 이토록 용렬한 자들도 자리에 오르는가? 어찌 절을 하는가?”

말을 마치고 곧바로 말을 타고 떠나니 어안이 멍해진 사신만 남겨졌다. 위소왕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노해 칭기스칸이 공물을 바치러 들어올 때 그를 사로잡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칭기스칸은 마침내 금나라와 절교하였으며 신하의 관계 역시 완전히 끊어버렸다.

1211년, 칭기스칸은 금조(金朝)를 대거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봄날에 그는 케룰렌강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해 각 방면과 함께 금나라를 정벌할 일을 공동으로 논의했다. 조상의 원수를 갚는 것 외에도 칭기스칸이 내세운 출정 이유는 금나라 사람들에게 쫓겨난 거란인들을 위해 치욕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것이었다. 회의에는 동맹을 맺은 위구르와 서하의 대표들도 초청되었다.

부중(部眾)과 동맹들의 지지를 얻은 칭기스칸은 부근의 몽골 성산에 올라 아홉 번 절하며 금나라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오, 장생천(長生天)이시여! 저는 이미 무장을 마치고 제 조상들이 흘린 피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금나라 황제가 제 선조인 암바가이 칸을 살해했으니, 제발 이 원수를 갚도록 허락해 주시고 제게 힘을 보태 주소서!”

출정하기에 앞서 칭기스칸은 또다시 자신의 장막 속에 사흘 밤낮을 틀어박혔고, 장생천의 결정과 칭기스칸의 명령을 기다리던 다른 몽골인들도 몽골 관용구인 “후레이, 후레이, 후레이”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흘째 되는 날 동이 틀 무렵, 칭기스칸은 대막에서 걸어 나와 무리를 향해 ‘장생천’이 그들의 복수를 허락했으며 승리를 거둘 것임을 계시해 주었다고 선언했다.

당시 겉보기에 대몽골국과 금나라의 세력은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1211년 당시 대몽골국의 인구는 70만 안팎이었고 군대는 15만 명(그중 10만 명이 대몽골국의 몽골군이고 나머지는 항복을 받아낸 각 부족의 군대였다)이었던 반면, 금나라는 인구가 5천만 명이 넘었고 군대만 100만 명이라고 칭했다. 당시 금나라 황제가 “그들(몽골인들)이 어찌 감히 침범하겠는가?”라고 말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나라 황제는 과연 누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터였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蒙古帝國興亡錄》
《西夏紀》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0/18/n1248463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