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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12 – 【칭기스칸】 호라즘의 멸망과 구처기가 천기를 말하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花剌子模灭国 丘处机道破天机몽골군대의 출정(에포크타임스 제작)

몽골의 네 갈래 군대가 각자 승리를 거둔 후, 1220년 5월에 사마르칸트 성 아래에서 회합했으며, 이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휩쓰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전의 정복 전쟁 중, 성을 함락한 후에 몽골인들은 사람을 보내 직업에 따라 평민을 나누었으며, 전문 인력에는 서기, 의사, 천문학자, 법관, 점술가, 교사, 목사, 장인 등이 포함되었고, 몽골인들은 특히 여러 언어를 아는 사람과 장인을 필요로 했다. 장인은 대장장이, 목수, 도예가, 직조공, 염색공, 제지공, 재단사, 보석공, 악사(樂師), 이발사, 약사, 요리사 및 오락 연행자 등일 수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따르거나 몽골 제국으로 보내졌으며, 그들은 전쟁을 하거나 방목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자신의 업종에 종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들은 몽골 제국의 발전과 강대함에 모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칭기스칸은 또 문인의 펜을 통해 전쟁에서 사망한 인원을 과장할 의도가 있었으며, 민중이 자신이나 몽골인에 관한 믿기 힘든 소문을 자유롭게 전파하는 것도 허용했다. 예를 들면 몽골인들은 정복당한 도시에서 대표단을 선발하여, 아직 정복되지 않은 도시로 가서 몽골인의 대단함을 이야기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후세의 몽골인들이 유라시아 정복전에서 살육했다는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아마도 신중한 고증을 진행할 필요가 있으며, 어쩌면 어떤 숫자들은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것이다.

연구자 중에는 몽골인이 정복한 도시의 파괴 상황을 검증한 후에,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을 초과하는 사상자가 나온 경우는 거의 없었음을 발견했다. 비록 이 메마르고 황막한 땅속에 수백 년 혹은 심지어 수천 년의 유골이 보존되어 있으나, 몽골인에게 도살당했다고 전해지는 수백만 명의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칭기스칸이 도살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시의 파괴자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가 일부 도시를 불태우거나 파괴한 것은, 위엄을 세워 몽골인들로 하여금 더욱 빨리 싸우지 않고 승리하게 하려는 원인 외에도, 전략적인 고려에 기반한 것이었다. 야심만만했던 그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통로를 열어 상업과 교류를 더욱 편리하게 만들고자 했기에, 자신의 구상에 따라 더 많은 무역을 자신의 군대가 더욱 쉽게 감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노선 위로 집중시키기를 희망했다.

사마르칸트 전투

몽골 대군은 사마르칸트에서 회합한 후, 칭기스칸은 먼저 외곽의 보루를 소탕하여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그후 포위망을 전개하라고 명령했다. 칭기스칸은 무함마드가 이미 사마르칸트를 떠났다는 것을 알자, 즉시 제베, 수베데이, 토구차르에게 군대 3만을 이끌고 무함마드를 추격하게 했다.

칭기스칸은 사마르칸트의 성이 높고 해자가 깊음을 보고는, 병법에 통달한 곽보옥에게 성을 깰 좋은 계책이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곽보옥은 “이 성은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며, 게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연일 행군하여 피로하니, 먼저 휴식하고 정돈한 뒤에 다시 좋은 계책을 도모함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칭기스칸은 이 말이 아주 옳다고 여겼다.

사흘째 되는 날 몽골군의 포위 형세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때, 사마르칸트 수비 장수 알프 칸이 자발적으로 공격에 나서 5천 명의 타지크 보병과 기병을 출격시켰다. 몽골인들은 곧 늘 쓰던 싸우며 퇴각하는 방식을 취해 타지크인들을 교외의 매복권으로 끌어들였고, 타지크인들은 모두 전사했으나 몽골인들도 사상자가 많았다. 한편 강리(康裏) 군대는 자신들이 몽골과 동족이라고 여겨 일찍부터 투항할 생각이 있었기에 타지크인을 지원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칭기스칸은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며 성 안의 주민들은 모두 매우 두려워했다. 몽골인들이 자주 죄수를 성 안으로 풀어주어 자신의 포로 우대 정책을 선전했기 때문이며, 게다가 각종 돌대포와 노전(弩箭 쇠뇌에서 발사한 화살)의 끊임없는 습격이 더해져 성 안을 굳게 지키려는 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닷새째 되는 날, 성 안의 강리 병사들이 잇달아 투항했고 성 안의 종교 지도자들도 칭기스칸의 군영으로 찾아와 항복을 청했으며 칭기스칸은 그들을 모두 잘 대우했다. 이어서 성 안의 군사와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몽골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안쪽 보루의 수비군을 섬멸했고, 오직 알프 칸이 1천 명을 이끌고 밤을 타서 도망쳤다.

칭기스칸은 태사국공(太師國公)인 야율아해(耶律阿海)에게 성 안에 지키게 하고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게 하고, 투항한 관리 바흐르 메리크, 야라와치에게 세수를 담당하고 투항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했으며, 성 안의 장인 3만 명을 선발해 몽골군 각 영에 나누어 배치하고, 다른 장정 3만을 선발해 징집군(簽軍 역주: 첨군이란 호적에 기초해 강제 징용된 군사를 말함)으로 삼아 공성대를 보충했다.

사마르칸트가 평정된 후, 칭기스칸은 삼군(三軍)에 그 자리에서 휴식하고 정비할 것을 명했고 자신은 사마르칸트와 나흐샤브 사이에 주둔하며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乌兹别克斯坦撒马尔罕是中亚地区的历史名城。(shutterstock)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이다. (shutterstock)

우르겐치 전투

호라즘의 구 수도인 우르겐치(몽골인은 우롱제치라 부름)는 아무다랴강을 가로지르고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게다가 성벽 방어가 견고하고 수비병이 많았으며 무함마드의 어머니 투르칸 태후가 통제했고 성 안의 수비 장수는 후마르로, 11만 명이라고 칭하는 대군을 통솔했다.

1220년 가을, 몽골군이 휴식과 정비 및 병력 증강을 마친 후, 칭기스칸은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에게 명하여 제1, 2로군과 포로로 잡은 장정들을 이끌고 우르겐치를 공격하러 가게 했으며 주치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 병력을 파견해 호라산 북부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호라즘인들이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방지했다.

몽골 선두 부대가 우르겐치 성 아래에 도달하여, 가축을 약탈하는 것으로 수비 장수들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을 파견해 몰아내도록 유인했으며, 호라즘인들은 매복에 걸려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다. 몽골군은 이에 패잔병의 뒤를 미행하여 하이란문으로 들어갔고, 나중에 밤이 곧 내리려 했기 때문에 물러났다.

칭기스칸이 일찍이 우르겐치를 주치의 봉지로 주겠다고 약속했기에, 차가타이는 강공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주치는 오히려 부하들에게 불태우거나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일렀고, 도리어 사자를 보내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주치는 이에 공성 기구를 준비하고, 3천 명의 몽골병을 보내 아무다랴강 위의 다리를 탈취하게 했으나 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아 살아남은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

이 한 차례 전투를 겪은 후, 수비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한편 몽골군은 이러한 좌절을 겪었고, 게다가 주치와 차가타이의 의견이 맞지 않고 명령이 통일되지 않아 기율이 해이해지고 사기가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외에도 수비군이 끊임없이 출격해 몽골군에게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므로 6개월 동안이나 우르겐치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타리칸에 있던 칭기스칸은 세 아들의 상황을 보고받은 후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한 원인이 세 아들 간의 불화에 있음을 알고는, 이에 엄하게 꾸짖고 우구데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기한 내에 성을 함락시킬 것을 명했다. 우구데이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두 형 사이의 모순을 조화하려 최선을 다했고 기율을 거듭 천명하며 병사들을 엄하게 단속하니, 군대의 위엄이 마침내 크게 진작되었다.

1221년 4월, 우구데이가 총공격을 명했다. 당일 몽골인들은 사다리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 불태웠다. 수비군은 층층이 방어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했고, 성 안의 부녀자들도 대다수 전투에 참가했다. 7일간의 격렬한 전투를 거친 후에야 몽골인들은 전체 성을 점령했고 수비군은 전원 전사했다. 몽골인들은 10만 명의 장인을 골라내어 부인 및 아이들과 함께 몽골국으로 돌려보냈고, 또 5만 명의 장정을 첨군(簽軍)으로 편입시켰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것이 동방에 무슬림이 생겨난 시초라고 한다.

우르겐치의 함락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이 전부 몽골군에게 점령되었음을 표명하는 것이며, 호라즘의 여러 대도시들이 몽골인들에게 공략당한 후에는 또한 그것이 멸국(滅國)에서 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타리칸 공략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의 전투가 끝난 후, 칭기스칸은 톨루이에게 일군의 병력을 이끌고 먼저 아무다랴강을 건너 호라산을 공격하여 마르브성과 니샤푸르를 함락시키게 했으며,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테르메즈(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테르메즈 북쪽)를 진공하여 열흘 만에 함락시켰다. 그 후에 일부 병력을 바다흐샨(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힌두쿠시산맥 이북 지역)으로 보내 군량을 수색하게 했고, 주력은 아무다랴강 북안에서 겨울을 지냈다.

1221년 봄, 칭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아무다랴강을 건너 발흐성(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르이샤리프 서쪽)을 거쳐 타리칸(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탈리칸)에 도달했으며, 발흐성의 병사와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귀부했다. 타리칸 산속에 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지세가 험준하고 성보가 견고했으며 수비군이 많고 또 용감했고 식량까지 충족해 장기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먼저 사람을 보내 타이르고 항복을 권유했으나 수비군이 항복을 거절했다. 몽골군은 이에 사방에서 포위하고 연달아 공격하며 6개월 동안 싸웠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침내 칭기스칸은 나무 틀을 만들고 흙을 날라 언덕을 만들어 성과 높이를 같게 하는 방식, 그리고 포로와 징집군을 맨 앞으로 몰아 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성에 진입했다. 수성 하던 기병은 도망칠 수 있었으나 보병은 전부 섬멸되었다. 칭기스칸은 타리칸 산록에 주둔하여 여름을 나며 더위를 피하라고 명했다.

이해 10월, 톨루이가 마루차예케, 마르브(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마리 서쪽), 사라흐스 등의 성을 함락시킨 후, 다음 해 4월에 또 니샤푸르(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네이샤부르)를 공격하러 갔다. 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칭기스칸의 부마이자 선봉인 토구차르가 화살에 맞아 죽었고, 톨루이는 곧 노포, 투석기, 화염방사기, 사다리 등의 수단을 채용하여 연속으로 성을 공격했으며, 또 근처 여러 산에서 돌을 가져와 대량의 투석용 돌을 성 아래에 쌓은 끝에 마침내 공략했다.

호라즘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한 후, 칭기스칸은 장자 주치에게 주둔하며 지키라고 명하고, 각 성에 다루가치(감독관)를 두어 인구 조사를 담당하게 하고, 종군 인원을 모집하며, 정보 역참을 세우고, 부세(賦稅)를 징수하며 진공 물품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맡겼다. 우르겐치 성의 야라와치, 말리쿠트 부자 두 사람이 칭기스칸에게 성읍을 관리하는 방법을 제안하여 윤허를 얻었으며, 칭기스칸은 말리쿠트를 파견하여 다루가치와 함께 부하라, 사마르칸트, 우르겐치 등의 중앙아시아 도시를 공동 관리하게 하고 야라와치는 데리고 돌아가 중도(오늘날의 북경)를 관리하게 했다.

이것은 몽골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전에 몽골인들은 오직 정복할 줄만 알았지 도시를 어떻게 관리할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의식적으로 정복된 도시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를 추격하고 잘랄알딘을 격파하다

사마르칸트가 5일 만에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함마드는 깜짝 놀랐으며, 장수들과 함께 다음 단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했다. 일파는 이라크로 퇴각하여 수비해야 한다고 여겼고, 다른 일파는 인도로 도망쳐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아들 잘랄알딘은 도리어 사방으로 도망쳐 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칭기스칸과 결사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도리어 슬픈 탄식을 내뱉었다. “호라즘이 재난을 입은 것은 하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인력으로 만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에 패잔병들을 이끌고 니샤푸르로 도망쳤으며, 매일 흥청망청 놀며 즐김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했다.

몇 주도 지나지 않아 몽골군이 추격해 왔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또 가지닌(오늘날의 이란 수도 테헤란 서북쪽 카즈빈)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3만의 이라크 군대를 소집하여 사수(죽기를 각오하고 지킴)할 준비를 했으나, 우구데이, 차가타이, 톨루이가 주력군을 이끌고 가지닌으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병사들은 곧바로 절반이 도망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무함마드는 도망을 계속했으나, 그가 어느 곳으로 도망치든 몽골인들은 따라붙었다.

마지막으로 갈 길이 없어진 무함마드는 카스피해변의 어느 작은 황무지 섬으로 도망쳤다.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제베와 수베데이는 할 수 없이 먼저 무함마드의 모후와 후궁들이 임시로 피난했던 하루온보를 공격하러 갔고 곧 함락시켰다. 무함마드가 처첩, 딸 및 모후가 모두 몽골인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즉시 기절했으며 절망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나중에 그의 처와 딸 및 모후는 몽골 제국으로 보내졌다.)

임종 전, 무함마드는 여러 아들을 곁으로 불러 일일이 당부하고, 용맹하고 지혜로운 잘랄알딘을 태자로 세웠다. 그가 죽은 후, 잘랄알딘은 일부 패잔병들을 소집해 계속해서 몽골인에 항거하여 싸웠다. 1221년 가을, 그는 힌두쿠시산 기슭의 바루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3만 몽골군을 격파하고 1.5만을 섬멸했다. 이것은 또한 몽골 서역 원정 모든 전투 중 유일한 패배였다.

칭기스칸은 이에 친히 5만 대군을 이끌고 왔고, 도중 바미안(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성) 부근의 반얀보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차가타이의 사랑하는 아들 무툭간이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무툭간은 소년 시절부터 날쌔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 모두 정통했고, 칭기스칸이 몹시 사랑하던 손자였다.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나머지 칭기스칸은 낮밤으로 번갈아가며 강공을 명령했고, 그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성 위와 성 아래가 온통 참혹했다.

반얀보 전투를 겪은 후, 칭기스칸의 대군과 잘랄알딘군은 인더스강 부근에서 결전을 전개했다. 이때 잘랄알딘 군중의 두 장수가 아라비아 준마 한 마리를 다투다가 반목했고, 그중 한 사람은 뜻밖에도 부대를 이끌고 떠나 버렸으니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잘랄알딘의 실력을 약화시켰다. 잘랄알딘은 칭기스칸을 당해내지 못하고 거의 전군이 몰살당했으며, 이에 4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인도로 도망쳤다.

몽골인들이 인더스강변까지 추격해 왔을 때, 칭기스칸은 영용(용맹하고 뛰어남)한 잘랄알딘을 가엾게 여겨 그를 생포한 뒤에 귀순하게 만들고자 하여 장수들로 하여금 그를 겹겹이 에워싸게 했다. 그러나 잘랄알딘은 틈을 타 절벽 위에서 말을 몰아 인더스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반대 기슭으로 건너갔다. 몽골인들은 물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그저 그가 도망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칭기스칸은 좌우의 여러 아들을 둘러보며 감탄하여 말했다. “개 같은 아버지에게 뜻밖에도 범과 같은 아들이 있구나, 이 사람은 여러 아들들이 본받을 만하다.”

이에 이르러 호라즘 왕국은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한편 인도로 도망친 잘랄알딘은 줄곧 나라를 다시 세우길 희망했고, 그는 나중에 페르시아, 이라크, 캅카스 등의 지역에서 전전하며 작전했으나 거듭 반항에 부딪혔다. 1231년, 그는 튀르키예에서 음모로 살해당했고 호라즘국은 철저히 멸망했다.

구처기가 천기를 말하다

이미 고인이 된 홍콩 작가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과 《신조협려(神雕俠侶)》 속에는 구처기(丘處機)라는 이름의 매우 유명한 도사가 나오는데, 사실 역사적으로 확실히 그러한 인물이 존재한다. 그는 전진교(全眞敎) ‘북칠진(北七真)’ 중 하나로 추앙받으며 용문파(龍門派)의 조사이고, 시대적으로는 금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이다. 당시 전진교는 전성기에 도달했고 구처기의 명성도 지극히 높았다. 그는 금나라 세종(世宗), 장종(章宗), 위소왕, 선종(宣宗)의 깊은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칭기스칸과도 만날 인연이 있었고 똑같이 존경을 받았다.

1219년 5월, 칭기스칸은 사자 유중록(劉仲祿) 등을 보내 조서를 휴대하고 산동으로 가서 구처기를 초청해 몽골 제국으로 와서 자신과 만나도록 했다. 조서 위에는 먼저 칭기스칸의 공적을 말했다.

“하늘이 중원의 교만과 사치를 미워하시매, 짐은 북쪽 들판에 머물며 온갖 욕망이 생겨나지 않는 순수한 성품을 지녔노라. 소박함으로 돌아가 순수함을 회복하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며, 옷 한 점 밥 한 술마다 소 치고 말 기르는 아이들과 함께 떨어지고 함께 나누어 먹었느라. 백성 보기를 갓난아이같이 하고 선비를 양육하기를 형제같이 하였으며, 꾀함은 평소 서로 어울렸고 은혜는 평소 두텁게 쌓았으니, 만 대중을 훈련시킴에 내 몸을 남보다 앞세웠고 백 번의 전투 진영에 임함에 내 뒤를 생각지 아니하였노라. 이에 7년 만에 대업을 이루고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였도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을 거둔 원인은 주로 금나라 통치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칭기스칸이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얻어 존귀한 지위를 얻었고, 나아가 “남으로는 남송과 연합하고, 북으로는 위구르와 접하며, 서하와 서역이 모두 신하로 돕기를 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걱정한 것은 어떻게 다스려 평안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천하를 편안하게 할 것인가였다. 그는 구처기가 “진리를 체득하고 규범을 실천하며,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으며, 깊은 이치를 탐색하고 다다르며, 도가 충만하고 덕이 드러나며, 옛 군자의 엄숙함을 품고, 진을 품은 상인(上人)의 고아한 절조를 지녔다. 오래 바위와 골짜기에 깃들며 몸을 감추고 숨어 행했다”고 들었기에 매우 앙모했으며, 그에게 “잠시 신선의 걸음을 굽혀 사막의 아득함을 마음에 두지 마시고”, “혹은 세상의 정무를 근심하는 것으로서, 혹은 짐의 몸을 보전하는 방술로서” 칭기스칸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려 했다. 비록 황제가 내린 조서임에도 말과 뜻의 간절함과 겸손함이 종이 위에 뛰어오르듯 생생히 드러난다.

일찍이 금나라와 송나라 황제의 초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구처기가 다 읽은 후 말했다.

“나는 하늘의 이치를 따라 행하니, 하늘이 시키는 것에 따라 행하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이에 가기를 동의했다. 이로부터 구처기는 칭기스칸이 천명(天命)을 받들어 왔음을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王重阳与北七真。 中间端坐者为王重阳。丘处机居其左首第一。(公有领域)

왕중양(王重陽)과 북칠진. 가운데 단정히 앉은 이가 왕중양이다. 구처기는 그의 왼쪽 첫 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공유영역)

1220년 정월, 73세의 구처기는 18명의 제자를 이끌고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몇 달 후 대몽골국이 통치하는 연경(燕京 금나라 중도였으나 1215년 5월 몽골 제국에 함락된 후 연경으로 개칭)에 도착했으며, 구처기 일행은 몽골 관원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구처기가 칭기스칸이 이미 군대를 거느리고 서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나이가 많음을 고려하여 진정서를 작성하고 칭기스칸과 연경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려 했다.

전쟁에 관한 사무로 바빴던 칭기스칸 또한 연경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야율초재(耶律楚材)에게 시켜 회답 조서를 쓰게 했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달마가 동쪽으로 건너와 법을 전하고 노자가 서쪽으로 천축으로 가서 호인(胡人)을 교화한 것을 예로 들어, 다시 구처기에게 서행해 줄 것을 초청했다. 구처기는 이에 1221년 봄에 서행을 계속했다.

떠나기 전, 구처기는 유중록이 칭기스칸을 위해 미녀를 골라 뽑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만류하고 역사를 거울삼아 군주가 여색에 빠지는 것이 국가에 미치는 위해를 설명했다. 칭기스칸이 알게 된 후 역시 그것을 금지했다.

그 후, 구처기 일행은 거용관(居庸關)을 나와 비슈발릭, 불라(오늘날의 신강 볼라시)를 거쳐 철문관(鐵門關 송관松關이라고도 부름, 오늘날의 이름은 과자구果子溝)에 이르러 알리말리에 도달했고, 서쪽으로 일리강을 건너 고생스러운 역정을 거쳐 그해 겨울에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칭기스칸은 이미 그곳을 떠나 대설산(大雪山 오늘날의 힌두쿠시산)의 바루완 행궁에 주둔하고 있었다. 도중에 큰눈으로 산이 막혔기 때문에 구처기는 봄이 되어 길이 열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222년 3월 상순, 칭기스칸이 행궁으로부터 조서를 내려 말했다.

“급히 진인을 뵙고자 하니, 진인은 수고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속히 행궁으로 와서 가르침을 청하고 도를 구할 수 있게 하기 바랍니다.” 이에 구처기 등은 몽골 대군의 보호 아래 20여 일을 걸어 행궁에 도착했다. 그는 칭기스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칭기스칸은 구처기를 “신선(神仙)”이라 칭하고 그와 여러 차례 대화하며 치국과 양생의 방책을 물었다. 칭기스칸이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이 있는지 물었을 때, 구처기는 직언했다. “위생(衛生)의 도는 있으나,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 칭기스칸은 그의 정직함을 가상히 여겨 이에 대칸의 궁장 옆에 별도로 두 개의 천막을 설치하여 구처기 일행이 거주하게 했다.

구처기는 또 칭기스칸에게 도인이 칭기스칸을 만날 때 손을 잡고 허리를 굽히는 예절을 행할 수 있으며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제안했고, 칭기스칸은 이에 동의했다. 칭기스칸이 함께 식사하자고 초청한 것에 대해 구처기는 자신은 출가인이니 궁정 정치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고 표명하며 거절했다. 칭기스칸은 이해한다고 표명했다. 이를 보면 칭기스칸이 구처기에 대한 예우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칭기스칸은 조서를 내려 번역을 맡았던 야율초재로 하여금 두 사람의 대화를 편집하여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으로 만들게 했다. 그중에서 우리는 구처기가 ‘도’를 말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색을 금해야 한다면서, “의식(衣食)을 경영하면 사려(思慮)가 수고롭고 비록 그 기를 흩뜨리나 흩뜨리는 바가 적지만, 색욕을 탐하면 정신을 소모하여 역시 그 기를 흩뜨리나 흩뜨리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수련의 술(術)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기호와 욕심을 버리고, 정(精)을 굳건히 하고 신(神)을 지켜야” 한다.

그는 도를 배우고 진(真)을 닦는 노정이 난관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반대로 도와 어긋나고 욕심을 좇아 날로 타락하는 것은 오히려 아주 쉽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대개 그것을 따르거나 그로부터 도를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구처기는 또 칭기스칸에게 그가 본래 천인(天人)이며, 하늘이 그에게 “잔인한 것을 없애고 포악함을 제거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명을 부여했고 공이 이루어지고 기한이 다하면 곧 하늘로 올라가 제자리를 회복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성색(聲色)을 줄이고, 기호와 욕심을 덜어야” 비로소 성체(聖體)가 건강하고 평안할 수 있다. 또 선(善)을 많이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건져야 하니, “선(善)을 행하고 도(道)에 나아가면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고, 악을 행하고 도를 등지면 땅으로 들어가 귀신이 되기” 때문이며, 칭기스칸은 본래 하늘에서 왔으니 “만약 선을 행하고 복(福)을 닦으면 하늘로 오를 때 지위가 이전의 직위보다 높을 것이고, 선을 행하고 복을 닦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칭기스칸에게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가지라는 등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술(術)을 알려준 외에, 구처기는 수신양명(修身養命 몸을 닦고 생명을 기름)의 방도를 설명했다. 칭기스칸은 얻는 바가 매우 많아 이렇게 말했다. “간곡하신 가르침과 인도에, 공경히 명을 받들어 새기겠나이다. 이는 모두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이오나, 감히 신선(진인)의 분부를 따르지 않고 부지런히 행하지 않으리오?”

약 1년 동안 머문 후, 1223년 봄에 구처기는 칭기스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가 돌아오는 도중에 칭기스칸은 잇달아 네 통의 성지(聖旨)를 내려 전진교의 부역을 면제하고 가는 길에 병력을 보내 호송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서신을 보내 구처기 일행의 안부를 문안했다.

구처기를 따라 서쪽 여행에 나섰던 18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이지상(李志常)이 도중에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나중에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真人西遊記)》라는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

1227년 5월, 칭기스칸은 또 성지를 내려 천장관(天長觀)을 장춘궁(長春宮 지금의 북경 백운관)으로, 북궁선도(北宮仙島)를 만안궁(萬安宮)으로 고치고, 구처기에게 조명을 내려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게 했다. 조서 속에서도 또한 “짐은 늘 신선을 생각하니 신선도 짐을 잊지 마시길”이라고 언급했다. 8월, 구처기는 장춘궁에서 우화(羽化 입적)하니, 향년 80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칭기스칸도 붕어했다. 두 사람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계속)

北京白云观,始建于8世纪中叶。(shutterstock)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북경 백운관(shutterstock)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長春真人西遊記》
《蒙古帝國史》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1/20/n125635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