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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15 – 【칭기스칸】 서하를 정벌하고 금을 없앨 대책을 남기고 장생천으로 돌아가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征西夏留灭金遗策 回归长生天

어떤 이들은 칭기스칸이 그가 마음에 품었던 성산인 부르칸 칼둔산(지금의 켄트 산맥)의 풍경이 수려하고 햇살 좋은 골짜기, 즉 기련곡에 매장되었다고 말한다. 사진은 켄트산맥 중 울루그 타그 산.(에포크타임스 제작)

칭기스칸이 수레 가득 전리품과 수많은 포로를 이끌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을 때 몽골 초원은 끓어올랐고, 사람들은 밤을 새워 가며 가무를 즐기고 술을 마시며 축하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휴식에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며, 그의 웅심(雄心)은 다음 전장으로 향하도록 재촉했다. 서정에서 돌아온 후 그가 선택한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자신을 배반했던 서하(西夏)였다.

서하를 멸망시킨 전쟁

이미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향한 정벌을 발동했을 무렵, 서하와 대몽골국의 평화 조약 하에서도 서하 임금의 어리석음과 관장(官場)의 부패를 가릴 수는 없었으며 서하 왕조의 기수(氣數)는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1211년, 제왕(齊王) 이준욱(李遵頊)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았으니 이가 바로 서하 신종(神宗)이다. 그는 비록 난세를 바로잡으려 애썼고 금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어 몽골에 항거할 생각도 했으나 금나라의 거절을 받았고 자신도 칭기스칸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일 역량이 없었기에 마지못해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치는[附蒙伐金]’ 정책을 계속 이어 나갔으며, 이로 인해 내부가 더욱 불안정해졌다.

1217년, 칭기스칸은 사자를 파견해 서하 임금에게 병력을 보내 서정에 종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종이 아직 의사를 표명하기도 전에 그의 수하 대신 아사감불(阿沙敢不)이 먼저 말했다. “병력이 부족한데 무슨 대칸이란 말입니까!” 그러고는 사자를 돌려보냈다.

이렇게 오만하고 비웃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난 칭기스칸은 마침내 친히 대군을 이끌고 네 번째로 친히 서하 정벌에 나서 수도인 중흥부(中興府 지금의 영하 은천銀川)를 포위했다. 서하 군신들이 힘을 다해 수비했으나 20여 일 동안 몽골 대군은 떠나지 않았고, 이에 신종은 성을 나와 영주(靈州 서북의 유명한 고성, 오늘날의 영하 경내)로 도망쳤으며 태자 이덕왕(李德旺)을 남겨 지키게 했다. 이덕왕이 마지못해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해왔고, 게다가 칭기스칸이 마침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서정할 계획이었기에 일단 서하를 놓아주며 돌아와서 다시 서하를 토벌하기로 했다.

칭기스칸이 서하를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서하 정권은 계속 연명했다. 1223년, 망국의 군주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신종은 황위를 아들인 이덕왕에게 물려주었으니 이가 헌종(獻宗)이다. 그는 다시 ‘금나라와 연합해 몽골에 항거한다’는 정책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다시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몽골 대군이 서정하는 틈을 타 몽골 주변의 여러 부락과 연합하여 몽골인들을 공격했다.

칭기스칸이 이 소식을 접하자 곧 중원 한지(漢地)를 경영하던 대장 보로(孛魯 무칼리를 계승한 아들)로 하여금 동쪽으로부터 서하를 공격하게 하고 서하의 은주(銀州 오늘날 섬서 경내)를 함락시켰으며, 서하 대장 탑해(塔海)를 사로잡고 서하 군사 수만 명을 죽였으며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했다.

1225년, 칭기스칸은 서정에서 막북으로 돌아온 후 서하를 철저히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토벌하기 전에 칭기스칸은 사자를 보내 헌종을 만나게 하고 옛날에 비웃었던 일을 문책했다. 하 헌종은 큰 화가 닥쳐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차라리 몽골과 일전을 벌이겠노라고 소문을 흘렸다.

이에 1226년 2월, 칭기스칸은 대규모의 서하 멸망전쟁을 발동했으며 기간은 1년 반에 달했다. 당시 칭기스칸은 비록 자신이 탄 말이 놀라 낙마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또 갑작스레 고열이 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었다. 10만 주력군으로 구성된 한 갈래는 칭기스칸이 친히 이끌고 먼저 오로해성(斡羅孩城) 서쪽의 흑수성(黑水城)을 함락시켰고, 그후 하란산(賀蘭山)에 위치한 서하 대장 아사감불을 격파했으며 여름에 혼수산(渾垂山)에 도달했다. 다른 한 갈래의 몽골군은 대장 아다치(阿答赤)가 이끌고 차례로 감주(甘州 오늘날 감숙 장액), 사주(沙州) 및 숙주(肅州 오늘날의 감숙 주천)를 손에 넣었다.

가을에 몽골 대군은 또 서량부(西涼府 오늘날의 감숙 무위)를 공략하고 황하를 아홉 번 건너 응리(應理 오늘날의 중위中衛 사파두구區) 등의 현을 차지했다. 겨울 11월에는 영주(靈州 오늘날의 영하 영무靈武 서남)를 공격했다. 그후 몽골 대군은 또 순조롭게 적석주(積石州), 서녕(西寧) 등을 공략하고 서하의 도성인 중흥부를 압박했다.

몽골군의 기세가 파죽지세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헌종은 지나치게 근심한 나머지 사망했으니 향년 46세였다. 제위는 그의 조카인 남평왕(南平王) 이헌이 계승했으니 이가 말제(末帝), 즉 서하의 마지막 황제였다.

1227년 봄, 칭기스칸은 서하의 멸망이 이미 결정된 것을 보고 마침내 병력을 남겨 서하 왕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금나라 경내로 진입해 임조(臨洮), 서녕(西寧), 용덕(龍德), 덕순(德順) 등의 주를 연달아 깨뜨렸다. 봉상(鳳翔)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을 때 칭기스칸은 유감스러워하며 장수들에게 말했다.

“만약 무칼리가 살아 있다면 내가 이곳까지 와서 독전(督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름에 칭기스칸은 육반산(六盤山) 행궁으로 돌아와 더위를 피했으며, 동시에 사람을 중흥부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이때 중흥부는 이미 몽골 군대에 포위된 지 반년이 되었고 성 안은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도 끊겼으며, 강진과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군민(軍民)들이 대부분 병에 걸리고 곤궁함이 극에 달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하 말제는 마침내 성을 바치고 항복하기로 결정했으나 중흥부 백성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한 달의 기간을 유예해 달라고 청했다. 칭기스칸은 이에 동의했다.

또한 이 시기 동안 금나라가 다시 완안합주(完顏合周), 오둔아호(奧屯阿虎)를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때 금 애종(哀宗)이 즉위한 후 내정과 외교상에서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고 충용(忠勇)의 선비를 임용해 몽골인들의 공격을 방비했기에 1년 동안 몽골군이 대창원(大昌原), 도회곡(倒回谷), 동관(潼關), 남관(藍關), 봉상, 구위주(舊衛州) 등지에서 수차례 전투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달 후, 하 말제는 대신 및 금은(金銀) 기물, 말과 낙타 등의 예물을 지니고 육반산으로 가서 투항했다. 이때 칭기스칸은 이미 행궁에서 붕어했고 넷째 아들인 톨루이가 임시로 몽골 대중군 통수(統帥)를 대행했다. 하 말제는 그후 살해당했다. 이로써 서하는 공식적으로 멸망을 고했고, 22년 동안 지속된 몽골의 서하 멸망전 또한 막을 내렸다.

서하가 멸망한 후 당항족(黨項族) 출신의 몽골 장령 차간(察罕)이 성에 들어가 성 안의 군민을 안무하여 서하 유민들이 보전될 수 있었다. 한편 서하 멸망의 중요한 의의는 몽골국 서부와 북부에 몽골의 후방을 견제할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여 몽골이 오롯이 남하하여 금나라와 송나라를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出土于黑水城的西夏武士像。(公有领域)

흑수성에서 출토된 서하 무사상. (공유 영역)

서하 멸망이 몽골-원 제국에 미친 영향

서하는 비록 멸망했으나 서하는 몽골 제국 및 나중에 원조(元朝)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서하는 유학을 숭상하고 공자를 존중하여 유가학설을 신봉하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으며, 그들은 몽골-원 왕조에 출사하여 소수민족이 건립한 이 제국 속에서 유학의 발전을 추동하였고 몽골인들에게 은근하지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서하의 국상(國相) 고양혜(高良惠)의 손자 고지요(高智耀)는 일찍이 몽골-원 통치자에게 유사(儒士)를 우대하고 보호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는 또 쿠빌라이에게 어사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흔쾌히 채택되었다.

둘째, 서하의 음악 역시 몽골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서하 음악은 초기에는 한족 음악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그후 한(漢), 토번, 위구르 등 여러 민족 음악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특색을 형성했다. 한편 몽골인들은 “태조(太祖 칭기스칸) 초년에 하서(河西) 고지요의 말에 따라 서하의 옛 음악을 사용했고”, “의봉사(儀鳳司)에서 한인(漢人), 위구르, 하서의 세 가지 색의 세악(細樂)을 관장했다.”

셋째, 서하인들은 불교를 숭배하여 수많은 고승들이 서하로 와서 법을 전파했으며, 바로 서하인들을 통하여 몽골인들은 토번의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몽골인들이 티베트 문화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서하인들의 추동과 조화, 영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하가 고승에게 내린 봉호는 제사(帝師)뿐만 아니라 상사(上師), 대사(大師), 국사(國師), 덕사(德師), 인사(仁師), 충사(忠師), 선사(禪師), 대법사(大法師) 등이 있었으며, 몽골인들은 제사(帝師)의 봉호 전통을 계승했다.

以西夏文刻印的《金光明最胜王经》。(公有领域)

서하 글자로 각인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공유 영역)

혼이 장생천으로 돌아가다: 임종 시 금나라를 멸망시킬 책략 남겨

1227년 가을 7월 을축일(양력 8월 25일), 칭기스칸은 병으로 진주(秦州) 청수현(清水縣) 살리천(薩裏川) 할로투(哈老徒)의 행궁에서 붕어하니 향년 66세였다.

나중에 원 세조 지원(至元) 2년(1265년)에 묘호를 태조라 하였고, 3년에 성무(聖武)황제라는 시호를 올렸다.

임종 전 칭기스칸은 좌우에 말했다.

“금나라의 정병(精兵)은 동관에 있고, 남쪽으로는 연산(連山)에 의거하며, 북쪽으로는 큰 강을 경계로 삼고 있으니 갑자기 깨뜨리기 어렵다. 만약 송에 길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송나라와 금나라 원수지간이니 반드시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니, 그렇다면 당주(唐州), 등주(鄧州)로 병사를 내려 대량(大梁 변경)을 곧바로 쳐라. 금나라가 다급해지면 반드시 동관에서 병사를 징발할 것이다. 그러나 수만 명의 무리로 천 리를 달려와 구원한다면 사람과 말이 피폐해져 비록 도착한다 해도 싸울 수 없을 것이니 깨뜨리는 것은 반드시 가능할 것이다.”

즉 남송에 길을 빌려 동관을 우회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칭기스칸이 붕어했다는 소식은 서하 군주의 투항 후에야 발표되었으며, 그의 영구는 검소한 큰 수레에 실려 몽골 초원으로 향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마음에 품었던 성산인 부르칸 칼둔산(오늘날의 켄트산) 양지 바르고 풍경이 수려한 골짜기, 즉 기련곡에 매장되었다고 말하나 지금까지 그의 능묘를 찾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천 명의 병사가 그의 묘지 위를 말을 타고 짓밟아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가 어디에 매장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구처기가 말했던 것처럼 칭기스칸은 틀림없이 사명을 완수한 후에 장생천(長生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후계자 문제

이미 칭기스칸이 호라즘을 출정할 계획을 세우기 전, 그에게 예수이라는 이름의 비(妃)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이렇게 아뢰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무상(無常)하니, 일단 폐하의 큰 나무 같은 몸이 갑자기 쓰러지시면 마를 엮은 것처럼 단결된 당신의 백성들을 누구에게 맡겨 관장하게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낳으신 걸출한 네 아들 중에서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칭기스칸은 이 말이 아주 옳다고 여겨 곧 쿠릴타이를 소집해 먼저 네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장자 주치와 차남 차가타이가 공동으로 셋째 우구데이가 대칸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자고 추대했다. 칭기스칸이 다시 우구데이의 의견을 물으니 우구데이는 자신의 능력을 다해 하겠다고 자원했다. 칭기스칸이 고개를 돌려 넷째 톨루이에게 묻자 톨루이가 말했다.

“저는 아버님(대칸)께서 지정해 계위(繼位)하신 형님의 곁에 머물며, 형님이 잊어버린 일은 일깨워 드리고, 형님이 잠드셨을 때는 깨워 드리겠습니다. 형님의 부름에 즉각 화답하는 메아리가 되고, 말을 채찍질하는 긴 채찍이 되겠습니다. 부름에 뒤처지지 않고, 전진함에 낙오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형님을 위해 먼 길을 원정할 것이며, 형님을 위해 백병전을 불사하겠습니다.”

칭기스칸은 신중한 고려를 마친 후 후계자를 정했으니, 성격이 비교적 차분하고 정치를 다스리는 재능이 탁월하며 성격이 온화한 우구데이를 후임 대칸으로 정했다.

元睿宗拖雷和显懿庄圣皇后唆鲁禾帖尼(公有领域)

원 예종(睿宗) 톨루이와 현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 소르칵타니 (공유영역)

포스트 칭기스칸 시대

칭기스칸이 승하할 때 우구데이는 원정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잠시 톨루이가 감국(監國)했다. 1229년 8월, 쿠릴타이에서 우구데이가 몽골 대칸으로 추대되어 공식으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명을 이어받아 남송과 연합해 금나라를 공격하고 계속 영토를 개척해 금나라를 철저히 소멸시켰으며 화북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정복했다. 내정 방면에서 그는 야율초재를 중용해 화북과 중원 지역을 관리하게 했고 한인들을 관원으로 발탁하며 내치를 정돈하여 대몽골국의 통치 기초를 공고히 했으며, 나중에 톨루이의 아들 쿠빌라이가 칭제(稱帝)하고 남송을 멸망시키는 기초를 닦았다.

이외에도 첫 번째 서정 후 몽골인들은 또 1235년부터 1242년 사이에 두 번째 서정을 진행하여 수베데이, 바투, 구육, 뭉케 및 부리 등이 군대를 통솔했다. 이번 서정을 통해 키예프 루스, 아란 왕국과 불가리아를 정복했으며 심지어 폴란드와 헝가리 경내까지 쳐들어가 폴란드 왕국과 게르만 연합군 및 헝가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1252년부터 1260년에 걸쳐 세 번째 서정이 진행되었으며 몽골군은 서아시아부터 레반트 지역의 각국을 정복했으니 하사신,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와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를 포함하며 그후 일 칸국을 건립했다.

몽골인의 세 차례 서정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심지어 오늘날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일대까지 진격하여 유럽을 진동시켰다. 서정의 가장 큰 공헌은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발트해,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러 몽골 대칸의 금패가 각지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에 가로막혀 통하지 않던 도로가 개통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교류가 원조 시기 한층 더 강화되었으니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고 할 만했다. 이러한 교류는 한편으로는 페르시아, 아랍의 천문 역법, 수학, 의학 등의 서적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화약과 각종 공예 기술, 비단 등의 상품이 대거 유럽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교류는 동서방으로 하여금 과학기술 등 방면에서 서로 참고하게 만들었으며 동서방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한층 더 촉진했다. 또한 바로 이러한 교류 덕분에 유럽에 중국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소개한 책인 《마르코 폴로 여행기(동방견문록)》가 나올 수 있었다. 책 속에서는 원나라의 대도 및 기타 도시의 풍속과 인정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원조(元朝)의 풍부한 물산, 발달한 상공업, 교통, 종교, 과학기술 및 각종 완비된 제도를 소개해 유럽의 발전에 수많은 계시를 주었다.

列格尼卡之战,爆发于1241年4月9日,蒙古西征的一部分。(公有领域)

몽골군 서정중인 1241년 4월 9일에 발발한 리그니차 전투.(공유 영역)

칭기스칸: “그들은 장차 내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의 칭기스칸의 공적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아마 그중의 일부에 불과할 뿐인데, 우리에게는 또 역사가 이 시기에 칭기스칸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유라시아 사이의 교류를 강화하게 하려던 것이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칭기스칸은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일찍이 호라산의 구르 왕조에서 관리를 지냈던 주즈자니의 《나시르의 세대지(世代誌)》 속에는 일찍이 칭기스칸을 위해 일했던 한 무슬림 이맘이 그와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대화에서 칭기스칸은 대략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 강력한 이름 하나가 이 세상에서 계속 전해질 것이다.”

확실히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 수많은 군주와 수많은 국가가 칭기스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그의 위명(威名)은 중원 대지를 울렸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시리즈 완결)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金史》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2/16/n12625530.htm