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德惠)
【정견망】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나라를 건립하기 전, 일찍이 후주(後周)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그때 중국은 마침 ‘오대십국’ 시기에 처해 있어 천하는 동요하고 전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왕조의 교체가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괄이지(括異志)》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송주(宋州), 즉 오늘날의 하남 상구(商丘)에 행동이 기이한 ‘광승(狂僧, 미친 승려)’이 나타났다. 그는 새총을 손에 쥐고 가시덤불 속을 걸어 다니며, 뒤돌아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마땅히 천자가 나올 것이다.” 그때 조광윤은 아직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度使)로 부임하지 않았고 송주의 군정 대권도 장악하지 않았을 때였다. 이 얼핏 뜬금없어 보이는 한마디는 나중에 결국 영험함을 입증하는 예언이 되었다.
후주 세종(世宗) 시영(柴榮)은 현덕(顯德) 2년(955년)에 대규모로 사원을 철폐하고 불상을 훼손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현덕훼불(顯德毁佛)’이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몇 차례 규모가 비교적 큰 불교 법난이 일어났는데, 그 발동자들을 함께 일컬어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 한다. ‘삼무’는 북위 태무제 탁발도(拓跋燾),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 및 당 무종 이염(李炎)을 가리키고; ‘일종’은 곧 후주 세종 시영을 가리킨다.
불교를 박해한 이 몇몇 황제들은 모두 불교를 훼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덕 6년(서기 959년), 그는 북벌 도중에 중병에 걸려 곧 사망했으니, 현덕 2년의 훼불로부터 불과 4년 만이었다.
시영이 사망한 후, 겨우 일곱살의 시종훈(柴宗訓)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조광윤은 그 뒤 곧바로 귀덕군절도사 겸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임명되었다. 귀덕군은 당시의 일개 지방 번진 군대였는데, 그 치소가 바로 송주에 있었다. 귀덕군절도사는 그 지역의 군사, 행정 및 재정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가히 일방의 군정 장관이라 할 만했고; ‘검교태위’는 주로 신분이 존귀한 무관의 영예로운 칭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윤은 진교역(陳橋驛)에서 병변(兵變 쿠데타)을 일으켰고, 장수들은 황포(黃袍 황제의 옷)를 그의 몸에 걸쳐주며 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조광윤은 그 뒤 후주의 선양을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그가 이전에 귀덕군절도사를 지냈고, 또 귀덕군의 치소가 송주에 있었던 까닭에, 새로운 왕조는 ‘송(宋)’을 국호로 삼았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북송(北宋)이라 부른다.
송주에서 과연 천자가 나왔다. 여러 해 전, 그 미친 승려가 말했던 “이곳에서 마땅히 천자가 나올 것이다”라는 말은 이렇게 하여 그 검증을 얻게 되었다.
사료 속에 왜 하필 이 미친 승려가 “새총을 휴대하고 가시덤불 속을 걸었다(携彈走荆棘中)”고 특별히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원문은 따로 해설을 내놓지 않았다. 필자는 여기서 비로소 한 가지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새총은 살상력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기구로, 대개 새를 쏘거나 소형 동물을 사냥하는 데 쓰인다. 그것은 아마도 조광윤이 진교역 병변과 후주의 선양을 통해 황위를 획득했을 때 대규모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왕조 교체가 비교적 평화로웠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새총은 또 송나라가 나중에 문을 숭상하고 무를 억누르는 격국을 형성하여 대외 군사 방면에서 장기간 압력을 떠안게 될 것을 예시했을 수도 있다.
미친 승려가 가시덤불 속을 걸어 다닌 것은 마치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의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시하는 듯했다.
오대 시기에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는 이미 거란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줄곧 이 중요한 지역을 수복하지 못했다. 연산 일대의 천연 방어벽과 전통적인 말 기르는 땅을 잃어버린 것은, 송나라로 하여금 우수한 군마(軍馬)가 부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기병에 맞설 만한 강력한 기병 부대를 구축하기에도 어렵게 만들었다. 일단 북방 군대가 연산(燕山) 방어선을 넘어 화북 평원으로 진입하면, 송나라는 겹겹이 거점 지킬 만한 천연 험준한 지형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송조는 건국 초기부터 동시에 기병 부족과 지리적 방어벽 결핍의 곤경에 직면했다. 북방 정권으로부터 오는 군사적 압력은 요나라로부터 금나라를 거쳐 몽골에 이르기까지, 거의 송나라 전체를 관통했다. 그 건국과 존속의 과정은 진정으로 가시덤불 속을 걷는 것과 같아서 곳곳이 난관이고 걸음걸음이 가슴 졸이는 일이었다.
만약 이러한 이해가 성립된다면, 그렇다면 미친 승려는 송주에서 천자가 나올 것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손에 쥔 새총과 발밑의 가시덤불까지도 일종의 특수한 방식을 통해 새로운 왕조의 건국 방식, 정치 형세 및 미래의 처지를 암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전통 수련 문화의 각도에서 볼 때, 역사의 발전은 완전히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정수(定數 정해진 운명)가 있으며, 천상(天象)의 변화에 따라 전개된다. 그 미친 승려는 아마도 수련 속에서 어떤 초상(超常)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어 미래의 역사 흐름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말과 행동을 통해 암시를 남긴 채, 후세 사람들이 이미 발생한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와 같은 예언을 남긴 것은 단순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신기하다고 여기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세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즉, 인류 사회의 흥망성쇠와 왕조의 교체는 더 높은 층차의 천상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천상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할 때 인간세상에서도 상응하는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수련하는 수많은 이들이 수련 속에서의 인식을 바탕으로 세인들에게 끊임없이 ‘천멸중공(天滅中共)’의 천상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중공이 역대 정치운동과 신앙 박해 과정에서 거대한 죄업을 쌓았으며, 청산이 도래할 때 일찍이 선서하여 중공의 당·단·대 조직에 가입했던 사람들도 몸 위에 있는 조직의 낙인 때문에 연루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끈질기게 세인들에게 중공의 당·단·대 조직을 탈퇴하고 일찍이 발했던 서약을 지워버림으로써 중공의 죄악과 단절하고 미래의 겁난을 피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간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련인들이 자비에서 우러나와 세인들이 큰 변화가 도래하기 전에 진상을 알고 자신을 위해 평안한 미래를 선택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해 미친 승려가 “이곳에서 마땅히 천자가 나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아마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조광윤이 송주에서 군정 대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송나라를 건국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한마디의 무게를 깨달았다. 역사가 사람에게 남긴 교훈은 이러하다. 어떤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때 들으면 터무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일단 현실이 되고 나면 그때 가서는 다시 선택하려 해도 이미 너무 늦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수련인의 선의(善意) 어린 권고에 직면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사색하며 진상을 알아보고 자신만의 선택을 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미래에 오늘을 되돌아볼 때, 당신은 일찍이 이 권고를 귀담아들었던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자료 출처: 《괄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