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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탄식 —— 《호료가(好了歌)》 해독함

청풍(淸風)

【정견망】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이 좋다는 것을 알건만,
오직 공명만은 잊지 못하네!
고금의 장상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거친 무덤에 잡초만 우거져 사라졌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이 좋다는 것을 알건만,
오직 금은보화만은 잊지 못하네!
날마다 모인 것이 적다고 한탄할 뿐,
막상 많아질 때쯤이면 눈을 감아버리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이 좋다는 것을 알건만,
오직 어여쁜 아내만은 잊지 못하네!
그대 살아생전엔 날마다 은정을 말하더니,
그대 죽자마자 또 다른 사람을 따라 가버렸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이 좋다는 것을 알건만,
오직 자식과 손자만은 잊지 못하네!
어리석은 마음 품은 부모 예부터 진실로 많았건만,
효도하는 자식과 손자는 그 누가 보았던가?

世人都晓神仙好,惟有功名忘不了!
古今将相在何方?荒冢一堆草没了。

世人都曉神仙好,只有金銀忘不了!
終朝只恨聚無多,及到多時眼閉了。

世人都曉神仙好,只有嬌妻忘不了!
君生日日說恩情,君死又隨人去了。

世人都曉神仙好,只有兒孫忘不了!
癡心父母古來多,孝順兒孫誰見了?

이것은 《홍루몽》 제1회에서 파족도인(跛足道人)이 읊은 《호료가》이다. 견사음(甄士隱)은 이 노래를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곧바로 이 노래를 위해 하나의 주해(注解)를 지었다.

누추한 방 텅 빈 마루, 당년에는 홀(笏)이 자리에 가득 찼었지;
시든 풀과 마른 버드나무, 일찍이 가무를 즐기던 무대였네.
거미줄은 조각된 들보에 가득 얽혀 있고,
초록색 명주 휘장은 지금 또 성긴 창문에 발려 있네.
입술 연지는 한참 진하고 가루 분은 한참 향기롭다 말하지만,
어찌하여 두 귀밑머리는 벌써 서리가 내려앉았는가?
어제는 누런 흙언덕 머리에서 하얀 뼈를 떠나보냈건만,
오늘 밤은 붉은 등잔 휘장 아래에서 원앙(부부)이 누워 있네.
금은 상자에 가득, 은은 상자에 가득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지가 되어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네.
다른 사람의 명이 짧다고 탄식하더니,
어찌 알았으랴 자신이 돌아와 죽음을 맞이할 줄이야!
가르침에 방도가 있었건만, 훗날 강도가 될 줄을 보장하지 못하고;
좋은 혼처를 골라주었으나, 화류계에 흘러들 줄을 그 누가 예상했던가!
벼슬아치의 모자가 작다 탓하다가, 마침내 칼과 수갑을 차게 되었네;
어제는 헐벗은 누더기옷의 추위를 가엾게 여기더니,
오늘은 자색 비단 관복이 길다고 불평하네.
시끌벅적하게, 그대들은 바야흐로 노래가 끝나자 무대에 오르고,
도리어 타향을 고향으로 여긴다네.
참으로 황당하구나, 결국에는 모두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지어주는 꼴이 되는구나!

《홍루몽》의 제1회는 곧 소설 전체의 큰 기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보옥(賈寶玉)과 임대옥(林黛玉)의 전생의 인연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호료가》 및 그 주해를 통해 책 속의 수많은 인물들의 운명과 작품 전체의 심층적인 주제를 미리 드러내 준다. 보옥과 대옥은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해 흩어지고, 대관원(大觀園) 안의 번화하고 성대한 경치도 결국에는 쓸쓸함과 시듦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의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을 빌어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진실하고 튼튼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호(好)’와 ‘료(了)’라는 두 글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아주 깊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선이 되어 도를 닦는 것이 ‘좋은(好)’ 것임을 알면서도, 세속 중의 공명, 금은, 부부와 자손을 차마 내려놓지 못한다. 반면에 진정으로 그 ‘좋음(好)’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이러한 집착들을 ‘끝내야(了)’만 한다. 소위 “좋은 것이 곧 끝낸 것이요, 끝낸 것이 곧 좋은 것이다; 만약 끝내지 못하면 곧 좋은 것이 아니요, 만약 좋아지려거든 모름지기 끝내야 한다”라고 하는 바와 같다. 이치는 비록 명백하지만, 진정으로 해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호료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면 결국 ‘명(名), 이(利), 정(情)’ 세 글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종종 공명은 믿을 수 없고, 금은은 가져갈 수 없으며, 부부는 결국 이별하고 자손에게는 각자의 복이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지 못한다. 인생이 덧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그 덧없음 속에서 몹시 애써 쫓아다니고; 모든 것이 결국에는 사라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온갖 심력과 노력을 다툼과 점유하는 데 소모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가장 깊은 모순이자, 또한 《호료가》가 사람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견사음의 《호료가주(好了歌注)》는 이 뜻을 한층 더 펼쳐놓았다.

옛날의 고관대작과 귀족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친 무덤의 마른풀로 변하고;
당년에 가무를 즐기던 무대는 나중에 시든 풀과 마른 버드나무만 남게 되며;
청춘의 아름다운 용모는 순식간에 두 귀밑의 흰 서리로 변하고;
오늘의 부귀영화가 문에 가득해도 내일이면 문득 거지로 전락할 수 있으며;
어떤 이는 벼슬아치 모자가 너무 작다며 필사적으로 더 높은 권세를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수갑을 차게 되고;
어떤 이는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의 비단옷과 맛있는 음식을 부러워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도 자색 도포를 입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인생의 영욕(榮辱)과 귀천(貴賤), 모이고 헤어짐, 흥함과 쇠퇴는 수십 년 세월 동안 끊임없이 윤회하듯 바뀐다. 만약 수련 문화의 각도에서 본다면, 이것들은 단순한 문학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마치 더 높고 더 광활한 시공 속에서 인간 세상의 온갖 비극과 희극의 한 막 한 막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인간 세상에서는 길다고 여겨지는 한평생도 더 높은 경지에서 바라보면 단지 순식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제는 번화하고 성대한 경치였던 것이 오늘은 곧 부서진 벽과 무너진 담장이 될 수 있고; 방금 전까지 붉은 등잔 휘장 아래의 신랑신부였던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황토언덕 위의 백골이 될 수 있다.

‘도리어 타향을 고향으로 여긴다(反認他鄉是故鄉)’라는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글의 근본을 밝혀주었다. 인간 세상은 생명이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님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영원한 고향으로 여겨, 찰나의 명예와 이익, 원한과 정 때문에 서로 죽일 듯이 다투며 심지어 생명이 진정으로 온 곳과 돌아갈 곳조차 잊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탄식하는 ‘참으로 황당한 것’이다.

‘결국에는 모두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지어주는 꼴이 되는구나(到頭來都是爲他人作嫁衣裳)’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자신이 힘들게 수고를 하고서는 결국에는 남 좋은 일만 시켜주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풀이가 표면적인 자의(字義)에는 부합할지라도, 작가가 품은 더 깊은 본뜻에는 미치지 못한다.

견사음은 이미 꿰뚫어 보았다. 사람의 일생은 대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 욕망, 그리고 집착에 의해 지배된다. 공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돈을 위해 바쁘게 일하고, 감정에 미혹되고, 자식과 손자를 위해 걱정한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자주 욕망과 집착에 의해 휩쓸려 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한평생을 마치는 동안 사람이 행한 수많은 일들은 그저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러한 관념들을 끊임없이 만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으로 청성한 자아가 발휘하는 역할은 아주 적기 그지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이 바쁘게 살아가며 평생을 보낸다 해도 반드시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며; 힘들여 이룩한 모든 것도 마지막에는 가져갈 수 없다. 재물은 다른 사람에게 남겨지고, 집은 다른 사람에게 남겨지며, 명예와 지위마저도 후계자들에게 대체되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던 감정조차도 시간에 따라 변해버린다. 소위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지어준다’는 것은 이익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한평생을 다 쏟아붓고도 자기 생명의 진정한 귀숙(歸宿)을 위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음을 이르는 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여동빈(呂洞賓)은 일찍이 사람은 동물보다도 제도하기가 더 어렵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움’이란 사람들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명(名), 리(利), 정(情)에 너무 깊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만약 스스로 집착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돌이켜 선(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설령 다른 사람의 경지가 아무리 높고 지혜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를 대신해 선택해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호료가》 속에는 세속의 일을 초연히 바라본 뒤의 어찌할 도리 없는 탄식이 깊게 배어 있다. 작가가 나아갈 길을 가리켜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비록 귀로 들을지라도 기꺼이 따라서 행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마다 신선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마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사람마다 인생무상을 알면서도 여전히 무상을 영원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어쩌면 바로 《호료가》의 가장 깊고 그윽한 탄식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이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